• 최종편집 2019-11-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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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도시공사, 지역사랑 봉사홛동 열기
부천도시공사(사장 김동호)는 7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지역 사랑 봉사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이날 사회공헌 활동은 지역아동센터 주거환경 개선과 부천시 공공기관 통합봉사단의 김장 담그기 행사로 나누어 진행됐다. 먼저, 부천영광지역아동센터 주거환경 개선 활동은 창호 래핑, 단열필름 시공 등을 진행해 아이들의 겨울철 실내 활동을 하기 위한 환경을 마련했다.   김장담그기 행사는 공사, 경기도일자리재단, 경기콘텐츠진흥원 등 부천시 공공기관 통합봉사단이 함께 진행했으며 총2,000kg의 배추를 관내 400여 명의 독거노인 가정에 5kg씩 각각 전달했다.    그동안 공사는 해마다 김장 담그기 행사를 열어 어려운 이웃에 전달하며 따뜻한 겨울을 나는 데 실질적인 보탬을 주어왔다. 또한 오는 14일 비영리단체인 새롬가정지원센터의 어르신 공부방 환경 개선 활동도 예정되어 있는 등 추운 겨울 지역 사회 소외된 이웃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김동호 공사 사장은 “이번 겨울에도 주거환경개선과 김장담그기 행사 등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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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 3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  번역서를 출간하다      왕성한 집필욕의 이상로는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인도동화독본 : 을유문화사 발간』을 발행했고 세계명작인 『신곡 - 단테 아리기에리 저 : 인문출판사』을 번역하기도 했다. 『신곡』은 희랍, 라틴의 고전과 철학 역사와 정치 종교 등을 총 망라한 대 서사시로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예작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단테 번역서」는 누가 읽어도 쉽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설형식으로 풀어 써 놓았다. 아마도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수업한 일본어 실력이 기본이 되어 일본어로 번역 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해 본다. 『문장가』 2호에도 “ㅅ 옮김”이라 일본인 작가의 번역시(翻譯詩) 한편이 있다. 확실하게 역자(譯者)를 밝히지 않고 다만 “ㅅ 옮김” 이라는 이니셜만 있기는 한데 이 이니셜을 곰곰 유추해 보면 상로의 ㅅ 이라는 결론으로 쉽게 귀추 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문장가』는 소향 이상로의 심혈을 기우린 사업(?)임으로 편집 중이던 그가 필요에 의해 삽입한 작품이라는 것으로 유추 될 수밖에 없다. 옛 문인들이 주로 인용해 오던 당, 송 시대의 한문시처럼 일본 유학파들이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드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동 일(冬  日) (-경주 불국사 반(畔)에서-)                                      삼 호 달 치(三 好 達 治)    -------중   략------ 가을은 오고 가을은 이슥해  그 가을은 이미 저리로 걸어간다. 어제는 하루 종일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의 이 새로운 겨울이 시작 되는 날이었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되어서도 내 마음은 가라앉지 못한다. 짧은 꿈이 몇 번씩이나 중단 되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고독한 나그네는 객사의 한밤에도 하찮은 것을 생각하고 하찮은 일로 고민하고 있다.   --------중   략 -------  이 시(詩)의 작가인 <미요시 다쓰지>는 1964년 4월 5일에 향년 62세로 별세한 일본의 저명한 시인(詩人)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본 예술원 회원으로 한국의 부여 경주 등을 여행하면서 시작(詩作)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상로가 크게 영향 받은 시인이었으리라 본다.       1957년 대한지방공제회의 《지방행정》지(誌) 179-180페이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4. 시(詩) 몇 편으로 보는 소향(素鄕)의 시(詩) 세계(世界)  유수리댁 대부(楡樹里宅 大父)  유수리댁 대부는  오늘도 밭 울타리를 매만지시는  장다리 밭은,  송종(松種) 배추 랏다 서울 무우 랏다 수집은체 노오란 배추꽃이며 발그레 웃음 짓는 무꽃이며,  나직 나직이 애정을 부리는 나비 나비의 원무(圓舞)------  수집은게 아니라 밭머리에 마주 서는 눈과 눈의 아이로니.  동리(洞里)밖 소학교(小學校) 마당 깃발 펄럭이는 오월의 태양아래 늘어만 가는 이단아(異端兒)들,  영순(英順)이 치마폭 속에 또 하나 이단(異端)의 회임(懷姙)을  유수리댁 대부는 아시는지요.  1957년 대한지방공제회의 『지방행정』지(誌) 179-180페이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유수리댁 대부는 대부(大父)라는 의미 하나로 이미 근엄해서 감히 아무도 근접할 수 없어 보이는 것으로 이 시(詩)는 시작 된다. 조용히 장다리 밭 울타리를 매만지고 있다는 데서는 말이 없는 근엄한 마을의 대부(大父)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노오란 배추꽃이며 발그레 웃음 짖는 무꽃을 살피다는데서 넓은 전답(田畓)의 들일은 몰라도 텃밭정도는 알뜰하게도 살피는 지극히 가정적인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감히 그의 위엄에 맞설 사람이 없어 보이는 어렵기만 한 대부임에도 5월의 태양아래 깃발 펄럭이는 소학교(小學校)마당에서 눈 맞아 사랑에 빠지는 무모한 영순(英順)이의 순박함도 눈에 그려진다.  영순(英順)이의 치마폭 속에  또 하나 이단(異端)의 회임(懷妊)을 ---  유수리댁 대부는 아무것도 모른다. 마지막 연의 이 기가 찰 사건을 알고 난다면 유수리댁 대부는 어찌할까? 이단아(異端兒)와 영순의 사랑은 소학교(小學校) 마당에서 잠깐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 진지한 사랑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엄격하기만 할 것 같은 유수리댁 대부의 위엄과 저질러 버린 영순의 회임(懷妊)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일종의 경악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도 장다리 밭을 매만지시는 대부의 헤아릴 수 없는 넓은 이해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이 시(詩)는 끝을 맺는다.   토 요 일(土 曜 日)  당청화(唐靑花) 치마의 주름이 허리에 흐르는 선(線)은 아스라이 고읍고  석양(夕陽)이 탑시계(塔時計)에 빗기자 파라솔을 접는 그는 무엔지 퍽도 궁거로운 낯이었다.  어느새 노을도 걷기고 흩어진 꽃구름인데 어딘선지 아까부터 누가 뭐라는것만 같은 기색(氣色)이기에 숲을 돌아가는 길목에 설펴오는 회화(懷花)의 내음세와 뿌려진 꽃이팔들 어릴때 감꽃을 줍던 그립은 생각에 잊었던 것을 찾는 듯 한참 머뭇거렸다.  벌써 짙어 오는 황혼의 푸자리에서  가슴에 뭉켜오는 서로의 내음세-------  무엔지 못 견디게 잡히지 않는 것만 같애 풀잎만을 뜯고 있는 모색(慕色)의 숲 속에 두 볼은 불 붙고만 있었다.   경사(傾斜)의 영상(影像)  겉절이도 좋겠지만 지레 솎아다 토장국 끓여 어린것 서껀 하냥 훌훌 마시면 행결 헛헛증(症)이 가시노라고,  뜰악이래야 비탈바지에 초갈이 봄배추를 부쳐놓고 기다리는 아내는  그 흔한 쇠기름덩이 하날 못 얻어 까치눈 징그러운 손등으로 구꾸시락 바람받이 거적 한 잎 제대루 못 가린 부엌에서 조반(朝飯)이라고 마련하기,  여덟살 백이한테 아궁이 불을 맡기고 드레박질 얼음질물 길어다 무엔지 헹기는 소리, 그래도 가난을랑 탓하잖는 아내의 솜씨껏 끓여다 주는 국 한 그릇이면 술 한 잔 없기로니 서운찮게 또 하루의 일을 이야기 하며 상을 물리면 해 돋이 창머리에 손 들어 전송(餞送)하는 어린것이랑  어제는 낡은 와이사쓰를 매만지던 손이 양말짝 기우며 올해야 말로 그 빈대 벼룩의 착취를 시키지 않으리라고 굽도루지며 디,디,티. 마련이랑 나를 걱정하는 마음씨,  밤이 겨워서야 자리잡고 이웃 소문 한 두가지 건니어보는 아내의 야윈 볼이 감으나 뜨나 환상같이 어른거리는,홀연 창구멍으로 내다 뵈는 하늘의 별들을 헤어 보기도 한다.  「토요일」은 데이트의 설렘을 나타낸 시(詩)다. 그녀가 아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49년 9월에 발표한 시이고 보면 1944년 결혼한 아내라고 여기기에는 설렘이 너무 크다. 또 하나 숨겨둔 여인과 데이트를 즐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경사(傾斜)의 영상(影像)」은 이상로 자신의 일상을 그려 낸 시(詩)로 가난한 살림에 약간의 불만을 표시하다가 이내 착한 아내의 살림솜씨를 칭찬하며 고마워한다. 사실 가난의 이유가 자신임에도 그 흔한 쇠기름덩이 하나 못 구한다는 아내를 까치눈 징그러운 손등으로 원망하는 부분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가난을 탓하지 않는 아내의 솜씨껏 끓여다 주는 국 한 그릇에서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 다행이다. 아이들의 전송을 받고 출근을 하는 셀러리맨 같기도 한데 왜 그리 살림이 궁핍했는지는 아마 시대가 그랬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밤이 겨워서야 자리 잡고 아내의 야윈 볼을 느끼는 자상함이 묻어 보인다.  양말짝을 기우며 방구석 굽도리 골고루 디.디.티.를 뿌려 빈대 벼룩을 퇴치해주며 걱정해 주는 아내를 이상로는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 디.디.티는 무서운 독성의 발암물질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동안도 꽤나 세월이 흘러다는 생각이 들어 세삼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5. 소향(素鄕)의 수필 세계  소향의 수필집 『어느 나비가 주는 기억(記憶)만치도』는 1960년에 발간된 것으로 1956년의 옥석혼화(玉石混和)집(集) 이후 50여 편을 모아 엮은 것이다. 비단 수필만이 아니라 편지 글 논설문 등 시 이외의 산문 모두를 수록한 책으로 이해하는 쪽이 맞다. 그리고 그의 후반기 작품들을 수록한 것들이어서 성숙된 작가의 안목과 시선을 알아보기에는 적당하다.  「제비의 논어성(論語聲)」은 제비의 지저귐 그리고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는 가을을 엮어 풀어 나간 작품이다. “「제비가 논어(論語)를 읽는다.」(연암燕岩 선생)는 말이 있다. 음력 9월 9일이면 후조(候鳥) 제비들은 강남으로 간다는데 그 제비가 논어를 읽는 소리를 경청하여야 할 이 땅의 「문학도」들이 많건만 9월 9일이 다가옴이 매우 안타깝다. 제비의 지저귐을 의음(擬音)하기를 흔히 ‘비리고 배리고 배배배-----’한다. 그런데 논어를 읽음이란 다름 아니라 ‘지지위 지지, 부지위 부지 시지야니라----’ 인 것이니 즉 논어 위정편(爲政篇)의 ‘화지위지지(和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之) 시지야(是지也)를 이름이다’-------------중  략------------- 아직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은 ‘스스로의 무지를 안다’고 말한 쏘크라테스에 방불하다.” 「제비의 논어성」에 나오는 제비는 요즘 보기 드문 조류다. 소향이 이 책을 펴 낸 1960년대만도 제비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라도 쉽게 볼 수 있는 여름 철새였다. 삼월 삼진 날(음력 3월 3일)을 기해 우리나라에 왔다가 중구절(혹은 중양절 음력-음력 9월 9일)에 남쪽 지방인 강남으로 떠나는 제비는 집집마다 처마에 둥지를 틀고 사는 인간 친화적인 철새였다. 때문에 우리나라 모든 설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새로 그 대표적인 것이 흥부전이다.  최근에는 그 많던 제비들을 한 여름이 다가도록 구경조차 할 수 없음은 어인 일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이 또한 지구의 오염이 원인이지 않을까 해서 문명의 발달과 반비례 해 사라지는 자연의 생태계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제비의 지저귐으로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한 이 수필은 무려 8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긴 수필이었다.  「남방(南方) 샤쓰」는 한자가 의미하는 말 그대로 남쪽에서 유래한 셔츠를 의미한다. 굳이 설명하면 서양에서 건너온 양복과 같은 의미일진데 유독 남쪽을 칭한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숨었을까? 그때만 해도 한복을 즐겨 입던 시절이라 서양 옷의 편리함과 선진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남방샤쓰의 유행이 마치 전염병의 만연 창궐에 비유하여 꼬집고 있다. 청,장년은 물론 노,소간에 모두 멋쟁이인양 입고 다니는 서울의 거리가 하와이나 피서지인 미국의 프로리다를 방불케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남방샤쓰’라는 명사는 본 고장 말인 ‘알로하 샤쓰’에서 수입 창작된 신어인 셈이고 그 ‘알로하’란 하와이의 항구에서 봉(逢),별(別)의 곡이 아직 연주되기도 전부터 눈물의 준비로 모두들 미리 손수건을 꺼내들고 있다는 그 봉(逢),별(別)의 곡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중   략----------------- 그 ‘알로하 샤쓰’의 기구망칙한 디자인 중에는 푸줏간에서 옷에 피투성이 칠을 하고 거리로 나온 백성의 웃통 같기도 하고 어느 간판점에서 난잡하게 펭키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나온 것 같은 것을 위시하여 별의 별 이상야릇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중  략--------------------- 실상 나는 그 ‘남방샤쓰’의 사태- 하나의 저속한 유행에서 착상한 것으로 우리나라 문예계에서의 소위 모던이즘이니 하는 등등에 대한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그리고 생활의 형성이 그러한 정신에서 배태(胚胎)되어야 할 것임을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소향이 남방샤쓰에서 밝힌 결론은 무분별한 유행은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인 셈이다. 세계가 이웃인 지구촌 시대에서는 좀 요원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감각으로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소향의 수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소향의 수필은 주로 논설문 형식이 많다. 어원에서부터 배경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 해결책 등등을 망라한 긴 논설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황한 인용과 예도 많이 들고 있는데다 가뜩이나 긴 문장들이 읽기를 지루하게 하는 게 특징이다. 하기는 당시의 모든 문장들이 길고 지루했다는 것은 당대의 소설가 이광수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더 많은 작품을 소개 하고 싶지만 이상의 작품만으로도 대략적인 소향의 수필 세계를 이해  하리라 믿어 여기에서 접는다.  맺는 말 1947년 『민중일보』 문화부 차장을 지냈다. 『민성(民聲)』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공군 종군 문인단에 입단하여 기관지 『코메트』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환도 후 『서울신문』 월간부장,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공보처 선전국 등 언론계에 종사하며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차장을 역임했다.언론계에 종사했던 탓에 그의 시는 현실에 기반 한 이미지의 다각적 포착을 시도하였고, 주정(主情)과 주지(主知)의 조화를 통해 이상주의적 미학을 추구하였다. 수필은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며 저항의 자세를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1953년 첫 시집 『귀로(歸路)』를 냈고, 그밖에 『불온서정(不穩抒情)』(1957)·『세월 속에서』(1961)·』『이상로 전시집(全詩集)』(1970)이 있다. 수필집으로는『문장보감』(1953)·『옥석혼화(玉石混和)』(1956)·『쑥꽃』『사어록(私語錄)』(1959)·『피어린 4월의 증언』(1960)·『어느 나비가 주는 기억만치도』(1960)·『한국전래동화독본』(1963)·『인생비어록 (人生秘語錄)』(1964) 등이 있다. 1944년 하복순과 결혼하여 영세 장세 화세 세 아들을 남기고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1973년 8월 2일 서울 상도동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아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한동안 새교회신학원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경기도 안산시 양상동 대한예수교장로회 남현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타계한지 3년 뒤인 1976년 그의 생애와 빛나는 업적과 진솔한 인품을 아끼던 친지들과 문우들이 소향의 대표적인 시 「밤이 새면」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그의 향리인 궁동에서 그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노력 했으나 도시화된 주변의 이주해온 주민들은 물론 토박이라 칭하는 만나본 몇 분들도 그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이 없다고 했다. 종친회에서 만난 사무실을 지키는 먼 친척뻘 아주머니 한 분이 소향을 상도동 아저씨라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해 두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다. 시비(詩碑)에 새겨져 있는 그의 시(詩)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밤이 새면  쓰다 남은 구멍탄 화로  사위어 가는 불김에 얼굴을 쪼인다.  뻘기 수염의 여윈 볼을  항구에서는 이따금씩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한 잎 거적에다 나의 육체를 눕혀 본다.  이 곳, 끝 다한 데까지 담아다 준 구두 ----정다워서일까. 벗지도 못한 채 바람벽을 베개 삼아 아랫목 같이 다리를 뻗어 본다. 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꿈을 꿀 수 있을까. 잠이 들면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이 밤이 새면  언제 꽃들을 그 만판 피는 꽃들을 볼 것인가. 날아드는 나비들과 함께.                                                  끝     참고 문헌 : 귀로 (이상로 시집-1953년 백오사 간) - (부천 문학도서관 소장)          : 어느 나비가 주는 기억만치도 (이상로 수필집-1960 수도문화사) - (부천 문학              도서관 소장)          : 부천문단 제 9집 (1996년 복사골문학회 간)-(부천 문학 도서관 소장)          : 용금성 시대 (이상로-1994년 서울신문사)-(부천 문학 도서관 소장)          : 문장가 제 2호 (1964년 7월-신우문화사)- (부천 문학 도서관 소장)          : 지방행정 지(誌) (1957년 대한지방공제회의)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3

소향관-부천 태생의 시인 이상로(李相魯)[1916~1973]의 호 소향(素鄕)에서 이름을 따온 행사 및 공연장이다.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있던 구 소사구청이 1996년 소사본동 새 청사로 이전하면서 구청 내 별관에 신축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왕성한 집필욕의 이상로는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인도동화독본 : 을유문화사 발간』을 발행했고 세계명작인 『신곡 - 단테 아리기에리 저 : 인문출판사』을 번역하기도 했다. 『신곡』은 희랍, 라틴의 고전과 철학 역사와 정치 종교 등을 총 망라한 대 서사시로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예작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단테 번역서」는 누가 읽어도 쉽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설형식으로 풀어 써 놓았다. 아마도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수업한 일본어 실력이 기본이 되어 일본어로 번역 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해 본다. 『문장가』 2호에도 “ㅅ 옮김”이라 일본인 작가의 번역시(翻譯詩) 한편이 있다. 확실하게 역자(譯者)를 밝히지 않고 다만 “ㅅ 옮김” 이라는 이니셜만 있기는 한데 이 이니셜을 곰곰 유추해 보면 상로의 ㅅ 이라는 결론으로 쉽게 귀추 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문장가』는 소향 이상로의 심혈을 기우린 사업(?)임으로 편집 중이던 그가 필요에 의해 삽입한 작품이라는 것으로 유추 될 수밖에 없다. 옛 문인들이 주로 인용해 오던 당, 송 시대의 한문시처럼 일본 유학파들이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드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1957년 대한지방공제회의 《지방행정》지(誌) 179-180페이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동 일(冬  日) (-경주 불국사 반(畔)에서-)                                      삼 호 달 치(三 好 達 治)    -------중   략------ 가을은 오고 가을은 이슥해  그 가을은 이미 저리로 걸어간다. 어제는 하루 종일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의 이 새로운 겨울이 시작 되는 날이었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되어서도 내 마음은 가라앉지 못한다. 짧은 꿈이 몇 번씩이나 중단 되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고독한 나그네는 객사의 한밤에도 하찮은 것을 생각하고 하찮은 일로 고민하고 있다.   --------중   략 -------  이 시(詩)의 작가인 <미요시 다쓰지>는 1964년 4월 5일에 향년 62세로 별세한 일본의 저명한 시인(詩人)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본 예술원 회원으로 한국의 부여 경주 등을 여행하면서 시작(詩作)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상로가 크게 영향 받은 시인이었으리라 본다. 다음은 1957년 대한지방공제회의 《지방행정》지(誌) 179-180페이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2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    소향(素鄕)의 『문장가(文章家)』 살펴보기   소향관-부천 태생의 시인 이상로(李相魯)[1916~1973]의 호 소향(素鄕)에서 이름을 따온 행사 및 공연장이다.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있던 구 소사구청이 1996년 소사본동 새 청사로 이전하면서 구청 내 별관에 신축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64년 소향(素鄕)은 『문장가(文章家)』라는 동인지(同人誌)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단지 시(詩)나 소설(小說)을 쓰는 문인(文人)들만이 아니라 음악(音樂) 미술(美術) 분야의 대가들도 포함했으며 당시 문헌정보가 부족했던 현실을 감안 번역가(翻譯家)들도 함께 했다. 『문장가(文章家)』에는 소향 이상로가 심혈을 기우려 전력투구한 그의 화려한 문학(文學)이 녹아 있다. 시와 수필을 쓰는 것은 물론 편집도 하고 동인들의 연락사무도 보는 등 혼자서 동인일 모두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때문에 『문장가』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이상로의 문학 활동을 쉽게 파악할 수가 없다.  1964년 봄, 창간호를 발행했다. 공교롭게도 1964년에 발간한 창간호는 64페이지짜리였다. 페이지가 말해 주듯이 창간호는 지면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많은 작품을 수록 할 수가 없었다. 임인수의 시, 김기승의 논고(論考) 이희승의 「인간가치의 붕락(崩落)」 외 수필 6편 금동원 이상로 김화진 남용우의 기행문 등이 내용의 거의 전부였다.  이어 118페이지나 되며 문제작까지 수록 돼 있는 제 2호를 발행하게 된다. 여기 제 2호에는 문제작을 위시한 많은 사람들의  많은 작품이 수록 돼 있다. 소향의 편집으로 발간 된 동인지이다 보니 여기 저기 소향의 채취가 물씬 풍기어 소향을 알 수 있게 하는 아주 좋은 자료라 아닐 수 없다. 우선 『문장가』 2호에는 서문으로 초대게재<招待揭載)라 하여 월탄 박종화의 글이 올라 있으며 삽화로는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을 비롯 노수현 백영수 구인회등 무려 7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문장가 2호 표지 - 소향이 삽화가 박서보(朴栖甫)선생에게 보낸 것으로 소향의 친필이 보인다)   서문 다음으로 수주 변영로의 글이 올라 있는데 이「불혹(不惑)과 부동심(不動心)」은 한국일보 천자춘란(千字春秋)란에 발표한 것으로 큰 반향을 이룬 글이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제직하고 있던 수주를 교수회나 이사회의 결의도 없이 총장과 이사장에 의해 하루아침에 파면의 길로 내닫게 했던 문제의 글이다. 이상로는 그의 저서 『논문강화(論文講話)』(계몽사 간 418페이지)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설명했으며 『문장가(文章家)』 2호에 게재하여 다시 당시의 사태를 심각하게 부각 시켰다. 또 한편의 문제 글은 「가면인두상(假明人頭上)에 일봉(一棒)」이라는 것으로 1920년 5월 8일~9일 2회에 걸쳐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최유(崔溜). 권직규(權直奎)가 발표하여 당시 유림(儒林)들 특히 영호남 유림(儒林)들의 분노를 크게 자극했던 글이었다. 파장은 점점 커져 전국적으로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성균관을 통하여 정간운동까지 일으키는 대소동이 있었다. 이상로는 이글 또한 『문장가』 2호에 게재하여 언론 자유화의 기치를 높게 외치기도 했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의 「인간 동물원」이란 수필도 게재돼 있다. 이상로의 절친한 문우(文友)이자 친구인 김성환은 만화가로 더 유명했지만 유화를 즐겨 그리는 정통 화가이기도 했다. 유화만의 개인전을 두 번이나 가졌으며 미술로 다하지 못하는 그의 나머지 인생 스토리는 수필로 써 나갔다. 보성사 간 『에드버룬의 미소』는 「구두쇠」를 비롯한 그의 수필이 55편이나 수록 돼 있으며 그가 그린 삽화도 함께 수록 돼 있어 한층 더 흥미로운 수필집이라 하겠다. 그가 『문장가』의 동인으로 활약한 것은 만화가나 화가가 아닌 순수한 수필분야의 수필가라는 것도 이상로의 『문장가』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상로는 자신의 작품을 2편이나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 한편은 「바닷가 통신」이라는 수필 형식의 글로 제 1신(信)에서 5신(信)까지 각기 독립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대천 해수욕장 수영강습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쓴 글이나 이 글 역시 문제가 있다하여 동아일보의 편집장에게 “세상이 뒤숭숭, 안정되지 못한 때라 서요.------”라며 게재를 거절  당했던 글이었다. 1963년 여름의 일이고 보면 1962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 군이 정권을 쥐고 있던 시대라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여기 해변에 와서 밤에 자지 않고 달리는 마음이란 우리도 그 전설의 덕망과 선정아래 쌀 걱정이랑 모든 번거로움을 잊고 국민들이 다 같이 태평세월을 노래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바다의 품에 안겨 저 구름속의 달로 하여금 운중풍월(雲中風月)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달빛의 서늘한 바닷가에서 청룡(靑龍)의 전갈 성좌(星座)를 동경하여 마지않음이 어찌 나뿐이겠습니까.” 위와 같이 직설이 아닌 은유로 시대를 풍자하였으나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아직 국민소득이 바닷가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부족하여 자칫하면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큰 이유였으리라 보여 진다. 제 3신(信)의 첫 구절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느낀다는 대목이 재미있어 인용해 본다. “우리나라의 전설에도 신라 때에 신(神)들이 모여 앉아서 어디에다 산을 앉히고 어느 쪽으로 강물을 흐르게 하고 또는 넓은 들을랑 어떻게 배치하고 등등을 논의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마는 마호메트는 어느 날 산(山)에게 명령을 내려 산더러 지정한 날에 자기에게 오라고 하였더랍니다. 그리하여 그날에 많은 사람들은 산이 움직여 오는 것을 구경하려고 모여 들었는데 마호메트가 아무리 큰 소리로 산에게 호통을 쳤어도 산은 드디어 다가오지를 않았읍니다. “암만해도 산(山)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산(山)에게로 가야만 되겠다.”하고 사람들을 남겨두고 산을 항하여 걸어갔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신라시대의 신(神)들도 마호메트도 아닙니다마는 서울 시내(市內)로 바다를 불러들일 념의(念意)도 하지 않았으며 아예 당초부터 바다를 찾아서 여기 대천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파도는 부르지 않아도 진격하듯이 밀쳐 들어오고 또 물러가도록 명령을 내린 적이 없건마는 조수(潮水)는 제시간이면은 물러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저절로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를 느끼는 것입니다.” (습니다.)의 당시 표기가  (읍니다.)여서 (읍니다.)를 그대로 인용했다. 불과 수 십 년 전의 글이 이미 古文처럼 보여 지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문장가 2호 목차-제목과 필진들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것은 칼럼으로 역시 문제의 글이다. 1963년 신문의 날에 붙여서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역시 속(俗)된 처세(處世)의 심정에서 스스로 유보(留保)하였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햇볕보지 못한 칼럼」이라는 장문의 글 가운데 “변변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사명을 다하자는 일념으로 쓴 글들이 수도 없이 통과부문에 걸려 활자화 되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제우스의 神일지라도 나의 정신을 정복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인용구를 주석으로 달고 있는 이유가 결국은 이렇게라도 하고픈 말은 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편집후기 이전의 4면은 창간호의 반향인 독자들의 의견을 수록했는데 이 또한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의견들이 편지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디지털 시대인 요즘에는 소셜 네트워크로 즉각 알 수 있는 반향(反響)을 몇 달 후에까지 취합해야 했던 그 시절의 시대성을 엿볼 수 있다. 끝으로 편집후기에서는 기업출판에 의한 잡지에는 없는 『문장가』지(誌)에서만 접할 수 있는 명사들의 글을 수록했다고 이상로는 자부하고 있다. 또한 선언에서도 밝힌 것처럼 행세주의(行世主義)적인 문인(文人)됨을 저어하듯이 동인지 운동을 꾀하지 않으며 오직 동호인끼리 편집 발행 배부하는 자기표현이 있을 따름이라고 했다.   (박서보 선생에게 보낸『문장가』책에서 발견한 집필진들의 친필사인)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기념 특집- 이재욱 소설가와 함께하는 부천 향토 문학이야기 부천이 낳은 시인- 素鄕 李相魯 연구                      들어가며   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는 1916년 10월 8일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궁리(宮里)(1963년 서울시 구로구 궁동으로 편입)에서 평범한 농부인 전의(全義) 李씨 근영(根泳)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천문단(1966년)에는 7남매 중 막내라는 또 다른 기록이 있어 전의(全義) 이씨 종친회에서 확인했던 바 4남과 7남매의 막내라는 기록 모두가 맞는 사실이라 했다.    소향관-부천 태생의 시인 이상로(李相魯)[1916~1973]의 호 소향(素鄕)에서 이름을 따온 행사 및 공연장이다.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있던 구 소사구청이 1996년 소사본동 새 청사로 이전하면서 구청 내 별관에 신축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들로는 4남이고 형제자매를 합치면 7남매였으니 7남매의 막내라는 사실도 틀린 기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만 소향(素鄕)이라는 그의 호를 소경(素卿)으로 표기해 놓은 족보의 오기를 발견하고 소향(素鄕)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소향이 태어난 궁리는 안동(安東)권씨(權氏)와 더불어 전의(全義)이씨(李氏)가 대대로 살아 온 집성촌이어서 이웃 모두가 일가친척이었다. 불행하게도 이상로는 젖먹이를 면하지도 못한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아버지마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이 보살펴 주던 시절은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이상로는 17세가 되어서야 한문을 배우러 서당에 다녔고 이어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24세가 되던 1940년 일본 메이지(明治)학원 고등문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빼앗긴 땅,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여 중퇴하고 떠돌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해서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귀국하던 그해인 1945년 5월 서울 YMCA에서 개최된 「예술의 밤」에서 시 「5월」을 발표했으나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원이 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 소사(素砂)를 사랑한 소향(素鄕)    이 벌을 지나면 저기 남향받이 산기슭 다소곳한 마을에 복사꽃 오 오  화안한 그 복사꽃을 피리니   소향 이상로 이 시(詩)는 이상로와 친했던 박두진의 작품으로 이상로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무렵인 1941년 이상로에게 보낸 편지 속에 포함 돼 있었다. 편지에서 박두진은 복사꽃 피는 마을을 찾아 시혼(詩魂)을 불러야 한다며 복사꽃 피는 마을을 마치 유토피아인양 서술하였다. 소사가 고향인 친구 이상로에게 마치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고향 소사의 소식을 전해주는 작품 같기도 해서 이상로가 무척 좋아했던 시 구절이지 않았을까 해 본다. 박두진의 편지전문을 소개한다.  친한 시인에게 만연히 집을 나와 만연하게 다니는 길이 예정이 일그러져 최초 일정의 세 배가 늦어졌습니다. 오늘은 스무 나흘, 지금은 0시 반쯤, 추풍령까지 왔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차 중입니다. 옥천에서 묵을 때 군서라는 촌을 찾아가다가 물이 푸르고 맑기가 금강산 옥류천과 맞선다는 것을 알고 곧 금강에 가 보았는데 물가의 흰모래가 하도 깨끗하기에 한나절 동심에서 어린애같이 놀다가 온 것입니다. 소박한 자연에 안기어 새로 어린 춘색에 나는 겨울을 벗어난 사슴과 같이 즐겁고 편안합니다. 어떤 글을 쓰는 동안 차는 황간에서 벌써 영동에 왔습니다. 차 안에는 불과 8,9인이 있을 뿐 거진 반 빈 것 같게 한적합니다. 바같 풍경이 매우 화창하여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습니다.  소향 형! 그간 어떠하십니까? 형은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십니까? 흰 구름 둥둥 구름은 가고………… 이제 다시 저 잠자는 시혼, 나의 잠자는 시혼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또는 멀리로 나들이 간 시혼! 복사꽃 피는 마을, 화안하니 복사꽃 피는 마을을 찾아 혼자 나들이 간 나의 시혼을 나는 어서 불러야겠습니다.   이 벌을 지나면 저기 남향받이 산기슭 다소곳한 마을에 복사꽃 오 오  화안한 그 복사꽃을 피리니 형! 나는 이제 복사꽃, 복사꽃 피는 마을을 향하여 가오리까? 영원히 영원히 화안한 나라를 찾아 가오리까? -그러므로 이 세상 장막이 무너지면 , 그는 너희를 위하여 다른 한 성을 예비하였나니- 성서(뜻만) 소식 주십시오. 더욱 강건하시기를 비옵니다.                         1941년    월     일                                           박 두 진    그의 호 소향(素鄕)은 소사(素砂)가 고향(故鄕)이라는 뜻이지만 소사(素砂)를 무한하게 사랑한다는 의미도 포함 돼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소사(素砂) 곳곳의 지명이 많이 등장하며 이런 작품 모두에서 고향 소사(素砂)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묻어난다. 『실락원(失樂園)』에서 보이는 여월리.(오정구 여월동) 『분이』에서 보이는 당아래,(원미구 춘의동) 『인간파편』에서 보이는 성골,(오정구 성곡동) 『냄새』에서 보이는 까치울,(오정구 작동)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실락원(失樂園)  하얗게 눈이 덮힌 소래산(蘇萊山)이 바라다 보이는 사랑방 툇마루에서 발돋음하며 나는 곧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곤 하였다. 어느 해 여름날이었다. 나는 혼자서 논두렁 밭모퉁이로 나비, 잠자리와 뭔지 모르게 좋기만 한 그 야생(野生)의 꽃들에 취(醉)하여 노는 중에서도 염록색(廉綠色) 이파리와 엷은 자색(紫色) 항가새 꽃에 나는 매혹(魅惑)되었었다.    일록달록 꽃배암- 꽃풀 속에 도사렸던 꽃뱀 떼가 머리를 들면 꽃다발이랑 꽃신짝을 동댕이치며 달아났고 낡은 빛 비석(碑石)이 서 있는 산(山)모롱이 길로 질겁을 하여 도망하였다.    한번은 아마 무슨 난리(亂離)소동이었는가 생각한다.   여월리(如月里)로 시집간 누나와, 치맛자락에 매어 달리듯이 언제나 내가 따르더란, 지금은 가고 없는 다홍치마를 입은 과천(果川) 누이 손에 잡혀 집들을 텅텅 비운 채 동네 사람들 서낀 산 너머 골짜기로 난피(難避)를 하여 쫓기던 일    ----이 집이 비록 북향(北向)이로되 아예 옮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고 청룡(靑龍)골에서 하아얀 선노인(仙老人)이 나타나 할아버지께서 이르드란 그 현몽(現夢)의 집은 지금 삼종숙(三從叔)께서 증손(曾孫)까지 거느리시고, 앞으로 소래산(蘇來山)을 향하고 오른 편으로 계양산(桂陽山) 왼켠으론 북한(北漢)을 동남(東南)향으론 관악(冠岳)의 봉(峰)들이 바라다 뵈는 이 마을은 려조(麗朝)때부터 내려오는 우리문중과 이씨부마(李氏附馬)의 후손 안동권씨(安東權氏)들로 지켜오는 옹긋한 터전, 그리 멀지 않은 고장으로 출가(出嫁)한 대고모(大姑母), 고모(姑母), 누님들이 시시(時時)로 와서 반가웠고 어른들과 곧잘 나드리도 떠나곤 하였다.  때로는 먼 조상(祖上)쩍 얘기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얘기를 들려주시곤 하였다.     원미산 진달래 축제 그 훗날,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진달래꽃이 진하게 핀 뒷동산엘 올랐었다. 아무것도 잊고 멀리 양아두 나루쪽과 제물포의 아득한 수평선(水平線)을 바라보다가 해 저뭇이 눈물 지었었다. 오늘, 원추리꽃 한떨기 피지 않은 산마루에 나는 오른다. 갈포기도 아쉬운 산은 산울림도 없다. 갈려진 벗들, 원수를 일컫는 핏줄들을 생각해 본다. ---------황폐한 산과 들들, 그래도 철따라 연두빛 어려오는 먼 산들.    이윽고 나는 현무봉(玄武峰)이며 청룡(靑龍)이며 백호(白虎)며를 살펴 본다. 주작(朱雀)을 안(案)하여 머언 봉(峰)들을 바라본다.    실락원(失樂園)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그의 고향 소사(궁리)마을을 안타까워하는데서 쓴 작품이다. 사랑방 툇마루에서 발돋움하여 바라보았다는 소래산(蘇來山)은 부천과 경계에 있는 시흥시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들이 붐빈다. 2연부터 그는 그의 마음껏 뛰 놀던 대자연속의 궁리(宮里)를 회상한다.  4연에서 지금의 여월동인 여월리(如月里) 그리고 과천(果川)이라는 지명과 함께 애틋한 누님들에 관한 회상이, 5연에서는 풍수설(風水說)을 인용하며 대가족이 함께 살던 고택(古宅)을 그리고 있다. 이어 계양산과 관악의 봉우리가 보이는 마을 위치며 부마(附馬) 마을이 된 안동권씨(安東權氏)를 비롯한 마을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 웃어른들을 통해 들어오던 먼 옛날이야기까지 전설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다가 마지막에는 황폐한 산과 들을 만나며 사라져 가는 고향마을에 대한 강한 회한의 가슴을 내 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분이(粉伊)    길마봉(峰) 언저리에 시울진 노을빛이  아주 산너머로 스러지는 것을 보자  분이(紛伊)는 누구도 모르게 없어지고 말았다.    〈당아래 고갯길에 山 그림자 가리도록 오늘도 긴 하루를 시름 짓던 분이는  「----눈물은 덧없어라-------」 갓 낳은 것 묻은 자리. 상수리 이슬 받는 뒷 산골에 다시 허리끈을 졸라맸었다.〉    삼년째 신었대야 서슬도 닳지 않은  별표 고무신만이 나란히 놓여 있는 -----    무슨 일이냐는 듯이 삽사리도 짖지 않는 밤    마을은 모밀꽃으로  환하기만 하였다.    갈마봉에 죽은 갖 나은 아이를 묻고 시름에 젖어 있던 분이는 오늘도 갈마봉이 보이는 당아래 고갯길에서 긴 하루를 보낸다. 당아래 고갯길에 산(山) 그림자가 드리우자 눈물이 덧없음을 느끼며 치마(허리)끈을 졸라매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 온 분이-. 별표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 있는 삽사리도 짖지 않는 고요한 밤 메밀꽃만 환하게 펴 있는 분이의 집, 분이의 고달프고 애달픈 마음을 읽게 해 준다.      인간파편        -성골 누님 영전(靈前)에.    팔쭉지며 흐므러져 선지피 흐르는 기총탄상(機銃彈傷)  응급 구호도 받을 길이라고는 없이 죽어 간다는  두 시체(屍體)의 모습이랑 마음 저리게 하는 기별 들으며.    피투성이 된 모자(母子)의 사랑---- 한 덩어리의 시체(屍體)로 쓰러진 수원(水原) 남양(南陽) 땅의 눈길 위.    엄마 잔등에 업힌채 곤드래 수그러진 모가지의 꼴이랑 죽어서 있는 인간(人間)- 고사리같은 두 주먹에    계레의 원한(怨恨)을 움켜 쥔채.  아아.우리 다시 원한(怨恨) 남기지 못할지니---     성골 누님의 최후를 그린 가슴을 애는 시(詩)다. 기총 탄환을 맞고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는 모자(母子)는 성골 누님과 조카일 텐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엄마 등에 업힌 조카는 고사리 손을 움켜쥐고 목이 꺾인 처참한 모습이었다. 가슴이 뭉클해 온다. 전쟁은 재앙이다. 우리 인류에 다시는 없어야 할 일임에도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일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기회가 있다면 이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전쟁의 폐해를 널리 알리고 싶다.     백오(白烏)의 노래    저도 모르게  내려 왔음이여!    먼 나라의 향수(鄕愁)로  두 눈에는 항시 이슬 맺히고    종일내 나의 날아 갈 곳을 응시(凝視)하기    놀 빛 바알갛게 시울지노니----    마지막 「백오의 노래」에서는 스스로도 모르게 고향(素砂)에 내려 왔음을 알고는 감격한 나머지 느낌표 하나로 그 감동을 나타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고향 소사(素砂)를 그리던 소향(素鄕)은 한국문학사에 작품으로는 커다란 공은 남기지 못했다. 시인이라기보다 언론활동이 더 활발하던 언론인이었던 때문이다. 그가 6.25를 겪는 동안은 어수선한 나라를 걱정하며 ‘나라 실정이 이러한데 내가 글을 써서는 뭐한단 말이냐’ 며 한동안 펜을 버린 적도 있었다. 소향관 앞의 베롱나무 꽃이 피었을때 1953년 첫 시집 『귀로』를 시작으로 그의 문단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는데 출판이 되자마자 과감한 그의 시 세계가 독자들에게 어필하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어 1957년 두 번째 시집 『불온서정』을 출판하고 1961년에는 세 번째 시집인 『세월 속에서』를 펴냈는데 이 두 권의 시집에서 이상로는 정적인 표현의 정서적인 시와 사회풍자의 정치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사회 부조리와 정치적 부패를 신랄하게 고발한 대표작으로는 「남대문 시장」 「태평로」등이 있다. 일부 평론가들이 사회 혐오와 정치적 부패에 대한 시류를 부각시켜 문제화하자 그것은 ‘오직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는 것으로 맞섰다. 유독 그런 주제들을 많이 다루게 된 원인으로는 아마도 그가 언론에 종사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한 술과 담배를 많이 즐겼다. 어린 시절 이미 부모를 여의고 항상 외롭다는 마음에 술을 퍼 마셨으나 술이 그의 마음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담배 또한 입에 달고 살았으며 술을 마실 때와 글을 쓸 때는 아예 줄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즐기는 것은 생각을 하는 - 새로운 싯귀를 연상케하는 매개체로 생각했다.  온화하면서도 내성적인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했다. 일찍이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주로 민족적 향토성과 윤리적 역사적 의식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소향은 시 외에도 수필을 많이 썼다. 그 중에도 세 번째 수필집「저 태어난 고장에 살면서도」는 수주 변영로의 시 구절을 인용했는데 수주 변영로를 존경하고 따랐음에 기인했다. 수주의 수필집 『수주수상록(樹州隨想錄)』을 책임 편집하기도 했다. ---계속   글/ 이재욱     한국소설가협회 서사문학연구위원 장편소설 -귀천의 길목, 아버지의 가슴앓이, 왕의 연인 소설집-연탄 두 장의 행복

부천시 문화예술 발전기금, 3년 연속지원 금지규정에 관한 제언

  이재욱(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서사문학연구위원) 부천의 유일한 문예창작 지원금은 부천시 문화예술발전기금 하나뿐이다. 그나마 이 기금은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등 크고 작은 다양한 부천의 모든 문화예술단체들에게 배분된다. 많은 수혜자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주어지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지원금은 당연히 작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원금 수혜자로 선정되는 날부터 또 다른 걱정을 해야 하는 수혜자로의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지원금만으로 소요예산의 전부를 충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스로 마련해야 할 자부담의 금액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가뭄의 단비처럼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그만큼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이 미미한 때문이다. 문학 분야의 출판지원금만 보더라도 지원금은 출판비의 20-25% 내외에 불과하다. 거의 자비 출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다.   문제는 이런 지원금의 많고 작음을 논하고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3년 연속지원이후 일 년의 휴식기간을 요하는 금지규정에 관한 제언이다.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는 기본취지에는 동의한다. 한사람이 3년 동안 연속해서 혜택을 받았다면 1년 정도 제외돼야 한다는 규정도 당연한 것 맞다. 그러나 문학 분야의 출판물은 다른 예술단체 활동과는 구분돼야 하는 특성이 있다. 도서 출판비는 개인의 것이나 단체의 것이나 한 권의 책이라는 데서 그 금액이 대동소이하며 이는 한 개인이 희생되는 금액으로 많은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문학 분야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 분야의 단체에게만 이런 특성이 있음을 강조하며 이런 단체로의 수혜를 거론하는 것임도 전재돼야 한다.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부천   음악이나 미술, 그 외 다른 모든 단체의 경우에도 연속적인 지원을 요구할 수 있다. 올해 공연을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어나가야 한다는 조건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 단체에 배분되는 지원금을 문학 쪽으로 이월해 달라는 특혜를 요구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문학은 문학 분야에 배분된 금액 내에서 어떤 한 개인이 희생되는 금액으로 단체의 많은 수혜자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경제원칙과도 부합하는 논리를 주장할 뿐이다. ‘가능하다면 골고루’ 라는 배분취지에도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개인출판물은 수혜자가 한명이지만 단체는 수혜자가 거의 개인의 10배 이상 수준이다. 때문에 개인 수혜자는 종전대로 3년 연속지원 금지규정이 존속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학 분야의 연속성을 가지는 단체 출판물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이라도 있어야 한다.   문학단체의 출판물은 연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면 부천소설가협회에서 발간하는 “부천, 소설과 비평”은 매년 연속적으로 발간하는 부천 소설가들의 작품 활동지다. 일 년 동안 활동(집필)해 온 작품을 게재한 결과물로 부천은 물론 전국적으로 배분 전달되어 부천 소설문학을 함께 공유하게 하는 출판물이다. 각 도 단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간행물이나 부천이라는 작은 도시에서는 벌써 10년 이상 발간해 오고 있는 중인 부천문학의 자랑스러운 출판물이다. 어쩌면 부천시의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선정에도 일조했을지 모를 출판물이기도하다. 그런데 이 3년이라는 금지규정에 묶여있는 해에는 작가들 스스로가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야 한다.   그동안 부천 작가들에게 꽤나 많이 회자되었던 새로울 것도 없는 사안이며 몇 차례 담당부서에 건의하기도 했었지만 자리 이동이 잦은 부서원들이다 보니 또 다른 자리로 이동하면서 그때마다 유야무야 돼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행정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제언하는 것이니만큼 이번에는 꼭 검토해 주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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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의회 최초의 여성의장 제 8대 김동희 의장을 만나다.

지난 8월 19일 부천시의회 의장실에서 김동희 의장과 본지 이재욱 논설위원의 인터뷰가 있었다. 김동희 의장의 배려로 편안한 분위기 속에 이어진 담소를 겸한 대담의 주요 내용을 발췌 정리했다.   김동희 시의장      안녕하십니까.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8대 부천시의회 최초의 여성의장으로 피선 되셨습니다. 그리고 의장으로 재임하신지 도 1년이 경과 됐습니다. 그 동안의 소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장으로 선임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의장이 되고 첫 의사봉을 잡으면 서 부천시의회의 긍정적 변화를 만들고 부천시민의 기대와 욕구에 부응하는 훌륭한 의 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꾸준히 여야가 서로 협조하며 일하는 좋은 의 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데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동안 여야 가 약간의 이견은 있었지만 7대에 비해 나름 큰 충돌 없이 순조롭게 잘 지내 온 것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부천시의회 최초 여성 의장인 저를 비롯해 이번 8대 여성의원 비율은 50%에 가깝습니다. 여성의원들의 의회 활동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 대변자 역할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동료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충실하게 지원할 것이며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의정에 반영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김동희 시의장   부천시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셨을 때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기능에 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책의 입안 단계부터 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면밀히 분 석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어 의원 한 분 한 분이 주민과 소통하며 지역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8대 부천시 의회의 전반기에 시의회가 주민과의 소통을 통한 지방자 치발전이 바람직하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의장님의 평가는 어떠하신지, 또 미진한 것 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8대 부천시 의회는 전체 28명의 의원 중 초선의원이 20명으로 70%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선 의원들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재선 이상 의원들의 연륜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어느 때보다 화합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의회의 분위기 가 조성됐다는 평입니다. 김동희 시의장 또한 제8대 부천시의회는 정책발전연구회, 열린광장 포럼, 지방분권연구 포럼, 청년미래 포럼 등, 4개의 연구단체를 구성하여 외부인사 초빙강의, 공청회, 자료 출판 등 공부하는 의회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의원 조례발의는 물론 정책개발을 통한 입법 활성화를 도모할 뿐더러 개인의 지식과 교양의 함양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천의 숲(생태)을 관찰하고 조사하는‘숲생태 보전연구회’라는 의원연구단체도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심도 있는 분야별 연구 활동과 시민과의 소통을 통한 정책개발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시민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토론회나 의원연구단체 활동을 더 많이 활성화해야 할 것입니다.     부천시 시민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함에 있어서 부천시가 집행하 는 창작활동지원액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의견이 문학, 예술인들 사이에 팽배한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산이 쪼들리는 시 집행부나 문화 경제국이 이와 같은 예산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의회가 의안발의 등을 통하여 창작발전기금을 조성 한다던가 또는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특례조례 등을 제정한다면 문화-예술인들의 커다란 호응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에 대한 가능성이 있을까요?   김동희 시의장 부천시에서는 문화예술인 창작활동을 위해 다양한 지원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부천시문화예술발전기금(1억 3천만 원) 외에 문학관련 사업으로 일인일저 책 쓰기 등 15개 사업에 2억 2백만 원, 수주문학제 5천만 원, 신진작가 지원 사업에 2,820만 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천문화재단에서 하는 사업 중에도 창작활동 지원 사업으로 청년예술가S 4,500만원, 우리동네 예술프로젝트 공모지원 사업에 1억 1천만 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발전기금의 경우 50억 원을 기금으로 운용으로 1년에 1억 3천만 원의 이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율이 낮아 예산법무과에서는 기금은 폐지하고 일반회계 예산을 세울 것을 권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천시 재정자립도가 2019년 본예산 기준 34.4%에 그치고 있습니다. 향후, 재정 상태가 좋아지면 문화특별시 부천의 명성에 걸맞게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에 더 많은 예산을 지원토록 하겠습니다.   김동희 시의장   부천시 의회의 조례제정 등에 있어 의원발의의 수가 매우 적거나 어떤 경우 발의된 조례의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한 의장님의 견해 는 어떠신지요?더불어 의회구성이 여당의 점유율이 지나치게 높아서 시 집행부가 제출한 조례 등에 대한 심의가 섬세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영상문화단지라던가 문화예술센터 건립 등에 대한 의회의 심의가 졸속적으로 처리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장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8대 부천시의회 의원들이 지난 1년간 발의한 조례는 26건으로 앞선 제7대 의회가 같은 기간 발의한 7건에 비하면 3배 이상 많습니다. 단순히 조례 제정 건수만을 비교하는 것을 떠나 그만큼 입법 활동이 활발했고 시민들의 요구 사항에 따른 필요한 조례들이 적절하게 제정됐다고 봅니다.    내용의 충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지만 조례라는 것이 항상 독창적이고 획기적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모법에 의해 개정해야만 하는 조례도 있고 현 상황에 맞게 변경되어야 할 부분을 잘 짚어주고 정비해 나가는 조례도 필요합니다.   김동희 시의장 문화예술회관 건립, 영상문화단지 졸속처리 질문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여대야소의 우려와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여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서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견해에 귀 기울이는 경청이 먼저입니다. 여야가 대화를 통한 타협을 끌어내는 정치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야당 의원들과도 현안사항이 발생하면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회관 건립은 부지 선정에만 15년이 걸렸고 설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 속에 지난 6월에 첫 삽을 떴습니다. 오랜 시민들의 숙원 사업인 문화예술회관은 부천시만의 문화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려 합니다. 클래식공연 외에도 365일 보고 즐길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문화도시 부천의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영상문화산업단지 조성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큰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천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 땅으로 문화 및 숙박시설을 모두 갖출 수 있도록 통합 개발하여 관광과 문화산업을 연결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도시교통위원회 활동 때에도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이재욱 논설위원과 김동희 시의장  의회 의장으로서의 바람직한 역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앞으로 남은 기 간중에 의장님께서 특히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시는 부문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은 임기 동안에도 안정적인 의회운영과 더불어 의회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신뢰받는 의회, 일하는 의회가 되도록 의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시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시의회를 이끌어 나가고자 합니다. 집행부와 시의회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정작 시민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노력은 효과도 없고 지지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입장에서 소통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것은 엄정하게 가려서 진정 무엇이 시민을 위한 것인지 꼼꼼히 살피는 의정활동을 펼쳐 가겠습니다.   또한, 현재 부천시에는 대장동 3기 신도시, 영상단지 조성, 역곡 북부역 등 크고 작은 대규모 사업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들 대부분이 지금부터 향후 5년이 부천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기간 동안 이런 대규모 사업들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과 난제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집행부와 시의회 간 소통을 통해 당면 과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동희 시의장     부천시민들에게 혹은 시 집행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 떤 것들이 있을까요?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배려로 지난 1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부천시의회 28명의 의원들은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의정활동에 전념할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또 한 번 더 다짐하고자 합니다.   김동희 시의장과 이재욱 논설위원 질책도 좋고 따뜻한 격려의 한 말씀도 좋습니다.  진정한 민의의 대변 기관으로 부천시 지방자치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장시간 할애해 주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의장님을 비롯한 모든 의회 의원님들의 선전과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인터뷰 진행: 이재욱 논설위원  정리 : 부천시티저널 편집부                                   

세상은 꿈꾸는자의 것이다 -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인터뷰 -2

 신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한국의 영화역사에 있어서 기획제작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적 영화제작자로 "엽기적인 그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등 수많은 흥행작을 만들어 온 영화제작자이며 한국형 블록버스터 제작을 시도한 선각자로 볼 수 있다.  비록 수차례의 대규모의 영화제작을 위한 노력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대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하고 그가 이룩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한국영화의 제작관행이 오늘날 외국의 영화와 경쟁하고 최근의 동남아시장의 확대에 기틀이 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이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그와의 인터뷰 2회를 연재한다.      우리나라에도 영화제가 많지요? 170여개가 넘는다고 하던데요.   세계에는 몇천개의 영화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판타스틱을 주제로하는 영화제로 브뤼셀(Brussels) , 스페인의 시체스(Sitges)가 유명합니다. 물론 우리 부천도 판타스틱영화계에서는 유명하지요. 우리도 별써 23회를 기록하는 오랜 역사를 갖게 되었어요,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시겠지만 “칸느 영화제“ 기간 중에는 물가도 뛰고 호텔비도 50%이상 뛰어요. 도시 경제에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지요. 로버트레드포드가 만든 선댄스 영화제에는 젊은 애들이 많습니다.스텝진이던, 자원봉사자 그룹이던 활기가 넘치고 이 인원들이 또 이어져서 새로운 맨 파워를 갖게합니다. 우리 부천영화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키워야 되고. 크게 생각을 해야지요. 거시적으로 봐야되요. 부천은 대도시인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있고 도시반경도 적습니다. 머무를 수 있는 도시가 되지 못하는 약점이 있어요. 그래도 우리 부천만이 할 수 있는 유인책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 요리사 중에 장사 안되는 곳에서만 개업을 하는 요리사가 있대요.그 사람은 그 곳에서 장사를 키운다고 해요. 물론 그 가게를 파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하고요. 나도 영화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온다“는 믿음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비젼이 있는 곳에 꿈이 이루어 지듯이 우리 부천이 비젼을 갖고 충실한 계획을 수행하면 미래가 있다고 봐요.   그렇다면, 위원장님께서 5년을 맞고 운영한다면. 그러면 5년뒤의 부천 영화제의 그림을 그릴수 있을까요?  이번 해보고, 그리고 난 후에 그때 얘기합시다. 이번이 처음이니까.  오늘,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나면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요?          후원은 어떤가요? 경제도 안 좋다고 그러는데요.   후원담당자에게 물어봐요 “책을 만드는데, 그 책을 함께 만들고 싶게 작업하는지?” “ 누군가 그 책 만드는 걸 보면서 따라서 해보고 싶게하는지?” “참여하고 싶게 해야지요, 같은 그룹이 되고 싶게 해야지요.” 난 습관적으로 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요 자랑거리를 넣어야지요, 그런걸 찾아야지요, 그래야 후원도 있고 도움도 있겠지요. 물론 우리 팀원들이 그렇게는 안했지요, 그렇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잠재력을 끌어내야합니다. 그 잠제력을 끌어냄으로서 미래를 볼 수 있는거지요.   부천사람이 부천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느끼도록..영화제가 그걸 끌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갖어야 할 목표가 있고 또 그런 목표로 일을 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중에 후원도 함께 하겠지요. 지금까지는 대체로 잘 진행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부천시민이 자기 돈을 내서 영화제에 참가하는 돈이 외지사람들의 돈보다 많을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울이나 인천 등 수도권의 사람들도 오겠지만 아직까지는 부천시민이 더 많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데이터를 축적해 봐야겠지만 예년의 경우 전체 좌석점유율이 60%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부천시민의 참여가 우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영화제가 갖는 의미가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고 이름에서도 보듯이 국제적인 행사라는 측면에서 볼때 부천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에 더해서 수도권의 시민들이 부천을 더 많이 찾도록 하는 것은 부천의 경제, 사회등에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영화제 운영하는동안 자신의 영화제작과 충돌할 수도 있고 선택하여야 할 시간도 있을수 있을텐데. .  처음에 영화제 제의 받았을때 못하겠다고 했어요.."영화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프로그래머들도 잘하고 그러니까 옆에서 두고 보고 조언을 하면서..뭐 그래라 그래서 왔는데..와서 보니까 일이 밑도 끝도 없는 거예요. 뭐 하면 할수록 일은 더 많아지고. 지금은 매일 출근해요, 그래도 여전히 바쁘고. 속은거지요. (웃음) 지금은 영화하느라고 쌓아두었던 여러 곳에서 , 특히 미국의 친구들,프로듀서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제 영화고 남의 영화고 필요한 모든것을 갖다씁니다.   위원장님께서는 우리나라 기획영화의 선구자이면서 흥행기록도 갖고 있으시면서 흥망이 극적이셨는데, 영화에 대한 꿈과 영화제의 운영이 상충하면 어떤 결론을 내게 될까요?  그만두어야지요, 영화제와 영화제작은 전혀 다른분야예요. 그 둘을 병행하는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에게 이야기 했어요, 내가 오래 못할수도 있다..그런 충돌지점이 오면 결정해야지요.    신성복 기자(왼쪽) 신철 위원장(오른쪽)  사실 요즈음의 영화시장이 많이 변했다고들 하는데요, 위원장님이 보는 시장은 어떠신지요?   시장이 많이 변했지요, 외국의 직배 모델이 일반화 되면서 지금 영화시장은 넷풀릭스, 유튜브같은 배급사, 유통업체에 의한 시장이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크리에이터들의 고민이 있게되는 겁니다. 시장의 흐름이 그렇게 되니까 대기업에 의한 독점 시장화가 지속되니까 크리에이터들이 대기업에 속하게 되는겁니다.   실질적으로 프로덕션은 불확정적이지요. 잘 될수도 있지만, 프로덕션이 평생 한두개가 성공할지 말지 그런데 지속적으로 수입이 될 수 있는 수입구조를 갖으려고 다들 노력하지만 만족한 결과를 얻는데 부족한점이 많아요, 시장도 크지 않지요. 그러다 보니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이들이 유통업자로 변하고 결국 크리에이터들도 대기업에 더욱 예속해 가지요. 시장이 단순화되는건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안되요.   우리나라도 CJ 같은 대기업에 의한 시장이 되고, 이에 대한 공과는 따져봐야겠지만, 어쨋던 이런 기업에 의해 시장이 커졌어요 파이도 커졌는데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영화시장이 작아서요. 앞으로 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될겁니다. 배급업자 입장에서도 크리에이티브 입장에서도요.   영화제가 몇달 안남았는데,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잘 진행되요, 영화제라는 것이 마지막까지 변수도 많고 협상에 따르는 일정등도 많고 늘 살얼음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점점 더 할 일이 늘어난다는 의미지요. 많은 협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공적인 영화제를 기대합니다.

세상은 꿈꾸는자의 것이다 -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인터뷰 -1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990 ~2000년대 한국의 성공적인 영화제작자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9), '엽기적인 그녀' (2001 출시작품중 흥행순위 2위) 등을 제작하였다.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한국영화사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영화사를 차리고 글로벌 마켓에 도전하였다. 다시 '로보트 태권브이'로 새롭게  도전했으나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숙제와 가능성을 남기고 후퇴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불법으로 3억장 이상의 VOD가 제작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엽기적인 그녀"를 리메이크하는 "엽기적인 그녀 2"를 중국측과 합작으로 제작하기로 한  기획은 중국쪽의 이해할수 없는 여러가지의 이유로 계속 지체되어왔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 주장하는 영화제작자 신철이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은 2018년 8월이다.                           미국으로 가게된 동기가 있을까요?   한국시장에서 성공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첫 번째 미션이었는데 그것이 1990년 ~2000년대 초에 거의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영화 <엽기적인 그녀> 이후에 한국시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이룬 듯한 느낌도 있고, 한국시장이 좁게 느껴져서 그래서 내 인생에 신의 축복이 더해진다면, 글로벌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요.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일본의 한 스님의 소개로 일본의 게임사 남코(Namco)의 회장이 1억불중 6천만불을 투자하기로 하고 진행했는데 그 당시의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습니다.  외국의 기술자들과 연결해서 4년동안 준비했는데 미국 영화계에서의 일의 추진이 험난했고, 여러가지 법적 처리등의 난제등으로 결국 4년만에 철수하게 되었읍니다. (注: 미국영화사 사무실이 4층 404호실이었고 미국으로 간지 4년만에 철수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 가지 분석을 했습니다.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서 준비 부족에 대한 후회도 하면서 다시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것은 동시에 한국영화의 확산 방안이 될 것으로 보고 전세계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않군요.    처음에 한국 영화계에서 제대로 기획된 영화하나 만드는데 10년 걸렸으니  까, 경험도 있고 한점을 감안해서  대략 4~5년 예상하고 추진했는데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환경도 많이 변한데다가 중국 당국의 관련규정, 허가 절차등이 명확하지 않아서요.   제작자로서 스티븐 스틸버그와 무척 닮은듯한 느낌을 갖는데-   미국 영화계에는 천재들이 많아요.제 경우 기술적인 천재를 아는데..그 친구가 진짜 천재이고 그 밑에 있는 애들도 다 천재지요. 그런 스텝들과 작업하는 스필버그도 천재지요. 대단한 천재라고 봐야지요.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그런데 나는 뭐 돈있는 집 자식도 아니고, 충암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는데,재수해서 서울대학교 미대에 진학했지요.처음에는 서울대 응시해서 떨어졌지만..  그리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느낀게 있는데 그것은 내가 천재는 아니라는 거예요.그런데 천재가 아닌 내가 영화계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별 수 없지요. 남보다 두배를 더 해야지요.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해요.   스필버그도 고생을 많이 했을거 아닙니까?   스필버그는 초등학교때 이미 8mm촬영기를 갖고 다닐정도였는데 무슨 고생을... 거기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자기집처럼 드나드는 기회를 갖었다는 점에서 조건도 좋았고요. 천재적인 작업자들도 주위에 널려있는데..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제작자의, 국내에 잘하고 있는 제작자들의성공의 원인을 보면?    김용화 감독 같은 경우는 자신이 직접 CGI회사를 갖고있어요.거기에서 다양한 시도를 거친 결과로 성공적인 작품의 조건을 갖추는 이점도 있겠지요. 그런데 성공적인 제작을 위해서는 좋은 원작이 있어야 돼요. 몇 일전에 인터뷰기사를 봤는데 거기서 "시나리오가 전부야, 나머지 것은 전부 장식이야(script is everything, anything else is dressing, just dressing)"그러더라구요.근데 이어서 말하기를 “그런데, 나는 좋은 작가를 살 수 있는 돈이 있어!! 여유가 돼 ! 그러더라구요. (웃음)  영화 '엽기적인 그녀' 좋은 제작자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시나리오가 몰려 옵니다. 그 많은 시나리오중에 좋은 시나리오를 볼줄 알아야 돼요. 물론 감독도 그래야 합니다. 재주있는 애가 시나리오 잘못 골라서 망해요.배우도 시나리오를 잘 봐야지 맨날 망하는 시나리오를 보면 같이 망하는 겁니다 . 성공하는 배우는 시나리오를 잘 봐야 돼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거기서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성공할지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못 보면 망하는 것이예요. 재주있는 애들이 사라지는 이유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송광호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선택이 탁월하지요. 그러니까 성공적인 작품에 함께 작업하는 빈도도 많지요. 성공하는 배우의 조건이 되는겁니다.    위원장님은 몇년간에 걸쳐서 스테디하게 성공했는데-     글쎄요 그때 한국에서 계속하면서 건물사서 그대로 한국에서 있어야 하는데, 미쳐버려서 괜히 미국가서,.고생만 엄청하고..돌아와서도 고생하고..   현재의 신철이라는 프리미엄으로 투자가치를 펀딩으로 평가해 본다면?    한국시장만 보면 최대치가 250억 정도로 봅니다. 250억이면 관객이 800만명이 들어야합니다. 참고로 150억이면 600만, 50억이면 200만 관객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이 되는데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한국시장만 보면서 800만을 목표로 하는것은 쉽지 않을거예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저는 외국시장을 함께 봅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시장까지 보고 4~500억의 투자가 최대치인데, "엽기적인그녀 2"의 경우에 600억까지 이야기가 된 적이 있어요, 아시아 시장까지 함께 보고. "로보트태권 브이도 적지 않은 투자가 예상되었지만" 구설수에 오르내리면서 지체가 되고 그랬지요. 아쉬운 점이 있어요.      다시 기회가 된다면 글로벌 영화계에 뛰어들 것인지?   세계로 향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글로벌 시장은 포기할수 없는거지요. 내가 지금도 영어를 계속 공부하고있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지금도 계속 추진하고 있어요. 포기하면 안되지요. 이제는 우리 영화도 세계를 향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어야합니다. 이미 몇 편의 영화는 아시아 시장에서 상당한 성공도 얻었고요.    신철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한국에 외국 영화직배사등도 포함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데-   많이 와 있지요.직배사도 많이 와있고 디즈니사도 벌써 몇년전에 들어왔는데, 성공적이라고 그래요. 예전에, 미국영화 직배반대를 위해서 미국에 여러번 갔고 , 스크린쿼터 지키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너무 한꺼번에 들어오면 안되니까요. 그러면 한국영화가 설 자리를 잃는거니까요. 내가 잘 아는 카나다 교수가 그러더라구요. "스크린쿼터, 목숨을 걸고 지켜라, 그거 한번 무너지면 우리꼴 난다. 영원히 찾을 길이 없다."그 말 맞는겁니다. 그때 우리가 무너졌으면 요즘과 같은 한국영화 힘들었을 겁니다. 프랑스도 스크린쿼터 갖고 버티고,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자기들 영화 엄청 좋아하고, 미국영화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자기들만의 눈으로 보는 영화 만들고, 그것이 스크린 쿼터로 다져진 눈인데 요즈음 우리나라 영화도 우리 눈으로 보는 영화 만들잖아요. 한류성 영화지요. 그것이 다시 세계시장으로 목표를 향하기도 하고 일부 성공하기도 하고..그것이 스크린쿼터로 다져진 것으로 볼 수 있는겁니다.      부천영화제가 경영적 마인드를 갖는 영화인으로 처음인것도 같은데, 부천영화제에 대한 의견은 어떤가요? 우선 예산이 50억 정도인데 이 예산이 적절한가요?   그것도 감지덕지지요, 예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그러나 그것이 모든건 아니잖아요? 부천영화제가 초기에는 무척 좋았어요, 부산영화제가 칸느 스타일이고 전주가 에술영화, 인디 쪽으로 갔으니까 두 영화하고차별화하기 위해서 판타스틱 영화제로,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특화된 초기 한10년은 매우 좋았어요. 시청 앞 영화제 사무실 그러던 영화제가 2005년 정치적인 이유로 집행위원장을 강제로 그만두게 하면서 영화계가 보이콧트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영화제가 표류하기 시작해서 4~5년전까지 이어져왔지요. 영화제마다 지역적 정체성을 갖어야 하는데, 지역적 특수성을 감안해야하고. 그런데 정치적인 영향에 의해서 영화계에서 차별받는 와중에- 너 갈데가 없어서 거기가서..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부천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적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번 핵심을 놓치면 회복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상황이 바뀌기 위해서는 숱한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의 조직위원장, 집행위원장들 심지어 프로그래머들이 힘을 못썼지요.영향력이 크지 못했어요. 영화계의 도움이 없이 프로그래머등 관련자들을 키우는데 어려움도 있었고. 비록 해외에서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판타스틱 영화제로 유명하고 기대도 컸지만 잃어버린 영화제의 특성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볼때, 부천영화제가 추구하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문을 제기하는데..모티브가 없다는 말도 있고-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초기에 잡았던 정체성은 이제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제는 시간도 달라졌고..환경도 크게 변한데다가 기술적인 발전도 감안해야 합니다.   처음 위원장 제의 받았을 때 부천영화제에 대한 평가는 잠재력(신철 위원장은 potential이란 단어를 굳이 사용했다.)은 있지만 기대치에 못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잠재력(potential)을 극대화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고  현재는 갖고있는 잠재력의 50%정도가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신철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제 직원들의 잠재력과 능력을 끌어올리고 그럴 수 있지 않을까?그럼으로서 다시한번 부천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아갈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내 역할이고 부천 영화제가 변화기에 그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위원장직에 대한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는 개막식에 가면 부천인지..부산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정체성을 갖는 영화제에서는 여기가 어딘지 구분이 가능하게 됩니다. '개막식의 한 커트만 봐도부천의 정체성이 들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그걸 위해서 우리 식구들과 노력하기로 했지요.   그런 맥락에서, 지금 떠오르는 프로그램등이 있나요? 그건 프로그래머들의 몫이지요, 각 프로그래머들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그들의 개성 과 능력을 극대화 시켜야지요.   영화제가 프로그래머들의 개성이 아니라 총 기획의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프로그래머 개인들의 taste나 개성이 모여서 합쳐짐으로서 전체적인 조합이 이루어질수 있을 것이고 그 조합이 일치 될 때 통합된 영상이 나올 것이다. 그 통합된 영상이 개성으로 정체성으로 나올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일이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중에 이견이 있고 이해해가는 과정이 있고 결합이 반복되고 타협하면서 부천이라는 개성이 창조되지요. 결국 이런 모든 과정이 영화제의 역사와 축적된 경험이 되고 그리고 이렇게 정립된 영화제의 정체성을 갖게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영화제 운영자로는 초보니까 나 역시 집행위원장으로서의 경험이 필요하지요. 해외 영화제들을 보면 위원장들의 경력이 수십년 됩니다. 20, 30년 40년 계속하면서 영화제의 개성을 축적해 가는거지요. 예전에 영화사 사장으로 영화제를 볼 때와 집행위원장으로 영화제를 볼 때 전혀 다른 면을 보게되는데. 일례로 선댄스 영화제에 가면 자원봉사자만도 1800여명이 넘어요, 우리는 300여명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저런 참여가 가능할까? 하는 면에 관심이 크게 가는데 영화제작자의 눈은 결코 아니지요.          프로그래머들을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이야기가 흐르도록 하자, 대화가 막히지 않도록 하자,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믿도록 하자'고 다짐하지요. 감독과 이야기해서 확정했으면 믿어주어야지 그걸 계속 간섭하면 개성이 나오기 어려운 겁니다. 그렇게 볼때 프로그래머 각자를 훈련시키고 능력을 배양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인터뷰 2" 에 계속됩니다]   

남미경 의원, 오늘과 내일을 위한 대화

부천시 시의회에서 가장 온화한 의원 중의 일인으로 손꼽히는 의원으로 지난 8개월간 인상적인 의회 활동으로, 왕성한 지역 활동에 참여한 의원으로 여러 여야 의원이 인정하는 남미경 의원(비례대표. 재정문화위원회)을 부천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남미경 자유한국당 시의원   제8대 부천시의회에 비례대표로 처음 입성한 남미경 시의원(자유한국당)의 정치경력은 짧지 않다. 2003년 아파트 연합주택 대표조합장으로 부천중동역 푸르지오 사태를 해결하고 분쟁아파트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일반분양까지 완료한 5년여간의 긴 여정을 이끈 투사이며, 2007년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협의회 위원으로 정치에 입문, 2010년의 시의원 당내경선 및 2016년의 보궐선거(부천시 바 선거구)에 출마한바 있는 정치,사회적으로 오랜 경험이 있는 지역인사이며 그녀 스스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할 정도의 능력을 갖는 음악전문가 이기도 하다. 인하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함으로 교과과정을 이수하여 2급 중등과학교사 자격증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나 보육교사(2급) 및 요양보호사 자격증 등을 추가로 갖추는 것을 보면 열정과 적극성을 이해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우파에 속하는 남 의원은 본인의 소극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차명진 전 의원과 함께 친김문수계열에 범 황교안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페이스북등에 정치적 의견에 대한 표시를 함에 매우 적극적인 행보를 하는 것으로 중앙에 알려진 몇 명의 시의원으로 꼽히고 있다. 문화예술 특히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어 2019년 부천시 예결위에서 부천필의 독일공연 필요성을 강력히 지원 이를 전액 예산에 반영하는 뚝심을 보였다.      2019년 부천시장 연두 동사무소 방문에서 주변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20여개 이상의 동 방문에 함께 참여하여 남의원의 행보에 대한 기대와 의구심에 대한 의견을 분분하게 하였다.   의원생활 8개월이 되는데 소감이랄까..   의원생활의 기준이 "부천시민을 위한.."으로라는 기본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부천시민을 위한..” 에는 “판단의 기준이 됨은 물론 행동의 기준도 되는 것으로 현재까지는 이 기준에 변함이 없다.” 이에 덧붙여 “이 기준은 내가 30여년동안 부천시민으로, 부천에 거주하는 한 사람으로서 살면서 얻은 것이기에 이 기준에 변함이 있는 경우 의원생활에 미련은 없다.” 따라서 의원이기 이전에 부천시민이고, 시민으로서, 또 시민의 이웃의 한 사람으로 부천시민을 위한 여하한 활동을 함에 있어 정말 좋은 도시 부천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   부천시장에 대한 인상과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하면?    우선 내가 비례대표인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지역구를 갖고 계신 의원님들과 다르게 부천시 전역의 문제에 자유롭게 다가 갈 수 있으며 또 시민과 호흡하는데 불편함이 없어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초선의원에게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진행된 부천시장의 동 순회에 20개동 이상을 동행 한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연히 시장의 모습을 꾸준히 보면서 비교하는 기회도 있었고 시정에 대한 전체적인 구조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 동 방문회를 통해 시장님의 시민과의 대화중에 특히 느낀 것인데, 내 생각에는 시장님이 토론하려고 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고 가능한 많이 들어주었으면 했다. 어떤 경우 시민과 1:1 토론회처럼 진행했는데 그 모습이 설득력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장 시장의 직업적 경력에서 나온 자연스러움이라 할까, 장 시장이 시민을 설득하려는 듯 한 인상을 많이 느꼈다. 다소 공격적이랄까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인 설득 노력이 안타까웠다.   또 장시장이 전임자의 업무에 너무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광역동도 그렇고.. , 예술회관도 그렇고..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도 그렇고.. 과연 장덕천 시장의 독자적인 그림이 무엇인가 찾게 되는데 선명한 그림을 볼 수 없어서 다소 답답한 마음이 있다. 오히려 당면분야와 이전의 프로젝트사이의 틈새정책에 불과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연립건물 등의 지하를 공영주차장화 하는 주차장의 Block화와 같은 참신한 정책도 이와 같은 관점으로 치부될 가능성마저 있어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부천시만의, 장덕천 시장의 특징을 갖는 커다란 밑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부천시의 대표적인 논란거리가 광역동 문제이고 이에 대한 분석과 반대가 만만치 않은데, 의원님만의 시각에서 본 것은?   현재의 광역동 문제는 시의 분명하지 않은 목적설정과 일방적인 계획에 원인을 찾을 수 있으나 지난 수년간 지속되어온 광역동 문제에 대하여 오피니언 리더들인 소위 지역 유지들과 주민자치회로 대별되는 시민들도 그 원인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주민자치위원 및 각 단체들은 시 행정부의 공무원들과의 마찰을 껄끄러워 해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지 않았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불편함이 없는 상태에서 광역동 문제에 대한 개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광역동 시행과 같은 시행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장기간 진행되어 지금의 문제 많은 광역동이 시행되기 직전인데 여러 가지 당면문제의 해결이 없는 광역동 시행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게다가 광역동의 구획이 실생활에 근거한 생활 주도적 행정구획으로 보기에는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오히려 정치적인 구획으로 볼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인위적 구획은 앞으로 오랜 동안 문제 거리가 될 공산이 크다. 원미동을 “부천동”으로 명명하는 것부터 동사무소의 위치 등 각 동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주민자치협의회“를 필두로 광역동체제의 조기시행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공감하고 이를 지지한다.   나는 부천시가 이 문제가 많은 “광역동체계”의 조기 시행에 매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시 공무원의 이해관계로만 분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이외에 광역동 시행에 대한 필수적인 이점이나 기본적인 필요성을 찾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부천시 특유의 독립적인 논리개발의 정당성이 정립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부천시가 전국 최초로 광역동의 시행을 진행하여야 하는 논리적 정당성은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 동의할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시행에 대한 홍보는 있는데 시행하여야 할 필수적 요건에 대한 정당성과 그 요건이 무엇인지 에 대한 홍보는 없다. 편리하고 실용적이라는데 무엇이 편리해 지고 어떤 것이 실용적이라는 것인지에 대한 실체적 근거가 없다.   시 행정 질의중인 남미경 의원    문화예술회관 건립이 확정되어서 이제 공사가 시작될 시점이 되었는데,   건립지점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현재의 건립 지점에 완공된 후 이 지역에 대한 교통량의 집중등 문제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단한 혼란이 분명히 예상된다. 저 창밖을 보자 , 현재도 각종 고층 건물들이 솟아오르고 계획된 고층 건물의 수가 절대 적지않다. 이미 포화된 현재의 교통 혼잡에 더하는 이런 계획의 타당성에 누가 공감 할 수 있을까? 문화회관이 완공된 후에 시청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오지 않을까? 오히려 현재의 시민회관 지점에 또는 여월동 지역에 건립하는 것이 훨씬 낳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천시는 문화회관 건립 후 충분한 관객의 동원이 가능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 이유를 모르겠다, 서울시의 관객을 어떻게 부천으로 유인 할 수 있는지, 인천시, 시흥, 광명시의 관객에 대한 합리적인 관객유치에 대한 계획이 검토 되었는지?   부천필의 서울 공연에서 상당한 관객동원에 성공했음을 지표로 내세우기도 하는데 서울시 내에서의 문화 활동과 그 관객들이 부천시에 와서 부천시의 문화예술에 동참하는 것과 같은 비교평가를 내리는 것에는 늘 괴리가 있었다. 그들에게 왕복 2시간에 걸친 시간적, 공간적 소모에 대한 평가는 정확한가? 이와 관련하여 시에서 주장하는 문화예술회관의 건축 목적에 대한 부천시의 지리적 입장을 검토해 보면 부천시는 문화예술회관 건립과 수반하여 컨벤션센터 와 부천시의 제반 문화행사 유치에 필요한 적정수준의 호텔유치가 동시에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르는 부수적인 면에도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문화예술회관의 건립에는 회관 건설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좀 더 세밀하고 효율적인 계획이 첨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금년도 회기에는 이점에 대해 따져볼 생각이다.   의원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시와 의회를 정의하는 관점이 다른데, 의원님의 관점을 표현하면,   시 행정을 시행정과 시장을 가장역활을 하는 남편의 역할 로 볼 때 의회는 어머니의 역할 로 볼 수 있다. 실행하는 역할 과 이를 지원, 협조하는 형태로도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의 행동력에는 얼마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있을 수 있다. 의회는 가능한 시의 위험성 부담을 완화하고 그 위험성의 실재적 출현 감소를 위해서 협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 행정부 와 의회간의 의견교환 과 협력체제의 구축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행동 과 견제 , 의견의 개진 과 결심에는 늘 충돌이 있게 마련이고 이 충돌이 효과성이나 효율성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충돌은 어떤 경우 독선 과 아집을 낳게도 하고 일방적인 흐름으로 상대적인 폭력적 저항을 낳게 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부천시의 미래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찾을 수 있는가? 나는 부천시가 부천시와 부천시민을 위한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기를 희망한다. 미시적인 틈새계획이 아닌 거시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위한 노력을 한다면 당을 떠나서 당의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동참 할 의사가 있다.   의회가 시 행정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옳은 결정이 아님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시 행정이 의회의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정을 하는 것은 독선으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모든 행정의 실행은 의견교환 과 충분한 검토에 근거한 협조가 필요한 것임을 공감할 때 시와 의회의 충돌이 경감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시장의 동사무소 순시에 동행한 것과 같이, 개인적으로도 시의 행정에 협조할 의사가 있고 나 자신은 늘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시가 의회의 협조를 예단하고 무시하고 의회가 이에 대하여 개혁을 위한 메스를 댈 경우 충돌은 불가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고 이러한 합의가 효율성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시와 의회의 활발한 의견 교환은 타협과 성취를 위한 중요한 과정임을 서로가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부천시의 문화발전에 대한 의견은? 작년에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부천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베를린 공연을 관철하시기도 했는데..   부천의 문화 와 예술에 대한 관심은 매우 크다. 가능한 모든 부천시의 문화행사에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비례대표니까, 부천시 전역구 의원으로 생각하고 크던 작던 기회가 되는대로 참여한다. 많은 경우, 특히 비교적 규모가 작은 행사에서 당황될 정도로 크게 환영도 받는다.   아직 의원으로 활동한 기간이 일천한 관계로 부천의 방대하고 다양한 문화 활동에 충분한 검토가 부족한 상태이고 또 부천문화재단, 한국만화영상진흥원등 규모가 큰 산하기관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충분하지 않다. 물론 이들의 비효율성이라던가 비 합리적인 제반 문제에 대한 인식은 앞으로 더욱 연구하고 분석해서 이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때 대책을 강구해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고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까지 어려움을 겪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문제가 신임 신종철 원장의 부임으로 개선되고 새로운 성장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아 신임 원장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 부천시가 오랫동안 지원해온 이 기관을 특히 지켜보고 있다.   부천 산업 경제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한데 이에 대한 관점이 어떠한지?   재정문화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당연히 부천시의 산업 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부천도시공사”, “부천산업진흥재단”을 필두로 부천의 도시재생 과 도시재개발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분야보다 크다. 특히 일자리 문제, 청년 일자리를 포함해서, 에 대한 관심이 많다.   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재개발, 도시재생에 대하여 폭 넓은 지지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시민을 위한 것이라는 원칙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도시재생 그리고 도시재개발은 부천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인데 공청회, 설명회 등의 빈도 수가 너무 적고 참여도가 그리 높다고 보기 어렵다. 도시재생 과 도시재개발등에 정치적인 고려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경향에 대해 우려감이 있다. 도시재생이나 재개발에 있어 지역 편중성이나 실현의 편의성에 우선하는 집행도 염려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 질 경우 난개발이 되고 도시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위험을 낳을 수 있다. 이 점을 예방하여야 한다.   “부천도시공사”의 경우 도시의 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부천산업진흥재단”의 경우 부천의 미래산업에 대한 첨병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조직을 키우는 것에 동의한다. 이 기관들이 앞서서 부천의 미래를 선두에 서서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부천도시공사가 현재의 HS를 대체하여 부천의 자족적 건설계획을 수행하는 것은 부천시의 도시재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오랜 시간 회견에 응해주신 남미경 의원님께 감사합니다.     봉사활동중인 남미경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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