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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용은 소사삼거리에서 무엇을 했나-
    부천이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가 되면서 부천의 작가들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부천이 고향이거나, 부천에 잠시 머물렀거나 부천과 인연이 있는 작가들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이렇게 알아낸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부천시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개편으로 없어졌지만 소사구에는 범박동에는 목일신 동요작가가 있고, 심곡본동에는 펄벅 소설가가 있고, 소사본동에는 소사삼거리에서 생활했던 정지용 시인이 있다. 이들 작가는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으로 범박동의 목일신은 동요 ‘자전거’등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무수한 동요로 국민동요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심곡본동의 펄벅은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대가일 뿐 아니라 심곡본동에 1960년대 ‘소사희망원’을 설립하여 혼혈아동을 돌보아주는 사회사업을 하였다.    성주산 가족 산책로 - 정지용 향수 길    소사삼거리의 정지용 시인은 소사본동의 대표적인 문학적 자산으로 2019년 가을에는 서울신학대학에서 시작하여 산새공원, 진영고등학교 입구까지의 길에 ‘정지용 향수 길’이라는 정지용 문학공원이 만들어진다. 정지용 문학공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계기로 부천 소새울에 산다는 정지용의 부천에서의 삶, 즉 부천 소사본동 소사삼거리에서의 정지용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정지용의 소사삼거리에서의 삶을 알아보는 것은 단지 이름뿐인 소사본동의 정지용이 아닌 소사본동의 주민들이 정지용의 삶을 알고 주민들의 삶속에 녹아든 정지용으로 새롭게 기억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사리 소사삼거리로 이사 온 정지용은 아마도 소사천의 둑 방 길을 시나브로 많이 걷지 않았을까. 소사본동 한 가운데를 흐르는 소사천을 따라 걸으며 정지용은 고향도 생각하고, 나라 걱정도 하고, 자신의 미래도 염려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지금은 정지용이 걸었던, 소사본동의 한 가운데를 흘러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소사천이 복개되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정지용은 천주교 신자라 소사삼거리로 이사 온 다음에는 아들과 함께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 답동성당으로 미사를 보러 다녔다. 그때까지 부천에는 성당이 없었다.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인천 답동성당으로 미사를 보러 다니던 정지용은 우연히 소사삼거리 집 근처에 소사공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근처에 소사공소를 두고 멀리 인천으로 미사를 보러 다니던 정지용은 소사공소를 알게 되고는 소사공소의 가장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소사공소는 소사삼거리에 살고 있는 전마리아 할머니의 집 단칸방에 차린 것이었다. 전마리아 할머니는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여우고개 넘어 소래면 대야리의 대골공소를 오랫동안 다녔다. 대골공소는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부천의 함박리와 소래의 대야리로 숨어든 신자들이 만든 것으로 이미 1880년대부터 운영되고 있었다. 부천에는 성당은 물론 공소마저 없어 여우고개 넘어 대야리의 대골공소로 미사를 드리려 다니던 전마리아 할머니는 소사삼거리에서 대야리까지 십여리 길을 걸어 다니는 게 힘에 부쳐 지인의 협조를 얻어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마련했다. 이것이 부천 천주교의 씨앗이 되는 소사공소의 시작이다.  정지용을 비롯한 소사공소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열의는 대단했다. 소사공소가 잘 운영되자 신자들은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모셨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소사공소의 신도들이 모여 공소에 신부님을 모시는 방안을 의논하는데 신부님이 오시면 식사가 제일 문제라고 하자 정지용이 신부님의 식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신부님은 공소에 기거하고 식사는 정지용의 집에서 하기로 하고 신부님을 모시기로 한 그날로 정지용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정지용이 계속 찾아와 간청을 하자 임세빈 신부를 소사공소에 파견하였다. 임세빈 신부가 소사공소에서 첫 미사를 드린 게 1945년 12월 24일 성탄전야였다.   정지용 시와 사진 - 소새울 마을 벽화   소사공소에 신부님이 오시자 소사공소의 신자들은 더 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당을 마련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조금한 단칸방의 공소에 신부님이 계신 것도 과분한 일인데 성당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허무맹랑한 일처럼 보였으나 소사공소 신자들은 성당을 마련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성당을 마련하는 일에도 역시 정지용이 발 벗고 나섰다. 정지용은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성당을 마련하고 싶다는 소사공소의 뜻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임세빈 신부와 정지용은 인천 답동성당 임종국 신부와 함께 적산관리소를 거의 매일 방문하다시피 했다. 소사삼거리 원미산 밑에 성당 자리로 보아둔 일본인이 소유했던 소림별장이 적산가옥이라 사용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적산가옥 소림별장의 사용허가를 받은 소사공소 신자들은 1946년 4월 5일 소림별장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소림별장에서 시작한 소사성당은 부천의 첫 번째 성당이고, 부천 성당역사의 시작이다. 소사성당의 초대 신부는 임세빈 신부였다. 소사성당이 첫 미사를 드린 그 해(1946년)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 되어 소사삼거리를 떠났다. 정지용은 소사삼거리에 사는 3년 동안 작품 활동은 하지 않아 절필을 한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신앙생활에 더욱 매진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모셔오고, 소사성당을 세우는데 있어서 정지용의 역할이 지대했다. 부천의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정지용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면 섭섭한 이유이다. 현재 소명사거리에 있는 소사성당(1960년 10월 20일)은 소림별장 자리에서 옮겨온 것으로 지금까지 부천 천주교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음은 정지용의 간절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시(詩)다.   또 하나 다른 태양   온 고을이 받들 만한장미 한 가지가 솟아난다 하기로그래도 나는 고하 아니하련다. 나는 나의 나이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웁다. 이제 태양을 금시 잃어버린다 하기로그래도 그리 놀라울 리 없다. 실상 나는 또 하나 다른 태양으로 살았다. 사랑을 위하여 입맛도 잃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설지라도 - 정지용 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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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9-03-28
  • 천년은행나무-너무 오래 살았나 - 소사본동 서울신학대학으로 올라가는 길에 천 년이 되었다는 늙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소사본동 서울신학대학으로 올라가는 길에 천 년이 되었다는 늙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늙은 은행나무에 잎이 파랗게 달려있을 때 보면 그나마 아쉬움이 덜하지만 가을 지나 잎을 모두 떨군 겨울에 보면 가슴 한 쪽을 도려낸 듯 마음이 짠해진다. 사람들의 욕심에 천 년의 세월동안 길게 뻗어나갔을 은행나무 가지들이 모두 잘린 채 겨우 몸통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년은행나무는 사람들에게 팔 다리가 잘린 늙은 몸통으로 자신이 살아온 천 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 은행나무는 천 년의 세월을 인정받아 1982년 경기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마을에서는 고사를 지내며 은행나무가 갖고 있는 천년의 경험과 지혜를 우리 주민들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란다. 천 년의 풍파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에게 이야기가 있으니 은행나무 뿌리가 심하게 노출되어 마을 사람들이 흙으로 덮어주자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은행나무 뿌리가 지상으로 노출되면 생육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주민들이 흙으로 덮어주었는데 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까? 은행나무가 주민들의 정성어린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뿌리가 지상으로 노출되는 것도 자연의 순리이니 그 이치를 따라 사는 게 행복이라는 무언의 암시는 아닐까? 은행나무가 견디어 온 천 년의 세월은 우리가 고려, 조선에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변신을 거듭해온 무궁한 시간이었다. 은행나무는 2억 년 전 지구상에 나타난 식물로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은행나무는 싹이 트고 20년 이상 지나야 열매를 맺으므로 손주를 볼 나이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하여 공손수(公孫樹)라 한다.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벌레가 없는데 방충작용을 하는 부틸산이 있기 때문이다. 잎에서 추출하는 플라보노이드게는 혈액순환을 돕는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인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가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전국적으로 19그루가 있고 옛날 중국에서 씨를 가지고 와 절 근처에 심으면서 우리나라에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는 과학의 발전으로 사랑도 못하게 되었다. 아니다. 과학을 탓할 게 아니다. 사람들의 편의주의를 탓할 일이다. 가을이면 구린내를 풍기는 은행이 열리는 암나무가 적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되었다. 유전자를 이용해 암수를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암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계속 가로수로 심데 앞으로 암나무는 빼고 심겠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기존의 암나무도 순차적으로 뽑겠다고 하니 사람들의 인권은 은행나무의 사랑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천년은행나무에게 앞으로의 천 년은 어떨까?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앞으로의 천년은행나무의 삶이 지금보다 좀 더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자연은 대립과 갈등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장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석이라는 목수가 사당의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보고 그냥 지나치자 제자가 보고는 물었다.“선생님, 제가 보기에 재목감으로 최고인데요.”“됐네, 하찮고 쓸모없는 나무야.” 목수가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낮에 보았던 사당의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그대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는가, 저 좋다는 과일나무들에 비기는가? 그런 나무들은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 살고 도중에 죽는 법이지.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쓸모없기를 바랐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완전히 그리 되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일세.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또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은데 어찌 그대는 상대방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가까운 쓸모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 운운한단 말인가?”     천년은행나무는 어떤 마음으로 긴 천 년의 세월을 살아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은행나무 주변을 둘러보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세종병원이고, 또 하나는 서울신학대학교이다. 세종병원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심장 전문병원으로 부천의 자랑이다. 심장병 하면 세종병원이라고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있을 정도로 특화된 병원이다.1911년 성서학원으로 개교한 서울신학대학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학교이다. 성결교는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게 하는 그리스도로 복음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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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9-02-13
  • 전문가가 필요한 도시재생, (부천시)도시재생과-전문가를 만들고 싶다면 어느 것은 된장처럼 오래 푹 묵혀야 할 필요가 있다.
    도시재생 전문가를 단시일 내에 양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의 사업을 계획단계에서부터 사업 완료까지, 그리고 이후의 관리까지 경험하게 하여 도시재생사업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도시재생사업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키고 업무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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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12-30
  • 정지용-부천에서의 3년은 너무 짧았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리야' 대한민국 사람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노래 ‘향수’(鄕愁)의 첫 구절이다. 향수는 월북 작가 정지용(1902-1950)을 작사가이자 시인 정지용으로 세상에 알린 노래이다. 그리고 향수는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함께 불러 대중가요 가수와 도도한 성악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킨 노래이다.    소사 삼거리 정지용 시인이 살턴 곳 그런 정지용이 부천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정지용 시인의 작가 연보를 보면 “1944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했다”라고 적혀있다. 그는 일제말기, 2차 세계대전말기 소개(疏開)령을 받고 소사리로 이사했다. 그는 소사리에 3년을 사는 동안 적산가옥인 소림별장(현 성가요양원 성당 자리)를 불하받아 소사성당을 개설하는 등 부천 기독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지용 시인의 소사리 활동이 알려진 것은 부천‘복사골문학회’의 구자룡이 ‘소사성당 반세기’를 발간하기 위하여 자료를 정리하던 중 시인의 활동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구자룡은 정지용 시인의 장남을 찾아 기록에 나온 주소지가 시인이 살던 곳이 맞는지 확인하였고 그 자리에 1993년 ‘복사골문학회’ 이름으로 정지용 시인이 살던 집터라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구자룡의 노력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에서 정지용 시인이 활동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정지용 시인은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였고 휘문고등학교와 일본 동지사 대학을 졸업하였다. 1922년 첫 시 ‘풍랑몽’을 썼고, 1926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비롯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 [문장]지의 추천위원이 되어 유명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을 등단시켰다. 부천시에서는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변영로, 정지용, 목일신 등 부천이 고향이거나 부천에서 활동한 작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특히 정지용시인은 소사본동에 정지용의 거리가 조성되어 소사본동 주민들과의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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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12-28
  • 서경열-동네를 위해서라면 땅인들 못 주리
      소사본동에는 여우고개 이야기, 천년 은행나무, 250년 대동산신제, 백성욱 독립운동가 및 교육자, 이제는 하나만 남은 우물 등 다양한 자랑거리가 있지만 그중 최고의 자랑거리는 ‘소새울 어울마당’이다. 이 소새울 어울마당은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부천시에 땅을 기부한 복지가의 애향심의 산물이다. 부천시에 동사무소가 입주할 땅을 내어놓은 서경열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 반드시 동사무소를 지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부천시에 땅을 내놓았고, 시는 그 약속을 지켜서 그가 기증한 땅에 동사무소를 지어서 화답했다. 그게 1975년 일로 1973년 부천시가 부천군에서 시(市)가 된지 2년만의 일이다. 서경열이 부천시에 동사무소를 건립할 땅을 기증함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당시 부천시의 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명색이 시(市)가 동사무소 하나 건립할 땅을 구입할 돈이 없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의 형편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70년대의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리면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는 소사본동의 자랑인 서경열을 얻었다는 것이다. 마을을 위하여 자신의 땅을 무상으로 기부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부천시에 땅을 기부하면서 우리 마을에 동사무소를 지어야 한다는 조건 하나만 걸었다고 한다. 서경열의 장남 서정현의 증언에 의하면 아들이 “왜 땅을 내 놓느냐” 물으니 서경열은 “우리 마을에 동사무소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가 발전한다” 고 했다. 그의 애향심 덕에 소사삼거리에 자리해야 할 동사무소가 당시로서는 외진 소사본동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소새울 어울마당’으로 이용하는 공간이 서경열이 기증한 땅에 건립한 동사무소다. 소새울 어울마당의 옛 이름은 ‘서경열 공부방’이었다. 소새울 어울마당은 서경열의 마음이 구현된 곳이다. 마을이 발전하고, 더불어 주민들이 행복해지를 바라는 게 서경열의 마음이다. 서경열이 마을을 위해 땅을 기증한 숭고한 마음이 이어져 또 다른 서경열이 소사본동에 줄이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서경열의 마음-소새울 어울마당의 기부자(이 글은 아키비스트 활동으로 서경열의 장남 서정현과 인터뷰한 것이다) 소사본동에는 주민들의 공부방이자 쉼터인 ‘소새울 어울마당’이 있다. 부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경열(1915-1998)이 1975년 부천시에 기부한 건물이다. 서경열의 장남 서정현에게 ‘소새울 어울마당’ 기부의 사연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선구자(先驅者)였다. 1973년 시(市)로 승격한 부천시는 재정적으로 열악했다. 소사본동에 동사무소를 신축하고 개설해야 했지만 돈이 없는 시는 동사무소 터를 누군가 기부해주기를 바랐다. 땅을 기부할만한 사람들이 나몰라 할 때 서경열이 나섰다. 아들 서정현의 말에 의하면 소사삼거리와 떨어져서 부천시가 생각하는 동사무소 자리로는 마땅치 않았지만 서경열이 ‘소새울 어울마당’ 자리에 동사무소가 들어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땅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때 서경열은 “부자도 아닌데 왜 땅을 기부 하냐는 자녀들에게 ‘내가 벌어 마련한 땅 내 마음대로 한다’ 하면서 ‘우리 마을에 동사무소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를 발전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냐’고” 했다. 1975년 서경열의 혜안과 결단이 외진 마을을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지로 만들었다. 서경열이 기부한 땅은 ‘소사본동사무소’로 마을 행정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에는 ‘서경열 공부방’으로, 다시 ‘소새울 어울마당’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주민과 함께 해왔다. 서정현은 바람이 있다면 ‘소새울 어울마당’이 크게 확대되어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발전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정현은 “앞으로는 복지 예술의 시대고, 이곳 ‘소새울 어울마당’이 소사본동 문화의 마당(場)이 되면 좋겠는데 (부천시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서정현에게 “‘소새울 어울마당’이 아니라 ‘서경열 어울마당’이나 ‘서경열 소새울 어울마당’으로 이름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빠진 게 서운하지 않냐”고 묻자. 서정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님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동사무소를 유치하려 하셨지 이름을 남기려 하신 건 아니니 아들인 내가 이름이 빠졌다고 해서 불만이 있거나 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소새울 어울마당’이 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경열의 장남인 서정현과 인터뷰를 마치고 ‘소새울 어울마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둠 속에서 서경열이 ‘여러분이 우리 동네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면 고맙겠네’ 하면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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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12-13
  • 여우고개-소사삼거리에서 시흥시 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여우 고개 소사본동에서 시흥 방향의 오르막 길.   소사본동에는 여우고개(如牛峴)가 있다. 소사삼거리에서 시흥시 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여우고개는 성주산에 있는데 성주산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창씨개명을 한 것처럼 산의 이름을 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성주산의 진짜 옛 이름은 대산(大山)이었고,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대산을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렀다.   여우고개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여우고개의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소(牛)라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여우(狐)라는 이야기이다. 여우고개의 여우는 한글로 보면 여우가 맞고, 여우고개의 여우를 한자로 보면 소(牛)가 맞다.   우리 선조들이 여우고개의 한자를 여우를 뜻하는 여우호(狐)로 쓰지 않고 소 같은 의미의 여우(如牛)로 쓴 것은 여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 그랬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풍수지리식 이름인 와우산에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여우고개(如牛峴)라 하지 않았나 싶다.  고개마루- 시흥시에서 소사본동 방향. 사진 뒤쪽의 마을이 소새울이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여우고개는 소가 아니라 여우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네 원로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성주산에 여우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본인들도 어린 시절 여우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았고, 언젠가는 경복궁에 호랑이가 들어온 적도 있다고 하니 당시 마을 주변에 여우가 살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럼 여우고개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소(牛)일까? 여우(狐)일까?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양경직 수석연구위원은 여우고개의 동물이 여우가 맞다 면 문헌에 기록이 남기 마련인데 여우라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며 역사란 문헌 등의 고증에 철저해야 하므로 여우고개의 동물은 여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소가 맞다 고 했다. 여우고개의 안내판에 한자를 병기하면 여우고개의 동물이 여우가 아니라 소라는 사실을 모두 알 수 있는 간단한 일인데 하지 않았으니 직무유기가 아니냐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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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22
  • 소사삼거리-왁자지껄 시끄러워라
    부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소사복숭아와 소사삼거리이다. 지금은 부천하면 스스럼없이 부천이지만 예전에는 부천은 곧 소사이고, 소사는 곧 소사삼거리를 의미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상당수의 대한민국 어르신들은 부천에 산다고 하면 “아! 복숭아 많이 나는 소사” 라고 한다. 소사삼거리는 경인간 도로 오류동에서 오는 길과 신천리 뱀내장에서 여우고개를 넘어오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두 길이 만나는 소사삼거리에서 심곡고가 사이가 부천군 소사읍의 중심이었다. 이외의 지역은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 듬성듬성 마을이 있었다. 소사삼거리는 부천군 경제의 중심지였다. 바로 옆 여우고개로 가는 길 입구 아랫소사에는 우시장(지금의 대보시장)이 있었고,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에는 자유시장이 있고, 자유시장 길 건너에는 청과물시장인 깡시장이 있었다. 원미동 원종동을 가려면 소명지하차도 자리에 있던 철도 건널목을 건너야 했다. 여름이면 복숭아와 포도를 파는 노점상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울이나 인천 등 근교에 사는 시민들이 소사삼거리로 소풍삼아 복숭아를 사먹으러 왔다. 소사삼거리는 사람들이 넘치는 낭만의 거리였다. 그 거리에 시인 정지용이 살았다. 시인이 소사삼거리에 살아 얼핏 이해가 안 될 것 같지만 시인이 어떤 사람인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가. 복숭아꽃이 피고 복숭아 향이 천지를 뒤덮고 청춘남녀가 밀려드는 소사삼거리에 시인이 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외갓집이 부평의 일신동이고, 할머니의 고향이 부천군 원종동이고, 부천시 광명시 시흥시 세 지역의 경계가 되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천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나는 연분홍 복숭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던 소사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소사역 철도 건널목을 건너 원종동 멧마루로 할머니 친정을 가던 일이 엊그제 같다.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는 곳이 되었지만 소사삼거리는 부천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부천의 관문이었다. 옛 소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소사삼거리는 여전히 정이 넘치고 흥이 넘치는 곳이다. 이제는 옛 기억 속 상상의 소사삼거리가 아닌 거친 숨소리 들리는 판타지아 소사삼거리, 판타지아 부천을 만들어야 한다.       
    • 테마기획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09-09
  • 소사천-친구야 송사리 잡으러 가자
             
    • 테마기획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08-19
  • 소사본동의 지형-소사본동 생김새
     소사본동을 소사본1동과 소사본3동으로 나눌 때 두 동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소사본1동은 마을의 옛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오래된 동네 같고, 소사본3동은 옛 흔적이 거의 없는 새롭게 조성된 동네 같다. 정확한 지적이다. 소사본1동은 여우고개 길이 지나가는 곳으로 아랫소사 윗소사로 불리고, 특히 아랫소사는 소사삼거리와 연결되어 오래전부터 부천의 중심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소사4리 영신마을로 불린 소사본3동은 마을이 형성되지 못하고 논이나 밭이었다. 그럼 소사본동에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소사본동에 나타나는 소사본1동과 소사본3동의 확연한 차이는 지형을 꼼꼼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소사본동은 소사역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는 할미산, 오른쪽에는 성주산, 전방 가운데에는 봉배산이 있다. 할미산 성주산 봉배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가운데에 소사본동이 자리한다. 여기에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지만 봉배산 봉배약수터에서 발원하는 소사천이 소사본동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흘러간다. 다시 정리하면 소사본동은 삼면이 산이고, 그 가운데는 냇가가 있다. 이 지형의 특징은 눈으로도 쉽게 확인되는데 소사본동의 양쪽 어디서든 중심인 소사초등학교 쪽을 바라보면 성주산 할미산 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마도 소사본동의 어느 쪽에서든 가운데를 향하여 공을 굴린다면 멈추지 않고 굴러 내려갈 것이다. 그것은 2000년 배수 시설이 정비되기 전에 비가 조금만 와도 소사본동이 침수되는 원인이었다. 지금은 배수가 잘되어 볼 수 없지만 소사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낮은 지대에 사는 분들은 집집마다 모래주머니가 준비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는 분들은 양수기를 구입해서 연례행사인 물난리를 대비했다.  소사본동이 물난리에서 벗어난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저지대가 물난리에서 벗어난 것은 부자가 되면서 가능해졌다. 대한민국의 경제에 여유가 없을 때는 연례행사로 물난리가 발생하는 것을 알아도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다. 급하게 먼저 돈을 써야할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툭하면 물이 차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우니 이곳이 소사본3동 지역이다. 당연히 지대가 높고 산을 등지고 있는 소사본1동에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고, 세월의 흔적을 곳곳에 남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지형이 마을의 입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소사본동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듯 소사본1동과 소사본3동의 차이는 지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둥그스름한 반구 안에 소사본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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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08-04
  • 소사본동-우리 동네 어떻게 생겼지
    부천은 소사구 원미구 오정구 세 개의 구(區)에 36개 동(洞)으로 이루어져있었다. 2016년 구(區)를 폐지하고 현재는 행정복지센터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36개 동(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헌에서 부천 소사본동을 알아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 부평도호부 옥산면 소사리로 부천의 소사가 등장한다. 그러다 부천이란 지명은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나타나고 부천군 옥산면 소사리가 되었다. 부천군의 계양면, 오정면이 김포시에 편입되고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된 채 소사읍이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사실 1970년에서 1980년대까지 부천이란 말보다는 소사란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지금의 부천역은 전에는 역명이 소사역이었고, 부천군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부천역으로 바뀌었다. 지금 있는 소사역은 별개의 이름이다. 부천시는 70년, 80년대까지 공업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부천시의 논과 밭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고, 공장이 이전하면 그 자리에 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렇게 부천시에 대단위 베드타운이 형성되면서 생산하는 도시에서 소비하는 도시로 성격이 변하였다. 부천의 경제적인 활력이 급격히 떨어진 이유이다. 도시의 발전과 물가 등 공장이 이전할 수밖에 없는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공장을 떠나보낸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예전의 재정이 튼튼한 도시 부천의 이미지는 성격이 변하면서 전설이 되고 말았다. 소사본동에도 신한주철 등 크고 작은 공장이 많았다.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역의 주민들이었고, 월급날이면 삼삼오오 모여 공장 근처의 식당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그간의 회포를 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소사본동에서 볼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부천시는 문화도시를 표명하고 있지만 시민에게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부천의 문화정책과 시민이 밀착하지 못하고 서로 겉돈다고 할까. 시민이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는 것은 삶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부천이 경제적 활력을 잃은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소사본동은 문화도시 부천에서 문화의 불모지이다. 소사본동에 어떻게 하면 문화의 향기가 진동하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해야 한다.  
    • 테마기획
    •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2018-07-28
  • 소새울 연가
      성주산 할미산 사이 넓디넓은 벌 터에 옹기종기 우리 동네 내 고향 소새울   여우고개 복사꽃 피는 웃음소리 가득한 동네 행복이 어딘지 묻지 마라 내 고향 소새울   옹알옹알 소사천 물소리 송사리 미꾸라지 잡던 동무 얼굴 보고 싶어라 내 고향 소새울   소사삼거리 미래로 가는 길 꿈은 복숭아처럼 영글어 세계로 달려간 친구들 내 고향 소새울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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