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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말
    1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아침에 단잠을 깨우듯눈부셔 못견딘사랑 하나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옛 동양의 조각달과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사랑 하나   2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그 벌이시키는 대로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한평생 다 저물어하직 삼아 만났더니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진홍인 노을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10-03
  • 책과 밥
    어렸을 적 밥보다 책이 좋았다.   혀끝의 단맛 쓴맛 몇 갑절   슬픈 사람 귀한 사람 진 면목.   혼자도 안 외롭고 안 무섭더니   흐린 정신 침침한 눈에 허기증   밥통은 의연하게 곁을 지켰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9-26
  • 시집 속의 소녀
    꽃이 지는 저녁 까닭모를 슬픔을 노을에 적었네. 파릇파릇 움트는 대지 목마름위에  봄비로 작은 동그라미 무수히 내리면  두근두근하는 가슴에 적었네. 팔 벌린 가로수 길 걸어 산에 오르며 상긋한 바람과 확 트인 들판의  벅찬 감격을 나무에 적었지. 낙엽 밟는 동무들 메아리   황금빛 논두렁 사이로 능금이 익어가고 첫서리 내린 장독대 옆의 국화꽃 줄 공책에 써 서랍에 두었네. 하얗게 덮인 눈 위에는 초롱초롱 눈망울을 그렸지.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9-03
  • 초롱꽃
      초롱꽃 등 앞세우고 님 마중 가자 봄 꽃 떠난 빈 가슴에 그리움 하나 행여 오실 님을 위해 꽃 초롱 불 밝히우고 앞장서라 앞장서라 님 마중 가자 초롱꽃 등 앞세우고 님마중 가자.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8-21
  • 바닷가에 대하여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의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8-10
  • 담배는 연기가 반드시 필요조건이다
    얼룩이 졌다 수많은 네가 내 안에서 피고 져갔다 방향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네 체향이 나를 지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마 몸 없는 몸 당연히 사라져야 하는데 공중의 구석이나마 차지하고 싶었나 그보다 시급한 일은 내가 너를 지우지 못한 일이다 허공에 자국을 남길 수 있는 네 존재 속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너를 끊어내는 스트레스가 내 몸이 병 들 거라는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이다 맘껏 한 모금의 너를 찾아 추억과 기억의 토사물 속에서 같이 시름겹고 슬퍼하기로 한다 허공에 흰 때 한 점 남기는 일 그러다 미련 없이 사라져 가는 일 떠날 때 떠나줄 아는 네게서 그녀가 홀가분하다 사내는 한숨 대신 널 뱉어내는 것이라고 먼 길 떠난 아버지가 일러주었다 유령이 되어가는 삶 옆집의 그녀가, 고시원의 그 남자가, 버림받은 한 아이가, 독거노인이 부재중임을 저녁 뉴스로 인사할 때 나 역시 흔적 없는 얼룩이었다 누군가 기억 속에 나는 얼마만큼 깊은 무게를 가졌을까 너보다 작고 가벼운 내가 문득, 거기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연기(緣起)다.    -부천문학 70호-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8-06
  • 숯가마
      세파에 찌든 상처 정화시키는 원적외선 빛 건강한 도전에 이슬의 아우성   땀방울 방울방울 푸른 불빛에 속세의 때가 녹아서 흐르는 번뇌의 아우성   숯가마 타는 불빛 아늑한 토굴 떠도는 정담(情談) 추억의 어울림    -부천문학 70호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7-27
  • (구) 심곡천
           도시의 빌딩 숲 자연 숲이 아닌 인공 숲이라 꽃이 없다, 나무가 없다 바람도 떠나고 새들도 같이 떠난 황량한 샤갈의 집   흰 숲들은 인적이 뜸한 밤이면 모두 괴물이 되어 나와 천변에 일제히 바지를 걷어 내리고 용변을 짓깔려댔고 흰 숲의 오만을 부추겼던 본부도 부화로 죽어간 수초들의 시신 횡혈식 석관에 떼로 묻어 오랜 세월 위선의 구린 물 발밑으로 흘렸다   반세기 동안 재생의 푸른 깃발을 들고 노상에 배 째라 드러누웠던 경이, 강성 녹색 항공 군단의 위력으로 어렵게 복원된 심곡 천 판타스틱 그 길에 바람과 새들 다시 들어와 오래 살 수 있도록 셋방을 많이 늘려 놓아야 한다.       시집 -불끈불끈      심곡천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7-14
  • 물 안 개
    저 강에 한가득 넘실대는 물안개 밤새도록 군불을 지피웠나 가마솥 솥뚜껑에 김이 울듯 강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을 한없이 뿜어 댄다.     말없이 흐르는 강바닥에 귀를 대고 그들만의 밀어를 엿 듣는다 옆집총각 이웃마을 홍씨여식 혼사 이야기 삼월이 득남 소식 노동할매 어허딸랑 소천 이야기 전설의 이야기     희미하게 다가오던 사람들이 오며가며 사라진다. 사방천지에 혼자 남는다. 간밤에 시름앓던 서러운 눈물을 운무에 훌 훌 털고 씻자      저기 저곳 물안개를 건너면 화사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어머님 포근한 품 속 있겠지 맑은 햇살 꽃나비 노니는 봄날이 있겠지 나룻배 뱃사공아 건너자구나   시집 - 2번 출구의 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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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시산책
    2019-07-11
  • 깃발
    아버지는 깃발을 숨기고 사셨다 내가 그 깃발을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해방 전부터 시작된 감옥살이에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석방 노력과 설득에 겨우 마음을 돌려 농사를 짓겠다고 나선 지 한 해도 못 되어 육이오가 일어났다 ―너 재집이 하고 명룡이네 좀 다녀 오거라 인민군이 어디쯤 내려왔는지 아직 전쟁바람도 안 불고 태극기가 우리나라 깃발이던 어느 날 이웃집 재집이와 나는 집 모퉁이 콩깍지동 속에서 꺼내주는 종이 깃발을 품 속에 안고 돌아왔다 운동회 날 하늘을 덮던 만국기들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그 깃발 아버지는 언제부터 무엇에 쓰시려고 숨겨두고 계셨던 것일까 그 깃발의 세상이 오자 아버지는 온양으로 떠나셨고 오늘토록 돌아오시지 않는다어머니와 우리 세 남매의 행복을 앗아간 깃발 하나 오래도록 내 안에서 입 다문 슬픔으로 펄럭이고. -『시와 사람』(2004. 봄)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6-13
  • 설레이는 아침과 낙조
      어둠의 동면을 깨고 움트는 새벽 새도록 밤새도록 별빛과 소곤대며 하얗게 지새운 뜰 앞의 라일락 향기에 설레이는 아침을 부여받는다   아침 창가를 두드리는 덩굴장미 꽃잎 이슬 맺힌 붉은 원색에 성주산 넘어온 새벽녘 서광이 영롱한 아름다움이여   불혹을 지나 지천명에 다다른 녹슨 구리거울에 자화상을 그리며 고치고 삼시 세 때를 스케치한다   이 땅에 의무에 사는 가장들이여 사랑이 잉태한 혈육에 천근만근 무쇠의 사슬에 길들여진 숙명이 언제 다할까   깃털처럼 가벼이 낙조를 맞이하고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는 평범한 일상이 좋다     <이날철 시집-2번 출구의 빗줄기>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6-03
  • 붓꽃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5-27
  •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赫赫)한 업적(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行路)와 비슷한 회전(廻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人生)이여 재앙(災殃)과 불행(不幸)과 격투(激鬪)와 청춘(靑春)과 천만인(千萬人)의 생활(生活)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5-01
  • 할미꽃
    손자 손녀너무 많이 사랑하다허리가 많이 굽은 우리 할머니할머니 무덤 가에봄마다 한 송이할미꽃 피어온 종일 연도를바치고 있네하늘 한 번 보지 않고자주빛 옷고름으로눈물 닦으며지울 수 없는 슬픔을땅 깊이 묻으며생전의 우리 할머니 처럼오래 오래혼자서 기도 하고 싶어혼자서 피었다혼자서 사라지네너무 많이 사랑해서너무 많이 외로운한숨 같은 할미꽃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4-17
  • 아, 歲月號!
      2014年 4月16日 아침 船主의 殘酷한 채찍에 이미 病든 歲月號는 이날도 過積의 짐 무겁게 싣고 달리다 珍島 앞바다 猛獸의 날카로운 이빨에 목줄을 물리고 쓰러져 水葬되고 말았다. 아, 밤을 새며 기다리던 三多島 消息!   지연이 아빠의 부푼 歸農의 꿈도, 檀園고 學生들의 修學旅行의 追憶도, 龍遊島 同窓生들의 끈끈한 友情도, 다 한 瞬間에 앗아 가버린 良心을 빼 내고 그 자리에 貨物을 가득 채워 실었던 人間을 抛棄한 몇몇 사람들이 저지른 도저히 容恕받지 못 할 犯罪! 그 慘事는 分明 人災였다.   영문도 모른 채 船室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버린 可憐한 善民들! 學生證 꼭 움켜쥐고 求命조끼 끈 단단히 묶고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어머님 恩惠 목 놓아 부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무섭고 險한 그 길 두렵게 간 그 들의 넋을 누가, 어떻게 慰勞해 줄까?   犯罪者 處罰하고 大統領 고개 숙여 謝過하고 全國民들 哀悼 속에, 그 들 떠나보내면 하늘나라 가서 다 天使 되고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 벌어지지 않을까?    無心한 비마저 핏물 되어 흐르는 彭木港 全國愁心 밀물에 쓸려 와 船着場에 가득 쌓이고 高熱 치솟는 珍島 室內 體育館 다섯 살 舞姬의 天眞한 훌라우프 公演이 喪心한 弔客의 애肝腸을 다 끊는구나!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4-02
  • 첫 줄이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첫 줄이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세상 안쪽이 다 만져지는 시를 쓰고 싶다  가보지 않은 마을에도 금잔화는 피고안 보이는 길 끝에도 어제까지 없던 집이 새로 지어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의 말이지 풀들의 말이 아니다말없이도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미리 가난을 준비해 둔 풀잎이 저리도 행복해 보이는 것은그들이 불행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열매 떨어지는 소리는어떤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다그 소리에 지구가 정숙해진다  계원필경집 첫 줄은 무슨 말로 시작되는가화엄경소 제사십회향품 첫 글자는 무슨 글자인가생각의 강물이 출렁거리는 동안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어제 없던 이끼가 하나 더 낀다  첫 줄이 아름다운 시를 써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봄은 한 해의 첫 행, 아침은 하루의 첫 줄이라고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다고난생 처음 시를 읽는 사람이 세상에 시라는 것이 있음을 처음 안 사람그 한 사람만이 읽어도 좋을 시를  나는 생애에 꼭 한 편만이라도첫 줄이 아름다운 말로 쓰고 싶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3-28
  • 소쩍새처럼
      얼굴도 본 적 없이 선홍빛 댕기 풀어 지아비를 모시고 울안에서 한생을 보낸 어머니의 마음이 진달래 빛깔일거라고 생각했다 붉게 물들지도 못하고 가녀리고 애슬프게 비껴 핀 산자락이 얼마나 애잔한지 소쩍새처럼 노래만 숲 밖으로 내보낸 채 구름 닮은 날개   곱게 담아주고 싶었다.   사진/최선경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3-22
  •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이른 새벽 도도새가 울고 바람은 나무쪽으로 휘어진다 숲에서는 나뭇잎마다 새의 세계가 있다 세계는 언제나 파괴 뒤에 오는 것 너도 알 것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남은 자의 고통은 자란다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렴 일과 일에 걸림돌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는 것이라고 저 나무들도 잎잎이 나부낀다 삶이 암중모색이다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아도 세계는 그림자를 묻어버린다 일어서렴 멀리 보는 자는 스스로를 희생시켜 미래를 키우는 법이다 새의 칼깃 뒤에도 나는 자의 피가 묻어 있다 그러니 너는 네 하루를 다시 써라 쓰는 자의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니 극복 못할 일이 어디에 있을라고 극복에도 바람은 있다 뛰어넘으려는 것이 너의 아픈 극복일 것이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3-06
  • 도시 풍경
    한겨울의 강물처럼 시린 얼굴들이 도심을 흐르고 있다 물고기는 무리지어 이웃을 삼고 새들은 떼를 지어 길을 찾는데 북적대며 걷는 저들의 표정엔 말 이음표 하나 없고 휘청 걸음에 말줄임표만 실려 있다. 카페의 유리창 밖 바람이 바람에 실려 날고 비가 비를 맞고 있는 풍경들 사이로 조울증 걸린 모습들이 내일을 잃어버린 듯 외롭게 외로움을 타고 있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어서이다. 그곳이 사막이다. 안개는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고 눈은 눈 위에 쌓이듯 언어는 언어끼리 소통해야 하는데 회색빛 도심 속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찌, 남의 일이랴.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3-03
  • 꽃과 시
    시들이 세든 자리에 꽃들도 세들어 있었다   꽃이 향긋한 시집을 짓는 일도 기쁨 담아둘 튼튼한 울타리를 쌓는 일도 한 생애 머리가 희끗하게 열중하고 계곡의 숲 같은 고요와 이슬 같은 맑은 사랑을 찾으려 분주히 아침을 맞는다   어김없이 꽃들은 피어 시절을 살고 어김없이 나도 시를 쓰며 하루를 살고 나무사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꿈을 되새긴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2-28
  • 첫매화
      밤에는 부엉이 우는 소리 산 가득 하더니   아침에는 딱따구리가 요란하게 나무 둥치를 쪼아댑니다   숲의 새들이 점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지리산에 사는 후배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섬진강 하류를 따라 곡성 쪽으로 내려가다가 첫매화를 보고는  생각이 나서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편지와 함께 보낸 사진에는 열일곱 시골 소녀처럼   보얀 매화꽃이 다소곳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채 맺혀 있는 꽃봉오리들은 아기를 가진   여자의 젖꼭지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배의 편지에 의하면 이 매화나무는  큰 상처를 입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굵은 가지가 여러 군데나 잘려나간 채 덜덜 떨며   겨울을 보낸 나무라 했습니다     상처받은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후배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상처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태풍에 크게 꺾인 경상도 벚나무들이   때 아닌 가을에 우르르  꽃을 피우더니   섬진강 매화나무들도 중상을 입은 나무들이   한 열흘씩 먼저 꽃을 피웁니다     전쟁의 폐허 뒤에 집집마다 힘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낳던 때처럼   그렇게 매화는 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인 저꽃이 아프게 아름답고 상처가 되었던   세상의 모든 첫사랑이 애틋하게 그리운 아침   꽃 한 송이 처절하게 피는 걸 바라봅니다 ....   문득 꽃 보러 오시길 바랍니다."     저는 "상처 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하는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산줄기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꽃 한 송이도 상처를 딛고 피고, 상처 속에 핀 꽃들로 하여   봄이 오는 지리산을 생각했습니다     설해를 입은 우리 집 마당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솔방울을 매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람도 쇠약해질 때 사랑의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존 본능이   그렇게 몸에 작용을 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이 매화꽃에는 본능을 넘어서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저는 답장을 쓰며 후배에게 편지를 옮겨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상처 입은 나무에서 첫매화 피는 걸 바라보며 보낸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이 저에게는 시처럼 다가왔습니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2-25
  • 눈 내리는 바닷가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부르고 싶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가슴에 깊이 묻어둔 어떤 슬픔 하나 아직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차가운 눈을 맞고 바다는 더욱 고요하고 따뜻해졌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웃음을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눈물을 피우며 송이송이 바다에서 꽃이 되는 눈 어느 날 문득 흰 옷 입은 천사의 노래를 듣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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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시산책
    2019-02-13
  • 별보기
    하늘에 떠 있을 때 보다떨어진 별이 더 아름답다.가령, 이름 없는 풀잎의 이슬에 내려외로움으로 꿋꿋한 풀대그 속을 흘러 다니는 미세한슬픔이 입자를 마시고 있을 때 혹은, 궁벽한 시골의 샘저 깊고 아득한 곳어둠이 지쳐 통증으로 솟아나는땅 속 그 애달픔에 가라앉아 있을 때별은 더욱 아름답다. 떨어지는 모든 것이다 절망일 수는 없다.가장 낮게 낮게 내려오히려 더 빛나는 별을 본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2-02
  • 1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1-30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1-18
  • 겨울행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단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9-01-05
  • 시월의 노래
    추운 겨울이면 생각나는 기억 하나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31
  • 나의 당신
    내자아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 내심연이 깨어나고 있다내생명속의 그대가 깨어나고 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깨어나고 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사랑이가슴에서 오늘의 의미를외치는 소리그대의 숨결 소리 들렸다. -펄벅 기념관에서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29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28
  • 폭설(暴雪)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24
  •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기침을 하자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눈은 살아있다죽음을 잊어버린 靈魂과 肉體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기침을 하자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17
  •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充電)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사진/홍요셉  
    • 예술/창작
    • 명시산책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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