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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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소설 - 매듭 /3회
    "객사는 집으로 들이는 게 아니다." 모두들 말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아내. 누구도 나를 어길 순 없었습니다. 난 영안실의 그 후덥지근하고 향내가 너무 강하고 탄식과 회한과 눈물이 범벅인 낯선 곳에 당신을 뉘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당신의 이 집에서 편히 있다가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때 그 노파에게서 팔만 원에 바가지 써서 산 병풍 뒤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도 역시 내 인생에 바가지를 씌웠지만 나는 정말 지금까지 그것이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쓴 바가지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귀여운 것이기까지 합니다. 당신을 변명하기 위한 귀여운 선택이었다고 나는 진작에 너그럽게 이해했으니까요. 당신과 내가 결혼하게 된 것은 당신이 내가 나가는 장애인 복지관에 봉사 활동을 오면서부터 입니다. 나는 중증 장애 1급으로 허리 밑으로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때로는 이런 내 몸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몸의 밑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 살아가는 게 말입니다. 나무를 보면 뿌리 부분인 밑동이 죽으면 위도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사니 신기하지요. 사람의 뿌리는 밑이 아니고 가슴 한 가운데, 그리고 정수리 속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바지 속에 감추어진 나의 다리는 오그라져서 펴지지도 않지만 이라크에서 발견 된 미라의 다리 같습니다. 사실 미라나 마찬가지지요. 그 때 우리 복지관에서는 매듭 전시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다른 장애우 들도 손이 민감하고 섬세해서 우리가 만드는 매듭은 실상 잘 팔려 나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 주기도 했지요. 특히나 내가 만든 매듭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난 주로 노리개를 만들었는데 가끔 티브에서 노리개를 한복 앞섶 옷고름에 단 여인들을 보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선 여인들이 멋을 알았습니다. 그곳에 노리개를 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살짝 끌면서 여인의 품위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노리개는 부귀다남. 불로장생. 백사여의(百事如意)등의 그 시대 여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호화로운 장식물입니다. "사람은 항상 밑을 보고 살아야 한다. 위를 보고 살면 목이 아프기도 하지만 불행해 진다. 위를 보고 살다 보면 매일 한탄 할 일만 생기지." 아버지는 나더러 밑을 보고 살아야 한다고 늘 말했습니다.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밑을 보고 사니 바가지 쓴 내 인생이 뭐 그렇게 가슴을 칠 일은 아니더라구요. 두 손이 없어서 발가락 사이에 칫솔을 끼워 이도 닦고 발가락 사이에 마스카라를 끼워 눈썹을 올리고 발가락 사이에 루즈를 끼워 입술을 그리고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위안을 삼았으니까요. 아마 내가 위를 쳐다 본 것은 당신이 유일한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날은 내가 당번이었습니다. 전시장을 지키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거든요. 당신은 복지관 수영장에서 봉사 활동을 끝내고 돌아가며 우리 전시실에 들렀고 전시되어 있는 노리개 중 내가 만든 소삼작 노리개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아름답네요." 당신은 고개를 소삼작 노리개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지요. 난 괜히 볼이 빨개져서 당황스러워졌습니다. "이건 팔기도 하나요." "네." "아. 여기 가격표가 있네요. 십오 만원이면 비싼 편이네요." "그게 은과 호박에다 매듭을 한 거라....." 당신은 지갑을 꺼내더군요. 사실 소삼작 노리개를 출품하면서 팔릴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내가 사겠습니다." 당신은 반 듯 하게 생긴 얼굴이었어요. 그러니까 미남이라는 얘기입니다. 나이는 서른 다섯쯤 되었겠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 딱 맞았더라구요. 나보다 열 살이 위였지요. "지금은 가져갈 수 없고 전시가 끝나면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예약을 하시면 예약증을 써 드릴 테니 이따 여섯 시 이후에 오시면 될 거예요." "그런데 이걸 만드신 분은 누구예요? 김찬휘 작이라..... 그 분도 그 시간에 오면 뵐 수 있을까요?" 난 수줍어서 나라고 대답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부끄럽더라구요. 그래서 그 시간에 오면 볼 수 있다고 했지요. 당신은 약속대로 여섯 시에 왔고 소삼작을 가져가며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노리개를 만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난 그냥 고개를 숙이고 배시시 웃기만 했습니다. "솜씨가 좋으네요. 그럼 저쪽 작업장에서 주로 만드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소삼작 노리개에 대해 나는 당신에게 설명해 주었지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 노리개 중 소삼작은 소녀들이 하는 것으로 분홍. 연두. 노랑으로 그 술을 달지요. 소녀 시절이란 인생의 봄 아닌가요. 분홍. 연두. 노랑은 모두 봄의 빛깔입니다. 노리개는 띠돈. 끈목. 패물. 매듭. 술 다섯 가지로 이루어지지요. 띠돈은 가장 위에 있는 고리로 노리개를 고름에 걸게 만든 것인데 주로 금. 은. 백옥. 비취옥. 금패. 산호등이 쓰이지요. 내가 출품한 소삼작엔 나비형의 은을 사용했습니다. 끈목은 동다회를 주로 쓰는데 띠돈과 패물. 술을 연결하며 매듭을 맺는 것입니다. 난 국화매듭으로 맺고 패물은 나비 모양의 호박을 사용했습니다. 난 소삼작을 만들며 꿈에 내가 한복으로 한껏 성장한 후 이걸 옷고름에 달고 날았다는 이야길 당신에게 했지요. 처음 본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런 이야길 하는 게 어렵지 않더군요. 날았다는 내 이야길 들은 당신은 소삼작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요. 그리고 당신은 내 흰색 티셔츠 위에 그 소삼작을 달아 주었지요. "봄이네요." 당신은 복지관 뜰에 핀 몽올몽올한 복숭아꽃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어요. 어느덧 저녁이었어요. 내 가슴 봉긋한 곳에 매달린 소삼작은 내가 살짝만 움직여도 파르라니 떨며 분홍. 연두. 노랑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 일주일 후에 계속 -    이준옥 :소설가. 제1회 전태일 문학상 소설 당선. 한국작가회의회원. 복사골문학회 주부토 소설동인. 아름다운 지구에 여행 온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지구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음.
    • 예술/창작
    • 웹소설
    2021-10-17
  • 웹소설 - 매듭 /2회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나왔습니다. 날이 바뀌기도 한 시각이었지만 아마 수를 놓느라 얼굴을 한참 동안 숙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나 김 기사 여." "예?" "아 김 기사 란 말이시. 신일 교통 김 기사. 철구 애비 말 여." "아,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시간에." "놀라지 말드라고. 그랑께 그게 뭐시냐 하믄 말 여. 아. 씨팔. 좆 같이 왜 나한테 이런 즌화를 하라고 시키고 지랄들 여. 즈그 가 못하는 거 나는 뭐 별 달른 가. 좆같은 인생이랑께 암튼." 김 기사는 나한테 전화를 해서 울음기 묻은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데 가슴이 바늘 끝으로 찌르는 것처럼 짜르르해 지더라구요. 그런데 이상하게 머리는 차가워지는 느낌이었어요. 아마 당신도 알 거예요. 그 기분. 당신이 동료가 잘못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의 그 표정과 말투를 기억하니까요. 당신은 새벽에 동료가 잘못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기를 냅다 던지며 이렇게 나지막하게 외쳤으니까요. "아. 씨발. 정말 엿 같은 인생이야." 난 손가락에 똥그랗게 올라오는 핏방울을 바라보았지요. 그건 꼭 우리 엄마 손가락에 끼어있는 산호 반지 알 같더라구요. 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피를 빨며 물었지요. "김 기사님. 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요? 그렇지요?" "여그 인천 응급 센터 서해 병원 응급실이여. 회사 택시가 실으러 갈테니께 그거 타고 오더라고. 아. 정말 인생이 뭐 이렇게 좆같으냐. 씨브랄 거." 김 기사는 그러더니 더 뭐랄 것도 없이 전화를 탁 끓어 버렸고 전화기에서는 뚜뚜뚜 하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이렇게 들리더군요.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곧 이어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내가 휠체어를 밀어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 그들은 나의 휠체어를 날름 들어 엘리베이터에 실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1층에 도착하자 그들은 또 나를 달랑 들어 신일 교통이라는 빨간 글씨가 차체 옆면에 쓰인 택시에 나를 구겨 넣듯 넣었습니다. "너무 놀라지는 마시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세요." 이미 나는 놀랐건만 그들은 나에게 너무 놀라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럴 때 말의 모호함이라니. 차는 새벽 거리를 쌩하니 달려 서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큰 응급 센터가 있다는 것이 내 기를 죽였습니다. 세상엔 엄청나게도 내가 모르는 많은 응급 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응급실에 도착하자 아까 전화를 했던 김 기사가 이미 술에 취해 눈알이 토끼 눈알처럼 빨개서 나를 보더니 가래를 크악 하고 목젖에서 끌어올리며 외면하고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커튼 안으로 들이밀더니 하나 둘 나갔습니다. 마침내 당신과 나 둘만 남았지요. 당신은 다리에 깨끗한 붕대를 감고 가슴이 부풀어올라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모습으로 눈을 굳건히 닫고 이를 조금 들어 낸 채 손은 가슴에 포개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아주 완고해 보이고 고집스러워 보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턱을 손으로 쓰윽 쓰다듬자 당신은 나의 그런 손길을 거부하겠다는 듯이 날카롭고 뾰족한 수염 끝으로 내 손바닥을 찔렀습니다. 대체 남자들의 수염은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 건 지요. 얼굴이 찼습니다. 누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색이더군요. 당신의 가슴이 부풀어 있어서 그 속에 바람이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을 빼 주면 당신이 한결 편 해 보일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부푼 가슴은 어릴 때 자전거 포에서 바람을 넣어 팽팽해지던 자전거 바퀴가 생각나게 하더군요. 당신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만져 보았습니다. 붕대의 올이 거친 게 맘에 걸렸습니다. 좀 더 부드러운 천으로 싸 주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병원에서 내가 도착하기 전 당신을 말 그대로 응급 처치를 해서 최대한 깨끗한 모습으로 꾸며 놓은 듯 했습니다. 그게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 나도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만수동 로터리에서 있는 대로 가로수를 들이받고...119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었다고 하드만. 다행이 손님은 없었고.. 술도 안 마시고 했는데 무엇 땜에 그렇게 가로수를 들이받았을까... 졸았나." 두서없이 신일 교통의 누군가가 이런 설명을 했고 의사도 당신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를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시선을 서로 교환하며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울며 몸부림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한바탕의 소극을 기대했는데,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조금 맥빠지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무언가 속고 있다는 표정도 있더군요. 나 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유달리 발달한 눈치랍니다. 먹고 남은 수박 껍데기라도 햩을려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거든요. 난 김 기사의 휴대폰을 빌려 침착하게 시댁에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 서해 병원 응급 센터인데요." 같은 인천의 남동구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와 시동생 시누이들이 한 두름에 엮인 굴비 마냥 주루룩이 달려왔습니다. 시아버님은 치매라 당신이 누군지 진작에 놓아 버렸습니다. "아이고. 천금같은 내 새끼. 생떼 같은 내 새끼. 이기 무슨 일이고. 이기 무슨 날 벼락이고 야야 눈 좀 떠 봐라. 에미 왔다. 니가 날 두고 어예 눈을 감았드노. 아이고. 저런 빙신년을 만나 살더니 결국은 니 팔자가 요렇게 끝나는구나." 시어머니는 눈물도 잘 흐르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는 나를 바라보며 부르르 떨더니 내게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내 휠체어를 휙 하니 밀어서 넘어뜨렸습니다. 난 병원의 대리석 바닥에 쿵하고 소리를 내며 쓰러졌지요. 내 한 쪽 휠체어의 바퀴가 허공에서 속절없이 휘잉 돌았습니다. 칠십 노인네가 힘도 좋더라구요. "이 빙신 같은 년. 내 아들 꼬시가 혼을 빼먹더니, 이젠 목숨마저 뺏아 묵었나. 이 빙신 같은 년. 내 아들 살려내라. 내 아들 안 살려내면 너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이 빙신 같은 년. 이 썩을 년. 사지가 오그라질 년." 이미 나는 사지 중 두지가 오그라져 있건만 시어머니는 나머지 두지도 오그라지기를 바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죽음의 무대가 비로소 제대로 차려졌다는 듯이 시어머니를 내게서 떼어 내며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습니다. "고마 참으소. 어매요. 어매 심정 압니더. 우리도 이리 가슴이 째는 듯 아픈데 어매야 오죽 하겠습니꺼. 고마 참으소." "내사 몬 참는다. 저 빙신 년을 내가 아주 오늘 요절을 낼 끼구 마. 메뚜기 볶듯 기름에 볶아 내가 오둑오둑 깨물어 먹어도 시원 찮타. 이 빙신 년아. 내 자식 살려내라." "어무이 고마 참으소. 요절을 내도 내가 낼께니, 아이고 우리 형 이제 우짜믄 좋노. 자식도 하나 없이." 당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시동생은 갑자기 세상에 없는 동생이 되어 섧게 외치더군요. 난 갑자기 우스워졌지만 참았지요. 웃었다 간 휠체어가 다시 한번 뒤집힐까 봐서요. 당신을 영안실로 옮기겠다는 걸 내가 우겨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 일주일 후에 계속 -    이준옥 :소설가. 제1회 전태일 문학상 소설 당선. 한국작가회의회원. 복사골문학회 주부토 소설동인. 아름다운 지구에 여행 온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지구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음.
    • 예술/창작
    • 웹소설
    2021-10-11
  • 웹소설 - 매듭 /1회
    '보셔요.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한 공간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병풍 저 뒤쪽에, 나는 병풍 앞쪽에 있습니다. 당신은 병풍 뒤쪽에 누워 있고 나는 앞쪽에 앉아 병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병풍엔 단지 검은 먹으로 대나무와 새와 앙상한 등걸에 꽃 두어 송이를 달고 있는 매화와 초서체로 흘려 쓴 글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네요. 하긴 그 글의 뜻을 알았다 해도 뭐 내 신산 한 생활이 달라질 건 없었을 테지만 요. 아니 오히려 그 뜻을 이해하려 애쓰느라 고단한 내 생활만 더 무겁게 했을 테지요. 이 병풍을 사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여름이었어요. 9층의 9살 난 대길이가 쭈쭈바를 먹으며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에게 허부죽이 웃었었지요. 미처 대길이의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쭈쭈바의 분홍색 물이 목이 늘어진 대길이의 흰 면 티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대길아. 빨리 먹어라. 쭈쭈바가 녹아서 옷으로 흐르잖니. 그래. 그렇게 옳지. 먹을 땐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거야." "어디가?" 대길이는 흐르는 쭈쭈바를 후루룩 소리나게 빨아들이더니 우리에게 물었지요. "응. 복지관에. 아줌마 갈 게." "응. 알았어." 대길이는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쭈쭈바를 빨기 시작했는데 쭈쭈바는 다시 그 애의 목이 늘어진 흰 면 티 앞으로 그 분홍색 끈적한 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가 입고 있던 면 티는 어디서 얻어 입혔거나 그 애의 어미가 다른 동네의 헌 옷 의류 함을 뒤져 가져다 입힌 것이거나 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구요. 그 옷이 크기도 했지만 그 옷 앞에 그려진 인물이 우습게도 베레모를 쓴 체게바라의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애나 그 애의 어미가 체게바라가 누군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또 안다 한들 그것은 그들 모자에게는 쭈쭈바만도 못한 인물일 것입니다. 대길이는 눈이 사시라 언제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 애는 뇌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애를 장애아라 부릅니다. 대길이와 헤어져 당신이 내 휠체어를 밀고 차가 있는 쪽으로 가는데 한 노파가 검은 보자기로 싼 길다란 장방형의 물건을 검은 띠로 묶어 어깨에 매달고 오고 있었습니다. 내 눈에 비친 그 검은 끈은, 노파의 어깨를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가 본래 거기에 있던 힘줄을 살갗 밖으로 밀어내기라도 할 듯, 노파의 어깨를 옥죄고 있었어요. 노파의 얼굴은 까맣고 굵은 주름 투성이고, 키는 가로로 짊어진 병풍보다 짧았고, 힘이 들고 지쳐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는 듬성듬성 빠져 있었습니다. 노파의 쪼그라든 젖가슴이 노파가 입은 갈색 반소매셔츠 위로 비추름이 그 모양을 만들고 있었지요. 대길의 티셔츠에 쭈쭈바의 달콤한 분홍 물이 흘렀다면 노파의 갈색 셔츠 위로는 찝찔한 땀이 흘러 갈색의 셔츠를 군데군데 더욱 짙은 색깔로 만들고 있더군요. 저렇게 작고 마른 몸에서 흐를 땀이 있다는 게 의아했습니다. 노파 가까이 가니 노파는 힘이 들어서 하아 하아 하며 애절한 숨을 뱃속에서 밖으로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뿜어내는 숨보다 들이마시는 숨이 더 적은 것 같아 안타깝더군요. "병풍 사. 싸게 줄 테니. 날이 아직 초복도 안 되얏는디 밉살스럽게 덥구 만." 그렇게 말하는 노파의 음색엔 우리가 병풍을 사리라는 기대는 없다는 것이 묻어 있었지요. 당신은 내 휠체어를 딱 하고 세웠지요. "보소. 장사를 할라 믄 팔릴 만한 곳에서 해야 제. 이런 곳에 누가 병풍을 사것다고....여긴 장애자 아파트라 병풍 거튼 호사시런 물건 살 인간 아마 모르긴 해도 없지 싶니더. 고마 힘 빼지 말고 팔릴 만한 곳으로 가 보소." "아이그. 이거나 좀 부짜바 줘 바. 좀 땀이나 들이그로." 노파는 등을 당신에게 돌려 대었고 당신은 병풍을 받아 아파트 주차장의 화단 모서리에 기대어 놓았지요. "힘도 좋을 시 더. 노인네가 이 무거운 거를 짊어지고 다니니. 다른 것도 많은데 하필 와 이 무겁고 잘 팔리지도 않는 병풍 장사를 하느라꼬." "딴 거슨 밑천이 있어야 하지만 이 거슨 밑천이 안 들거든. 하나 팔믄 파는 데로 주거든." 당신은 노파를 우두커니 보더니 다시 병풍을 바라보다 나를 보고는 내가 배시시 웃자 얼만교. 하고 노파에게 물었지요. "노파는 후우 하고 숨을 몰아 쉬더니 고마 12만원인데 8만원만 내라. 날도 덥고 그냥 오늘은 수당 포기하고 들어 갈란다. 삭신도 쑤시고. 아이고 구신은 얼매나 바쁘믄 날 같은 인간 안 잡아가고 누굴 잡으러 댕기나 몰라. 그마 칵 죽어 버리믄 삭신 쑤신 것도 모릴텐데. 사는 게 무섭다니까. 날 밝는 게 웬수 같아." 해서 그 병풍을 우리는 팔만 원에 샀지요. 나중에 딴 곳에서 우리는 그 노파를 보았는데 오만 원에 팔고 있었지요. 노파는 여전히 '아이고 구신은 얼매나 바쁘믄 날 같은 인간 안 잡아가고 누굴 잡으러 댕기나 몰라. 그마 칵 죽어버리믄 삭신 쑤신 것도 모릴텐데. 사는 게 무섭다니까. 날 밝는 게 웬수 같아.' 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지요. 우리는 그런 노파를 모른 척 하며 지나쳤었습니다. 그 병풍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팔만 원이 당신을 가리고 있는 셈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나는 병풍 저 너머에 누워 있는 당신이 웬 지 나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할거라는 느낌입니다. 전혀 슬프지도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아요. 오히려 가슴 한 구석에 두웅하고 뜨는 풍선 하나가 들어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내가 그 전화를 받은 것은 요즘 놓기 시작한 십자수의 돈황곡자(敦煌曲子)-보살만(菩薩蠻)의 枕前發盡千般愿 :베개 위의 머리 다 빠지도록 원하노라 要休宜侍靑山爛 :청산이 다 썩어 水面上枰鐘浮 :물위에 저울추가 뜨고 直侍黃河徹底枯 :황하가 다 메말라도 그대에 대한 사랑 변함없어라 白日參辰現 :낮에 별이 보이고 北斗回南面 :북두칠성이 남쪽에서 돌아가도 休卽未能休 :그만둘 수 없노라 直侍三更見日頭 :밤중에 해가 뜨기 전에는 중 마지막 연 한글의 밤중에 해가 뜨기 전에는 중 ‘에’ 자를 수놓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돈황곡자 보살만은 인천 관교동 신세계 백화점 선물 코너에서 중년의 아줌마들에게 잘 팔리는 십자수입니다. 이 시구가 맘에 들어 내 스스로가 십자수 본을 만들고 수를 놓아 석 장을 백화점 선물 코너에 의탁했는데 이외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아직도 중년의 여성들에게는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녀들은 아마 이 시구가 적힌 액자를 경대 위나 거실의 티브이가 자리한 벽에 걸겠지요. 그렇지만 우습지 않나요. 낮에 별이 보이고 북두칠성이 남쪽에서 돌아가고 밤중에 해가 뜨다니요. 시란 불가해하고 추상적일수록 사람의, 그것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양입니다. ‘에’ 자의 윗변 가로획을 뜨는데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바늘을 천의 면에 꽂느라 몰두해 있었기에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리고 나는 놀라 바늘이 천을 바치고 있는 왼손 중지를 찔렀습니다. 피가 천에 베어 들까 봐 재빠르게 천을 무릎 위에 놓고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피를 빨며 시계를 힐끗 보았습니다. 시계는 새벽 한시 십오 분이더군요.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도 전화벨이 계속 울렸는데 이 짧은 사이에 나는 위의 행동과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 일주일 후에 계속 -    이준옥 :소설가. 제1회 전태일 문학상 소설 당선. 한국작가회의회원. 복사골문학회 주부토 소설동인. 아름다운 지구에 여행 온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지구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음.   
    • 예술/창작
    • 웹소설
    2021-10-03
  • 책 읽는 도시 부천의 작가들과 나누는 4인4색 이야기
    부천시는 11월 16일부터 11월 19일까지를 ‘부천작가주간’으로 정하고 부천에서 활동하는 분야별 대표 작가를 초청하여 릴레이 강연을 개최한다.         ▲11월 16일 동시작가이자 2014년 계룡전국시낭송대회 대상 수상자인 정나래 시인의 ‘문학과 인생이야기’ 강연을 시작으로 ▲11월 17일 『동해생활』의 저자 송지현 에세이작가의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돌아오는 것’ ▲11월 18일 201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자 민병훈 작가의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 ▲11월 19일 부천 역곡역의 일상을 담은 일러스트 그림책 『건물의 초상』의 저자 김은희 일러스트레이터의 ‘1km, 오늘도 삶을 짓는 중입니다’ 강연을 진행한다.   부천시는 이번 ‘부천작가주간’ 행사를 통해 문학창의도시 부천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시민에게 알리고 시민 주도의 지속가능한 독서 문화 생태계 확산과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강연은 네이버 밴드 ‘책 읽는 도시 부천’에 가입하여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밴드에 접속할 수 있는 링크는 부천시립도서관 홈페이지(www.bcl.go.kr)에서 신청한 후 문자로 받아볼 수 있다. 기타 궁금한 사항은 상동도서관 독서진흥팀(032-625-4541)으로 문의하면 된다.
    • 예술/창작
    • 공연/전시/이벤트
    2020-11-04
  • 야회(夜會)- 5회
      김찬숙 소설가 황노인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온 천지는 온통 흰 눈으로 덮였고, 언제부터인가 보름달이 검푸른 달무리를 안고 떠 있었다. 집을 나서 산으로 오르던 때의 그 미친 듯이 휘날리던 흰 눈발들의 군무는 정녕 꿈이었는가. 그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만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달은 검은 구름들 사이를 지나 소래봉 위에 걸려 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고개를 돌려 멀리 안골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다. 거기 어둠 속에 온통 눈을 뒤집어 쓴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노인은 흰 눈 속 마을 위에 내리는 별빛을, 절반쯤 눈에 묻힌 채 바라다보았다. 결코 자기의 몫일 수 없는, 온전히 다른 사람들만의 몫인 달빛을 노인은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별들은 또 하나의 마을을 만들어 다정하게 함께 어우러져 빛나고 있었다. 황노인은 영영 누릴 수 없는 빛나는 하늘 마을, 그 마을의 온기가 오직 그에게만은 그토록 시리게 느껴졌다. 그는 가느다랗게나마 한번 울어보고 싶었지만 기운이 다해서인지 도저히 울음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죽어서도 저 하늘 마을의 일원으로 살 수 없으리란 걸, 저에게는 작은 울음조차 허용되지 않으리란 걸,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멀리 큰 바위 위의 등성이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제 집 드나들듯 하루에도 몇 번씩 내달음 치던 곳, 먼 남의 일이 될 것이다. 거기에 황소는 있기나 한 걸까. 그럴 리 없지! 황소도 늙은 내가 싫어졌을 테지. 그럴 거야, 모두가 그랬으니까. 모두 어디론가 멀리 멀리 가버렸겠지. 흔적을 감춘 우심이처럼. 또 땅꾼 서씨와 야반도주한 어머니처럼, 그리고 어린 자기를 이 세상에 내팽개친 채 죽어간 아버지처럼.   그가 어둠 속에 달빛 받은 흰 눈을 입에 쑤셔 넣자 이제까지와 달리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 세상은 오직 황노인 자신에게만 가멸차고 한 점 정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우심 또한 그를 늘 가슴 아리고 쓸쓸하게 만들었었다. 쉬이 몸을 허락하지도 않았고, 소래산 도깨비 장군상만을 끌어안은 채 그에게는 더 없는 욕망과 허기, 갈증만을 허락했다. 다시 눈을 입에 쑤셔 넣어 보았지만 설움만이 몰려 왔다. 그러자 가슴 깊은 곳에서 굉음과 함께 울분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노인의 심장에 쩍쩍 금이 가더니 이내 심장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은 엉엉엉엉 온 몸을 들썩이며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래봉에 걸렸던 달이 숨자 멀리 화사한 불빛들이 황노인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때마다 여름날이면 이 일대를 뒤덮었던 도화(桃花) 향기가 한 겨울임에도 꽃향기와 함께 꽃비가 되어 날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리에 결계를 치듯 복숭아나무들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나무에서 흘러나온 꽃잎들이 노인을 감싸 돌았다. 그러자 아뿔싸!! 쾌자와 패랭이를 쓴 열여덟 앳된 아내 우심이 망자를 떠나보내는 씻김굿을 하던 그 차림으로 한 무리의 사당패와 어울려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뭐여! 이제 내게 마지막 굿판이라도 벌릴 셈인가. 노인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멍 했다. 조금 전 꿈에서 본 그대로 온 천지는 일시에 황홀하게 도깨비 불꽃들이 일렁이며 급속도로 물들어 가는가 싶더니 이내 징소리와 장구, 피리소리가 실린 굿판의 격렬한 울림이 이어졌다. 앳된 우심이 징소리와 함께 혼맞이 무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도깨비 탈을 쓰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소리를 냈다. 황노인 스스로가 도깨비에 홀렸구나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이처럼 황홀하게 물들이는 굿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을 드러낸 검은 하늘과 온통 백색 눈에 휩싸인 소래산 중턱에 정령처럼 불꽃이 일자, 이것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확신과 함께 결코 자기의 몫일 수 없었던, 온전히 다른 사람들만의 몫이었던 우심이의 굿판을 볼 요량으로 가슴이 뛰었다. 자기 곁을 떠나 어디론가 멀리 멀리 가버린 황소, 또 어린 자식을 버리고 떠나간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기를 이 세상에 내팽개친 채 죽어간 아버지, 죽은 아내 우심이의 혼들이 돌아와 오직 자신을 위한 씻김굿을 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었다. 제 집 지나들듯, 이 산문(山門) 어느 한 곳도 그의 체취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있을까. 소래산 도깨비만큼 그의 쓸쓸함을 알아주는 이 또 누가 있을까.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우심이를 불러들여 굿판을 열고, 굿판이 끝난 뒤 노인의 혼을 앗아간들 그는 이제 아무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온 천지에 굿거리 소리가 자욱하게 퍼져나가고 춤꾼들의 형체가 사그라질 무렵, 그를 굽어보는 검은 그림자를 그는 보았다. 거기에 황소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서 타야해요! 어서!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해 황소의 등판에 올라탔다. 그리고 흰 눈이 쌓이는 소래산을 뒤로 하고 그는 황소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 끝 --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 예술/창작
    • 웹소설
    2020-07-21
  • 야회(夜會)- 4회
    김찬숙 소설가 어쨌든 황노인은 우심이 가출했던 그해 겨울, 인근마을 사람들로부터 우심이 죽었으니 시신을 거두어 가라는 전갈을 받았었다. 안골에서 불과 30리 안팎의 그리 머잖은 마을의 한 외딴 오두막에서 우심은 여섯 달 동안이나 해산을 기다렸고, 난산 끝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 여섯 달 동안 우심의 뒷바라지를 맡아 온 노파가 우심이 난산 끝에 죽자 시신을 앞마당 눈 속에 가매장한 뒤 수소문하여 황노인에게 전갈을 보낸 것이었다. 황노인은 이미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을 큰 바위 구릉에 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조차도 마을 사람들은 황씨를 안심시키기 위한 우심의 고도의 계략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우심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구만! 그게 무엇이든 그는 두 번째 굿판에서의 우심의 불타던 눈빛과 애원하며 흘리던 눈물만큼은 진정한 것이었다고 끊임없이 되새김하며 살아왔다. 우심!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뛰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 깊은 갈증과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끼게 했던 그 이름. 그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 한 끝으로부터 집채만 한 커다란 저녁놀이 부서지고 있었다. 들판의 다른 한쪽 끝으로부터는 또한 누군가가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온 천지에는 굿거리 소리만이 자욱하게 퍼져나가고, 아마도 그 굿거리 소리는 지금 제자리걸음을 하듯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저 춤추는 형체가 거기 있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싶었다. 저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오고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나저나 저 춤꾼이 어서 들판 밖으로 사라져버리든지, 아니면 이쪽으로 어서 다가와서 집채만 한 저 햇덩어리를 좀 막아주었으면 좋으련만. 황노인은 저녁 햇빛에 눈이 부시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굿거리 소리가 점점, 점점 높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뚝 그치면서 별안간 귀가 멍멍한 고요 속에 그 춤꾼의 검은 형체가 해를 등지고 물끄러미 황노인을 굽어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그 춤꾼은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라구요, 하고 마치 타이르는 듯한 말을 남기고는 햇덩어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 우심이로구나! 그 춤꾼의 형체가 어쩌면 죽은 아내 우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황노인은 온 힘을 다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황노인에게는 하루 중 하산하는 길이 가장 쓸쓸했다. 자기도 언젠가는 백사를 잡으리라, 그것은 땅꾼으로서는 명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이긴 했으나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이기도 하니까. 황노인이 하산 길에 느껴야 하는 쓸쓸함은 아마 백사를 찾아내지 못한 서운함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언제나처럼 황노인은 큰 바위 구릉이 내려다보이는 등성이에 뱀 자루를 내려놓은 채 쉬고 있으면, 조금 전의 그 이상한 춤꾼을 통째로 삼킨 바로 그 햇덩어리가 소래산봉에 아슬아슬 걸려 있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굴러 떨어지며 온 천지는 바야흐로 황홀한 황혼녘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황노인은 마흔을 한참 지났건만 장가들 꿈조차 꾸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늘 한탄해 오던 터였고, 특히 하산 길에는 그 같은 감정에 쌓여 매우 울적해 하곤 했었다. 백사를 잡으려면 먼저 사람-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그래야 백사 잡을 힘이 생긴다고 산에서 만났던 노인은 말하지 않던가 말이다. 갑자기 소래봉 뒤에서 뿜는 황홀한 황혼의 빛줄기 한 가닥이 저 아래 큰 바위 구릉에 내리꽂히는가 싶더니, 거기 언제부터 있었던지 열여섯 앳된 우심이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고 있고 서른 살의 황노인이 그때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며 다가가 어깨를 잡자 우심이 재가 되어 폭삭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다음 회에 계속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 예술/창작
    • 웹소설
    2020-07-12
  • 야회(夜會)- 3회
    김찬숙 소설가  눈은 그렇게 계속 퍼붓고 있고, 황노인은 자신이 어느새 큰 바위 근처에 올라와 있음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어느새 큰 바위라니! 황노인은 갑자기 제 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무게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엾은 짐승! 불쌍한 것! 마치 그놈 황소가 눈앞 가까이 있기라도 하듯이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자신마냥 먹는 게 시원찮아진 놈을 위하여 평소보다 여물에 칡넝쿨과 콩깍지를 더 넣어 끓이고, 쇠죽에 겨까지 끼얹어 주었건만. 밥을 눈앞에 두고도 콧김만 몇 번 뿜어내고는 이내 주저앉아 되새김질도 시원치 않더니, 혀 한 번 날름거리지 않고 눈밭 가까이 버썩 얽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늙은 황소가 없어진 걸보면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선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놈도 살만큼 살았지! 그래 우심이 떠날 때도 이 늙은인 그저 눈만 뜨고 있었지! 외양간이나 주위의 모든 것들은 눈발에 묻힌 채 고요히 잠들어 있을 뿐, 코뚜레에 매어 기둥에 묶어놓은 고삐는 눈발 속에 거뭇하게 흔적만 남긴 채였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내가 꼭 찾아주마! 그런데 노인의 마음과는 달리 제 몸 하나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새어나가고,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집을 나서기 전(그것이 오늘 아침이었는지 며칠쯤 전의 어느 무렵이었는지 전혀 분별이 되지 않았지만) 그 긴 까무러침의 잠을 마지막으로 깨운 것-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방문 앞을 잠시 환하게 가로막고 서던 황소의 모습, 그것은 정녕 실물이었을까, 아니면 허깨비였을까. 황노인이 허둥지둥 집을 나선 그 길로 곧장 큰 바위 구릉을 향해 내달은 것은 그놈이 허깨비로나마 끊임없이 자신 앞에 서 있다가는 다시 다가가면 사라지기를 거듭한 까닭이었다. 이제 그놈이 선 곳은 큰 바위 구릉 안쪽, 우심의 무덤가였다. 구릉은 누군가 알려준 대로 황노인의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는 곳이며, 죽은 우심의 시체를 묻어 준 곳이며, 첫 굿판을 치르고 신 내림을 받은 우심이를 껴안고 첫정을 나눈 곳이 아닌가. 그래서 울적하거나 외로울 때 그 놈과 찾던 바로 그곳이었다. 어리석은 놈, 여름이면 몰라도 이 삼동에 가엾은 놈! 황노인은 어쩌면 그 짐승마저 자기 곁을 영영 떠나버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짐짓 위엄을 부려보았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과 절망감을 어쩌지 못했다. 노인은 이제 점점 온몸이 굳어져 마비가 옴을 느꼈다. 큰 바위 밑에 잠시 쉬어서 갈까. 그래, 잠시만 쉬어도 새 힘이 솟아날지도 모르지. 아니 녀석이 여길 찾아올지도 몰라. 그래 전에도 늘 그랬듯이 바위에 올라앉았노라면 언제나 새로운 힘이 솟구쳤지. 황노인은 한평생을 이 길 따라 뱀을 찾아 오르내리며, 비를 피해 수없이 큰 바위 구릉 밑으로 찾아들었다. 정말이지 이젠 더는 한 발짝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바위 밑에 이르러 거기 아무렇게나 길게 누워보았다. 그러자 한꺼번에 갈증과 졸음이 몰려들어 그는 입으로 눈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감았다.     황노인은 자신처럼 한평생을 땅꾼으로서 지냈다는 아버지 황백사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백사와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자꾸 꿈으로 꾸어오곤 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그때마다 대체로 당신의 친구이기도 했던, 어머니와 눈이 맞아 야간도주한 땅꾼 서씨의 얼굴로도, 더러는 박수 공씨의 얼굴로도 나타나곤 했는데, 지금 황노인은 자신의 얼굴을 한 아버지가 백사와 싸우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백사는 한겨울 눈을 함빡 뒤집어쓴 저 영물 같은 소래봉보다 더 우람하고 아름다운 몸뚱이를 뒤틀면서 황노인을 향해 덤벼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백사는 또한 우심이가 되기도 했다. 우심이가 뒤 안 우물가에서 알몸인 채 달빛을 흠뻑 받고 목욕을 하고 있고, 갑자기 노인을 향해 긴 혀를 날름대더니 불현듯 백사가 되어 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우심의 망령에서 가까스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잠시 조용해진 뒤란은 갑자기 안골 일대가 되고, 안골에는 이튿날부터 낮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아 온 천지가 개기일식 때처럼 캄캄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황노인이 꿈에서 깬 건 아마도 바위 밑에 스며든 한기 탓이었을까. 가까스로 천근만근한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그는 온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았다. 분명 살아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마지막 열기를 품은 채 어둠을 향해 벌겋게 불타고 있었다. 이제 밤이 오면 그들이 몰려오겠지. 그는 수도 없이 많은 도깨비불을 보았었다. 여름이면 소래산 도깨비들이 산을 뒤덮곤 했으니까. 그 안에 소를 찾아야 했다. 어둠이 오기 전……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땅꾼인 서씨를 따라 집을 나간 것은 황노인의 나이 겨우 열세 살 되던 해 봄이었는데, 지금도 가끔씩 그 당시를 꿈으로 꿀라치면 꿈은 언제나 안골 일대가 개기일식을 하던 깜깜한 어둠속이었다. 열세 살 되던 해 봄부터 황노인은 내리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를 찾아 헤맸지만, 자취를 감춘 어머니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어린 황노인이 불쌍하다 하여 집안으로 들였으나, 나이를 더해 갈수록 뱀 잡이에만 정신이 팔린 것을 알고는 그 아비 황백사를 대하듯 했다.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한테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라 하여 문전박대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낮 동안에는 마을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버지 황백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성 싶었다. 단지 황백사가 잡은 뱀을 헐값에 처분하고는 하는 별난 땅꾼이었다는 것, 그리고 입버릇처럼 자신이 한 겨울, 전설에만 있는 설상사(雪上蛇)를 잡겠다며 온 산을 헤매고 다녔고, 딱 한번 그것과 마주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것을 찾아 나선 위인임을 늘 자처했다는 것, 그리고 한해 겨울 마침내 소래산 큰 바위 구릉에서 그가 찾아다닌다는 설상사에 물려 비명횡사했다는 것, 그 정도가 그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아는 바 전부였다. 그런데 우심이 그녀가 집을 나가기 전날 밤, 그러니까 한씨네 딸 씻김굿에 황노인을 구경 오도록 허락하던 그 밤, 그녀는 제 어미한테 들은 것이라며, 제 아비가 백사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간 땅꾼이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전에 없이 우심이 몇 번이고 몸을 불같이 달구곤 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다음회에 계속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 예술/창작
    • 웹소설
    2020-06-20
  • 야회(夜會)- 2회
    눈은 그 사이 무르팍을 넘어 허벅지까지 차올라 지칠 대로 지친 걸음을 더는 옮겨 디딜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면 내리붓는 눈발이 봄이면 분홍빛 도화로 장관이었던 아랫마을 안골 복숭아나무들도,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도, 들판도, 또 암수 두 큰 소나무로서 멀리서도 쉽게 식별되는 서낭당마저도 뒤덮어 온통 천지를 구분할 수 없게 했다. 땅꾼으로서 뱀을 찾아 한평생을 수없이 오르내려 이 일대와 저 소래산이라면 그 구석구석을 마치 손바닥 펴보듯이 훤히 읽는 황노인으로서도 그 동안 쌓인 눈과, 또 내리붓는 눈발 속에서는 등성이와 골짜기의 구분마저도 어렵게 했다. 그래서 이제 황노인은 그저 어림짐작만으로 큰바위쪽 구릉을 향해 등성이를 타 오르고 있었다. 이놈! 이 못된 놈! 수없이 낭떠러지에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잡목 숲에 발목이 잡혀 태기질치기도 하며, 또 손등과 얼굴을 오리목과 싸리나무 잔가지에 찔리고 찢기고 할퀴이면서 황노인은 한사코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김찬숙 소설가  소는-송아지는 첫눈에도 한낱 짐승이 아닌 영물로 비쳤었다. 그러니까 황노인에 있어 소는 어쩌면 아내 우심이 자체인 셈이 되기도 하였고, 우심이 떠난 그날 밤 이후 내내 빈자리를 채워준 동무이기도 했다. 그 큰 눈알을 껌벅 껌벅 감았다 뜨기만 해도 노인은 이미 그 심중을 읽을 수 있었고, 소의 눈에도 저의 마음이 다 읽혀지는 듯했다. 그리하여 아내 우심의 떠나는 뒷모습을 그저 둘이 눈알만 뒹굴뒹굴 굴리며 같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소는 이미 오래전 야간도주해 버린 어머니인 셈이 되기도 했으며, 겨우 다섯 살 때 백사에 물려 죽었다는 아버지인 셈이 되기도 했다. 황노인을 혼자 이 기슭에 내팽개쳐 둔 채 곁을 하나씩 하나씩 떠나버린 정붙인 사람들의 자리- 그 몫으로 대신 보내어진 듯만 싶은 짐승. 그와 함께 한 날들이, 떠나보낸 이들과 지냈던 시간 이상으로 많았지 않았나 싶었다. 황노인에 있어 온전히 황소만이 자기 몫이 되어버린 때는 죽은 아내 우심의 굿판을 두 번째로 구경하던 날이었다. 두 번째라고는 하지만, 우심의 첫 굿판 구경이 그보다 거의 십여 년 가까이나 거슬러 올라야 하는, 혼례를 치르던 해의 일이니 황노인에게는 첫 구경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아니던가. 어찌된 영문인지 아내 우심이 황노인에게만은 자기 굿의 구경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그것이 아내 우심이 저 자신과 박수 공씨 간의 그렇고 그런 망측한 관계를 절대 꼬리 밟히지 않으려는 계산속이라 했다. 사실 우심이 인근 마을이나 멀리 타지로 며칠씩 혹은 어떤 경우에는 한두 달 간씩 집을 비우고 굿하러 떠날 때면 으레 박수 공씨와는 동행이었고, 더구나 그곳에서 그들은 침식과 기거를 언제나 함께 해온다고들 했다. 그리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부부 사이로 알고 있다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또, 우심이 있을 적에 황노인은 한 번도 우심을 흡족히 안아보지 못했다. 어쩌다 합방을 허락하는 날 밤이면 우심의 목욕이 좀처럼 끝나지 않아 노인을 안절부절못케 했고, 합궁 때는 합궁 때대로 장수 도깨비 신주를 모신 방이라 몸을 흩트려서는 안 된다며 몰아세우곤 하지 않았던가. 우심의 두 번째 굿판, 건너 마을 한 씨 집안 과년했던 딸이 신변을 비관해 물에 빠져 죽고, 그 죽음을 달래는 씻김굿판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노인의 구경을 허락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황노인으로서는 그것이 이날 이때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우심의 그 두 번째 굿판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심이와 헤어진 마지막 대목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그 굿판 자체에서 느꼈던 순전한 어떤 감동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박수 공씨에 대한 가슴 깊이 타오르는 질투심이 극에 달하면서 느꼈던 일종의 흥분 상태가 지속되어 그 굿판의 광경이 이날 이때까지 뇌리를 벗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왜 그때 우심의 이상행동에 대해 한번쯤 의심해 보지 않았던가. 송아지 고삐를 건네받고 속으로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황노인의 마음에 늘 박혀있던 죄책감은 우심이 원혼이 되어 눈물 흘리며 타령조의 사설을 할 때, 애써 그 눈빛을 외면했던 것이었다. 그 눈빛을 예감해 알아차렸더라면, 혹은 그때의 그 부정스러운 생각만 아니었던들 우심을 죽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이 들곤 했다.     아내 우심은 그때 첫 애기를 배었던 모양이었다. 한씨네 과년한 딸이 신병을 비관해 물에 빠져 목숨을 끊는 장면을 굿으로 재연할 때, 우심의 젖은 옷 밖으로 드러나는 그 풍만한 육체의 놀림에 황노인은 오랫동안 야릇한 흥분에 휩싸여 넋을 빼앗겼다. 구경 온 마을 사람들이 굿거리장단 따라 엮어가는 우심의 청승스런 사설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도, 서슬 퍼런 작두에 몸을 실어 천을 찢으며 내달음 칠 때에도 그 화려한 몸놀림에 취해 그저 야릇한 흥분과 열기 속에서 망연자실해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굿판이 끝나갈 무렵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우심이 송아지 고삐를 자신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건네 줄 때에도, 그저 그 어떤 알 수 없는 질투와 송아지를 얻은 뿌듯함에 이별다운 이별 또한 치르지 못했었다.      - 다음회에 계속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 예술/창작
    • 웹소설
    2020-06-14
  • 야회(夜會)- 1회
    이 삼동(三冬)에 놈이 산으로 도망친 것부터가 무슨 조화 속임이 분명했다. 황노인은 그것이 어쩌면 억수로 퍼붓는 눈발 속에 신비의 자태를 감추고 있는 저 소래산이 부리는 조화가 아닐까 싶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소래산을 진산이니 성산이니 신산이라고들 불러왔고, 밤만 되면 산은 온통 도깨비 세상으로 변해, 천지에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고, 길 잃은 나그네들이 여인에 홀려 길을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는 전설을 즐겨 말해오지 않았던가. 자고 깨면 언제나 거기 얼굴을 마주해 온 산, 돌이켜보면 한 평생을 저 산의 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보지 못한 것부터가 이미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의 이끌림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걸음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면서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산정을 향해 한사코 씩씩거리며 내딛고 있는 황노인의 모습은 흡사 한 마리 늙고 병든 살쾡이를 연상케 했다. 본디 살점 한번 제대로 세워보지 못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며칠씩(그것이 이틀쯤인지, 사흘쯤인지,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여러 날이었는지 황노인으로서는 도저히 셈할 수가 없었지만)이나 미음 한술 뜨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덕지덕지 엉겨 붙은 눈곱 사이로 비치는 충혈된 눈과 봉두난발의 몰골은 늙은 살쾡이 그 자체였다. 이놈아, 어리석은 놈아! 네가 도망친다고 어디까지 칠 게여, 어디까지! 들판을 지나고 서낭 앞을 지나 산문에 들어서자 노인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지 더욱 거칠게 씩씩거렸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한때의 절규도 어느새 젖어드는 넋두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겨울철로서는 좀체 보기 힘든 흙먼지 바람이 미친년처럼 앙칼진 소리를 내며 먹장구름 떼를 몰고 소래산으로부터 내리던 날, 그래서 단숨에 저 아래 마을 계수동 일대까지 마치 일식하는 날처럼 캄캄하게 어두워오던 날, 바로 그날부터 황노인의 악몽도 함께 시작되었다. 생전에는 한 번도 흡족스레 다루어보지 못했던 죽은 아내 우심의 알몸뚱이가 어느 때는 죽어 자빠지는 황소처럼 무겁게 얼굴에 덮쳐오고, 또 어느 때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해괴한 짓거리로 덤벼들어 그때마다 황노인은 까무러치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까무러치고 깨어나 다시 까무러치기를 거듭하는 날들이 대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오늘(그것이 아침 무렵인지 또는 저녁 무렵인지도 황노인으로서는 확신이 안 섰지만) 황소가 집을 나가기까지 악몽에 시달려 온 날들이 과연 며칠간이었는지 황노인으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무르팍을 훨씬 웃도는 눈이 쌓였고, 또 그렇게 쌓인 눈이 방금 내린 눈 같지 않게 꽤 솔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꽤 여러 날이 지났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 소래산으로부터 미친 흙먼지 바람이 내리던 날만 해도, 그러니까 황노인이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하던 그날까지만 하더라도 눈이 올 징후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지 않았던가. 아닌 게 아니라 황노인은 잠(그것을 잠이라고 불러야할지, 까무러침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는 꿈이라도 불러야 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속에서도 다만 억수로 퍼붓고 있는 눈발을 보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 잠 속에서 뿐만 아니라 잠깐 잠깐 깨어나서도 그때마다 또한 억수로 퍼붓고 있는 눈발을 보았었다. 그러니까 끝도 없이 덤벼드는 죽은 아내 우심의 망측스러운 알몸뚱이에 깔려 까무러칠 그때마다, 까무러친 잠속에서, 또한 깨어서는 깨어있는 대로 다만 퍼부어오는 눈발을 보고 있은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흰 눈발이 시야를 어지럽히던 그때, 그 눈발사이로 우뚝 모습을 드러낸 망할 놈의 황소, 놈은 분명 부엌 아궁이 건너편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할 터인데, 소 방울을 울리며 커다란 궁둥짝을 보인 채 유유히 흰 눈발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망할 놈 같으니라구! 이젠 네 놈 까지 날 버리겠다구? 망할 놈! 망할 놈!   -다음회에 계속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 예술/창작
    • 웹소설
    2020-05-28
  • 펄 벅 부천에 오다 - 제4회
      제4회   10 유일한은 9살 때 미국으로 갔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이승만 박용만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서양의 문물을 배워 나라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남인 유일한을 선교사를 통해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는 어린 아들 유일한에게 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유일한은 낯선 곳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고 자꾸만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나서 힘들었지만 곧 그곳의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힘들었지만 유일한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유일한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부지런한 유일한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어느덧 청년이 된 유일한은 대학에 다니면서 중국 사람을 상대로 사업을 하였습니다. 유일한이 있는 곳에는 유일한과 마찬가지로 고국을 떠나와 말 설고 낯 설은 미국에서 생활하는 중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일한은 무슨 사업을 할까 궁리하다 중국 사람들에게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비단, 찻잔, 부채 등 중국 물건을 팔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물건이 잘 팔릴까 걱정하였지만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중국 물건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유일한은 중국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습니다. 첫 사업에서 성공한 유일한은 이번에는 중국 사람들에게 숙주나물을 팔기로 하였습니다. 숙주나물은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두에 꼭 들어가므로 수요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유일한이 콩나물을 팔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유일한은 콩나물이 아니라 숙주나물을 통조림에 넣어 팔아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유일한의 사업은 번창했지만 그럴수록 유일한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일한이 사업을 한 것도 일본에게 강제 합병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한은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세웠습니다. 유한양행의 상표 버드나무는 서재필 박사가 유일한에게 선물한 목판 그림속의 버드나무였습니다. 유일한은 조회 때 마다 직원들에게 강조하였습니다. 유한양행은 결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하여 경제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일제의 방해에도 1924년 시작한 유일한의 사업은 크게 번창했습니다. 1936년 유일한은 부천 심곡본동에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을 세웠습니다. 소사공장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과 목조 건물 세 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는 직원들을 위한 사택과 기숙사 운동장 수영장 등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11 아빠는 몹시 궁금한 게 있는지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문을 했습니다. “그 유명한 유일한 선생님의 유한양행이 부천에, 그것도 깊은구지 심곡본동에 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놀랍죠. 사실 유한양행이 부천 심곡본동 깊은구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아마 부천에 사시는 분들도 잘 모를 걸요.” “그런데 선생님 유일한 선생님이 왜 부천 심곡본동에 유한양행 공장을 세웠을까요?” “저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대강 짐작할 수는 있어요.” “왜죠?” “공장은 대부분 교통이 좋은 곳에 짓죠. 그리고 공장을 돌리려면 전기가 있어야겠죠.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교통이 좋고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부천 소사역에는 서울 인천을 왕래하는 기차가 다니고, 소사역 주변의 소사삼거리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인천의 항구도 가깝고요. 깊은구지가 소사역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공장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인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죠.” “선생님 설명을 들으니 정말 이곳이 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네요.” “이제는 다 이전하고 부천에 없지만 좋은 입지조건 덕분에 2000년 전까지만 해도 부천에 많은 공장들이 있었죠. 사실 부천은 산업도시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 도시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있으니 참 안타까워요.” 아빠와 선생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아가 끼어들었습니다. “펄벅 할머니는 유일한 할아버지의 소사공장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빠도 이제 생각이 난 듯 정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선생님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나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선생님이 아빠와 정아를 바라보면서 말을 했습니다. “당연히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죠.” 아빠가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두 분의 나이 차이가 겨우 두 살인데 혹 연인 사이는 아니었나요?” 아빠의 말에 깜짝 놀란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무슨 그런 엉뚱한 말씀을 하세요. 연인이라니.” “그럼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죠?” “시대 상황이 두 분을 만나게 만들었죠.” “시대 상황이라니 무슨 뜻이죠?” “일본이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은 대한민국과 중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미국에서 대한민국과 중국에 대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한마디로 미국은 미국에 좋은 정보를 제공해줄 만한 특별한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그 특별한 사람으로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가 뽑힌 거고. 펄벅 할머니는 중국에서 오래 살았고 중국어에 능통하니 중국 담당 고문으로, 유일한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대한민국의 사정에 밝으니 대한민국 담당 고문으로 OSS의 요원이 되셨죠. 아! OSS는 미국 CIA의 전신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이 맞겠네요.” “그러니까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가 정보원이 되었네요.” “참 내가 깜빡했는데 유일한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OSS의 요원이 되셨죠. 대한민국으로의 침투를 대비해서 힘든 훈련을 모두 받으셨지요. 그때 유일한 할아버지의 나이가 50대였습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OSS에서의 인연이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으로까지 이어졌군요.” “아버님의 말씀이 맞아요.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는 두 분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죠. 우선 두 분은 서로 마음이 통했으니까요. 펄벅 할머니는 자신의 고국과도 같은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고 있죠. 유일한 할아버지는 조국을 일본에 빼앗겼지. 그러니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죠.” 12 대한민국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펄벅은 대한민국에 있는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의 혼혈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유일한 할아버지도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펄벅 할머니의 뜻을 알게 된 유일한 할아버지는 부천 심곡동의 유한양행 소사공장을 펄벅재단에 기증하기로 하였습니다. 유일한 할아버지로부터 유한양행 소사공장 건물을 기증받은 펄벅재단은 혼혈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고 많은 수의 혼혈 아이들이 펄벅재단을 통해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펄벅 할머니가 우리 부천 심곡본동 깊은구지에서 소사희망원을 하게 된 게 우연이 아니었군요?” “우연이 아니죠. 펄벅 할머니의 마음과 유일한 할아버지의 마음이 혼혈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으로 이어져서 소사희망원이 탄생한 것이니.”   13 “아빠 펄벅 할머니 같은 훌륭한 분이 우리 동네에서 소사희망원을 했다는 것을 알아서 너무 기뻐요.” “아빠는 펄벅 할머니가 우리 동네에서 혼혈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신 것도 좋지만 유일한 할아버지가 펄벅 할머니의 소사희망원에 도움을 주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정아는 아빠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도 크면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 같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럼 아빠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야.’ 정아는 빨리 집에 가서 엄마와 오빠에게 펄벅 할머니와 유일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정아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아빠의 손을 잡고 끌었습니다. 아빠는 정아가 왜 서두르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끝---               이재학 마라토너/ 복사골문학회, 부천수필협회 소새울 소통미디어 협력단 대표 저서/ 나는 마라토너다, 길에서 다시 찾은 행복마라톤, 황소도 말처럼 뛰나 부천 소새울에 산다(1,2,3,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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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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