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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소설/다윗과 하늘, 그리고 갈마(褐磨)-12회
    “여호와여. 이것으로 끝내시옵소서. 이것만으로도 이 종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어떻게 애비로서 자식이 자식을 죽이는 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견뎌낼 수가 없사옵니다. 간절히 빌고 원하오니 저를 취하소서.” 다윗은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은 셈이었다. 암논은 자신이 저지른 죗값으로 죽었고 압살롬은 다윗을 기만하고 그술로 도망가 버렸다. 암논은 실질적인 장자였으나 압살롬은 심정적인 장자였다. 다윗의 애통은 그래서 더 컸다. 차남인 길르압은 모든 면에서 너무 소심했다. 사람이 장래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윗은 그제야 암논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율법을 어긴 자는 어떤 식으로든 하늘이 징벌을 내린다는 걸 간과했다. 암논을 꼭 죽이지 않고도 국외 추방 같은 조치를 취했더라면 신하들도 공감했을 것이고 압살롬 또한 형을 살해하는 무모한 짓을 범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후회막급이었다. 자신은 결국 법의 정의도 세우지 못하고 백성들의 공감도 얻지 못했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 결과만을 초래한 것이다. 사실 다윗의 마음은 암논에게서 떠나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로서 암논이 아무리 장자라 할지라도 너무나 커다란 허물을 갖게 된 것이다. 아무리 덮으려고 해도 덮을 수 없는,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여동생을 강간했다는 허물. 그가 설사 다윗의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해도 여호와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며 백성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리라. 그래서 염두에 둔 아들이 압살롬이었다. 차남 길르압은 매사에 의욕이 너무 없다는 얘길 듣고 있었다. 압살롬을 후계자로 했을 경우 자연스럽게 암논에 대한 처벌로 여기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정쩡하고도 우유부단한 세월. 결과는 형제간의 칼부림이었다. 이런 단초를 제공한 나를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유언비어와 뜬소문에 민감한 백성들의 여론은 조석지변일진대. 다윗은 괴로웠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백성들이 갑자기 돌아서서 손가락질을 해대는 모습을 그리며 괴로워했다. 그럴수록 의지하고 매달릴 수 있는 영원한 피난처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였다. 경(經)이 전하는 다윗의 심정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의 둘째아들 길르압. 안하무인이자 천하의 구두쇠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로부터 낳은 아들. 왕자의 신분이지만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로 모두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그도 남자였다. 아무리 왜소한 체구에 다른 형제들에 비해 드러나지 않는 품성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어 세상의 평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모친이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는 것. 남편을 죽이려 했던 남자를 사모하여 불같은 성질을 이용해 남편으로 하여금 피를 토하여 죽어버리도록 기지를 발휘하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자신의 출생. 여호와. 여호와의 뜻. 선택된 기름 부음.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아버지. 그의 간음과 아무런 죄도 없는 우리아와 핏덩이의 죽음. 하나에서 열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를 직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아 여태껏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다윗가의 장자이던 형 암논이 동생인 압살롬에게 참살을 당했다. 암논과 압살롬은 저 잘난 맛에 자신을 동생이나 형으로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 그 둘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윗은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다윗의 장자는 자신이었다. 자격지심에 움츠러들기만 한 지난날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암논을 패륜의 길로 인도한 요나답이었다. 요나답은 길르압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다. “왕자마마, 언제까지 관망만 하고 계실 겁니까?” “무슨 말이오?” “야자나무에서 야자가 저절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길르압은 목소리를 죽여 소곤대는 요나답을 쏘아봤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 이러는 게요?” “천하를 얻는 일입니다. 온 이스라엘을요. 다음 차례는 왕자마마가 아니겠습니까?” 길르압은 냉소했다. “나는 그대를 만나지 않은 것이오. 당장 나가시오.” 잔뜩 기대를 걸고 왔던 요나답은 머쓱해져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길르압에겐 측근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자기만한 위치의 인물이 다가서길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지금까지 평판대로라면 길르압은 자신이 마음 놓고 주무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랬는데 그의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다. 내가 너무 서두른 것인가? 그렇다면 듣던 것보다 의뭉하단 말이로구나. 그래 좀 더 기다려보자. 요나답은 시류를 읽을 줄 아는 타고난 머리를 가졌다. 암논에게 접근하였던 것도 다윗의 장자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길르압의 관심은 딴 데 있었다. 사람과 죄, 만물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이었다. 사람을 만든 하나님이었다. 아울러 죄도 만든 하나님이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사람과 죄를 같이 만든 것은 장난을 즐기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하나님이 장난의 대상으로 사람과 죄를 만들지 않았다면 사람과 죄를 만든 건 하나님의 실수이자 하나님의 죄였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죄.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든지 전지전능한 또 다른 절대자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서 자신을 믿으라 한다? 믿지 않는 이방민족은 죄인이므로 죽여도 좋다? 그 이방인들도 자신이 만들었으면서? 죄인을 응징하기 위해선 죄도 없는 희생제물을 만들어 죽이기 좋아하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여호와하나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죽여도 좋았다. 이런 신을 과연 믿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일방적인 신을. 뭔가 잘못되고 있다. 이방인을 말살시키기 위한,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 만들기가 아니었을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 그렇다면…, 단언컨대 여호와는 없다. 길르압의 생각은 끝을 몰랐다. 여호와하나님에 대한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는 맹목적인 여호와 섬기기를 거부했다. 기도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왕자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앞으로 거의 나서질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끊임없이 인간이 지켜야할 도리에 대해 묵상했다. 요르답은 길르압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길르압은 언제나 조용했다. 길르압의 종에게 근황을 물어보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여호와에게 기도만 하고 있는 길르압이 참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다윗에게 길르압이 조금만 잘 보이면 후계자는 따 놓은 당상인데 어쩌자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가. 그는 어떻게 하면 꼼짝을 하지 않는 길르압을 부추겨 다윗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길르압이 후계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으면 자신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주하다시피 하는 다윗을 생각하고는 무릎을 탁 치며 길르압에게 갔다. 그는 천재였다. 길르압도 날이면 날마다 기도만 하고 있다 하지 않는가.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던 것이다. “왕자마마, 건강이 염려되오이다. 여호와께서는 왕자님의 신실하심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부디 건강을 잃지 마시옵소서.” “……” 길르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요나답이 들어오는 것을 잠깐 봤을 뿐 계속해서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요나답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왕 기도하시려거든 여호와께서 계시는 곳에서 하심이 어떨지요.” “내게 여호와는 없소.” 길르압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요나답은 잘 알아듣질 못했다. “폐하께서도 그곳에 자주 납시는데요.” 다윗에게 신실한 길르압이라는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죄인이오.” “예?” “없는 여호와를 향해 무엇을 용서받겠다는 것이오?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고 용서받으면 그게 무슨 신이란 말이오? 우리아, 그 충신에게도 여호와가 있지 않았소? 우리아는 무엇이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게 애들 장난이오? 아무런 죄가 없는 우리아가 죽어 가는데 그의 여호와는 어디에 있었소? 뭣하고 있었냐고요. 애초부터 여호와는 없었소이다. 아니, 설령 있다한들 그런 여호와 따윈 내게 필요 없소.” 요르답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여호와가 없다니? 여호와를 부정하다니? 더군다나 다윗이 죄인이라니? 죄악 중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길르압은 그토록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있었다. 사탄의 조종에 놀아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어둠 가득한 저 얼굴 좀 봐. 틀림없었다. 요르답은 서둘러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소. 당신은 이곳에 왔고 여호와를 부정하는 내 말을 들었습니다.” 요르답은 황급히 길르압의 집을 빠져나왔다. 길르압은 분명 사탄의 괴뢰였다. 괴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여호와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두문불출하고, 있어도 없는 척한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왕자의 신분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아들. 여호와에 대한 부정은 반역보다도 무서운 죄였다. 그는 지체치 않고 다윗에게 나아갔다. 길르압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만이 공을 세우는 일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적인 사탄의 괴뢰를 없애는 일 또한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 공을 어디에 비기랴. 역시 다윗은 여호와의 집인 장막에 있었다. 요르답은 왕의 조카이기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고하고 나서 이 말을 덧붙였다. “얼굴마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청천벽력이었다. 너무나 놀란 다윗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불경스러운 이야기가 요르답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둘째아들 길르압에 대한. “그 말이 사실인가?” 다윗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겠습니까.” 다윗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실을 너 말고 누가 알고 있느냐?” “아무도 모릅니다.” “알았느니라. 이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할 터이니 너는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 내 명을 어길 시 네 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잘 알겠지?” “명심하겠나이다.” 다윗은 망연자실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괘가 눈앞에 그대로 있었다. 여호와를 부정하다니! 그렇다면 저 언약괘를 부정하고 율법을 부정하고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이스라엘의 왕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길르압은 여호와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저가 왕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여호와의 은혜인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내 피를 받은 자식이 여호와를 부정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요나답이 잘못 들었던 게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없는 얘기를 지어낼 리도 없지 않은가. 제 목숨이 달린 얘기를. 왕자들이 압살롬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났을 때도 요나답만은 암논은 몰라도 다른 왕자들은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했잖은가? 그렇다면 이것도 여호와의 징계일까? 아, 나는 어째서 자식들에 대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인가.   (매주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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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6
  • 웹소설/다윗과 하늘, 그리고 갈마(褐磨)-11회
    “나는 지난 이 년 간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암논은 나의 형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도 아니다. 그는 한낱 율법을 어긴 죄인일 뿐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요행이었다. 요행은 영원하지 않다. 그는 오늘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율법이 살아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내 말을 따르라. 그는 여호와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왕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짐승과도 같은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너희는 내 명령을 따를 뿐이다. 오늘은 하늘이 준 기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최대한 그 죄인이 술을 많이 마시도록 내가 유도할 것이다. 죄인의 부하들이 죄인을 보호하지 못하도록 자리 배치에 유념하고 죄인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을 때를 기다려 신호를 보낼 것이니 너희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기 바란다. 실수가 있을 때는 너희들과 내 목숨은 없다는 걸 명심해라. 단 피는 그 죄인 하나로 족하다.” 넓은 들판에 장막이 지어지고 잔치 준비는 끝났다. 시간이 되자 압살롬의 형제, 왕자들이 속속 도착하여 축하를 보내고 자리를 잡았다. 다윗의 둘째 아들인 길르압과 넷째 아도니야, 다섯째 스바댜, 여섯째 이드르암이 그들이다. 암논은 맨 나중에 그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밧세바로부터 난 왕자들은 아직 어렸다. 압살롬은 암논의 말이 보이자 직접 나아가 그를 맞이했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더욱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암논은 말에서 내려 압살롬의 손을 잡아끌고 포옹했다. “그래, 압살롬. 축하한다. 좋은 날씨구나.” “이렇게 오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그동안 우리 사이가 많이 어색했지? 잊자. 잊어버리자. 내가 철이 없었다. 아바마마를 위해서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자. 내가 너를 도울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도우마.”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암논은 불안했다. 압살롬 앞에만 서면 자꾸 움츠러드는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그는 압살롬의 어깨 너머로 모든 동생들이 와 있는 걸 보고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양의 수가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조금 늘었을 뿐입니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아바마마의 배려 덕분입니다. 그렇지만 어디 형님에 비기겠습니까. 대적들이 사라지고 온 이스라엘이 평안하니 그놈들도 무럭무럭 자라나 봅니다.” 식탁에는 송아지와 양과 염소 고기로 만든 각종 요리와 과일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포도주가 넘쳐나고 있었다. 양떼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것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자연의 교향곡이었다. 잔치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압살롬의 동생 왕자들은 형의 번영을 축하해마지 않았고, 다윗의 차남이자 압살롬에게는 바로 위의 형이 되는 길르압은 몸이 약해 술을 마시진 못했으나 진정으로 기뻐하여 흐뭇해했으며, 암논 또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압살롬에게 무척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술이 여러 순배가 돌자 암논은 배짱이 두둑해져 여러 동생들이 따라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압살롬은 특히 암논이 잔을 내려놓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잔을 그에게 바쳤다. 암논은 기분이 좋았다. 압살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충직한 동생으로만 보였다. 압살롬에게 느꼈던 자기 혼자만의 불안과 걱정은 괜한 기우처럼 여겨졌다. 어렴풋이 갖고 있던 부도덕한 장형으로서의 자격지심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동생들은 변함이 없었고 압살롬 또한 깍듯했다.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앞으로는 정말 장형으로서 모범이 되리라 다짐하고 형제간의 우의를 앞장서서 다지리라 결심했다. 형으로서 어지간한 손해쯤은 충분히 감수하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잘못된 행동을 충분히 보상하리라, 그러면 부르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 아바마마께서도 나를 용서하시리라. 그래서 암논은 실추된 장자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싶었다. 압살롬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긴장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주변의 상황도 계획에 빈틈이 없었다. 암논은 저 죽을 줄 모르고 마냥 기분이 좋아 껄껄거리며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압살롬이 거느리는 부하들의 눈은 언제나 그에게 쏠려 있었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하더니 원을 그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암논의 부하들과 같이 음식을 먹던 압살롬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칼을 빼들어 암논의 부하들을 에워쌈과 동시에 무장해제를 시키고 그때까지 보이지 않고 언덕 아래 수풀 속에 은신해 있던 압살롬의 정예 용사들이 왕자들의 식탁으로 돌진해 온 것은. 술에 취한 왕자들의 몽롱해진 눈들이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놀라 휘둥그레지는 찰나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 그들은 경악했다. 거짓말처럼 암논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머리가 푹 꺾이어진 것이다. 잔치는 한마디로 난장판이 돼버렸다. 왕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소스라치며 허둥지둥 자신의 부하를 찾아 말을 타고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다. 압살롬은 목석처럼 서서 암논의 주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붉게 타올랐다. 그는 비명과 주변의 소란스런 상황에도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었노라. 너희들은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아무런 죄가 없다. 율법을 유린한 죄인은 처단되었다. 여호와께서도 기뻐하실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정당한 일을 집행했지만 어디까지나 폐하께서 망설이던 일이고 명에 없었던 일이다. 다른 왕자님들도 많이 놀라셨을 터. 차분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먼 훗날을 기약하자. 나는 잠시 이곳을 피해야겠다. 폐하께서는 죽은 자가 죄인일지언정 장자인 아들을 잃었으니 심히 진노하실 것이다. 나는 폐하께만은 죄인이 되었노라.” 압살롬은 그길로 심중에 두었던 그술 땅으로 향했다. 그술의 왕 달매가 압살롬의 어머니인 마아가의 아버지이자 압살롬의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다윗에게도 마침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모든 왕자들이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시종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시종은 너무 놀라서인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다윗은 믿기지가 않아서 숨을 죽이며 다시 물었다.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청하던 압살롬의 얼굴이 어른거리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잘 모르지만 분명히 오늘의 잔치에서 왕자님들과 관계되는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경악했다. 압살롬을 만났을 때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신경과민으로 돌렸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선지자 나단의 경고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단 말인가.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자신을 가리키던 나단의 손가락이 이제는 자신의 눈을 찔러오고 있는 듯했다. 언제나 가슴 졸이며 자신의 형제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아들을 감시하며 왕자들의 동태도 살피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암논은 자신을 팔아 다말을 능욕했고 그로 인해 압살롬마저 자신을 속였다. 암논의 경우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압살롬은 설마, 했었다. 그런데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단 말인가. 다윗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낭떠러지로 한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추락.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봐야 하나. 다윗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여호와여, 끝내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의 죄가 그렇게 크더이까. 저를 벌하시옵소서.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못 볼 거 다 보며 산들 무슨 의미가 있으리까.” 어전에서 다윗을 따라와 죽 늘어서있던 신하들도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다윗의 형 시무아의 아들 요나답이 코 막힌 소리로 왕자들의 죽임을 전한 시종을 나무랐다. 그는 암논에게 다말을 범할 수 있는 계책을 가르쳐 준 암논의 친구이자 사촌이었다. “무엄하도다. 어찌하여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뜬소문을 가지고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만약 왕자들께서 압살롬 왕자에게 변을 당하셨다면 아마도 암논 왕자만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다말 공주를 암논 왕자가 욕을 보였던 일로 압살롬 왕자는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시끄럽도다. 썩 물러가거라.” 다윗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으면 싶었다.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분명히 다른 왕자님들은 무사하실 겁니다.” 요나답은 다윗 가까이 기어와 고개를 숙이며 다윗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때 왕궁을 지키는 병사가 소릴 질렀다. “왕자님들이 오십니다. 왕자님들이 오십니다!” 다윗은 그 소리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요나답이 더 바싹 다가와 울먹였다. “폐하, 소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왕자님들이 오신다 하옵니다. 어서 가보시지요.” 다윗은 일어섰다. 요나답의 말이 사실인가? 역시 암논은 보이지 않았다. 다윗은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왕자들은 다윗 앞에 다가와서는 땅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그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이냐?” 다윗은 왕자들을 부둥켜안으며 물었다. “아바마마, 암논 형님이 갑자기 밀어닥친 압살롬의 부하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압살롬이 양털 깎는다는 명목으로 우리들을 초청하여 암논 형님을 죽이려 했던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차남 길르압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다윗은 아들과 함께 통곡했다. 아들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낫다는 안도감과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에 울었고 다윗은 허탈감과 참척의 고통에 울었다. “내 탓이로다. 모두가 내 탓이로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른 내 탓이로다. 이 일을 어찌할 거나.” 자초지종을 들은 왕도 울고 왕자들도 울고 신하들도 울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그래서 징계도 남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비로우신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 저에 대한 징벌이 언제나 끝나는 것입니까. 자식들 보기 부끄럽사옵니다. 저를 치소서. 자식들에 대하여 내려지는 저에 대한 분노를 이만 거두소서. 어떻게 하여야 여호와께서 진노를 거두실지요. 가르쳐 주소서. 우매한 저를 일깨워 주옵소서.” 다윗은 무서웠다. 하늘이 무서웠고 여호와가 무서웠다.  (매주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1996년 등단한 후 첫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와 두 번째 시집 『네페르타리』를 발간하고 2005년 <월간문학>에 중편소설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로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소설계 데뷔. 소설집으로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와 장편소설집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나무가 바람에 미쳐버리듯이』가 있다. 2021년 제46회 한국소설문학상, 우수출판콘텐츠로 ‘박희주 중편3선’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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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6
  • 웹소설/다윗과 하늘, 그리고 갈마(褐磨)-10회
    어떻게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허겁지겁 걸었고 무심결에 압살롬의 집에 도착했으며 엉겁결에 오빠를 보자마자 서러움이 북받쳐 통곡을 했다. 차마 말도 못하고 까무러질 때까지. 압살롬은 다말의 행색을 보고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암논에 의해 몹쓸 짓을 당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무언의 경쟁을 벌이는 이복형 암논이 갑자기 아프다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어째서 다말이 그 음흉한 놈의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지 불만이었던 그였다. 결국 불길한 예감은 설마, 설마 하다가 최악의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내가 이 더러운 놈을 결코 가만 두지 않으리라.’ 압살롬은 분에 겨워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용서치 못할 짓이었다. 그러나 먼저 해야 될 일은 삶의 의욕을 잃은 듯한 동생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다말이 입은 상처와 충격은 그녀 스스로 삶을 포기할지도 모를 상황처럼 보였다. 그는 다말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말, 진정하여라. 힘든 얘기다만 네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버려라. 암논 그 놈은 나의 형도 너의 오라비도 아니다. 미친개다. 차마 아바마마까지 이용해서 네게 음흉한 짓거리를 벌일 줄은 정말 몰랐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그 놈의 수작이 비열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 밖에 없는 내 여동생을 지켜주지 못했구나. 나를 용서해다오. 내 기어코 가만있지 않을 게다. 너의 수모를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니. 중요한 건 바로 너다. 빨리 잊어버려라. 재수 없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심각하게 여길수록 너만 손해야.” 압살롬은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흐느끼기만 하는 다말을 보고 그의 눈에서도 분노의 눈물이 솟구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눈은 불꽃을 뿜어내며 이글거렸다. 그 후로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이 자신의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딸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말을 어떻게 믿으랴. 그것도 믿고 있던 장자, 암논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 다말을 범했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기가 막혔다. 처음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묻고 또 물었다. 사실이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드디어 노발대발했다. ‘나를 속이면서까지?’ 찢어죽이고 싶었다. 당장에 암논을 잡아들여 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자신이 직접 쳐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밧세바와 자신의 지난날이 너무나 또렷하게 떠오르는 게 아닌가. 자신의 간음과 그걸 감추기 위해 충신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죄악들. 나단 선지자의 골육상쟁의 칼부림이 끊이지 않을 거라는 경고. 자신이 암논을 처벌한다면 똥 묻은 것이 겨 묻은 걸 탓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죄는 죄를 낳고 그 죄는 또 다른 죄악을 잉태하는 것이라. 다윗은 자신의 망설임이 율법을 어긴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징벌이 막상 자신이 뿌린 죄악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게 된 맏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엄청난 현실에 고민이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거의 다 소탕되고 정복되었는데, 외부로부터 오는 우환은 사라졌는데, 어쩌자고 내부에서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는 괴로웠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런 시험을 어찌해야 하오리까. 어떻게 해야 합당한 일이 되오리까.”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다윗이 아무리 간구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세월만 보내게 되었다.   압살롬은 다말을 볼 때마다 암논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다말의 그토록 해맑고 아름다웠던 얼굴이 그 일이 있고부터 항시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고 웃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으며 날이 갈수록 야위어만 가는 것이었다. 치장도 하지 않았다. 말도 거의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누가 아는 체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곤 했다. 왕궁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살아있다고 하지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다윗은 그런 딸을 보러 와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꼭 안아주고는 한숨만 푹 내시다갈 뿐, 그것도 잠시였다, 나중엔 딸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는지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벌어지는 공식 행사나 만찬석상에서 암논은 의도적으로 압살롬의 눈길을 피했다. 아무래도 뒤가 구렸던 것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예전과 다름없이 암논을 대했다. 다윗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영 딴 사람이 돼버린 다말을 보면 울화통이 터져 암논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치밀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는 형편에 속병만 늘어갔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다윗은 밧세바를 의지하고 사랑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밧세바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다시 아들을 낳았고 또 낳고 연이어 낳았다. 다윗과 불륜의 관계로 낳은 아들을 이레 만에 잃은 후 여호와가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일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으며 자신은 아직도 죄인이라는 심정으로 신실한 삶을 영위해 나갔다.   압살롬의 암논에 대한 증오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는 언젠가는 암논을 처단하리라 자신과 수없이 다짐하며 힘을 길러갔다. 왕자의 신분에 걸맞게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신체 건강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부하로 삼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암논을 죽인다는 목표에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다윗은 비록 아버지로서 자식을 죽일 수가 없어 징벌을 내리지 못했으나 자신은 암논과 친형제도 아닐뿐더러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강간한 범법자에게 율법이 정한 대로 처단할 뿐이라는 논리였다. 율법은 그렇게 죽인 행위를 시비하지 못하도록 돼있었다. 다말이 암논에게 당한 지 이 년이 지나고 양털을 깎는 시기가 되었다. 양털을 깎는다는 건 중요한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압살롬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모든 왕자들을 양털 깎는 축제에 초청하곤 다윗에게 나아갔다. 다윗은 언제 보아도 늠름하고 잘생긴 셋째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아바마마, 만군의 여호와께서 아바마마와 항상 함께 하심으로 온 이스라엘에 아바마마의 힘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듯합니다.” “허허, 그래 어서 오너라. 오늘따라 네 얼굴이 더욱 환히 빛나는구나. 기분도 좋아 보이고.” “그렇사옵니다. 오늘은 소자가 아바마마께 청이 있어 왔사옵니다.” “청이라니?” 다윗은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이 바로 양털 깎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르고 있는 양들을 자랑하고 싶어 잔치를 마련할 예정이옵니다. 아바마마께서 모든 신하들과 함께 참석하셔서 축복해 주신다면 소자로선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다윗은 양털을 깎는다는 아들의 말에 가슴이 다 설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을 도맡아 풀을 뜯기던 양치기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양털을 깎는 날은 하늘에도 온통 양떼 모습을 한 구름들이 뭉게뭉게 떠다녔다. 그것은 곧 평화였다. “아, 그렇구나. 벌써 그렇게 좋은 날이 되었구나. 나도 가보고 싶구나.” “오시옵소서.” “그렇지만 나까지 가서 북적거릴 필요가 있겠느냐. 괜히 네게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구나. 다말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기운을 많이 회복하였습니다. 다말도 아바마마를 기다릴 것입니다. 부디 소자의 청을 거절치 마시옵소서.” “허허허. 나도 가고 싶다니까 그러는구나. 네가 이 애비 맘을 몰라서 그러느냐. 나도 한때는 양치기였느니라. 그러나 그 많은 신하들까지 가서 너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다윗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감으로 인하여 모든 신하들이 따라갈 것이고 시위대가 이동해야 하고 후궁들이 따를 것이며 시종과 궁녀들까지 모두 맞이하려면 왕자의 신분에는 버거운 규모가 뻔했다. “소자의 간절한 청이옵니다.” 압살롬은 시종 머리를 조아렸다. 다윗은 그런 아들을 보고 흡족했다. “내가 간 거나 다름없이 너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마.” 다윗은 압살롬에게 다가가 한손은 압살롬의 머리에 얹고 또 한손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압살롬은 감격해 하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아바마마께서 그토록 소자를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소자는 아직도 아바마마를 모시고 싶은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아바마마를 대신하여 암논 형님께서는 필히 참석해 주시길 원하나이다.” “그건 암논이 결정할 일이 아니냐?” 다윗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 형님은 우리 형제들의 장형이 아니십니까. 그동안 불미스러운 일로 관계도 소원하였사오니 모든 형제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혹 연락을 받고도 참석치 않을까 염려되어 감히 아바마마께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형님이 오게 되면 아바마마를 대하듯 모시겠습니다.” 다윗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방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지난 일을 연관시켜 생각한다고 자성했다. 압살롬은 외모와 마찬가지로 호탕하고 대범했다. 그래 그동안 너희들이 다말의 일로 껄끄럽게 지냈겠지. 암논이 먼저 풀기는 어려울 거다. 역시 압살롬이구나. 이번 기회에 지난 일을 잊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압살롬. 너는 역시 내 아들이로구나. 내 모든 왕자들에게 너의 행사에 필히 참석하라고 이르마. 특히 암논에게는 너의 기특한 뜻을 꼭 전하도록 하겠다. 참으로 기쁜 일이로고.” 다윗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곪은 상처가 터져 고름이 시원스럽게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잔뜩 찌푸린 먹구름 속에서 마침내 햇살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고름이 빠지면 상처는 금방 아물 것이리라. 우중충하던 날이 곧 화창해지리라. 다윗을 만나고 나온 압살롬은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이제야 다말의 원수를 갚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왕궁을 나와 말을 달려 그의 집에 오면서도 흥분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 다말에게 암논을 죽일 수 있게 되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창가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다말을 본 순간 그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다가 돌아서버렸다. 암논을 죽인들 다말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더욱 더 암논에 대한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적개심에는 암논이 사라진 이후 장자권에 대한 야망도 포함됐다. 어쩌면 다말을 위한다는 건 명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압살롬은 그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 계속   박희주 작가  1996년 등단한 후 첫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와 두 번째 시집 『네페르타리』를 발간하고 2005년 <월간문학>에 중편소설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로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소설계 데뷔. 소설집으로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와 장편소설집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나무가 바람에 미쳐버리듯이』가 있다. 2021년 제46회 한국소설문학상, 우수출판콘텐츠로 ‘박희주 중편3선’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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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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