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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 걸음/이상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나비 걸음/이상호   꽃바람 공원길을 낡은 유모차 하나 느릿느릿 사람들 사이를 건너가고 있다 아기에게 처음으로 세상 구경시켜 주었을 5월의 하늘 속보다 더 깊은 등 굽은 유모차에 접힌 박스, 찌그러진 빈 페트병 철 지난 신문지가 실려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처럼 세월의 모퉁이 섶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아기의 아기가 되어 이팝나무 꽃길을 지나가고 있다 아카시아 꽃길을 지나가고 있다 물푸레나무 그늘 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걸어가고 있다   ▸2019년 『Moment』 신인상 수상   ----------------------------------------------   시인은 어찌 보면 고통스러움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왜냐면, 삶과 죽음, 극과 극을 동시에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생과 사를 아파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피어난 시 한 송이는 독자에게 진한 감동의 향기를 풍긴다. 물론, 어느 예술 장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시인은 극단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와 할머니를 대비시킨 화자의 시적 진술이 돋보인다. 우리가 나비를 좋아하는 것은 나비 자체라기보다는 애벌레에서 羽化(우화)하고 난 뒤 훨훨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그 과정을 사랑한 것이다. 화자는 폐지를 줍는 등 굽은 할머니의 걸음에서 나비의 우화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것은 유모차의 아이가 지금의 할머니로 변화하는 과정에서이다. 그냥 놓치기 쉬운 일상의 풍경들에 입김을 불어 넣고 눈으로 더듬으며 때론, 귀로 마시면서 묘사를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라고 할 때 시적 화자는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이렇듯 관조로 이루어진 작품일수록 시적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등 굽은 유모차에’는 파릇파릇한 5월의 새싹 같은 어린아이가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접힌 박스, 찌그러진 빈 페트병’ 등이 실려 있다. 새싹 돋는 ‘5월과 아기’, ‘철 지난 신문지와 모퉁이 진 세월의 섶다리’를 통해 화자는 극한 대비를 시키고 있다. 그리고 ‘철 지난 신문지’에서 이미 저물어가는 황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시상의 흐름에서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왜냐면, 시제의 ‘나비 걸음’에서 ‘나비’는 곡선(여성적)의 날갯짓으로 변화무쌍하게 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등 굽은 유모차’와 ‘접힌 박스’, ‘찌그러진 페트병’, 그리고 ‘철 지난 신문‘ 등의 표현은 할머니의 상징이며 또 다른 이름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처럼/세월의 모퉁이 섶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에서 굽이쳐 돌아가는 강물같이 모퉁이 세월의 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직유의 화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굽은 허리에 매달린 고독 한 바구니와 곰삭힌 침묵 한 종지, 나비 걸음과 함께 걷는 한숨 소리에서 화자는 가슴 아린 감정의 흐름을 느끼면서 인고와 희생의 삶을 살았을 할머니의 辛酸(신산)한 삶을 떠올리고 있다.   봄바람처럼 속삭이는 바람이든, 엄동설한의 폭풍이든, 봄 햇볕 같은 따사로움이든,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든 아무리 현실이 반어적으로 다가와서 몰아치더라도 ‘폐지와 찌그러진 페트병’과 같은 것을 주워야 한다. 그것이 삶의 방식이고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는 일에 대한 귀천이 없음은 물론일뿐더러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비본질적인 존재가 아닌 본질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팝나무 꽃길’, ‘아카시아 꽃길’, ‘물푸레나무 그늘 속’을 걸어가는 할머니의 나비 걸음은 결코 허무도 아니고 헛됨도 아니다. 비록, 가녀린 발걸음은 비록 몸짓 가벼운 걸음이지만 그 걸음 자체에서 삶의 호흡을 감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자는‘아기의 아기가 되어’‘꽃길’과‘나무 그늘 속’을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걷고 있다고 한다. 여기 할머니 걸음에서 화자는 차라리 삶의 역동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과거에 대한 회한과 덧없음에 몸서리칠 필요도 없고, 불안한 미래에 떨 필요도 없다. 아직은 나비의 걸음걸이를 할 수 있고 자유로운 날갯짓을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흔들리고 휘청이는 걸음일지라도 사뿐사뿐 걷는 ‘나비 걸음’은 삶의 몸부림이고 영혼의 발걸음이다. 커다란 목표가 없더라도 5월의 파란 하늘의 공기 아래 걸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산자락에서 바라보는 산과 산속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이렇듯 화자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겉모습만 봤다면 한 마리의 나비도, 그 나비의 발걸음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모차와 할머니’, 꽃길을 지나고 있는 ‘아기의 아기’, 그 아기의 발걸음은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천사의 옷깃처럼 가벼운 아기의 발걸음이다. 그 발걸음엔 소리가 없다. 침묵의 메아리만 있을 뿐이다. 고치 속에 갇힌 과거를 회상하면서 더 높은 곳을 날기 위한 아름다운 곡선과 부드러운 침묵의 걸음, 그것은 ‘나비 걸음’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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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1
  •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기다림은 행복을 찾는 순간일까, 서정적인 평시조 한 수 읊조리며 누굴 저리도 애타게 기다릴까.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임은 오지 않을까? 성엣장 같은 차가운,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은 깊어 가는데 …… 송도삼절의 조선 최고의 뮤즈인 황진이, 밤중에 가슴에서 부화한 그리움 한 줌 안겨준 그이는 하룻밤 풋사랑이었을까 아님, 정 주고 떠난 풍류객의 사대부였을까? 누가 되었던 그 임이 언제 올지 몰라 기나긴 밤의 시간을 한 토막 잘라낸다니, 비록 기녀의 신분이지만 순수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그녀, 얼마나 겨울밤 동치미 같은 맛 난 표현인가.   그 시간을 봄바람 같은 따스한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거든 펴 드린다니, 이토록 으늑한 정성, 장작불에 달궈진 사랑방 구들장인들 이보다 더할까.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풍류객이 사실 여부를 떠나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직에 부임하기도 전 파직 당할 만하지 않은가. 한 번쯤 황진이 같은 여성에 젖어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 嚴冬雪寒에……   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가 임이 오길 바라는 밀물의 기다림이었다면 폭풍한설에 실연의 아픔을 안고 방황을 하며 괴로운 심사를 토해내면서 겨울 여행을 떠나는 썰물의 떠남이 있다.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곡 왕 슈베르트다   죽기 한 해 전, 빌헬름 뮐러의 시에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짓는데 그 마지막 곡이 ‘Der Leiermann 거리의 악사’이다. 빌헬름 뮐러는 연인에게 배신당한 뒤 그 어떤 세속적인 욕망이나 미련도 다 벗어 던지고 애통한 마음으로 시를 썼다. 그러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독감과 사무친 고뇌의 심정으로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안식을 얻는다. 슈베르트는 바로 이 빌헬름 뮐러의 보고 <겨울 나그네>라는 걸작을 탄생시킨다.   황진이와 슈베르트는 기다림과 떠남의 엇갈린 운명을 노래한다. 기다림은 떠남을 예고하고 떠남은 또 다른 기다림을 예약하는 모순의 진리 속에 동일성의 사유를 발견한다.   황진이가 시조 한 수 짓고서 밤새도록 임 그리며 읊조린 것처럼 슈베르트 또한 ‘거리의 악사’를 마치 250여 년 앞선 황진이 시조처럼 길게 늘어뜨리며 우울하게 슬픈 곡조로 여운을 남긴다. 사랑하는 임의 곁을 떠나면서 차마 떠나기 싫은 마음에서일까. 슈베르트와 같은 나이(31세)에 세상을 등진 명동백작 시인 박인환도 그랬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법화경’에서 말한 會者定離(회자정리) 이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진다.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한 것이리라. 또한 去者必返(거자필반)처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 이 또한 거슬릴 수 없는 인생의 순리이다.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과 만남 속, 인생은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고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는 순리 앞에 황진이나 <겨울 나그네> 속 주인공도 순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시를 짓고 노래를 읊조린 것이다.   실연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 우린 그 누구도 타인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시조 한 수의 문학과 노악사의 음악, 오감으로 스며든 향기여! 난 동짓날을 얼마 앞두고 삼경의 겨울밤에 이 곡을 들으며 황진이와 겨울 나그네가 되어 본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https://www.youtube.com/watch?v=7OvZWtHH3mI&list=RD7OvZWtHH3mI&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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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1-12-05
  •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온 하루하루 오르막길 내리막길 희로애락 그 세월들 열두 달도 끝자락인데   밤을 새며 뒤척이던 베갯잇에 묻은 사연 무어 그리 서러워서 고개고개 스무고개 아쉬움에 긴 한숨   동지섣달 기나긴 밤 정든 님은 어디 가고 칼바람 황소바람 문풍지에 부딪혀서 시퍼렇게 멍이 들고   돌아오는 길을 잃어 어디선가 그대도 긴긴밤 허리춤을 굽이굽이 홀로 새며 두고 온 님을 그리는지   낙엽 구르는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훠이훠이 눈물 바람 그 누가 이내 설움 행여나 아실까나 기다린 세월만큼 원망도 깊어가네.   시집 <내 그리움의 끝은 언제 너였다>, 미디어저널, 2021.   덕유산 정상-사진/홍영수  ---------------------------- 너에게 나는 간다. 그렇지만 다가가지는 못한다. 보고픈 맘 간절하기에 원망도 안타까움도 커지지만, 어찌하랴, 너에게 다가설 수 없는 이 현실을. 그래서 갈망할 수밖에.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듯이. 이 순간만은 진실이고 진심이다. 이때의 열정과 욕망, 그리고 그리움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갈망이기에 감추려 해도 낭중지추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안다. 널 가질 수 없다는 이 현실과 이 순간을. 아니 어쩜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계절은 겨울, 대설과 소한 사이다. 숨 가쁘고 바삐 살아온 한 해가 저문다. 1연의 “오르막길 내리막길//희로애락 그 세월들”의 대구법을 쓰면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아쉬움을 강조하고 있다.   춘향가 <쑥대머리> 사설 중에 전전반측(輾轉反側)에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를 반영하듯 “밤을 새며 뒤척이던”의 전전반측하는 화자의 심정 또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베갯잇에 묻은 사연/무어 그리 서러워서” 분명코 베갯잇에 속 울음으로 흐느끼며 눈물 자국을 흘렸을 것이다. ‘베개’는 잠을 잘 때 사용하는 꿈을 실은 물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선 세계에 노니는 ‘유선침遊仙枕’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화자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까 하는‘여의침如意枕’의 베개를 베고 돌아누워 있다.   길고 긴 한겨울 밤이다. 3연의“칼바람 황소바람”은 강력한 ‘추위’의 강력한 청각적 은유다. 그 추위가 “문풍지에 부딪쳐서/시퍼렇게 멍이 들고”라고 한다. 화자는 이러한 추위 속에서 혹여 “돌아오는 길을 잃어”, “긴긴 밤 허리춤을/굽이굽이 홀로 새며”라고 하면서 임을 걱정한다. 이 숭고한 여인네의 사랑 앞에 한 번쯤 다가가 보고 싶은 것이 모든 남정네의 욕망이라면 지나친 걸까? 더욱이“낙엽 구르는 소리에/버선발로 뛰어나가”라고 하니 더욱더 그러하지 않은가.   여인네의 사랑은 베갯잇에 적신 눈물과 한숨으로부터 새어 나온 것일까, 임을 기다리는 화자의 그리움은 전전반측하는 몸부림에서 새어 나온 것일까. 눈물과 한숨, 그리움의 늪에 빠져 긴 긴 밤을 지새우면서 원망하는 듯 원망하지 않고 흐느끼고 호소하면서 기다리는 화자의 절절한 사랑은 가난했던 백석을 평생토록 잊지 못하는 순수 사랑의 자야 김영한을 떠 올리게 한다.   문학에서는 ‘꿈’을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토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긴장의 통로로 이용하기도 한다. 화자는 잠깐 잠든 사이에서도 벌떡 깨어나 폭풍 한설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그리고 차갑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서 보듯, 동짓달 기나긴 밤과 교응하는 소리를 “훠이훠이 눈물 바람”으로 환치하며 설움과 원망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설움과 원망은 또 하나의 그리움에 대한 역설의 장치일 뿐이다    시상에 흐르는 운율은 서구적 운율이나 악기가 아닌 전형적인 동양적 리듬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섧디섧게 흐르는 거문고 가락이기도 하다. 그 가락 속엔 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속‘설움’과‘원망’을 특히 겨울 특유의 청각적 운율을 통해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는 연정가(戀情歌)이다.   「동지섣달 긴긴밤에」의 시를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원망과 설움보다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한 올 한 올 직조한 한 필의 비단결 같은 서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단 폭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네의 정한과 정조가 무늬로 채색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쓰라림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이지만 누구나 사랑과 이별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모티브가 되었을 황진이를 만났다. 500년 지난 후 또 다른 황진이, 지금쯤 그녀의 곁에는 분명코 백호 임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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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4
  • 訪曹處士山居(방조처사산거)- 박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訪曹處士山居(방조처사산거)- 박순(1523~1589, 중종 17~선조 22) 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취해 자던 신선 집 깨어보니 의아하다 白雲平壑月沈時 (백운평학월침시) 흰 구름은 골 가득 메우고 달이 지는 새벽녘 翛然獨出脩林外 (소연독출수임외) 주인 몰래 혼자 나와 긴 숲길 벗어나니 石逕筇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에게 들켰네. 술 취한 후 희미하게 눈을 뜨니 너붓한 반석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으늑한 장면, 좋은 벗과 주거니 받거니, 달무리로 주안상 차리고, 솔잎 향 몇 방울 술잔에 떨어뜨리며 명지바람에 실려 온 실솔(蟋蟀) 울음소리로 세속의 찌든 귀 헹구면서, 맴도는 흰 달빛도 초대한 깔축없는 분위기에 실컷 마시고 쓰러졌다. 깨어보니 너부러져 있는 술상 앞에 주인은 쓰러져 코를 골고 주변을 살펴보니 골을 메운 흰 구름 雲海를 이뤘다. 밤새도록 마신 달도 취해 서녘으로 어슷하게 비틀거릴 무렵 미안한 마음에 슬며시 일어나 숲길 나서는데 돌길에 그만 지팡이 소리가 난다. 아뿔사! 잠자던 새에게 들키고 말았다. 상영소견(觴詠消遣), 어찌 벗과 자연과 술잔 기울이며 시 한 대접 선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자의 자연에 대한 관조, 곰살궂은 마음씨, 익살미의 ‘宿鳥知’에서 순수를 읽는다. 박순은 ‘숙조지선생(宿鳥知先生)’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300년 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는 결곡한 대학자 박순에게 헌정하듯 곡 하나 짓는다. ‘달빛’(Clair de lune)‘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고 단지 느끼게 한다. 바로 ‘분위기 음악’이다. 베를렌느의 시 ‘달빛’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1위에 선정되기도 한 곡이다. 知音의 벗과 달빛 친구 삼아 이슥토록 술잔 기울일 때, 적요가 적요롭게 숲에 내려앉을 때, 나뭇잎 사이를 타고 흐르는 곡 ‘달빛’, 몽환적 운율의 우주성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달빛이 내게 와서 빛나는 것일까. 내가 달빛 속에서 달이 된 것일까. 잡을 수 없는 신비로움 애매한 윤곽, 모호한 선에 핀 인상주의 모네와 르누아르 드뷔시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함으로 흐르는 멜로디 말하려 하지도 않고 느끼게 할 뿐 달빛의 몽환 꿈속의 달빛. -필자의 드뷔시 <달빛>에 대한 斷想-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음악듣기/드뷔시-달빛 https://www.youtube.com/watch?v=zpIgoy3Q1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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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5
  •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던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든 고단한 숨소리를 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 이 절절한 모순 앞에 나의 심장에서 잊혀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지는 두려움을 꽉 찬 공허의 그리움으로 동살 잡히는 새벽녘까지 당신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홍영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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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4
  • 눈 먼 사랑/이천명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눈 먼 사랑/이천명    사랑에 눈이 멀어 눈 먼 사랑을 한다   백일의 해맑은 눈동자 허공을 맴돌다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 첫사랑이었다   웃는 모습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 웃음 소리 귓가에 맴돌지만   함께 해서 더 황홀했던 순간도 세월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슴 아픈 짝사랑이었나 보다   밤을 새워도 한 줄의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   첫사랑은 눈 먼 사랑으로 자라나 세월 담은 기다림만 가득하다    산문집. <섬 그리고 자유>. 산과들. 2013   ---------------------------------------------------   나는 너에게로 가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욕망은 앞서지만 안타까움 속 닿을 수 없는, 어릴 적 목숨도 바칠 것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사랑, 그 순간만은 분명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순수와 진실한 사랑은 딱 한 번, ‘첫사랑’이 아닐까. 그렇기에 화자는 ‘해맑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심장이 쿵’ 하는 ‘첫사랑’이라고 단정 짓는다. 사실 살아가면서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지만,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첫사랑만큼 무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몰의 서해에서 바라보는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괜스레 눈시울이 적셔지고 눈으로 노을 한 점 당겨 와인 잔에 부어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리라. 사라지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머문 상태라면 굳이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 변하기에 아름답고 변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랑, ‘첫사랑’,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도 바로 그러한 성정 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눈 앞을 가리고, 뭔가 낀 눈먼 사랑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미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미리 짐작하기에 화자는 시제를 ‘눈 먼 사랑’이라 했고, “눈먼”의 맞춤법마저 일탈해서‘눈이 멀다’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눈 먼’이라 띄어쓰기를 했다. 인간은 사랑할 때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첫사랑’이라면야.   시인이 되려면 화산의 불구덩이로 빠져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얼마나 웃는 모습이 심쿵했으면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라고 할까. 그리고 웃음소리는 활화산에서 쉼 없이 뿜어져 오르는 마그마의 뜨거움이 되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첫사랑’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때도 있지만 중고시절에 이웃집 오빠, 또는 친구의 오빠를 친구 몰래 만나게 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인 첫사랑의 방식이다. 첫사랑! 세간의 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렇기에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그 고통을 넘어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성 간에서 오는 고통 속 쾌락, 은밀하게 마음을 휘어잡고 관통하며 지속시키는 내적 충만감. 라깡이 말한 “주이상스(jouissance)”다. 그래서 화자는 함께 해서 ‘황홀했던 순간’이 세월 지나 ‘가슴 아픈 짝사랑’ 곧 ‘첫사랑’ 라고 한다. 참혹한 기쁨의 첫사랑.   필자의 중고등 시절은 펜팔이 대단히 유행했다. 말 그대로 오직 펜으로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이기에 초 멋진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밤새워 글을 쓴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유치함을 넘어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때 그 시절의 펜팔이라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문학지망생들에게 초석이 되지는 않았을까. 라디오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고, - 혹시 편지가 올까 하는 마음에 - 시선은 동구밖에 서성이고. ‘밤을 새워도’,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의 화자의 심상을 보면 다분히 공감할 수 있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항상 첫사랑에게 돌아간다”라는 어느 나라 속담이 있다. 시인의 세월을 지팡이가 짚고 가는 지금, ‘세월을 담은’‘기다림만 가득하다’고 한다. ‘첫사랑’,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그 첫사랑의 행복은 이미 깃을 잃고 추락한 행복일 뿐이다. 천하의 백거이도 - 첫사랑이었던,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했던 - “남몰래 이별”하는 사랑을 했다.   潛別離/白居易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울 수 없어요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말할 수 없어요 남몰래 사랑해야 하기에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몰라 깊은 새장 한밤에 갇혀 홀로 깃든 새 봄날 날카로운 칼날에 잘린 연리지 황하 강물 탁하지만 맑아질 날 있고 까마귀 머리 검지만 희어질 날 있으리 오로지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우리 만날 기약 없음을 감수해야 하리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7-21
  • 바깥잠/ 구미정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바깥잠/ 구미정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까맣게 쏟아진 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보다 무거운 버스 요금 앞에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을 본다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신발이 된 사내는 눈 감아야 보이는 세상으로 걷는다. 흔들흔들 기점을 돌아온 원점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바깥잠 사내가 내렸다 비를 몰고 바람이 휘돌아 간다   * 월간 시 31회추천시인상     -------------------------------------- 스스로, 아님, 사회적 제도, 또는 의도치 않게 소속된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인생이 끝났다거나, 낙오되었다고 할 수 없다. 스스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타인에 의했을 경우는 힘들겠지만, 스스로 마음을 접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화자는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까맣게”쏟아진다며 왠지 어두운 분위기를 예감한다. 그때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그 무게가 버스 요금보다 무겁다고 하는 “바깥잠”이 승차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어쩜 IMF 이후부터 우리의 주변, 특히 지하철 역, 공원의 벤치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등에 얹힌 짐”과 “양손에 든 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속에 옷가지와, 딱딱한 바닥에 펴고 자야 할 이불 같지 않은 이불 등이 순서도, 질서도 없이 빼꼭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저들이 살아오면서 일구고 가꿔놓은 삶의 텃밭과 경작지, 그 위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화자는 이미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하는 그의 말이 차라리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줄임표(……)”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언어 너머의 뜻(言外之意)을 알아차린 시인은 신호등의 불빛처럼 번뜩이며 반짝이는 시선으로 “바깥잠”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은 머리로 사는 게 아니라 심장의 고동으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비참하게 된 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화자의 시선은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대중교통인 버스를 운행하면서도 “바깥잠”을 살펴보는 화자는 버스 요금을 내지 않고 승차한 ‘무임승차’너머의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출근길 내리는 비의 모습을 “툭!/ 툭”’으로 행갈이 해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느낌을 더해주었고, 또한 “툭”이라는 단어 옆의“!” 은 빗방울을 형상화 시킨 일종의 상형의 그림시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It’s raining」처럼 도형화시켜 “바깥잠”의 메마르고 황폐한 그의 가슴속에, 그리고 영양실조 걸린 고요한 혈맥에 한 줄기 수액으로 내리게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빗줄기의 리듬을 자장가 삼은 그가 잠이 들었다.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자는 쪽잠일지언정 어쩜 그는 “호접몽”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왜냐면, 어린 날의 기억들이 꿈속에서나마 떠올라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나비가 나였는지 내가 나비였는지 비몽사몽간에 기점으로 돌아온 버스에서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욕망으로 가득한 숨을 허공을 향해 내쉬고 있는 세상 속으로. 사회적, 또는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좀 허름하고 허술하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정신까지 허름, 허술하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인간의 정신은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 등이 단순하지 않다. 커다란 저택에 살든 지하 쪽방에 살든, 삶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본질을 떠나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것으로 가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점을 익히 경험했던 것 같고 더 나아가 스스로 내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지혜는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록 가난할지언정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는 누구의 말대로 ‘우아한 가난’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대체수단을 통해서 실천해야 한다. 참으로 어렵고 어렵지만 어찌하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은 되지 않은가?   디오게네스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줄이기 위해 노숙인보다 못한 생활을 자처했다 한다. 그 어딘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의 소유를 거부해버리는 게 그의 삶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바깥잠”은 노숙인의 삶으로만 반드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표층적인 그의 겉모습이 아닌 심층적인 내면에는 또 다른 디오게네스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추구했던 “가지지 않은 것처럼 가져라”라는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 수준 이하의 경제적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인간성마저 말살과 동의어로 부추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람이 비를 데리고 휘돌아 가게 하고 있다”젖지 않고, 춥지 않게. “바깥잠”을 향한 화자의 시선이 따스하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6-22
  • 생의 바다/이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생의 바다/이부자   전철 속 마주한 군상들이 졸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눈꺼풀 위에 얹고 찰나 충전의 시간   내리실 손님은 오른쪽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놀란 인생의 주인 황망히 뛰어내린다. 매달린 삶의 무게를 달고   몸부림치듯 세파를 가르며 종일 피라미만큼의 생존의 떡과 노래미 같은 자식을 위한 처절함과 지친 무릎, 힘을 다해 바다로 간다.   생존으로 흘린 눈물처럼 짜디짠 생의 바다로 간다   시집 <생의 바다를 건너다>. 에세이아카데미. 202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우린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중요하다. 더욱이 속도전 시대에는 압박감과 억압감 때문에 자칫 자기만의 리듬감을 잃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한낱 부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독서, 등산, 낚시, 숲길을 거닐거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쉽사리 실행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삶의 향기를 갖지 못하고 어떤 삶의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기는 천천히 걸어야 맡을 수 있고, 내 몸에 향기가 머물 수 있다. 그러나‘생의 바다’에 던져진 거친 삶, 먹고사니즘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바다’에 던져진 우린 삶의 영위를 위해 출근을 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의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삶의 눈꺼풀 위에 얹고” 졸음이 순간적으로 온다. 그 찰나적 시간 속에서 눈을 뜨면 대부분 한두 정거장 전이거나 한두 정거장 더 갈 때도 있다. 이럴 때의 상황을 화자는 “황망히 뛰어내린다.”라고 한다. 늘 그렇듯 친절한 안내 방송은 변함이 없다. 특히 출퇴근 시간, 붐비는 역에서는 어쩌다 신발 한 짝 벗겨지면 그대로 인파에 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듯 어깨에 “매달린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린, 먹고사니즘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광경을 다람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쳇바퀴 돌 듯”이라고 하지 않을까.   주변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위해 “세파를 가르며” , “무릎”에 힘을 다해 삶의 터전인 고해의 바다로 향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다고 보면 벌써 눈앞에 또 다른 고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이다. 정말 ‘삶의 리듬감’과 ‘향기 있는 삶’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속도와 경쟁의 시대,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느낌 있고 향기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리듬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경쟁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좀 더 여유 있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자. 삶의 향기와 삶의 리듬감은 속도감과 욕심이 앞서면 저 멀리 사라진다.   장자는 입신출세를 주장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 자아를 비우고 세상에 노니라고 한다. 허기유세虛己遊世, 얽매이지 말고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이리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라는 책을 썼다.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을 즐기라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좀 의아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방향으로 –주 4일제 – 흘러가는 것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대단히 시스테믹한 사회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던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점에서 좀 특별한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으르고 싶은 권리가 있어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우리에게 스스로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다는 것, “짜디짠/생의 바다로 간다”라며 화자는 시를 끝맺고 있다.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때론 게으르고 느리게 생의 바다를 항해한다면 메말라가는 우리의 허기진 혈맥에 한 줄기 수혈이 될 것이다. 어둠 속 항해는 아직 밝아오지 않는 새벽일 뿐, 비록 고해의 삶일지언정 바다가 품고 있는 욕망은 푸르름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21
  •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속은 뜨겁다. 900도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다가, 뜨겁게 한번 살아보자   다시 냉전이다, 차갑게 식은 우리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그림도 그리고 또 다른, 색색의 옷을 입힌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 지난번, 온몸과 마음을 다 준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1250도 뜨겁게 더 뜨겁게, 밖에서는 모른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갈 일이다   뜨겁게 사랑한 결과물이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깨지지 마라 살아만 있어라, 1250도 불구덩이 속으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들어간다.       시집 <상자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 시선사, 2018. 부천 시소리낭송회 회원   국보310호 백자 달항아리   ---------------------------------------   흙을 구워서 만든 넓은 의미의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나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고, 섭씨 700~1000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지고.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고 유약을 입혀서 섭씨 1000~1100도에서 번조燔造한다. 화분이나 떡시루 같은 기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태토가 유리질화 된 반투명체다.   시적 화자는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번조 하고 있다. 사랑, 모든 예술과 문학, 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결코 삶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중년의 그윽한 눈빛 사랑, 칠십, 팔십 노년에게도 사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고, 대마초와 모르핀 같은 환각제이다. 화자는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뜨겁게 살아보자“ 에서 보듯 사랑은 가마의 불 구덩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자고 한다. 도자기기가 불의 예술이듯 사랑 또한 불꽃의 타오름이다.   기물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한다. - 요즘은 가스가마, 전기가마 사용하기에 그렇지 않다 – 사랑 또한 한 번 빠지면 입구나 출구가 없다.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기에 형체가 있어도 볼 수 없다.   더 아름답고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표면에 얇은 유리질막, 즉 유약을 덧씌운다. 이것은 광택과 색깔을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색색의 옷을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예뻐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변신을 하듯이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결말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한다.   시인은 사람과 언어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더 나아가 우주와 존재를 이어주는 큐피드이자 헤르메스가 된다. 점진적인 불꽃의 소멸로 인해 태어난 도자기란 존재는 불꽃의 울부짖음이듯, 시 또한 시인 자신이 소멸하면서 모든 걸 포용하며 탄생한 존재의 울음이다.   드디어 사랑의 완성을 위해 1250도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마, 승염식이든 오름 가마든 상관없이 어떠한 작품이 완성될지 모른다. 다만,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에서 보듯 ‘달항아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뜨겁게 타오른 사랑이라는 가마 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듯 말이다.   달항아리는 너무 커서 물레에서 한 번에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아래의 몸통을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빚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반듯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달항아리는 정형화된 조형미보다는 부정형의 달덩이 같은 항아리가 구워진다.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졌을 때의 기묘한 빛깔을 낸다. 그래서 같은 백자 달항아리도 乳白, 牙白, 純白 등등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자는 단순 명료한 사랑보다는 둘 사이의 사랑은 단조롭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색상으로 조각조각 붙여 만든 조각보, 상보 같은, 치맛자락, 바짓자락을 끌고 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도자기도 구우면서 생기는 빙렬(氷裂)로 인해 더 가치 있듯이 사랑 또한 때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는 엷은 틈새 같은 식은태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보면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라고도 했다. 1250도의 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고, 영웅이 아닌 민초의 삶일지라도 “그냥 깨지지 말고”,“살아만 있어라”이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고 경건함이다.   온몸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예술인, 문학인일지라도 결코 진정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멀쩡한 눈을 멀게 하고, 사막에서도 촉촉한 이슬을 맺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힘,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사랑부터 하자’그 사랑에 에고이즘이 싹을 트면 둘 사이의 융복합은 현실적으로 멀어진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이 동반되더라고 사랑하자.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   화자는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기 위한 과정에서‘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떠 올리며 달항아리 굽듯 사랑의 달항아리를 희망하며 가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 어린 히틀러 마져도 에바 브라운에게는 순정으로 대해주었고, 하물며 베를렌느와 랭보, 그 둘의 사랑은 동성애를 나눴던 사이였다. 그뿐인가, 백석의 사랑 ‘자야(김영한)’는 그 짧은 동거 끝에 이별하고 평생을 잊지 못해 지금의 성북동에서 요정집을 운영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그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지금은‘길상사’로 변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렇게 해서 잉태된 자야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10
  •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만 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 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 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찌’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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