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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의 바다/이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생의 바다/이부자   전철 속 마주한 군상들이 졸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눈꺼풀 위에 얹고 찰나 충전의 시간   내리실 손님은 오른쪽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놀란 인생의 주인 황망히 뛰어내린다. 매달린 삶의 무게를 달고   몸부림치듯 세파를 가르며 종일 피라미만큼의 생존의 떡과 노래미 같은 자식을 위한 처절함과 지친 무릎, 힘을 다해 바다로 간다.   생존으로 흘린 눈물처럼 짜디짠 생의 바다로 간다   시집 <생의 바다를 건너다>. 에세이아카데미. 202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우린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중요하다. 더욱이 속도전 시대에는 압박감과 억압감 때문에 자칫 자기만의 리듬감을 잃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한낱 부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독서, 등산, 낚시, 숲길을 거닐거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쉽사리 실행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삶의 향기를 갖지 못하고 어떤 삶의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기는 천천히 걸어야 맡을 수 있고, 내 몸에 향기가 머물 수 있다. 그러나‘생의 바다’에 던져진 거친 삶, 먹고사니즘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바다’에 던져진 우린 삶의 영위를 위해 출근을 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의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삶의 눈꺼풀 위에 얹고” 졸음이 순간적으로 온다. 그 찰나적 시간 속에서 눈을 뜨면 대부분 한두 정거장 전이거나 한두 정거장 더 갈 때도 있다. 이럴 때의 상황을 화자는 “황망히 뛰어내린다.”라고 한다. 늘 그렇듯 친절한 안내 방송은 변함이 없다. 특히 출퇴근 시간, 붐비는 역에서는 어쩌다 신발 한 짝 벗겨지면 그대로 인파에 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듯 어깨에 “매달린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린, 먹고사니즘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광경을 다람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쳇바퀴 돌 듯”이라고 하지 않을까.   주변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위해 “세파를 가르며” , “무릎”에 힘을 다해 삶의 터전인 고해의 바다로 향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다고 보면 벌써 눈앞에 또 다른 고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이다. 정말 ‘삶의 리듬감’과 ‘향기 있는 삶’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속도와 경쟁의 시대,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느낌 있고 향기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리듬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경쟁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좀 더 여유 있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자. 삶의 향기와 삶의 리듬감은 속도감과 욕심이 앞서면 저 멀리 사라진다.   장자는 입신출세를 주장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 자아를 비우고 세상에 노니라고 한다. 허기유세虛己遊世, 얽매이지 말고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이리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라는 책을 썼다.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을 즐기라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좀 의아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방향으로 –주 4일제 – 흘러가는 것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대단히 시스테믹한 사회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던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점에서 좀 특별한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으르고 싶은 권리가 있어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우리에게 스스로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다는 것, “짜디짠/생의 바다로 간다”라며 화자는 시를 끝맺고 있다.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때론 게으르고 느리게 생의 바다를 항해한다면 메말라가는 우리의 허기진 혈맥에 한 줄기 수혈이 될 것이다. 어둠 속 항해는 아직 밝아오지 않는 새벽일 뿐, 비록 고해의 삶일지언정 바다가 품고 있는 욕망은 푸르름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21
  •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속은 뜨겁다. 900도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다가, 뜨겁게 한번 살아보자   다시 냉전이다, 차갑게 식은 우리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그림도 그리고 또 다른, 색색의 옷을 입힌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 지난번, 온몸과 마음을 다 준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1250도 뜨겁게 더 뜨겁게, 밖에서는 모른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갈 일이다   뜨겁게 사랑한 결과물이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깨지지 마라 살아만 있어라, 1250도 불구덩이 속으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들어간다.       시집 <상자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 시선사, 2018. 부천 시소리낭송회 회원   국보310호 백자 달항아리   ---------------------------------------   흙을 구워서 만든 넓은 의미의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나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고, 섭씨 700~1000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지고.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고 유약을 입혀서 섭씨 1000~1100도에서 번조燔造한다. 화분이나 떡시루 같은 기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태토가 유리질화 된 반투명체다.   시적 화자는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번조 하고 있다. 사랑, 모든 예술과 문학, 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결코 삶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중년의 그윽한 눈빛 사랑, 칠십, 팔십 노년에게도 사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고, 대마초와 모르핀 같은 환각제이다. 화자는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뜨겁게 살아보자“ 에서 보듯 사랑은 가마의 불 구덩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자고 한다. 도자기기가 불의 예술이듯 사랑 또한 불꽃의 타오름이다.   기물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한다. - 요즘은 가스가마, 전기가마 사용하기에 그렇지 않다 – 사랑 또한 한 번 빠지면 입구나 출구가 없다.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기에 형체가 있어도 볼 수 없다.   더 아름답고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표면에 얇은 유리질막, 즉 유약을 덧씌운다. 이것은 광택과 색깔을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색색의 옷을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예뻐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변신을 하듯이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결말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한다.   시인은 사람과 언어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더 나아가 우주와 존재를 이어주는 큐피드이자 헤르메스가 된다. 점진적인 불꽃의 소멸로 인해 태어난 도자기란 존재는 불꽃의 울부짖음이듯, 시 또한 시인 자신이 소멸하면서 모든 걸 포용하며 탄생한 존재의 울음이다.   드디어 사랑의 완성을 위해 1250도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마, 승염식이든 오름 가마든 상관없이 어떠한 작품이 완성될지 모른다. 다만,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에서 보듯 ‘달항아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뜨겁게 타오른 사랑이라는 가마 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듯 말이다.   달항아리는 너무 커서 물레에서 한 번에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아래의 몸통을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빚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반듯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달항아리는 정형화된 조형미보다는 부정형의 달덩이 같은 항아리가 구워진다.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졌을 때의 기묘한 빛깔을 낸다. 그래서 같은 백자 달항아리도 乳白, 牙白, 純白 등등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자는 단순 명료한 사랑보다는 둘 사이의 사랑은 단조롭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색상으로 조각조각 붙여 만든 조각보, 상보 같은, 치맛자락, 바짓자락을 끌고 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도자기도 구우면서 생기는 빙렬(氷裂)로 인해 더 가치 있듯이 사랑 또한 때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는 엷은 틈새 같은 식은태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보면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라고도 했다. 1250도의 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고, 영웅이 아닌 민초의 삶일지라도 “그냥 깨지지 말고”,“살아만 있어라”이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고 경건함이다.   온몸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예술인, 문학인일지라도 결코 진정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멀쩡한 눈을 멀게 하고, 사막에서도 촉촉한 이슬을 맺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힘,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사랑부터 하자’그 사랑에 에고이즘이 싹을 트면 둘 사이의 융복합은 현실적으로 멀어진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이 동반되더라고 사랑하자.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   화자는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기 위한 과정에서‘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떠 올리며 달항아리 굽듯 사랑의 달항아리를 희망하며 가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 어린 히틀러 마져도 에바 브라운에게는 순정으로 대해주었고, 하물며 베를렌느와 랭보, 그 둘의 사랑은 동성애를 나눴던 사이였다. 그뿐인가, 백석의 사랑 ‘자야(김영한)’는 그 짧은 동거 끝에 이별하고 평생을 잊지 못해 지금의 성북동에서 요정집을 운영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그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지금은‘길상사’로 변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렇게 해서 잉태된 자야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10
  •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만 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 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 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찌’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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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7
  •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세월호 100일 후,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가 있었다   이것은 구명조끼의 아랫단을 묶고 나란히 피아노 속으로 걸어간 메아리들에 대한 이야기   제1의 조명탄이 반복적인 아르페지오로 이름을 부른다 제2의 조명탄이 트릴로 따라간다 제3의 조명탄이 물 위에 손을 얹고 밤바다를 어루만진다 제4의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낸다 제…… 10의 조명탄이 누구도 함부로 잊혀서는 안 된다고 물의 지문을 센다 아가야 내 아가 ……. 제50의 조명탄이 물비늘 빛나는 보름사리의 먼 바다에까지 이름을 찾는다 ……. 제100의 조명탄이 흰 갈기로 일렁인다……. 제200의 조명탄이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인다……. 제300번째 조명탄 아래 깊게 눌린 검은 건반이 마지막 이름을 부른다 어둠 속에서 뒤척이며 한껏 멀어진 양손을 건반 한가운데로 모은다……. 제304번째의 조명탄이 오른손으로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풍랑을 쓰다듬는다   영혼들의 격랑이 창백해진 물보라로 일어선다 수평선 너머 선율이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물의 건반과 한 몸을 이룬다. 건반 위로 오른 울음들이 물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제주 제7항구로 내달리는 유속이 빨라진다 산맥처럼 몰려든 터지지 않는 울음, 물의 흰 건반이 일제히 물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앉는다 해저 수만 마일 아래 갇힌 발목들을 인양중이다 다 못 읽힌 악보가 다치지 않도록 겉봉투를 뜯는 세심한 파문, 파문들 심해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빛의 날갯짓, 회오리치던 조류와 수평을 맞춘 피아노 선율의 밀물이 긴 잠의 귓전에 가 닿는다   상현달이 양의 뿔처럼 밤하늘에 걸린다   *바그너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곡       시집 <사라진 포도월>. 현대시. 2020   NEWSIS에서 가져옴-편집자 주  ------------------------------------------------------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8월 중순 오후, 팽목항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깃발과 애도의 글들이 휘날리고 즐비했다. 평소 같으면 듣기 좋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 소리가 갑자기 곡비의 슬픈 곡조 같았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은 아픈 상처 부위에 염장을 했었다.   건축가 노베르 그 슐츠는‘장소의 魂’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장소에 스며든 喜怒哀樂과 삶의 발자취, 역사가 켜켜이 쌓아져 만들어진 장소를 말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필자가 찾은 ’장소의 혼‘인 팽목항은 喜樂’은‘세월호’와 함께 심연으로 수장되고 오직‘怒哀’만이 찾는 이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을 뿐이었다.   화자는 기억하기도 싫은 커다란 참사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를 소재로 시상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바닷속 깊이 잠들었을, 그들을 찾기 위해 불 밝히는 조명탄을 음악적 이미저리로 끌어와 감각적인 전개를 하면서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를 함께 상기시킨다.   ‘조명탄’은 아르페지오로 음을 펼치고 이름을 부르면서, 트릴의 물결로 이어간다. 밤바다를 어루만지고, 조명탄은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질치고, 드디어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 낸다’ 피아노 건반은 ‘파와 솔’, 시와 도‘사이는 ’검은건반‘이다. - 여기서‘검은건반’은 죽음을 의미한 또 하나의 장치다 -. 그러면서 지문을 세어보며‘아가야 내 아가…….’라고 오직 부모만이 성인의 자식에게 호칭할 수 있는 부르짖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부르며 찾고 찾는다. 이 얼마나 침통하고 애절한 시상의 전개인가.   그리고 마지막 304번 째의 조명탄은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풍랑을 어루만짐에서 보듯이 화자는 청각적 상상력과 촉각적 이미지의 씨 날줄로 직조한 한 필의 진혼곡을 헌정하고 있다.   “갑작스런 죽음은 혼을 동요시키고 적의나 원한을 품게 한다. 생명이 갑자기 끊어졌을 때 죽은 자의 혼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 근처에서 일상생활로 남겨진 일들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상상한다.”  -엘리아데의 글 부분-   그렇다. ‘갑작스런 죽음’, 아이(자식)를 잃은 슬픔과 고통,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하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시켜 끌어안고 그냥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차라리 자학하며 살아가는 수준일 것이다. 슬픔, 아픔, 고통의 크기와 넓이를 낮추고 줄이며 오직 버틸 뿐, 누구의 哀悼(애도)도 동정도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며 …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봇물 터지듯 치솟으면 큰 사고 나고, 언어 또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고 거친 언어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터지고 넘치는 물과 언어의 함수 관계. 낮고 비좁은 천막에서‘물의 잠을 위해 아르페지오’를 뜯는 유족들 곁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고 누군가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향해 징그럽게 (?)쳐 먹는다고 했잖은가.‘물과 언어’ 물속은 생명수가 넘쳐야 하고 사람의 말속에는 숨겨진 신비와 비밀이 있어야 하는데 불순물과 광기 서린 언어가 웬 말인가. 세월호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을 규탄하고 비난하는 사회, 그렇게 만연되어 있는 선과 악의 顚倒(전도)를 우린 이미 目睹(목도) 했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생각보다 인간은 잔인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일 때 보다 집단적일 때 잔인성은 더한 것 같다. 중세시기 이단자로 내몰린‘마녀재판’이 성행하면서 화형 시키는 무렵의 수사형(水死刑)이 떠올려진다. 물에 던져진 여자가 떠오르면 마녀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고, 가라앉아서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끝이다. 시인이 읊조리고 있는 시상을 펼쳐보며 수사형(水死刑)이 떠 올려지는 것은 비단 필자일 뿐일까.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영양괘각羚羊掛角’을 떠올리는 게 하는 한 행으로 마무리를 한다. 송나라 엄우의 시론서인 <滄浪詩話>에 나온 얘기다. 영양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 발자국 흔적을 없앴듯이 탄생의 발자국인‘죽은 자의 이름’을 상현달의 뿔에 걸어 버렸으니 흔적이 사라질 수밖에. 이렇듯 화자는 죽은 혼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상현달 바라보고 있다. 밤하늘에 걸린 그 상현달을.     https://www.youtube.com/watch?v=2jMdRxeZEkQ (백건우가 당시 연주했던 곡 중 하나인 ‘비창’)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2
  •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민들레 홀씨로 피어나다”
     부천시는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개발하고 상표출원을 완료했다.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영문명칭 Bucheon Diaspora Literary Award, 이하 문학상)은 국제 문학상을 말한다. 이는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 네트워크와 함께 문학을 통해 세계의 연대와 환대, 협력의 정신을 고양하고자 제정한 것이다. 현재 2021년 첫 수상작 선정과 제1회 시상식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아울러, 부천시에서 이번에 개발한 문학상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바람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낯선 땅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홀씨’를 모티브로 한다.   흩날리는 홀씨는 디아스포라의 확장성과 창의성,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또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고 분열된 세계를 잇고자하는 디아스포라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부천시는 이를 친숙하게 전달하고 응용이 가능하도록 문학상 명칭(워드마크) 대신 이미지(심볼마크) 중심으로 로고를 디자인하였다. 시는 2월부터 문학상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바탕으로 상패 디자인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다.     한편‘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은 한국어나 영어로 출판된 현존 작가의 디아스포라 주제 장편소설이 심사대상이다. 총 상금은 6,000만원 (작가 5,000만원, 번역가 1,000만원)으로, 매년 1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시상할 예정이다.   아울러 제1회 문학상의 경우 현재 작품 접수와 예비심사(추천위원회)를 거쳐 올 1월부터 본심사(심사위원회)에 돌입했다. 심사위원회 심사가 완료되면 문학상 운영위원회 승인을 거쳐 7월 중에 첫 번째 수상작을 결정한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위원 명단과 최종후보작(shortlist, 최대 12개 작품)은 수상작 발표 시 함께 공개하며, 상패 디자인 역시 함께 발표한다. 시상식은 10월 중 개최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부천문학창의도시 블로그(https://blog.naver.com/bucheon_unesco)에서 확인하면 된다.  
    • 예술/창작
    • 영화/만화
    2021-02-03
  • 책 읽는 시민, 2021년 ‘부천의 책’ 선정
    부천시는 시민과 함께 ‘2021년 부천의 책’을 선정했다. 2021년 부천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는 ▲일반분야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팩토리나인)’, ▲아동분야 ‘담을 넘은 아이(김정민, 비룡소)’, ▲만화분야 ‘연의 편지(조현아, 손봄북스)’ 다.          도서선정위원회는 10월부터 시민 공모와 독서 관련 기관을 통해 추천받은 총 528종 800권의 도서 가운데 일반, 아동, 만화 분야별 5권의 후보도서를 선정했다. 이후 53개소 투표판과 홈페이지를 통해 시민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분야별 후보도서 2권을 추렸다. 지난 19일 시민선정단과 도서선정위원이 참여한 가운데 온라인으로 비대면 투표를 실시하여 최종 ‘2021 부천의 책’3권을 선정했다.   ‘2021 부천의 책’ 도서선정위원회 고경숙 위원장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어려운 시기에 희망 쪽을 바라보면서 세대 간 주제를 놓고 토론할 수 있는 세대를 관통한 책”이라며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꿈은 있어도 현실의 상황이 많이 비껴간’ 사람들이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어떤 꿈을 살 것인지 토론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독서 내내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아동분야 시민선정단 주어진 어린이는 “<담을 넘은 아이>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며 “내 안에 오랜 시간 있었던 담을 넘어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마음을 합쳤던 효진이와 선비, 푸실이처럼 모든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도서선정 위원 김종옥 위원은 “만화 분야 <연의 편지>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해, 폭력성의 과도한 노출보다는 폭력의 현장에 제3자로 존재하는 무수한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라며 “학교폭력을 둘러싼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통해 ‘선한 영향력’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냈으며 정감 가는 그림체와 아름다운 색감으로 만화적 완성도를 높인 따뜻한 작품”이라고 추천 사유를 설명했다.   시는 2021년 1월 중 ‘2021 부천의 책’을 누구나 읽어볼 수 있도록 부천시립도서관, 작은도서관, 학교 등에 비치할 계획이다.   부천의 책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추진한다. 2월부터 부천의 책 선포식과 작가와의 만남 북 콘서트를 시작으로 독서 릴레이, 작가초청 강연회, 찾아가는 독서 토론회, 청소년 독서 캠프까지 약 8개월간 범시민 독서 운동을 펼쳐 책 읽는 문화도시 부천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부천시립도서관 홈페이지(www.bcl.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23
  • 여행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행 / 조은영 날마다 같은 길 걸으며같은 얼굴 바라보며    익숙한 풍경 속엔나는 없고 남루한 습관만 남아더 이상 퍼 올릴 수 없는빈 우물   메마른 마음 밭 사막이 될 때저만치 기다리는 오아시스신기루일지라도    우리가 두고 온 가지 않은 길그 갈림길 근처 잠시배회해 보며나도 모르는나를 만난다. <은유의 속내>, 산과들, 2020   성주사지 터 3층 석탑. 2020/10/31, 사진/홍영수              지금은 기술복제의 시대이다. 또 한 CCTV 등, 어느 곳, 어느 위치에서도 감시하기도 하고 또한 당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 제한하고, 족쇄가 되어 가두리 양식장에 양식되어가며 서로가 물어뜯고 어울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정보화 시대, 핸드폰, 컴퓨터 등에서의 SNS, 유투브 등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정보사회에서 딱 꼬집을 수 있는 중심 사조가 없이 시각과 촉각만을 자극하는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고독과 적요의 공간에 갇히게 된다. 이럴 때, 매일 반복되는 시계추 같은 획일화된 일상의 시스템을 벗어나 앙리 마쇼의 시학 같은 무브망mouvement이 필요하다. 움직임의 여행이다. ‘자유함’이고 ‘떠남’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가정은 안식처이자 곧, 감옥이다”했다. -─ 이율배반적 표현 속 존재의 양면성을 얘기한 것이리라 ─   가정에서‘안식’과 ‘감옥’의 불편한 동거는 서로를 갉아먹고 서로에게 기댄다. 이미 성장해버린 자식들과의 거리에서 오는 괴리감, 작금의 데이터 황사 현상, 자욱이 안개 낀 정보의 바다에서 화자는 난파된 자의식을 이렇게 발견한다. “날마다 같은 길 걸으며/같은 얼굴 바라보며”라고 하면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겉치레로 살지 말고, 비본질적으로도 살지 말고, 마땅히 되려는 것을 살라” 했다. 그렇다. “나는 없고 습관만 남아”에서 보듯 화자는 이미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붕어빵 같은 삶에서 ‘실존’이나 ‘참나’를 퍼 올리고 싶어 한다. 비록 “빈 우물”에서일지라도. 필자의 책장 위에 있는 많은 LP판의 곡들은 잠들어 있다. 소리로 탄생하지 않은 음악은 죽은 것이다.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순간 살아나며 비로소 음악이 된다. ‘여행’, 마음과 머릿속에 머물게 하지 말고 단어 그대로 떠나자. 그때가 비로소 여행의 시작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왠지 혼자인 것 같고, 외롭기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어서이다. 그것은 메마른 황무지이며 사막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자는 “오아시스”를 찾아 건조된 영혼에 촉촉한 수분을 적시고 싶어 한다. 비록 가보면 여전히 사막인 ”신기루일지라도“.   영혼이 휴식할 수 없는 공간, 그것은 세트장이며 박제된 공간일 뿐이다. 변화 없는 공간은 재빨리 포맷해야 한다. 인생은 놀라우리만큼 짧다. 뒤돌아보면 섬광처럼 훅 지나가고 만화 책장 넘기듯 순식간이다. ”메마른 마음 밭 사막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새로워져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머무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 집시나 노마드가 되어야 한다. 통념과 습관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나는 행위 한다, 고로 존재한다“ 행동으로 옮기자. 떠나자.   ”가지 않은 길“, 예를 들면 외국 여행을 갔을 때 ─화자는 외국 여행을 많이 한 듯하다─ 이국적인 정서와 풍경에서 낯섦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낯섦과 두려움에서 설렘과 신선함, 해방감을 맛보기도 하고 때론 소통되지 않는 언어는 오히려 두려움보다는 소통할 수 없어 차라리 자유함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복잡다단하게 머리도 굴릴 필요도 없다. 여행이 가져온 즐거움이고 해방감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곰팡이 핀 우유병을 빨지 말고 낯섦과 설렘의 싱싱한 여행의 젖을 빨자.   보통 여행하면 관광지 구경이나 기념물, 유적,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가지고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행의 즐거움은 우연히 마주친, 또는 물끄러미 바라본 그 무언가에서 포착되는 시선의 파편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도시인이 산촌을 가든지, 시골 사람이 대도시를 오던지 자기들의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나도 모르는 나를 만난다“와 같이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떠나면 비로소 만나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이 바로 ‘새로운 나’가 아닐까.   원고를 쓰면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본다. 그때 밑줄 그어놓은 존 러스킨의 얘기다. 그는 여행하면서 스케치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을 굳히려면 “말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방법 즉, ”잔디는 녹색이고, 땅은 회색을 띤 갈색이었다“뿐 아니라 그 장소를 심리적 언어로 분석하는 ”풀은 대담해 보이고, 땅은 소심해 보였다“라고 ”“말 그림“으로 표현하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이다. 시인이 새겨둘 얘기다.   여행하며, ‘종묘’에서 유교의 지문을 보았고, 최근에 다녀왔던 보령의 ‘성주사자 터’에서는 신라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17
  • 인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생/명실   쌓여지는 날들의 두께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       *부천 디카시 회원     ---------------------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다가오고 누군가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어떤 인생살이는 하루하루가 새털처럼 가볍고 날아갈 듯한 세월이라면 또 다른 인생은 세월의 무게가 천만 근의 짓누름으로 깊은 심연만큼이나 버거울 것이다. 삶이란 그렇듯 시대적, 개인적인 상황 논리에 따라 공통분모가 있고 교집합이 있고, 배타적,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한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시가 시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시인의 삶 또한, 시로 연결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없다. 어쩜 시인은 줄 아래의 땅과 줄 위의 허공 사이에서 어름을 타는, 시와 삶 사이를 아슬아슬 버티고 서는 어름사니가 아닌가 싶다.   시인의 눈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메마른 나무가 표의 문자로 다가오기도 하고 하얀 눈이 쌓인 초가지붕의 이미지에서 시라는 문자의 옷을 입기도 한다. 조선 시대 대학자 정인지는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을진대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을 것이다”했다. 어쩜 조선 초기에 이미 디카시를 예언한 말 같이 들리기도 한다. 특히 디카시를 쓰는 시인은 눈에 잠기고, 담긴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짧은 시행으로 시의 혼을 불어넣을 때 무겁고 버겁게, 때론 가볍게 다가올 것이다.   화자의 바로 눈앞에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상징하는 일력日曆이 놓여 있다. 하루가 지나면 젊은이들은 그냥 의미 없이 확 찢어 버릴 얇디얇은 하루를 화자는 모아 모아 놓고 비록 지난 날일 망정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그런데 그 풍경이 풍경으로 보인 게 아니고 인생살이의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한 스투디움이 아닌, 푼크툼으로 확 박힌 것이다.   바로 지난 하루(16일)와 지금의 오늘(17일) 사이에서 꾹 집어놓고 바라본 저 두께, 그래서일까 17일의 하루는 반듯한데 지난날들은 지나갔다는 듯 옆으로 돌려놓았다. 저렇게 쌓인 날들의 웅변하는 침묵 속에서 디카시라는 침묵의 울림으로 화자는 단단히 깊어져 가는 삶을 건져 올리고 있다. 화자는 분명 무거운 나이이다.   8월,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날이다. 더구나 17, 18일이면 중순이다. 얼핏 보아도 탁상용 일력日曆이 분명하다. 한 주의 쉼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인 17일 맞는다. 아니, 어쩜 하루가 기우는 오후쯤, 일요일의 휴식 한 장을 떼어내어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하루라는 종잇장도 감정을 잃고 붉게 물들어 일요일로 누워있다. 하루하루의 시간과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두께도 꽤 두터워 보인다. 화자는 그 지난날을 “쌓여 지는 날들의 두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두꺼운 만큼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이라 얘기하며 시제의 제목처럼 “인생”을 “두께”와 “단단하고 깊은 삶”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뜯어내어 차곡차곡 쌓아 놓은, 흘러가면서 존재하는 시간과 세월 속에서.   17일의 날짜에 당나라 시인 우세남의 <매미>의 시가 적혀있어 완본을 옮겨본다.   垂緌飮淸露(수유음청로) 드리운 빨대로 맑은 이슬 마시며 流響出疏桐(유향출소동) 오동나무에서 울음소리 울려 퍼진다 居高聲自遠(거고성자원) 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 非是籍秋風(비시적추풍) 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   혹여 화자는 우세남의 시를 보고 시상을 떠 올렸을지 모른다.“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했듯이 화자는 인생이란 그 무엇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두터워져 가는 삶이 바로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만물은 生成하고 死滅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 잡고 막을 수 없으며 시간 또한, 멈출 수도 없다. 이렇게 소멸하고 생성하는 커다란 자연 앞에서 일력이라는 자그마한 이미지를 보고 ─다소 거창하고 과한 듯한─ “인생”을 발견한다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다.   디카시에서 이미지는 시인의 의식 속에 내재 되어 문자 언어와 함께 태어난다. 그러므로 문자와(시)와 이미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디카시가 성립된다. 이렇다고 할 때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문자에 예시되지 않고 문자 또한 이미지를 설명하듯 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곧 이미지가 문자이고 싶어하고 문자가 이미지이고 싶어 할 때 좋은 디카시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론이나 시학에 앞서 태초부터 대자연의 수북한 풍경이 주는 주머니 속에서 시혼을 일깨워 끄집어내는 시인들의 생각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이다. 저 얇고 엷은 종잇장과 셰익스피어는 “간결은 지혜의 상징”이라 했듯이, 단 2행의 글 줄 앞에 여백마저 시이게 하는, 그래서 진한 페이소스가 전해오는 한 편의 디카시다.   디카시는 이미지의 언어로 빚는 장엄한 시혼이 아닐까.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09
  • 텅 빈 가슴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텅 빈 가슴/조용수    새벽 세 시 현관문 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옆자리가 허전하다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 고요한 이 밤   바람 마중 갔다 온 것인지 냉기가 돈다 들어오자마자 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 애써 잠을 청하며 누웠는데 감기지 않는 눈가 촉촉하고 엄마 부르는 소리 기다리는 두 귀 쫑긋 세운다 적막이 흐르는 새벽 창가에 비친 달과 별빛도 가쁜 한숨 소리에 무겁다 소나기라도 세차게 내렸으면        시집 <관성의 법칙>, 시산맥사, 2020.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피에타(Pietà)> 像을 볼 때마다 유난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이다. 여섯 살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이성과 감성은 이미 증발해버리고 오직 고통과 슬픔의 고체 덩어리로 굳어 있다.   어린 자식을 품속에 안고 한 손은 여린 손가락을 만지고, 한 손은 턱에 고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 고고의 성을 터뜨린 분만의 고통을 넘어 또 다른 탯줄을 자른 것 같은 아픔이 혈관을 타고 흐르다 갑자기 멈춰버린 표정이다. 작품의 분위기마저 경직된 우울증으로 박제된 듯하다. 로맹 롤랑은 이 작품을 보고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라고 했다던가.   이른 새벽, 4更에서 5更으로 접어든 시간‘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이른 출근일까 아님, 야근 뒤의 퇴근일까.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하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걸 보면 밤새워 근무하고 퇴근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옆자리가 허전하다.’고 한다. 화자의 옆지기가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들어오자마자’,‘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를 보면 그렇다.    왜 하필이면 ‘빈방’일까. 그리고 왜 ‘한숨 짓는’ 것일까. 우린 시상의 전개에서 慘慽(참척)의 아픔과 슬픔을 알 수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 특히 엄마의 심장은 아픈 기억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고 자식을 잃은 슬픔은 되새길수록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비록 인생살이가 生住異滅(생주이멸)의 변화 속 삶일지라 하더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는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어 잠을 못 이루고 늘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아니라 상처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선가 특히 적막의 밤이면 현관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것 같고 창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를 것 같은, 그래서 화자는 ‘두 귀 쫑긋 세운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부를 것 같은 환청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신의 행복을 덜어내서 아니, 다 모아 모아서 자식의 행복에 보태는 것이 부모 마음이기에 더 그렇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죽은 자식도 소생시키지 않을까.   허난설헌의 <哭子(곡자)> 라는 한시 일부를 보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연이어 딸 아들을 잃고서 비탄에 젖어 피눈물 흘리며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 곡진한 슬픔으로 흐느끼는 허난설헌의 극한적 모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句에서는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극한적 슬픔 토로하고 있다. ─ 필자는 경기도 광주, 중부고속도로 아래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소를 두 번 갔다. 그녀의 묘역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봉분이 바로 아들, 딸의 무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면 참척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술을 준비하지 못해 야생화 몇 송이 상석에 놓고 왔다. ─   어찌 콜비츠와 허난설헌만 그랬겠는가. 너무나 잘 알려진 고려 시대 가사인 <청산별곡>에서도 “올리도 갈리도 없는 밤일랑 또 어찌하오리까”에서 보듯 창가에는 별빛 달빛마저 가쁜 숨소리로 울먹이고 있다. 분명히 그가‘올리도 갈리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을 잃은 비애를 읊은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도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와 같은 느낌으로 화자는 ‘별빛 달빛이 가슴 깊이 박히고’ 있는 가운데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를 떠올린 순간 차라리 세찬 소나기라도 맞으며 잠시라도 잊고 싶었을 것이다.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그 다섯 번째의 마지막 강이 ‘레테’이다. 죽은 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망각의 강’이다.   그렇게 전생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온을 얻는다고 한다. 비단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린 세상을 살면서 비탄과 고통, 때론 증오, 분노 등을 겪는데 이런 것들을 대부분 잊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비록 자식 잃은 슬픔이 무엇보다 클지라도 이제는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서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치료를 할 때다. 슬프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지금의 상황에 충실 할 때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결국,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 달을 품은 그 품속에 다시 품은 것이다.   어머니 앞에 자식의 죽음이란 없다. 다만 곁에 없을 뿐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1-28
  • 매창의 무덤 앞에 서다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창의 무덤 앞에 서다/김문배    해마다 배롱꽃은 피고 지는데 세월은 모든 걸 거두어 가버렸네 거문고 뜯던 가냘픈 손가락 그 따스한 온기는 간데없고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던 시절 매창*과 같이한 술상 앞에서 시담을 주고받던 선비의 못다 한 사랑 이야기만 분분하다   봄날 배꽃으로 피어나 백일홍으로 여름을 지내고 가을은 낙엽으로 겨울엔 냉가슴에 따뜻한 불을 지핀 무수한 세월들 한평생 한 몸으로 모자라 뭇 선비의 가슴에 점만 찍는다   누군가 따라 논 무덤 앞 술잔이 외롭지 않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매창공원이 있음   시집 <번짐의 속성>. 문학공간. 2020.     홍영수 시인이 매창의 시비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   ’무릉도원‘이란 공원의 둘레길을 산책했다. 늦가을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무엇으로 불태우길래 저리도 푸를까. 얼마나 잘 연소시켰기에. 내 삶의 대부분은 불완전하게 태워져서인지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고 재채기하며 살아왔는데……   만약에 남녀의 사랑이 이렇듯 불완전 연소가 된다면 굳이 사랑할 이유가 없다. 활활 타올라 남은 재마저 불태워도 모자랄 판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이 아닌 연기만 피운 미지근한 사랑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렇듯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고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져가는 어쩔 수 없는 사랑 아닌 사랑을 해야 하는 기구한 숙명적 사랑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신분이 있다. 바로 기생(통상적 호칭)이다. 필자는 무슨 癖 때문인지 몇 번에 걸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인들의 음택, 그 가운데 기생의 음택을 몇 군데 찾아 답사했다. 이 중에 부안의 매창뜸은 문학단체의 기행 때 어쭙잖은 앎으로 필자가 길라잡이를 했다. 기생의 역할은 고구려 벽화의 무용총에서 보듯 삼국시대부터 歌와 舞를 담당해 왔다.   여성과 남성의 만남. 그때나 지금이나 배신 없는 사랑이 있을까? 하물며 신분의 계급이 뚜렷하고 조선 시대, 그것도 천한 기생의 신분이라면 그 어떤 남성도 마음과 마음으로 엮이어 매듭짓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창 또한 원하면 언제든지 떠나라고 하면서 ‘난 울지 않고, 불평하지 않아요’라고 했지만, 어찌 정분을 주고받는 남녀 사이에 울지 않고, 떠난 자에게 불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한 역설로 읽힐 뿐이다. 평생 촌은 유희경을 사랑하고 그리며 살아서 행복할 것 같았지만 전해지는 그녀의 작품, 한시 57수와 시조 1수 중 한시는 대부분 恨과 기다림이 중심을 이룬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엮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신분, 그걸 받아들인 매창, 그래서 오히려 매창은 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진정한 의미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신분 사회에서 나름대로 거문고를 뜯으며 시조 한 수 짓고 읊조렸던 그녀는 온데간데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매창과 술상을 마주하고 직접 옛 선비가 되어 그녀의 못다 했던 사랑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서화악에 능한 종합예술인으로서 지금까지도 전통무용 등은 계승 발전해 오고 있는데 그들의 신분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던 시절’의 천인 계급이었다. 그렇지만 기생들의 만남은 王侯將相부터 무명의 閑良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화자는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지 않고 21세기의 매창과 술상 앞에 손목을 부여잡으며 ‘시담을 주고받던 선비’가 되어 정담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면 시인의 가슴은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뜨겁고 항상 끓어오르기 때문에. 또한 解語花, 은유와 상징으로 무장한 시인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꽃 앞에서라면 더욱 불타오를 수밖에.   노래 한 곡을 상기해보자. 상징과 풍자가 넘친 고려 시대 속요인 <쌍화점>의 ‘만두가게 회회 아비’, 나 ‘삼장사 절 지주’, ‘술 파는 집 아비’ 등이 한결같이 여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밀애를 나누고 있지 않던가. 더구나 매창과 같은 시서악에 능하고 미인이 - 비록 무덤 앞이지만 – 화자의 눈앞에 謫仙來가 되어 나타나면 천하의 정지상이나 이규보가 그랬듯이 화자 또한 향렴시香奩詩 한 잔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봄날 배꽃’, ‘여름의 백일홍’, ‘가을의 낙엽’, ‘겨울의 냉가슴’ 사계절의 흐름을 그녀의 인생에 이입시켜 꽃, 낙엽, 냉가슴‘ 등의 시어로 표현했다. 어찌 보면 그녀에게 계절은 봄 여름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염염焰焰한 영혼으로 妖妖한 꽃다움으로 홀연히 37세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몸으로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인 가슴에 뭇 선비들이 찍어 놓은 점들뿐이다. 매창의 가슴은 한 폭의 슬픈 점들이 스며든 점묘화로 점철되어있을 것이다. 서경덕과 황진이, 허균, 이귀 등과의 매창, 기생은 이렇듯 수많은 시인 묵객들과의 교류에서 시가 탄생 되어 국문학사에 전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의 대부분 여류시인은 기생들이었다. 사대부들의 도학적 유학적인 시가 아닌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으로 사랑을 노래하기에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뭇 선비의 가슴에 점만 찍는다‘에서 ’점‘은 분명 사랑의 ’점‘임은 분명하다.   천하 미인 西施도 술에 취하면 비실비실하며 취한 모습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다고 했던가. 그렇다. 누구도 매창뜸의 시비 앞에서 서면 묵념의 자세가 아닌 술 한잔을 따르면서 시담도 주고받고, 적당히 취해 ’持花者‘ 하면서 꽃을 쥐고 춤추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십 년도 훨씬 지난 기생 김부용의 묘 앞의 술잔은 여전히 그날의 나를 담고 있을 것이다. ’지화자持花者‘하면서.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1-17
  • 천년 향기-월정사 전나무 숲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천년 향기-월정사 전나무 숲길 강수경   온 우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한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 일주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산도産道를 뚫고 태어난 것인지 한 알 씨앗이 된 것인지   수행자의 상아詳雅한 비질이 품은 숨결 맨발로 전해져 오는 다지고 다져진 연한 흙의 기운 살과 살이 맞닿는 부드럽고 상쾌한 몸살   하늘 향해 뻗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을 침묵 수행자 되어 걷노라면 온몸에 푸른 물이 들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금강교 밑으로 흐르는 우통수 계곡물 소리 넉넉히 품는 사람 되라는 설법처럼 들리고 아리도록 차가운 물에 세족洗足하고 숲길을 돌아 일주문에 닿으면 순풍, 천년 향기로 세상에 던져진다   *계간 미래시학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 회원   오대산 월정사 일주문   필자는 사찰 답사를 자주 하곤 하는데, 어느 해 겨울,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아가는 길에 월정사를 들렀을 때 뜻하지 않게 절간에서 대규모로 김장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선하다. 월정사대가람의 김장하는 울력에서 사찰의 전통을 보았었다.   一柱門은 기둥이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란히 한 줄로 되어있어서 유래된 명칭이다. 넓고, 높게 생각하면 수미산須彌山의 우주관에서 보면 일주문은 향수해 (香水海)를 건너 수미산에 접하는 최하단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화자는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을 가려고 하는 첫 발자국에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産道를 뚫고 태어난 것인지/한 알 씨앗이 된 것인지’이런 찰나적 순간은 일반적으로는 경험하기 힘든 경우인데, 화자는‘순간적 진실의 포착’즉, 어떤 본질이나 사물에 대한 직관이나 통찰인 ‘epiphany(에피퍼니)’를 느낀다. 한마디로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논리나 판단을 벗어난‘순간의 직관, 통찰’ 속에서 어떤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聖과 俗이 분절되는 문 없는 문 일주문에서 화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聖과 俗’, 단절되지만 결코 분절되지 않는 경계에서 어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산도를 통해 생명이 탄생하듯 俗埃의 번뇌로 흩어지고 부수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一心‘으로 豁然大悟하며 화자는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어느 사찰이든 들어서는 초입부터 길과 주변이 항상 정갈하고 티끌 하나 없는 듯하여 찾는 이의 마음이 상쾌하다. 스님의 비질은 수행의 과정이며 비질하는 행위를 보면 수행하는 마음과 불심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비질을 한 절 마당에서 맨발에 스며드는 흙의 숨결을 화자는 느끼고 들이마시며 ’상쾌한 몸살‘의 역설을 체험하고 있다. 온갖 탐욕과 욕망, 증오심과 노여움 등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잃은 어리석음 등의 탐진치貪瞋痴를 비질한 절간에서 화자도 함께 비질하며 쓸어버리고 있다. 그러니 三毒으로 몸살을 앓은 마음이 상쾌할 수밖에 없다.   월정사 가는 전나무 숲길은 고즈넉하고 뭔가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든 숲길이다. 내가, 내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가 되는 길, 말없이 걷기만 해도 전나무의 푸른 잎은 화자를 전나무가 되게 한다. 또 다른 종교적 관점인 케노시스kenosis , 즉 , 자기 비움‘을 통해 내가 전나무가 되고 전나무가 내가 되고 있다. 묵언 수행의 길에서 곧게 뻗은 한 그루의 전나무가 된 것이다. 어찌 부처와 중생이 다르단 말인가. 聖과 俗, 깨달음과 無明이 다르지 않고 나와 전나무가 다르지 않으니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인 不一不二의 세계관을 화자는 숲길을 걷으며 깨닫고 있다.   그리고 한강의 발원지라 알려진 우통수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전나무가 나를 품고 내가 전나무를 품는 넉넉한 현상들이 큰스님의 설법처럼 들려올 때 법열을 느끼며 차가운 계곡물에 화자는 발을 씻는다(洗足).   여기서 좀 아쉬운 점이 있다. 가톨릭의’‘洗足式’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동양의 古典이나 詩文에선 ‘洗眼濯足’이라 하여 얼굴을 씻을 때는 ‘洗’자를 쓰고 발을 씻을 때는 ‘濯’자를 주로 사용한다. 굴원의 <어부사>에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와 조선 중기 화가 이경윤의 ‘高士濯足圖’등이 그렇다. - 오직 필자의 협량한 견해임을 밝혀둔다. -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일주문에 들어선다. 또다시 일주문에 다다른 화자는 어쩜 월정사를 들고, 나옴에서 윤회의 의미까지 되새기는 것 같다. 중생의 돌고 도는 삶에서 잠시나마 순풍을 타고 천년의 향기로 던져지고 싶은 마음, 화자에게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의 체험은 삶의 해시계가 되었을지 모른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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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0-05
  • 인간 관계론 / 박수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하나 귀 기울이어야 할 것이 있다. ‘인간관계論’에서 ‘論’이다. 동양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흔히 접하는 ‘論’이나 ‘疏’는 ‘經典’즉 ‘聖經’, ‘佛經’등을 해설하여 다시 엮는 것을 말한다. 용수보살의 ‘中論’이나,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제‘인간관계론’에서의 ‘論’은 그 어떤‘經典’을 해설하여 작가가 엮은 것이 아니고, 문학적, 시적 발화일 뿐이다. 연작시이기에 일반 독자들의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 적어본 것이다. 비록 기우일지라도.       인간관계론 6/박수호   겨울 들판, 텅 비어 있는 곳, 다가가서 보면 저희끼리 다가올 것을 맞을 준비 하고 있다. 허리 굽히고 다가가 바라보면 꼬무락거리고 있다. 그 작은 움직임이 아무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물음을 던져놓고 되돌아올 답을 기다리는 골똘한 모습이 있다. 이어 일어나자 일어나 하는 소리 들린다. 텅 비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소리로 빛으로 다가온다. 주변 하찮은 것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보이는 것이 적지 않다. 될 수 있으면 몸을 낮출수록 좋다 ---------------------     삭막한 겨울 들판, 동토의 땅에서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움직임이 있다. 풀뿌리도 해토머리를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고 논고랑에 깊숙이 잠든 누런 미꾸라지도 봄맞이를 위해 동면에 취해있다.   이렇듯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미물들도 나름 어떻게 살아가는 방법에 물음표를 안고 살아간다. 화자처럼 허리 굽혀 자세히 듣고 바라보아야 알 수 있는 자그마한 삶, 화자의 ‘인간관계’를 보자 ‘허리 굽히고 다가가 바라보면’은 나의 낮춤의 의미이고, ‘하찮은 것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는 몸을 낮춰 다가가되 불온함 없는 마음으로 다가서라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논어 <성심편>에“심재불언(心在不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이요, 청이불문(聽而不聞)”이라(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를 떠 올린다. 또한‘텅 비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소리로 빛으로 다가온다’는 표현 그대로 필자가 좋아하는 장자의 ”虛室生白“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행의 ‘몸을 낮출수록 좋다’는 기승전결의‘結’로 아퀴짓고 있다. 새삼 무엇을 말하리, ‘吉祥止止(길상지지) 길하고 상서로운 일도 빈 마음에 모인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관계론 19   물음에서 물음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 두 행의 시를 보다가 떠오르는 책이 있어 나의 ’비망록(필사노트)‘을 찾아 들었다. 에드몽 자베스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의 내용 중에   “질문은 어둠이다. 답은, 간결한 맑음이다. 답은 기억이 없다. 질문 홀로 추억한다.”   질문(물음)은 어둡단다. 답이 없다는 것이다. ’답은, 간결한 맑음‘이라는 것은 구름 없는 하늘이 맑고 갓 솟은 옹달샘물이 맑듯이 무엇하나(답) 섞이지 않은 것이다. 곧 질문과 답을 어둠과 맑음으로 대비시키고 다시 한번 한시의 對句처럼 설파한다. ‘답은 기억이 없다‘. 당연하다. 답이 없으니 기억해야 할 기억이 없다. 그래서 답이 없는 질문은 홀로 추억할 뿐이다. 답도 없고 응답이 없으니 혼자서 추억할 뿐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독법이다)   질문에서 질문으로(물음에서 물음으로) ‘질문’의 징검돌이 놓인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다. 답 없는 답을 구하기 위해 저 건너 피안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화자는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해 징검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인간의 관계론으로 이어가는 고차원의 미적분의 방정식을 긴 징검다리처럼 펼쳐놓고서 물음표인 징검돌 하나하나를 건너고 있다. 물음표는 느낌표를 소환한다. 그렇기에 연속적인 물음에서 물음은 느낌에서 느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시인은 얼마나 긴 세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갈고 닦아 딱 두 행만 남겼을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예전에 정선아우라지를 갔을 때 긴 징검다리를 건넜었는데, 그때 이 두 행의 시를 읽고 갔다면 어떤 생각으로 건너갔을까?        인간관계론 21   사람들 가운데 있어도 잘 섞여지지 않는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너는 또 다른 내 이름이라는 말에 마음 쏠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 외로움에 고개를 쳐들고 대드는 방법 하나는 ‘사랑’이라고 하더라 글쎄 -------------------------------------- 길을 걷는데 누군가와 한눈팔다 심하게 부딪쳤다. 에이~하며 기분 나빠 하면 이미 아무런 의미 없는 부정적 관계가 되지만, 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 .하면 예사로운 인연의 긍정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이‘나와 그’아닌 ‘나와 너’의 관계론이다.   물과 기름, 절대로 섞이지 않는다. 서로가 가르고 나누면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나가 될 수 없다. 분별지 때문이다. 필자의 졸시 <돌담> 중 “나는 너를 지고 너는 나를 이고, 너는 나를 안고 너는 나를 베고”가 있다. 전혀 다른 생김새와 모양새가 모여 한세상을 이룬다. ‘이질적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 때, 우린 외롭다.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시골의 돌담은 태풍 하이소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돌과 돌 사이의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곧 너도나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 즉, ’사랑‘의 다름 아닐 것이다.   화자는 어차피 우린 외로울 수밖에 없단다. 그 외로움을 견디며 너와 내가 되어감을 ’사랑‘이란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요 목표이다. 그렇다. 다소 거친 ’고개를 쳐들고‘는 고개를 푹 숙이는 ’수동적 사랑‘이 아닌, 당당하게 고개 들어 ’능동적 사랑‘으로 다가서서 ’나만, 너만‘의 ’만만‘의 利己心 아닌 ‘너도, 나도’의 ‘도도’적 利他心의 사랑법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론 28   사람들끼리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 별은 반짝이고, 하늘은 푸르게 빛날 것이다. 당신의 간절함이 멀리 있어서 닿을 수 없다고 생각 마라. 오히려 떨어져 있어서 향기가 되고 빛이 되고 노래가 되어 다가갈 것이다 -------------- 영국의 시인 존 던의 유명한 설교문 중에 “ No man is an island(인간은 외딴 섬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바다 한가운데 홀로 있는 섬은 외롭게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사람은 외딴 섬처럼 혼자 살아갈 수가 없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절대로 다른 이들을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 별은 반짝이고’라 했다. 가을 숲속, 형형색색의 나뭇잎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 더 아름답고 바람 또한 스치며 지나간다. 적당한 거리에서 숲은 보이는 것이다. 매일 만나 얘기하고 수다 떠는 친구일지라도 때론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장단점이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화자는 ‘떨어져 있어서 향기가 빛이 된다’고 한다. 그 어떤 종교일지라도 대면의 기도 보다 비대면의 기도가 좋을 때가 있다. 말인즉슨, 신앙의 절대자가 전하는 말씀의 향기는 떨어져 있어도 향기를 풍긴다는 의미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맞서지 말고 스스로 향기를 지니면 먼 곳의 타인에게 향기가 퍼질 수밖에 없다.   올 여름휴가 때 고향 해남을 갔다. 잠시 읍내의 약국에 들러서 기다리는데 우연히 약사의 책상 유리판 밑에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아래의 시가 있었다. 약을 받으며 필자가 약사에게 했던 말, “약사님의 얼굴에 禪이 흐릅니다”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답은 “笑而不答”역시 ‘야보도천’다웠다.   有麝自然香(유사자연향) 사향을 지니면 절로 향기롭다.何必當風立(하필당풍립) 무엇 하러 바람 앞에 서려 하는가. (야보도천의 禪詩 중)   정선 아우라지(22년 전 홍영수 시인)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9-10
  •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빛낼 문학샛별 4인
    문학도시 부천 속 열정 가득한 문학샛별이 등장했다. 부천문화재단은 ‘제17회 부천신인문학상’ 수상작 5편을 선정해 발표했다. 수상작은 ▲소설 ‘냉장고 사람사람사람’ 및 극 일반 ‘MBTI’(이보혜·25) ▲시 ‘구두 이야기’(김성훈·60) ▲아동문학 ‘아하파워랜드’(조혜용·55) ▲수필 ‘아픈 손가락’(김정이·45) 등 총 5편이며, 문화평론 부문은 당선작이 없다. 수상자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나이, 경력과 관계없이 문학적 가능성을 보인 미등단 인물들로 선정됐다. 재단은 소설 부문 당선자에 3백만 원, 시·아동문학·수필·극 일반 부문 당선자에 각각 2백만 원의 작가지원금을 수여한다. 올해 총 시상금 규모는 지난해 대비 2배가량 늘었다. 심사위원단은 “문학에 대한 부천시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깃든 부천신인문학상이 비상시국인 올해도 진행돼 다행스럽고 기뻤다”며 “‘문학 청춘, 시대를 울려라’는 문학상의 지향처럼 응모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응원의 인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9월 18일(금) 오후 3시 복사골문화센터에서 ‘제22회 수주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리며, 당선자 본인과 최소한의 관계자만 참석하는 등 축소 운영된다. 부천신인문학상은 지역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창작 의지 고취를 위해 2004년 제정됐으며, 제정 이래 현재까지 총 1,700여 명이 응모했다. 올해는 6개 부문 총 240편을 접수했으며, 각 부문 심사평과 수상작은 재단 홈페이지(www.bcf.or.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제17회 부천신인문학상 수상자 (왼쪽부터) 이보혜(소설·극 일반 부문), 김성훈(시 부문), 조혜용(아동문학 부문), 김정이(수필 부문)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9-09
  • 인간관계론/박수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反芻의 시학    필자는 농부의 아들이었다. 당시 소는 대학 등록금이었으며 농사 밑천이었다. 논밭갈이 온종일 하고 돌아온 소에게 소죽을 끓여 주면 다 먹고 난 뒤 가만히 앉아 되새김을 한다. 그 모습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소의 주식은 다양한 풀이다. 일과를 끝내고 난 뒤 위속에 저장된 풀의 종류를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며 풀 맛, 즉 의미를 곱씹고 소화시키는 모습이 선정에 든 큰 선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수호 시인의 연작시 ‘인간관계론’을 ‘반추(反芻)의 시학’이라 하고 싶다. 왜냐면 눈으로는 쉽게 읽히지만 눈을 떼는 순간 눈을 감게 만들어 내가 뭘 봤지? 하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의문부호에도 물음표가 붙으며 시작이 있되 마침표가 없다. 그러므로 또 다른 생각의 연속이다 소위 말한 ‘관계론’이다. 또한 흡사 宋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의 禪詩적 느낌마저 든다.   여기서 ‘관계’는 사이의 존재이다. 人間, 時間 등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아니라 단어 그 자체가 의미하듯 다른 것과의 ‘間’즉 ‘사이’,‘틈새’가 본질이다. 우린 그 틈새를 메우고, 뛰어넘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이’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든 사물이든 간에 관계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불변이 아닌 쉼 없는 변화의 연속이고 탈주를 한다. 한 점 구름이 모였다 흩어 지듯 부단히 관계를 맺으며 해체되고 변화하며 탈주한다. 동양적 사유가 바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이다. 대표적 關係論이 바로 불교의 緣起論이다. 그 하나가 ‘인드 라網’이기도 하다.   이렇듯 다소 무거운 詩題로 연작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시적인 철학적 세계관이 없으면 창작을 할 수가 없다. 술잔에 계속 술을 따르면 넘치듯 세월의 부피만큼 절차탁마한 뒤에라야 시인과 같은 墨香과 文氣가 풍기고 서린다. 철학적 시제인 만큼 다소 서두가 길어졌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인간관계론 1   나는 누구인가 오래된 질문이다 답을 얻고 싶어서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산과 들을 거닐다 보면 이름 모를 들꽃과 초목들에 마음이 다가갈 때가 있다. 왜냐면 ‘나’라는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 안에 갇혀 불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답을 알 수도 없고 어쩜, 답에 대해 알 수 없음을 알고 질문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인은 ‘답을 얻고 싶어서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름 지어진 나와 관계되는 타인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오직 답이 있다면 관계 속에서 ‘쉼 없이 질문을 불태우는 것이다.’    인간관계론 11   사과는 과일이다 정물이며 유혹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주는 둥근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머릿속에 저장된 사회의 관습적이고 공인된 언어를 랑그라 했고, 특정한 발화 장소에서 발음되는 언어를 파롤이라 했다. ‘사과’는 우리가 쓰고 있는 하나의 약속된 표기이다. 즉 기표 일뿐이다. 그리고 붉고, 둥글고, 새콤달콤하게 느끼는 것은 기의이다. 같은 ‘사과’를 보고 사람에 따라 달리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사과를 보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담과 사과,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은 애플사의 로고를 떠 올릴 것이다. 이렇듯 랑그와 파롤,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다. 또 다른 이에게는 ‘사과’의 둥그런 형태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면‘둥근 사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시니피에를 상실하면 시니피앙의 이미지도 상실된다. 시인은 ‘사과’를 통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상관관계의 메시지를 던지며 시인들의 언어학에 관심도를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관계론 12    커피라는 글씨에서는 커피 냄새가 난다   “이미지는 현혹하고 당신을 미끼로 문다 “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작품이 생각난다. 그림의 파이프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파이프는 아니다. 마그리트가 얘기했듯이 ”이것이 파이프라면 잡고 담배를 피워보시오.“라고 했다.   주관적인 해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물론 몸과 마음에 베인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담배 피우는 파이를 떠 올리는 것은 흔히 말한 ‘생각의 관성’ 때문이다. ‘커피’라는 글씨는 글씨일 뿐 마시는 커피는 아니다. 그림의 파이프가 진짜 파이프가 아니듯. 그런데 시인은 글자에서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한다. 그림의 파이프에서 담배 피우는 파이프를 읽어내듯,    ‘커피’라는 글씨는 글씨이면서 상표고, 상표이면서 글씨다. 또한 글자이지만 글자가 아니고 상표이면서 상표도 아니다. 이렇듯 시는 언어의 개념과 의미를 뛰어넘어 인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한마디로 Memta language다.   2행의 짧은 시에서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를 느낀다. 어쩜 우린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론에서 혼돈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자판을 두드리는 필자의 눈에 식탁 위에 놓인 커피 상자에 쓰여 있는‘커피’라는 글자에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운다.   인간관계론 30   입 밖을 떠나면 공중에서 부서져 흩어져버릴 말들을 가리지 않고 해 대는 사람이 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시나 보다. 침묵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메꾸어 준다는 사실도 잊고 계신듯하다.   혀는 있는데 문이 없다. 문이 없으니 혀끝에서 수 없는 말들이 대책 없고 영양가 없이 쏟아져 나온다. 튀어나온 말을 닫는 문이 없으니‘공중에서 흩어져버릴 말’들이 튀어나온다. 쪽문이든 대문이든 문이 없다는 것은 침묵할 수 없다는 또 다른 말이다. 자신을 반추하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言과 行이 얼마나 일치할까? 하물며 “물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 (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입에 문이 없어 침묵하지 못하고 계속 혀를 놀릴 수밖에 없다.   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한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세치의 혀끝을 가두고 잠글 외짝 문이든 철문이든 창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to be continued . . .   홍영수 시인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8-25
  • 순환을 꿈꾸며/이종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순환을 꿈꾸며/이종숙 이것은 미칠 듯한 방황이었다  세상 것의 대한 미련은허공을 무수히 떠다니고한순간 분해될지 모를생의 기도는순환을 꿈꾼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살다가 살다가   가벼운 무게조차 이길 수 없을 때나는넓디 넓은 허공이 되겠다깊고 깊은 침묵이 되겠다. 시집 <이름도 외로움을 탄다>. 산과들. 2015.   땅끝 해남 풍경/ 홍영수. 2019.   우린 태어나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주어진 시간 속에 살아간다. 시계의 초. 분침을 쳐다본다든지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인식하기도 한다. 특히 생의 황혼기에 뒤돌아보는 삶의 발자취는 걸어온 만큼 축적되어 쌓인 시간이다. 우린 이미 주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노예였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적이고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한다. 이에 반해 아이온의 시간은 크로노스에 균열을 내며 갑자기 다가오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뭔가 ‘되어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나를 압박해 와서 나를 나답게 느끼게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시간을 가지고 사건을 전개한 사람이 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입사해서 정년퇴임하고 입학해서 졸업하는 등의 크로노스의 시간과 살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서 내가 변하는 순간 등의 아이온(Aion)의 시간. 이 두 시간은 내 안에서 함께 공존한다. 작품을 보자. 순환을 꿈꾸기 위해 ‘미칠 듯한 방황’을 했다. 이미 크로노스와 아이온이라는 병존의 두 가지 시간을 겪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느끼며 겪고 있다.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의 겹이 두꺼워진 나이, 즉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이 석양을 향하고 있을 때 아이온의 순간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미치게 방황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삶의 뒤편에서 돌아다보는 발자국, 내 모든 것들의 기억이고, 과거이고, 흔적이기에 미련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젠 허공에 흩뿌리고 날려야 한다. 그렇지만 간절한 기도가 순간 허공에 분해되어 휘날릴지라도 ‘삶과 죽음’즉,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아니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은 꼭짓점에서 부활을, 윤회를, 순환을 꿈꾸어 본다. 그러나 화자는 알고 있다. 이미 ‘순환을 꿈꾸며’라는 제목이 말하듯 ‘순환’은 ‘꿈’이라는 것을. 여기서 ‘순환’은 그리스도교의‘부활’, 이라기보다는 불교적‘윤회’를 뜻하는 게 아닐까 한다. ‘부활’과 ‘윤회’는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아님 종교적 색채를 피하기 위한 중성적 의미의 표현일 수도 있다. ― 불교에서의 윤회는 생명이 순환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뜻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해탈’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환생과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환하는 것이다. 해탈이 아닌 순환을 꿈꾸며 기도하지만 어느 순간 와해됨을 화자는 알고 있다. 마지막 연의 ‘살다가 살다가/가벼운 무게조차 이길 수 없을 때’는 이미 화자는 지금까지 태어나 살며, 살다가, 살아오는 과정 속의 티끌만한 무게조차 견딜 수 없을 때, 아니, 견딜 수 없음을 알고서 이젠 ‘허공’과 ‘침묵’이 되겠다고 한다. 타나토스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 종교적 세계관의 사유를 떠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쉼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순환’을 꿈꾸어 보지만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을 화자는 간파하고 있다. 사약을 마시기 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있다(확실치는 않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神만이 알 것이다.” 계절이 변하고 젊음에서 늙음으로 변하듯 삶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로 자기중심적인 나에게서 정신적인 나에게로의 해방적 변화를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삶도 죽음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과거의 나에서 현재의 나, 미래의 나로 변해야 한다. 어느 스님의 偈頌을 보자 生也一片 浮雲起 생야일편 부운기 /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死也一片 浮雲滅 사야일편 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사라짐이다.浮雲自體 本無實 부운자체 본무실 / 구름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느니. 生死去來 亦如然 생사거래 역여연/ 삶과 죽음 오고감이 이와 같도다. 내가 없는데 내가 되려고 한다. 내가, 내가 되면 내가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 순간일 때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니어야 하는데 자꾸 내가 되어가려고 하는 순간 화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를 비워서 ‘虛空’이 되고 ‘沈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허공’과 ‘침묵’은 바로 나를 비운 ‘虛心’에서 나온 ‘無我’일 것이다.‘무아’는 ‘我’의 있고 없음의 유무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諸法無我’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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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8-05
  • 모과나무/임동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모과나무/임동석      당신의 마당가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바람을 궁글리어 푸르게 짓는 그늘 빈손의 가을이어도 향기만은 짙었지   매달린 아홉 식구 가지 휘청 휘어져 감겨오는 마디마다 꿈 하나로 다그쳐 온 익숙한 동구밖 길에 젖은 눈길 하염없네   빈 나무에 기대앉은 등 굽은 그림자가 접힌 자국 지워가며 길 끝은 다독이는 어머니 가녀린 손을 묵은 향이 잡아주네.        2016년<시조문학사> 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 문학 작품에서 은유는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r)가 상호 배제되며 이루어지는 공간이면서 의미작용의 기초가 되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징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이나 문학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독자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어떤 때는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이런 점에서 상징은 독자를 옭아매는 장치이기도 하다.   작품을 보자‘모과나무’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상징물이다. ‘푸르게 짓는 그늘’의 젊은 시절엔 비록 텅 빈 곳간이나 쌀이나 보리를 넣어놓은 뒤주가 휑하더라도 자식들의 성장하는 모습으로 흠뻑 채워 마음만은 옴팡졌으니 흔한 표현으로 ‘텅 빈 충만’의 생활이 아니었겠는가.   알다시피 모과나무는 굉장히 단단하면서 樹皮는 매끈하지만 줄기는 딱딱하다. 벌레 등의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함인지 가지는 거칠어 다루기 힘들다.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모과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 즉 어머니가 화자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는것이다.   모과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매달고 있다. 사람이나 과일나무나 가을의 결실은 뭐니 뭐니해도 열매이다. 단단한 나뭇가지일지라도 한 가지에 아홉 열매를 맺었으니 휘청일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아홉 개의 열매에 햇빛과 수분, 질 좋은 토양만으로도 힘겹고 어려운데 때론 천둥과 번개, 暴風寒雪의 시기도 넘겨야 한다. 그러하니 어찌 百骸九竅에 상처 없고 아픔이 없으며 깨물러 아픈 손가락이 없겠는가. 그래도 어떤 시련과 역경, 험난한 길도 ‘자식’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밟고, 딛고 견디며 일어서야 하는 운명의 여신 아난케Ananke, 바로 어머니이다. 이러한 어머니에게도 여러 겹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면서 키워 온 꿈들이 살그머니 눈가로 다그쳐 온다. 동구 밖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 훔치며 혹여 걷는 모습이 익숙한 걸음걸이인가 살펴본다. 이때 화자는 젖은 눈시울에서 묻어나온 가슴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시골에서 모닥불을 피울 때 타오르는 불꽃의 심장 속으로 뛰어든 불나비, 하루살이를 무모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면 어떤 흔적도 없는 완벽한 사라짐. 자신을 버리고 此岸에서 彼岸의 세계로 향하는, 채우기 위해 버려야 하는, 어머니의 삶이란 바로 자신을 버리고 또 남은 찌꺼기까지 씻어내어 다 나눠주고 퍼주는 비움의 삶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젠 세월이 흘렀다. 모든 열매를 떨군 뒤의 빈 나뭇가지,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낸 동병상련의 등 굽어 ㄱ字가 된 어머니. 그동안 서로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고, 그러나 지금은 서로가 쓸쓸하다고, 외롭다고, 휘어졌다고 그리고 적적하다고, 묵은 향으로 다잡아 준다고, 그래서 김종삼의 <묵화>가 생각난다고……   김종삼의 <묵화>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조에서 초심자가 3수로 연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무조건 늘인다고 연시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시어들만의 배열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립된 주제가 각 수에 통하며 통일성과 조화가 있어야 하기에 연시조 창작은 매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시어들의 배치인 行馬法과 특히 율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에 초심자는 단시조부터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데도 유장한 호흡과 율격처리, 그리고 주제의 연결성에 성공한 작가는 초심자임에도 불구하고 정형시 3 연수의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수많은 창작 실기의 고통과 고뇌의 시간으로 몸소 습득한 결과물이리라   첫수에서는 푸르러서인지‘향기가 짙었고’ 셋째 수에서는 노년의 길목이어서인지 ‘묵은 향’이 되어 잡아준다고 했다. 발상의 飛躍이 아닐 수 없다. 창조의 능력 없이는 어렵다. ‘바람을 궁글리는’힘찬 나무가 ‘휘청 휘어져’지고, 이젠 ‘빈 나무’가 되었다. 어머니의 일생을 초년, 중년, 노년으로 구분하여 맺고 푸는 시어와 문장의 배열이 놀라운 詩作임이 틀림없다. 평범한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한다는 것, 그래서 시인을 ‘見者’라고 할 것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7-17
  • 바램/김진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바램/김진석       너무 노여워 마세요. 당신의 주름진 얼굴은 살아낸 삶의 수고스러움 보다 남아있는 시간의 기쁨의 깊이 일테니... 너무 그리워 마세요. 당신의 하얀 머릿결은 젊은 날의 검은 머릿결보다 더 아름다운 인고의 시간에 수고스러움을 고이 간직한 당신의 세월 일테니... 너무 슬퍼는 마세요. 당신께서 보낸 시간들은 슬픔의 흔적보단 기쁘게 살아온 나날의 시간을 더욱 값지게 하고 있으니... 당신께서 살아온 삶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기 힘든 인고의 세월일지라도 삶이 지치고 힘들었을 수고스러움 보다 억겁의 세월을 버텨내 드디어 더욱 값지게 빛을 비출 거니까요        -계간 시와늪(30집) 1차 추천작품   --------------------------------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감이 있다. 시간과 속도가 너무 느리거나 빨라도 안 된다. 지금은 너무 빠른 속도감에서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방향타를 잃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지쳐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젠 빠름에서 오는 불안과 초조 공포를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실천할 때이다. 때론 권태롭고 때론 역동적이게. 느림 속에서 삶과 시간의 향기를 가져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삶에서도 가끔은 동네 공원을 산책한다거나 가까운 산길을 걸으며 逍遙吟詠하는 것이다. 나를 옭아매는 성공, 출세, 부의 축적이라는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이젠 노여워 말지어다. 비록 솟구치는 욕망의 족쇄에 옭아 매여 생긴 피고름이나 곱디고운 얼굴에 주름이 생겼더라도. 옛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정신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 모습도 터럭과 주름 하나도 빠짐없이 함께 담았다. 傳神寫照이다. 내면의 가치를 그리되 외면의 주름 잡힌 형상도 그대로 그렸다.   나이 듦에서 오는‘주름’은 삶의 굴곡과 긴 여정의 발자국, 그리고 함께 한 그림자마저 새겨진 흔적이다. 수 없이 생의 키보드를 두드려 저장된 정보이고 발자취이다. 어찌 보면‘주름’은 한 사람의 일기장이며 상징이다. 이러한데 어찌 다리미로 펼 수 있으며 골을 메워 평탄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정녕 노여워하지 말자. “깊이의 기쁨”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잖은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자. 종이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고, 수분과, 햇볕과 천둥 번개를 치고 맞으며 자랐다. 종이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중체, 즉 주름이다. 나이 들어 생긴 주름엔 수많은 타자들과 만나고 접촉하며 때론 일탈하면서 생성되고 종이접기 하듯 또는 패치워크나 쪽매맞춤하며 인생의 장을 만든 다중체(multiplicity)이다. 인간과 사물들과의 마주침을 통한 아장스망(agencement)이 실현되며 주름이 생긴다. 그러므로 주름은 한 인간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한단 말인가.   흰 머리카락이 생기는 원인은 의학적인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유전적, 심한 스트레스, 염색, 또는 관계된 영양소의 부족 등등으로 생길 수 있다. 화자가 얘기하는 하얀 머릿결은 나이 듦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늙은 모습을 본다. 공자가 존경했던 거백옥(蘧伯玉)은 “나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할 뿐”이라고 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찾아오는 흰머리.   두목(杜牧)이〈송은자(送隱者)라는 시에서“백발공도(白髮公道)”라는 말을 했다. “세상의 공평한 도리는 백발뿐이다. 귀인의 머리도 봐준 적이 없으니(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 그렇다. 그 어떤 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공평하게 찾아오니 白髮은 公道일 수밖에. 필자의 졸시에 ‘흰머리 꽃(白頭花)’라는 시가 있다. 흰 머리카락을 ‘흰 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화자는 검은 머릿결을 너무 그리워하지 마란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난 결과물인 세월이기에. 굳이 젊은 시절의 검은 머릿결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워한다고 파뿌리가 된 머리카락이 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목도 세월 따라 희어지 듯 사람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의 섭리일 수밖에.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한 세월의 흐름에 대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하며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최근에 본 어느 과학자의 연구 결과물이 생각난다. ‘인체 변화’를 연구한 결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시계시간(clock time)과 마음을 느끼는 ’마음시간(mind time)이다. 일정한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같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신호의 전달 경로가 활력이 떨어져서 젊은이에 비해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리 지나간 시간일망정 시계의 시간은 변함없이 일정하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 어느새 북망(北邙)의 산천(山川)이 눈앞에 다가왔다. 특별한 보상을 바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을 터전을 일궜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서글퍼지고 자꾸 남은 시간의 셈법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마냥 회한에 젖어 슬퍼할 수만 없는 노릇 아닌가. 석양의 노을빛이 아름다운 것은 온종일 스스로 자신을 불태우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가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슬프되 슬퍼할 수만 없고 기쁘되 기뻐할 수만 없는 노년의 오후. ‘슬픈기쁨’이란 단어는 없는 것일까.   노년은 수많은 어리고, 젊고, 중장년의 시절들을 모아서 보다 넓고 큰 광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 광장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광장이며 누구나 와서 신명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폭넓은 경험과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숨 쉬는 곳이기에 오히려 주름진 자화상을 노여워할, 검은 머릿결을 그리워할, 그리고 순간처럼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을 슬퍼할 시간도 이유도 없다. 이것이 화자의‘바램’이다. 외적인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의 뜻을 읽어보자. 言外之味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6-28
  • 강남, 몽夢/서금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강남, 몽夢/서금숙      눈웃음이 치열 고른 입까지 흘러내렸다. 남산만한 아버지의 뱃속에 빈 위스키병과 마담이 들어있다. 아파트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는 외삼촌이 지고 온 가방 속 돈다발을 꺼내 월급을 준다. 베란다처럼 줄을 서는 인부들, 인부들의 장화 속 쿰쿰한 돈 냄새가 집안 가득 번진다. 아버지는 돈을 잘 벌수록 배사장이 되어 갔다. 강남 아파트 분양이 끝날 무렵 아파트 붐이 일고, 입안에는 모래바람이 훈훈했다. 어머니는 오남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공사판 한쪽에 함바집을 차렸다. 국수를 삶는 솥에서 화독내가 나면 허기가 참을 수 없다고 뱃가죽에 딱 달라붙은 어머니 등이 휘었다. 사내 팔뚝만한 주걱을 휘휘 저었다. 국물을 우려낸 연기에 눈이 시렸다. 아버지의 배에 바람이 빠진 날, 일곱 식구가 강남 물을 먹던 날, 빨간딱지가 붙던 날, 버려진 교과서, 기억은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넘고, 나는 아직도 강남 사는 꿈을 꾸곤 한다.        ‘강남, 몽夢’, ‘2019「월간 시문학 」, 신인우수작품상 1970년대 은마 아파트   ------------------------------    ‘강남, 몽夢’ 초꼬슴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인들은 시집이나 시 제목에 있어 독특한 게 많다. 물론 작가의 고민과 의도적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야만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고, 詩題에 의해 고도로 절제되고 농축된 시의 함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강남, 몽, 시의 내용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서울의 특구? 강남이다. 일부 사람들이 거주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원일까? 아니, 헛된 망상가들에게는 실낙원이 아닐까? 극히 일부는 유토피아의 터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유토피아>의 저자가 영국 출신이어서인지 그곳에서 외교관이었던 분도 이곳에서 꿈?을 이루기도 했다. ― 그렇지만 강남은 희망사일 뿐, 누구나 살 수 있지만 아무나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夢’이다. ‘강남의 꿈’이라는 평범한 시제를 붙일 수 있었지만 ‘강남’다음에 쉼표(,)를 두고 ‘꿈’이 아닌 한자인‘夢’을 썼다. 대단히 의도적이다. 화자는‘강남’을 꿈꾸지만 ‘꿈’일 수밖에 없는 모순, ‘형용 모순’이면서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모순 형용’인 시인다운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도 전후, 당시에는 강의 북쪽, 背山臨水인 한양이 최고의 양택지이다. 강의 이남인 강남은 한창 개발이 진행될 때이다. 아버지는 그 개발 공사현장의 사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한 직책이고 위치이다. 지금과는 달라서 당시는 윗사람의 뒷주머니에 하청업자들의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공사판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검은 거래는 강남의 술집에서 오갔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새벽 햇귀를 목에 두르고 저물녘엔 뒤 굽이 닳고 닳은 고흐의‘구두 한 켤레’를 신고 헛헛한 뱃속을 햇볕 몇 덩이로 채우고, 인내를 지불하며 절박한 상황 속 빈곤의 삶을 영위할 때, 아버지는 그러한 노동자의 응축된 피땀으로 뱃살을 살찌우고 그러다 뱃속은 부패되어가며 서서히 가스가 차며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하늘 높이 오르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말이다. 아니, 높이 오르다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된 것이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뱃속에서 위스키 병이 술에 취하고, 마담은 볼록 나온 배를 보고, 두툼한 지폐를 보는 순간 자존심과 체면은 휘발되고, 아양 떠는 路柳牆花인 마담의 감미로움 앞에 도취될 수밖에 없는 황홀경, 그 속에서 뱅크럽트가 되어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타락의 강 깊은 수심으로 내려앉는 사이 강남의 물은 빨갛게 물들어 결국 마실 수 없게 되었으니, 강남의 꿈은 저 먼 팔당 상류에 낀 안개가 되어 작은 고양이의 발걸음으로 가족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움켜쥐려고 하지만 이미 꿈이 된 지난 일이다.   칼 샌드버그의 ‘안개’를 보자.   작은 고양이의 걸음으로 안개는 온다.   안개는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바라본 뒤 걸음을 옮긴다.   가난한 사람, 특히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전도된 삶을 맞이하게 된 사람은 안개조차도 슬픔과 고난으로 다가올 뿐이다. 저 작은 고양이 발걸음 소리는 허울에 찬 형식주의자의 겉발림을 비웃고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젠, 배사장인 아버지의 배는 死藏되었다 정신적 조난자가 된 후. 식구들 입안에는 사막풍이 불어왔다. 다섯 남매를 위한 어머니, 어둑새벽이 새벽같이 어머니를 깨운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 처음부터 어머니였을 것이다. 고된 노동자의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 황당한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한다면 그 무엇을 못하겠는가. 눈물의 호수에서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뚜벅뚜벅 걸어 나와야만 했다. 그러한 모든 어머니는 저 멀리 울려 퍼지는 종소리이고 누구의 말처럼 천부적 죄인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때의 상황들을 세월이 흘러 잊힌듯 하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상처 입은 세월의 울음을 머금고 있다. 쾌락과 허울에 젖어 곰팡이 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좁다란 바늘귀를 꿰뚫고, 버려진 교과서의 맨 마지막 장엔 “어린 씨앗은 어떤 환경에서도 땅 속에서 발길질 하고 있다”라고 씌어져 있을 것이다. 비록 벼랑 끝에 다다른 삶일지라도 허공에서도 새로운 삶을 찾기에.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6-07
  • 勸酒歌/이봉영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勸酒歌/이봉영    白壽를 살아도 짧은 인생 쉬엄쉬엄 쉬며 가세 세월아 네월아 더디 간다고 최촉할 이 있다던가?   해도 해도 끝없는 일 슬렁슬렁 놀다 하세 비나리 눈나리 핑계 댈 일 많구나!   披露와 愁心이 술술 풀리는 한 잔 술 쓴소리 단소리 그 안에 들었다네!   人生事 塞翁之馬, 生老病死는 天理라 잔 들고 기쁨은 더해주고 슬픔은 덜어주고 내 사랑, 내 친구, 다 酒님의 뜻 자, 우리의 安寧을 위하여!   -시집 <불끈 불끈>, 미디어 저널. 2019   신윤복(申潤福)의 <대쾌도(大快圖)>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람이 살아가는데 언어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든 다 안다. 언어는 인간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매개체이며 화자와 청자 사이에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다.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 품격이 드러나기에 같은 주제를 가지고, 특히 설득의 화법에 있어서는 저질적이고 자극적, 금도를 넘어선 화법은 다수의 언중이 실망하게 된다. 특히 국민을 대표한다거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60년대, 대학에서 화법 교육의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대화의 경지에 오른 맹자의 논리와 비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냐면, 그는 시, 서, 예악을 통섭했기 때문이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언어의 품격과 격을 높이기 위해서 한 달에 시집 한 권 구입해서 읽어보길 권해본다.   21대 총선이 끝났다. 승자와 패자는 각자의 이유로 한 잔의 술로 웃으며 회포를 풀고, 한 편에서는 울부짖었을 것이다. 희비가 교차된 상황에서 권커니 잣거니, 아님 獨酌을 했을 것이다. 음주는 이렇듯 喜怒哀樂의 性情 속에서, 때와, 장소, 계절을 떠나 울분을 토하고 때로는 기쁨에 환호하며 즐기는 음식 문화이기도 하다.   ‘권주가’하면 바로 송강의 ‘장진주사’와 시선 이백의 ‘장진주’를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시가이기 때문이다. 송강은 이백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듯 화자인 작가 자신도 고시가를 당연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왜냐면 예술가들은 학제 간의 교류와 인접 학문에서 직간접적으로 영감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자 이제, 필자도 勸酒歌’한 잔 받았으니 두 손 모아 받잡으며 펼쳐 놓은 멍석에서 한 바탕 놀아보자. 백 년도 못살면서 천년 근심 안고 사는 인생아(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세월아 네월아 뭐가 그리 급하더냐. 막대 들고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때려본들 허연 머리칼이 먼저 온다고 그 누가 말했더냐. 바로 우탁이 늙음을 한탄하지 않았더냐(嘆老歌) 깊은 산속에서 불로초 찾지 말고, 이른 아침 공원길을 微吟緩步하며 시 한 송이 접어보고, 원미산 둘레길을 逍遙吟詠하며 시조 한 수 읊조려본들 어떠하랴.   비나리고 눈 나린들 어떠하리, 중앙공원에 봄이 들어 흥이 절로 나니 하던 일 잠시 멈추고 한적한 계곡에서 막걸리 한 사발(濁醪溪邊)에 쏘가리(錦鱗魚) 안주 그 어떠한가. 마당바위 걸터앉아 한 잔 권커니, 한 잔 잣거니. 술꾼인 李伯, 松江. <將進酒>’,‘將進酒辭’‘한 대목씩 술잔에 띄워놓고, 몇 잔을 마시는지 꽃 꺾어 算 놓고 무지하게 마셔보세.   쌓이고 쌓인 披露(疲勞의 오기인 듯)와 수심은 흔들리는 내 술잔에 어리고, 쓴소리, 단소리는 그대 술잔에 어룽대니 風樂과 山海珍味 없다한들 어떨손가. 거나하게 취한 김에 천하 술꾼 송강 되어 사이좋은 이웃집에 술 익었단 소문 들었으니 누운 소 없는 대신 좋은 벗과 어깨동무하고 대문 앞 다가가서 친구 왔다 큰소리로 외쳐보세. 말술 마시며 이웃과 어울려보세(斗酒聚比隣)   길흉화복 변화 많으니,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하고, 늙어 병들어 죽는 인생, 허망코 허망토다. 자 이쯤에서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벗들과 노닐다가(友人會宿), 술 취해 텅 빈 산에 누우니(醉來臥空山), 하늘이 이불이요 땅이 베개인 것을. 한창때의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盛年不重來)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라(歲月不待人).   이백과 송강의 권주가가 저 먼 이탈리아 주세페 베르디를 취하게 했는지 그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축배의 노래’로 한 잔 술을 권하지 않았더냐.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이중창으로 말이야.   잔을 가득 채워 축배의 잔을 높이 드세 우정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우리 다 함께 이 잔을 드세.        홍영수 시인jisrak@hanmail.net https://www.youtube.com/watch?v=ZDkggN2Ll9A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4-23
  • 쑥부쟁이 재수아재/안귀선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쑥부쟁이 재수아재/안귀선      가을 하늘 가득 만국기가 헹가래를 친다 술 한 잔에 어깨를 덩실 들어 올려 벅구를 치며 고깔모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재수아재도 이런 날은 더없이 좋다   언제나 마을에 궂은일이 생길 때는 재수아재의 발이 바쁘다 서당 아래채에 얹혀사는 재수아재를 마을 사람들은 어이 재수라고 불렀고 넉넉한 웃음에 이순이 훨씬 넘은 재수아재는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어느 날이던가 재수아재네 집 방문이 밖으로 잠기고 대못이 쳐져있던 날 아침 마을은 어수선했고 한동안 누구도 잠긴 문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신분 탈피로 떠났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행실 나쁜 아들 때문이라고도 했다 해거름 덩실 어깨를 들어 올리고 벅구를 치며 오던 서당 재수아재가 마을 어귀에 진한 보라색 쑥부쟁이로 서 있다        ‘쑥부쟁이 재수아재’, 계간 시와늪 제45집(가을호), 2019     ------------------------------------------   필자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다. 어렸을 적 마을의 대동제나 또는 모내기, 수확기에는 의례 굿판이 벌어졌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 ‘뒷방양반’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산 밑 토담집에 혼자 살았다.   이 분의 출신성분은 ‘상쇠’로 가름할 뿐이다. 두레나 농악에서 꽹매기(꽹가리)를 치며 판을 선두에서 이끄는 사람이 상쇠이니, 일상의 신분은 ‘뒷방양반’이고 굿판에서는 ‘안방양반’이었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논수밭에 활짝 핀 개망초를 수북이 남겨놓고 향기만 가지고 어디론지 가고 없었다.-지금 거실에 소품으로 걸어놓은 꽹매기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때는 가을, 청명한 하늘 아래 많은 깃발은 풍요의 계절을 안고 헹가래 친다. 호남우도농악 해남의‘뒷방양반’이 호남좌도농악의 남원에 쑥부쟁이의 향기가 되어 ‘재수아재’로 활짝 피었다. 해남 꽹매기를 떠나 남원에서 벅구를 치며 신명이 난다. 좌우도 농악의 정체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우도농악이 급하면서도 절제되어있다면 좌도농악은 버들가지처럼 휘어 늘어지고 낭창거린 가락이다.   화자는 눈앞의 풍물을 보며 신분을 알 수 없는 ‘재수아재’를 통해 마을 공동체 의식을 느끼며 넓게는 한민족 뿌리 깊이 흐르는 신명의 유전자를 시인의 눈으로 보고 있다.   잡색들의 호응에 조롱을 열고 나온 새처럼 더욱 신이 난 재수아재, 거기에 탁배기 한 사발 걸쭉하게 들이켜면 흥은 흥에 취한다. 절정에 으르면 흥은 흥을 떠나 忘我의 엑스타스에 이른다. 들썩거린 어깨엔 홀아비의 고독과 외로움이 소고에 얹혀 황홀경에 이르고, 벅구춤을 추는 재수아재는 고깔을 쓰고 상모놀음, 자반뒤집기에 신명이 난다. 이럴 때 동네 뒷산의 봉우리도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화자는 이 엄청난 RPM속 놀이와 소리의 굿판에서 다름 아닌 화엄의 판놀음을 보고 있다.   ‘아재’라는 호칭은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촌수의 높낮이가 없고, 친근한 동네 삼촌 같은 이미지를 떠 올리는 단어이다. 착한 맘씨에 동네 좋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다. ―이순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분명히 남녀노소 불문하고 ‘아재’라고 불렀을 것이다.― 화자에겐 이러한 모습으로 ‘재수아재’가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재수’라는 호칭은‘재수가 좋다’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누구든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은 이미지가 훼손당하면 참기 힘들다. 때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때론 모욕감이나 분노까지 느끼는 게 이미지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재수아재, 남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 더욱이 홀로 된 삶과 더불어 자식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 그리고 신분을 탈출한다는 것은 기존 이미지의 탈바꿈을 의미한 것이리라. 화자는 사려 깊은 통찰력으로‘재수아재’의 현실의 삶에 감춰진 실재와 허상의 차이를 횡단하고 있다.   문이 잠겼을 뿐 아니라 대못이 박혀있다. 이건 이미 스스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당연하다. 왔던 곳도 없으니 가는 곳 또한 없을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의 뇌 한 편에 자리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시적 발상이 되고 시상을 전개하며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적이지 않고 체험에서 오는 시가 독자에게는 깊이 와 닿는다.   화자는 시적인물인‘재수아재’와‘아재’라는 보편적 호칭, 그리고 벅구와 고깔모자로 대변되는 동네 두레 굿판 속 맺고, 풀고, 메기고, 받는 가락과 리듬의 천변만화하는 大同의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 문화의 결정체이고 자화상인 굿판의 흥과 신명의 유전자를 ‘재수아재’을 통해 시상을 펼치면서 쑥부쟁이의 꽃말처럼 ‘평범한 진리’한 송이를 마을 어귀에서 줍고 있다.   길들여지고 정형화된 듯한 작금의 풍물이 아닌 딜레탕트적인‘재수아재’와 같은 예인들이 가고 없는 화자의 가슴 한 복판을 어느 누가 뚜벅뚜벅 직립보행을 할 것이며 드라이포인트(drypoint) 할 것인가.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3-28
  • 물에게서 듣다 / 김철기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물에게서 듣다 / 김철기   흐르는 결로 하여 때로 일그러지는 모습에 꼭 슬퍼할 일 아니라 하네   타인으로 하여 메워주고 돌아가다 더뎌지는 길 역정 말라하네   버겁게 곁줄기 밀고 들어도 밀쳐내기보다 비켜서 세 불어나는 융합의 뜻 헤아리라네.   평상심으론 속 치밀어 더는, 더는 그런들 멈추거나 역류하지 않는 수심水心의 언어를   걸핏 사람 관계에 이는 격랑, 풍파, 홍수, 해일 등 속살 경련할 원초의 자존 울컥거릴 때   매번 몸 낮추고 여과함이 일상이라 나직나직 혹은 악센트 찍어주는 물, 물에게서 듣는다   김철기 제10시집 <노을 순백으로 웃다>. 한누리 미디어. 2011.     ---------------------------------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아주 오래전 양수리에서 낚시하고 민물조개 잡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에‘세미원洗美園’이라는 곳이 있다. 장자에 나오는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에서 따온 글이다.‘上善若水’가 말해주듯 ‘물’이라는 물질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순리’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일찍이 탈레스도 "물은 만물의 근원임"을 밝힌 바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은 물의 특성 즉 순리에 순응하는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굽은 곳은 굽은 대로, 웅덩이를 만나면 고이고, 차면 다시 흐르는 순연하는 물의 물리 앞에 슬퍼함도, 역정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물의 언어를 통해 가슴의 눈으로 듣고 마음의 귀로 보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때론,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이때 비로소 변증법적인 나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새벽을 일깨우는 산사의 종소리, 그 맥놀이의 울림 등이 내 삶의 공명통에 깊이와 폭을 더해주게 됨을 느끼는 것처럼, 화자는 “역류하지 않는 수심水心”의 심연에서 언어를 건져 올려 내성內省의 시간을 갖고, “융합”의 메시지를 통해 밀쳐내지 않고 비켜선 자세로 자신을 헤아리고 있다.   한마디로 한 발 물러서서 아님 한 계단 올라서서 객관적인 대상 자체가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다. 여태껏 잊고, 잃어버렸던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언어에 빗대어 보면 “나는 듣는다, 고로 비로소 나를 발견한다.”   우린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감당할 수 없는 풍파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밀려든 걱정과 수심의 해일 앞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럴 땐 인간이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몸이 부서지는 강한 경련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낮추면서 몸과 마음의 필터를 통해 심신을 옥죄는 것들과 혈류의 혼탁함을 여과시키고 있다. 또한 나직나직하면서도 때론 강하게 뒤통수를 후려치며 몽매한 뇌를 깨우쳐주는 죽비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물, 물의 몸짓과 언어에서.   남이 생각해준 대로, 남이 하란대로 하고, 친구가 고가의 옷을 사면 따라 사고, 누군가 깃발을 들면 따라 들고, 누군가 광장에 모이면 따라 모여서 두부모 자르듯 편 가르는, 스스로가 아닌 외적 영향에 좌우되는 삶을 일컬어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이라 했다.   그러한‘비본래적 삶’을 차 버리고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물, 영혼을 깨우고 심신을 씻어주는 물의 언어를 배우고 귀담아 들어야 하다. 종교적 용어로 ‘세미한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眞我를 찾아가는 즉‘본래적 나로 되돌아옴’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화자는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서 “물, 물에게서 듣는다.”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고정되고, 피아를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그리고 자아주의적인 세계관에 변화가 옴을 ‘물’, 물을 통해서 듣고 있다. 그렇게 해서 세계관의 변화가 오는 것을 느끼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순수의 물 한 모금으로 굽은 지혜의 허리를 펴고 있다.    폴 발레리(1871~1945) 시를 보자   거룩한 총명, 투명한 바위, 생명의 불가사의한 원동력, 만능인 물아, 나는 기꺼이 끝없는 연도로써 너에게 경의를 표하겠다.   나는 조용한 물을 말하겠다, 그것은 경치들의 더할 나위 없는 호사이며, 물은 거기다 절대적인 고요의 자리를 펴고, 그 순수한 수면 위에서는 비추어진 만물이 저 자신보다도 더 완벽하다. 거기서는 자연 모두가 나르시스가 되어, 자기를 사랑하고…   움직이는 물, 부드럽고 사납게, 스며들며 또 놀랍도록 천천히 훼손시키며, 제 무게로 또는 제멋대로인 흐름과 소용돌이로, 안개와 비로, 시내로, 큰 폭포와 작은 폭포로, 바위를 만들고, 화강암을 닦고, 대리석을 갈고, 조약돌을 무한정 둥글리고, 제가 만들어낸 모래 모두를 얼러가며 푹신한 자락과 편편한 모래톱을 마련하는 물. 물은 단단한 땅의 어둡고 거친 모습을 다듬고 갖가지로 둔갑시키고, 조각하고 장식해준다. - < 물의 예찬, in Praise of Water>의 일부 -    홍영수 시인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3-04
  •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고양이로 하여금 쓰레기 봉지를 찢도록 한 것은 생선 찌꺼기의 비린내였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 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객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 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고양이는 쓰레기 봉지를 거침없이 찢어놓고 사라졌다 쓰레기 봉지를 테이프로 봉합하며 너덜거리는 내 생은 무엇으로 봉합하나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천년의 시작. 2002   알베르토 자코메티 , 사진/홍영수, 장소/한가람미술관. 2018년  -----------------------------------------------------------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이 사라지거나 공상 같은 현실이 눈앞에 번뜩 나타날 때는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분신을 통하여 자아의 죽음을 부정하면서 한 줄기 희망을 품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이 분신이라 여기는 것과 마주할 때 억압되어있는 절망이나 죽음의 공포를 떠 올리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Uncanny(두려운 낯섦)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이 모습에서 화자가 처한 작금의 상황과 비슷한, 어쩜 데자뷔의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굶주리며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새끼들을 위해 비닐을 찢고 있는 어미 고양이. 생선 뼈 한 조각 얻기 위한 고양이의 눈은 어둠의 터널과 같은 것이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화자는 ‘두렵게 다가온 낯설음(Uncanny)’ 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고양이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은 생의 의미, 관계의 의미 등 다양한 의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런 의미들이 때론 눈앞의 현실에서 멀어지거나 또는 흩어져 버린다. 니체의 표현대로 “나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낼 모레면 불혹의 나이다. 어찌하랴 젊디젊은 나이에 폐결핵을 앓고 있는 화자는 무엇 하나 보탬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방인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 비록 철없는 자식들일 망정 툭툭 던지는 말 한미다가 가시가 되어 폐부 깊숙이 찌른다. 아프다. 어쩜 삶에서 가장 아픈 ‘아픔’일 것이다. 지쳐버린 영혼의 근육에 등불을 켜지 못하는 가장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에서 보듯 ‘도망치듯’이 의미는 뭔가에 쫓기듯 급히 달아나는 모습이다. ─어쩜 “아내가 도망치듯”이라는 표현은 쉽게 쓸 수 없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 폐결핵을 앓고 있는 화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픈 가슴에 출근하는 아내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헉헉거렸는지도 모른다. 이때 먹는 알약은 목에 넘기는 순간 바로 배설되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아버지로서의 위치에 따른 가족부양 등을 실현코자 하나 현실이 따라주지 못한 상황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특히 대부분 문화 예술인들이 그러하듯 경제적 관념에 밝지 못한 시인이기에 더욱 그렇지 않을까. 가족을 짊어져야 할 책임감, 그 멍에를 걸머지는 가장의 강박관념은 때론 의도치 않게 다른 방향으로 흐르다 폭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디오니소스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멀게 느껴지는 관계망에 사로잡히면 소화불량에 걸릴 수밖에 없다. 생각의 힘줄을 키우며 스스로 비우고 의도적인 망각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거북스러운 뱃속이 상쾌해지고 걸머진 멍에의 창문을 닫을 수 있다.   가끔 거울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거울 속의 나를 어찌하든 꺼내어 자신의 눈을 후벼 파고 싶었을까.   고양이는 시인 자신이다. 봉지를 찢고 다시 봉합하는 고양이지만 정작 현실의 화자는 그 무엇으로도 봉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고양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자신을 닮은 두렵고 두려운 낯선 언캐니의 현실이지만.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현실의 나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것이다.   죽기 며칠 전, 화가인 고흐가 동생 테오와 그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자. “내 생활은 뿌리가 뽑히고, 내 걸음걸이도 휘청휘청한다. 나는 내가 너희들의 저주스러운 짐짝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 전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음악가 라벨이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 요양원에서 탄식하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 조각씩 사라져 간다.”라고.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2-12
  • 물 이야기/이순정
    물 이야기/이순정  흐르다 뒤엉켜 돌아서 가고돌아서 넘지 못하면 기다릴 줄 아는 겸손기다리다 지치면 하늘로 올라무거워진 눈 그림자 물로 풀어 놓는다돌고 돌아가고 오는 길들어와 나가지 못하면 썩은 자리 하나 차지하고들어와 나가면 그것이 사는 법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면서 여럿이 아닌뭉침과 버림을 반복하며 비워감을 알게 한다무심한 말言들이 바람에 흩어져습하면 썩는 자연의 법을 거슬러비워내지 못해 울음으로 토해낸다막혀오는 숨통 트이기 위해 남술 들숨 숨을 고르고살 속을 헤집어 길을 만든다모든 것을 담아내고 비틀어 버리는 얄궂은 잔망가벼우면서 가볍지 못한 무게로나약함을 가장한 채 흐르고 있다.   시집 <껍데기 어디있냐>, 한맥, 2015.   출처: 다음카페, 백수 중학교                          ----------------------------------------------------    동양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지배했던 노장사상의 핵심은 無爲이다. 그러면서 무위를 주장하며 드는 예가 바로 물이다. 노자의 <도덕경> 8장을 보자.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만물과 다투지 않으며,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거해도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물은 거의 ‘道’에 가깝다.” 이렇듯, 물은 다투지도 않고, 빈 곳은 채우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며 굽은 곳은 굽어 흐르고, 급한 곳은 급하게,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며 沼를 이루기도 한다.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는개, 이슬비, 소나기 등과, 작은 입자 같은 안개, 때로는 육각형의 눈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오고 찬 서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물의 특성을 간파한 화자는 “넘지 못하면 기다릴 줄 아는 겸손”에서 비움과 채움의 역설을 얘기하고, “지치면 하늘로 올라가는”, 물의 순환논리와 자연의 섭리 앞에 더듬이가 닿으면 눈이 내려 물에 잠기듯 삶에 지친 무거운 눈을 맑은 물에 담아보기도 한다.  물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모습이 변화하고 때론 격렬한 소용돌이로 잔잔한 물결로 솟구치고 침잠하며 세상의 만물과 감응하며 흐른다. 천편일률적인 습성을 짓밟아 버리고 스스로의 몸짓으로 하늘로 올라 먹구름 속에 가두기도 한다. 고이면 썩는 것은 비단 물뿐이 아니다. 변화와 혁신 없는 고정된 관념과 깨트릴 수 없는 틀을 가진 세계관은 굳어서 풀리지 않고, 응고된 짧은 생각은 이분법에 얽매어 편견의 나락으로 흘러들어 상한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다. 정지되고 정체된 영혼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부패하지 않고 냄새나지 않게 사는 법이다. 바닷물을 보자, 수 없이 많은 개개의 하천수가 강으로 흘러들고 강은 또 오대양으로 흘러든다. 이렇듯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 물(H2O) 또한 수소2와 산소1으로 이뤄져 있다 一 불교의 인간관이라 할 할 수 있는‘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화자는 물의 성격과 특성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곧 나와 너, 타인과 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심화시켜 시인의 눈과 감성으로 보고 느끼며 물이 비우고 흐르며 쓰는 문장을 방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살며 살아가며, 우리는 여울물 같은 잔잔함으로, 때론 폭포수 같은 강렬함으로 그냥 흘러버린 듯, 또는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에겐 치명적이고 비수로 꽂히기도 한다. 그것을 안고 있으면 상처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기에 울음을 토해 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막혀오는 숨통을 트이기 위해 화자는 들숨 날숨으로 벗어나고자 살 속을 헤집어 길을 만들어간다. 물의 특성은 흐름이고 증발이다. 흘러간 자리는 다시 흘러 들어오고 증발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움과 채움의 반복이고 순환 원리다. 광화문 광장도 비워져야 집회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모든 주체는 비워야 한다. 무언가로 채우려 하고 채운다면 주체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객체일 뿐이다. ‘뭉침과 버림’,‘들어감과 나옴’이라는 물의 원리 앞에 화자는 사람과의 관계와 삶의 방식을 ‘물의 원리’에서 가져와 물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자기 비움”의 의미를 기독교에서 케노시스(Kenosis)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비워 자기 마음 안에 주님으로 가득 채우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케노시스의 영성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도 비워지지 않은가. 니체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덧없는 그림자다’고 했듯이, 삶을 의미로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하나의 그림자로 남은 삶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생명의 근원인 물은 시인에게는 자연의 사물을 들여다보는 시적 감수성의 매개체이다. 시적 화자는 가볍지 못한 무거움으로 물처럼 흐르고 있다. 비록 나약함처럼 비추일지언정. 시인은 비워짐이다. 텅 빈 마음의 공간을 매우고 채우기 위해 시를 쓴다. 결여된 공간이 없으면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자기 자신이고 자아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물의 이야기”는 시인 자신이고 물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1-27
  • 가불하고 싶다/허윤설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가불하고 싶다/허윤설        허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침 맞고 물리치료 받고 알약을 한 움큼 먹어도 쉬이 낫지 않는다   욕심부리지 않아 지갑 얇아도 무탈한 날들에 감사하던 때 복병처럼 나타난 폭풍에 기대고 있던 중심이 무너졌다 지난날은 꿈만 같고 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다 두 다리가 자꾸만 주저앉는다.   커진 덩치만큼 생각이 다른 자식들 내일을 향해 가려는 길 불안해 보여 핑계 삼아 삼키던 하루가 실타래처럼 뒤엉키는 일 잦아 미래를 가불하고 싶다 딱 10년만,     시집 <마지막 버스에서>. 푸른사상. 2019.   --------------------------------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을 보는 기준을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으로 나누었다. 스투디움은 작가의 촬영 의도를 알 수 있는 일반적으로 보는 관점이고 푼크툼은 작품 안에서 아주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감상자의 마음을 감동 또는 가슴을 울리거나 상처를 주는 것이다. 타인에겐 별로인 작품의 한 부분이 자신에게는 번뜩이며 다가오는 것. 예를 들어 <뽕>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영화를 보면서도 어릴 적 누에를 힘들게 치는 어머니를 그리며 ‘뽕나무’의 생각에 눈물짓는 아이러니 같은 것이다.   이렇듯 필자 또한 한 편의 시를 대할 때 ‘푼크툼’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의도대로,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혀 프로그램화 된 감상이 아닌,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불하고 싶다’의 시는 ‘태풍으로 무너져버린 중심’이 시를 읽는 중심이 되어 필자의 가슴에 닿았다. 문학의 비 프로그램화와 같은 일종의 ‘푼크툼 감상법’이 아닐까 스스로 이름 지어 본다.   욕심을 덜어내고 욕망을 억제하니 그 얼마나 평안한 마음인가. 어느 누군들 욕심이 없고 욕망이 없겠는가. 이미 심연의 밑바닥에부터 꽉 채워져 있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비우고 또 비우려고 할 뿐이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화자는 이미 ‘비움’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기에 허기진 지갑과, 특히 가족의 무사, 안녕함 외에 바랄 것이 없이 소탈한 일상 속에 빈곤의 풍요와, 비움의 충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적 케노시스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요와 평온의 바다 속에 미처 볼 수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검은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다름 아닌 느닷없는 폭풍이다. 여기서의 폭풍은 화자의 집안 중심인 대들보를 무너뜨리는 악마인 것이다. 왜냐면 집의 중심은 대들보이고 대들보가 무너지면 중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찌, 알았겠는가. 묵묵히 무언의 침묵으로 헌걸차게 버티고 서 있는 저 대들보의 늠연한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비바람에 씻기어 패인 상처의 깊이를 혼자 삼키고 인내하는 곧은 상기둥의 단단한 마음을. 무너진 중심에서 비로소 알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태풍은 기미幾微를 알아차리지만 삶이라는 바다에서는 갑자기 솟구치는 용오름과 같고, 갑자기 휘몰아치는 사막의 사막풍처럼 어둡고 무서운 형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냥 태풍만 탓할 게 아니다. 알약과 물리치료와 침도 소용이 없다. 태풍에 의해 조각난 상처의 조각들을 꿰매야 하고 핥기고 쓰러진 마음자리도 다스려야 한다. 반반했던 길이 가시밭길이 되었다고 발길을 돌린다든지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태풍은 중심을 무너뜨리고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말없이 든든하게 집안을 지탱해줬던 수직과 수평의 목재를 앗아 가버린 황량한 집안, 그 대들보 속에 잠긴 묵직한 나이테의 마음을, 태풍 속 고요함 같은 섬 하나를 간직했던 대들보의 외로움을 미처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할 일은 아니다. 이제 눈과 몸에 익숙했던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 소유와 욕망과 육신의 끈에 매달린 삶. 타성에 젖은 삶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장자의 수양론인 “心齋”, 즉, 마음속 모든 것들을 버리고 육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언제든 쉴 수도 앉을 수도 비를 피할 수도 있는 생명줄 같은 정류장이 없어졌더라도 언제까지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이란 또 어찌 하리오”의 청산별곡이나 가시리, 公無渡河歌만을 읊조리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소의 시차가 있을 뿐.   동토를 뚫고 나온 새순을 보자.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묻힘은 묻힘이 아니지 않은가. 얼음장 밑에서도 생명수는 흐르고 언 땅에서도 씨앗은 싹트고 폭풍의 떨림에서도 부름켜의 왕성한 활동상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울음을 그치고 생각을 바꾸자. 아픔이 아픔만은 아니다는 것을. 그래서 희망의 싹을 틔우자.   그렇다, 자식은 품 안에서만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은 1촌이다. 미세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1촌의 간극을 엇붙임 해야 한다. 화자의 마음은 무촌이라 생각하기에 생각을 벗어나면 서운하고 불안하다. 삶의 해시계를 잃은 자식들 또한 엄마보다 더한 순간의 어둠을 삼켰으리라. 그렇지만 말이 없다. 자기들보다 더 아파할 엄마를 위해. 훌쩍 커버린 덩치만큼 가족애도 살 찌웠으리라. 굳이 가불 하지 말자. 가불은 갚아야 하기에. 차라리 엉킨 실타래 한 올 한 풀어 한 땀 한 땀 사랑의 옷감을 꿰매자. 딱 10년이 아닌, 천년 세월의 옷을 재단하자.   새해가 밝았다. 小寒이 코앞이다. 우린 춥고 거친 황량한 겨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자.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 중 ‘폭풍의 아침(Der stuermische Morgen)’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01-03
  • 꿈의 퍼즐/홍명근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꿈의 퍼즐/홍명근       살다보니 열망과 갈등의 순간 위에 오래 머물고 머물러보니 기다림은 시계바늘을 흔든다.   초침 따라 달려가던 시절에는 별 하나 꽃 한 송이조차 두근거렸다   이제는 꽃이 피어도 별이 반짝여도 설레임 희미하지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겹쳐 만난 인연은 실타래처럼 길다.   실매듭을 풀어 나무가 기둥처럼 자라는 언덕에 둥지를 틀고 학이 되어 바라보는 길 끝에 담쟁이 넝쿨 한 겹 더 두른 너는 또 하나의 울타리.   살아가는 것이 순간이 쌓여 가는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깊어져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별 모양의 담쟁이 잎 넝쿨 너머 꽃 같은 저 무지개는 열정을 향해 여전히 손짓하고 있다.   시집 <꿈의 퍼즐>. 미디어 저널. 2019   그렇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침, 분침보다는 1초라는 짧은 순간을 소리 내며 똑딱이는 모습은 인간의 활동상으로 비유한다면 초침은 분명코 역동적 젊은 시절에 해당할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거쳐 청소년기엔 내가 최고이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 한편으로는 달과 별의 반짝임과 이름 모를 들꽃의 하늘거린 모습에서 괜스레 가슴 설레고 뭉클해지는 그래서 시절의 짐을 벗지 못한 가련한 시인이 되는 시절이 있다. 그런데 어찌하랴! 젊은 날의 초침은 더욱 빨리 돌아가고 보이지 않았던 시, 분침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슬픔의 중량이 늘어난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물위에서 노래함>의 가사처럼 “아, 이슬 젖은 날개를 가진 세월은 스쳐가네 이 흔들리는 물 위의 나에게서”그렇지만 세월을 털어버릴 수는 없잖은가. 때론 서녘 노을 같은 중년이 아름답지 않은가.   사람은 때가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그 어떤 배움과 지식을 떠나 그 나이가 되어야만 보이는 것들, 젊어서 놓친 것들이 나이 들면서 보이는 것이 있다. 이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였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왜냐면 사고와 의식이 확장되지 못하고,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지성과 판단력을 가진 젊은 시절은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의 말을 빌리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이 보이나니 보인다고 다 모으면, 그것은 모으는 것이 아니리(원래의 뜻 ).” 여기에‘사랑’대신‘살다’를 대입시켜도 무방하리라.   이때 보이는 것처럼 화자는 지나온 날과 앞으로의 길을 떠올리며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그 무엇도 독립적이고 스스로 홀로 발생하는 것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시인은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학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鶴은 생물학적인 새가 아닌 인문학적인 표현이다. 수많은 한시에 등장하는 학, 고고한 모습을 선비적 특성으로 묘사되어서 일까. 시인이 학의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살아온 과정에서 혜안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하고 한편으로는 學의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지혜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초탈한 시선으로 삶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 시인은 무념무상으로 세상과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이다.   도연명의 <飮酒>중 5수에 “동쪽 울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멀리 남산을 보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와 고산 윤선도의 <漫興>이라는 시를 보자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이처럼 두 시인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바라본 게 아니다.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비우는 것이고, 보려고,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고개 들어 먼 곳(남산)을 바라볼 때, 그때 시야에 들어온 광경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앞에 ‘남산’처럼 우연히 보이는 넝쿨 두른 담쟁이, 이렇게 자신을 잊고 비우며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고산의 詩題처럼(漫興) 저절로 흥취가 생겨난 것이다.   화자의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종교적 체험과도 연관된 듯싶다. 종교적 삶의 기본태도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잊는 것이고, 부정하는 것이다. 흔히 말한 죄를 뉘우치는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즉 메타노이아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서는 것, 가치와 의식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 그래서 실재를 꿰뚫어 보는 일이다. ‘나’를 살기 위해 나를 비우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말대로 “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성령님을 갈망하는 자의 영성은 비움이 듯.   삶이란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어가듯 매 순간순간의 축적이다. 그 축적된 삶이 깊어지면 그 자체가 걸어왔던 길의 역사이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미래의 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 신체적 조건들은 변화를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언제나 청춘이듯 저 너머에 피어오른 무지개는 “당신은 아직 젊고 할 일이 많다”라며 일곱 색깔의 빛으로 응원하고 있다. 누구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다.   언젠가 인사동 길거리에서 구입해 벽에 걸린 조각보를 쳐다본다. 옛 여인들의 버려진 천 조각 하나하나를 버리지 않고 능숙한 시침질과 감침질로 통짜기하여 완성시킨 작품을 생각하며 내가 꿈꾸는 생의 퍼즐을 맞춰 나만의 쩍말없는 조각보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슈베르트의 가곡 연주를 들으며. 아, 시간은 이슬의 날개를 달고. . . https://www.youtube.com/watch?v=mCBPRmt_al8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2-08
  • 아름다운 잠입/손영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잠입/손영      빗방울이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망설임 없이   강물은 싫은 기색 없이 비를 받아들인다   빗물이 스미는 소리 강물은 한 가족으로 비를 맞이한다 물과 물이 합쳐지는 순간 나타나는 둥근 파문 빗줄기는 소리로 계약서를 쓴다 수많은 물도장을 찍는다 이것은 오래 전 둘만의 약속 한 번도 파기한 적 없는 물도장 계약서가 사방에 낭자하다   청아한 톤이 강물에 찍히는 소리 수많은 비의 음성   강물은 떨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세운다 빗소리를 녹취하고 쏟아지는 하늘을 저장중이다.     시집 <공손한 풀잎들>       -------------------------   공기 속 수분의 입자들이 떠돌다 뭉쳐 지구의 중력에 의해 빗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추락에서 때론 우리의 슬픔도 느낀다. 이러한 것은 시인에게는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고, 가뭄의 단비 같은 고마운 존재로 다가오기보다는 수직으로 때론 바람에 실려 사선으로 내리는 빗소리에서 시의 영감과 신의 호흡과 음성을 듣기도 하고 비 그친 뒤의 무지개를 기약하기도 한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태어나 지구의 표면에서 죽는다. 죽을 때는 최고의 속력으로 미친 듯 창공을 내리 가르며 죽어간다. 정작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르면서. 슬픈 인생이다. 한 번 뛰어내리면 절대로 그곳을 올라갈 수 없는 운명이다. 추락만 안고 태어난 슬픈 삶이기에 대지와 또는 강물을 만나면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만나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 시냇물, 강물, 오대양으로 흐르다 다시금 증발해서 똑같은 순환의 반복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시인은 유한한 삶 앞에 무한의 실마리를 찾기보다는 순환적인 자연의 섭리를 과감히 접고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빗소리를 녹취하고 저장한다.   저 먼 낯선 곳에서 뛰어내린 비를 이유 불문하고 가족으로 맞이하는 강물의 포용력, 수직의 허공에서 거침없이 착지하여 온전한 강물의 식구가 되는 모습에서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창조는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융합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강이 빗물을 배불리 담아 둘이 하나 되어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나 껴안고 악수하는 곳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물과 물이 하나 되어 경계를 지우며 일으키는 둥근 파문은 한 울림의 맥놀이가 되어 가슴 저민다. 시가 아니면 건 널 수 없는 강을 시인은 건너고 있다. 머리가 아닌 웅숭깊은 가슴으로.   이때 보이는 또 하나, 강물은 빗방울의 雅號인 소리로 白文의 陽刻으로 낙관을 찍는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아니 世世年年 변함없이.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대지의 강물과 하늘의 빗물이 하나가 되기 위해 안고 안긴다. 不一不二이기에 강물은 싫어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청산리 벽계수의 물도 쉬이 감을 자랑하지 않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떨어져 인연 따라 흘러간다. 그렇기에 강물은 비를 안고 흐른다. 시인은 하늘의 빗방울과 대지의 강물을 대립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는 너를 안고 너는 나를 베는’, 자아주의自我主義을 벗어나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되어 조화로운 상생으로 자연의 현묘한 품에 안기는 모습을 읽고 있다.   맑고 우아한 빗방울 소리가 강의 옆구리를 찌르고 귀에 소곤거리며 하늘과 대지와의 벽을 허물며 하나가 됨을 하늘은 녹음 하는 중이다. 독자 또한 임장감을 느낀다.   한국의 문화는 벽을 쌓고 높이는 문화가 아니다, 벽을 허물고 낮추는 문화이다. 그러한 문화에 익숙한 시인은 빗물과 강물이 하나가 되어가며 하늘과 대지의 벽을 허무는 순간을 냉철한 시인은 눈으로 매섭게 묘사하고 있다. 빗방울이 쓰는 마지막 시는 ‘경계 지움’이다. 하늘을 우러러보아 천문을 읽고 굽어보아 지리를 살피는 仰觀俯察하는 시인의 글두름손이 돋보인다.   서양의 로고스 중심적인 線彫적 양태를 벗어던지고 한국적인 순환적 구조로 전위성을 창조해 나가야 함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시이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표현하는 자의 무게만큼 들리고 다가온다.   立冬이 지났다. 조석으로 싸늘한 기온이 감도는데 창밖에는 느닷없이 천둥 번개 소리에 때마침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흐른다. 이때다 싶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찾는다.       글-홍영수 시인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1-10
  • 月下孤吟/김현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月下孤吟/김현구 달이 기척 없이 떠와 하늘에 걸리고벌레 하나 지껄이지 않는  이 밤 玲瓏한 沈黙!    때도 그 걸음을 멈추운 듯고요한 달빛 아래꽃가지 잡습니다   天理가 그윽한 밤 三更  無我한 나는달 아래佇立합니다.     永劫의 一隅에 서서  슬픔과 기쁨을 떠나나는不死身이 되오리까   -시집(비매품) <현구시집> 김현구(오른쪽 두 번째)와 김영랑(왼쪽 첫 번째)이 지인들과 경주 분황사 여행 중에 촬영한 기념사진(1940.5.26.) (출처. 강진군청)   --------------------------- 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달밤이 아니던가. 누구나 청명한 시골의 밤하늘을 쳐다보면 발걸음 멈추어 달빛에 젖어 보고 싶어 한다. 시인의 고향 강진 밤하늘이 얼마나 청명하고 고요하기에 –자동차도 가로등도 흔치 않은 시절- 벌레마저 울음을 멈춘 가을의 달밤, 오죽했으면 침묵마저 영롱하다고 하겠는가.  시인 이백이 달빛 아래 외로이 술잔을 들었다면(月下獨酌), 시인은 달빛 풍경을 홀로 읊조리고 있는 모습에서(月下孤吟) 禪詩 한 수를 접한 느낌이다. 덩달아 우리도 시적 진술에 의해 강진만의 달빛 아래 서서 꽃가지를 잡고 서 있는 듯하고 아님 이백처럼 此忘憂物에 취하는 듯하기도 하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다가오는 것을 시인은 적고, 쓰는 것이다. 시인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비우지 않으면, 한마디로 自我가 죽지 않으면 다가오려는 시도 도망가고 사라져버린다. 시가 시인에게 다가올 때 시인은 내 안에 들어앉은 누군가를 죽여야 그 빈자리에 시가 들어와 채운다.  ‘無我’란 불변의 나, 진정한 나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정한 연기적 관계 속에서 내가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아’란 나를 그 안에 가두는 틀이 된다. 이러한 틀을 깨부수고 넘어서야 하는 것이 ‘무아’라고 할 때 시인은 이미 지금의 ‘나’를 벗어나 넘어서고 있다. 어쩜 신앙적 체험이나 깊은 명상에서 오는 몽환적 환상의 황홀경, 엑스터시의 상태처럼 보인다. 한밤중인 삼경, 가을의 달밤, 나를 벗어나 내가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자기도 모르게 天理를 터득하며 스스로 젖어든 것이다. 동서양 미학의 차이는 서양은 형이상학적이고 동양은 일원론적이다. 흔히 플라톤이 말했듯이 서양은 사물에는 실재하는 이데아가 있고, 동양은 사물 자체가 본질이고 실재이다. 주객을 초월한다. 스테이스 교수가 말했듯이 “초주관적”적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달을 보고 달이 시인을 보고 있는, 시적 화자와 달의 이미지가 합일된 경지를 초월한 무아지경의 상태에 있다. 얼마나 가을 달빛에 도취되었으면 아니, 달빛과 자신을 초탈했으면 영겁의 한 모퉁이에 서서 일희일비하는 속세를 떠나 불사조가 되고 싶었을까. 며칠 전(9/28) 경남 하동군의 ‘禪詩’공모전의 시상식장에 다녀왔다. 시의 특성상 불교적이기에 ‘해인총림 방장, 벽산 원각’ 큰스님께서 직접 시상하셨다. 이때 하신 말씀이 선이란  선악과 호불호, 彼我와 장단고저 등등을 떠나면 “隨處作主,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어 선 자리에 바로 참다운 삶이 된다”라고 하셨다. 슬픔과 기쁨을 떠나고자 한 시인 자신이 ‘禪’이다. ‘禪詩’공모전의 대상 작품을 보자.   여여 如如/구정혜(부천)   산길을한 시간쯤 걷다보니나무의자 하나 별 생각 없이 기냥 누웠다걷는 동안 따라오던 잡다한생각들 온데 간데 없다. 허공과 하나 되어 누운 몸에하늘과 나무와 숲이모두 들어온다 내가 있는데 내가 없고만물이 가득한데만물이 없는 듯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알 수 없는 그 말의 경계를 헤맨다. 오래전 와불이 누워서 바라본하늘이 이러하였을까생각에 생각을 포개고 있다. 시집 <아무 일 없는 날>, <말하지 않아도>   오래전, ‘서편제’ 촬영지였던 완도군 청산도를 갔다가 막 배를 놓치고 예비로 들어오는 배를 차 안에서 기다렸다. 선착장 잔물결에 일렁이는 달빛을 보면서 cd로 듣는 드뷔시가 작곡한 ‘달빛’, 몽환의 선율을 듣는 게 아니라 마시고 있었다. 은빛의 학꽁치도 함께. 조석으로 서늘한 가을이다. 시인이 달빛에 젖어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듯이 드뷔시의‘달빛Debussy Clair de lune ’을 들으며 필자도 잠시 취해본다.   덧붙이며전라남도 강진 출생. 본명 현구(炫耉). 시인은 1930년대 김영랑 시인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으로 지금은 매우 활발한 조명을 받고 있다. 주요작품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1930년 박용철(朴龍喆)이 주관하던 《시문학(詩文學)》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寂滅)》 등 4편을 발표하고, 그 뒤 《문예월간(文藝月刊)》과 《문학(文學)》지를 통해 1934년 4월까지 8편의 시를 더 발표하였다. 그 후 낙향하여 계속 시를 썼으며, 그것을 묶어 《무상(無常)》이라는 제목의 시집 발간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김현구 시인의 차남 김문배 님이 현재 부천에 거주하고 있다. 홍영수 시인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0-01
  •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산길을 걷다가울퉁불퉁 드러난 벚나무 뿌리를 본다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처럼드러난 상처 다발로 송두리째 뻗어 있다 그래도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땅과 하늘의 경계에서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서 있는 벚나무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도저렇게 자기를 버티고 서 있는 나무죽음을 앞에 두고도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 잠시 신발을 벗어놓고나갔다 돌아온 주인처럼해마다 새싹이 돋아넉넉하게 그늘을 품어주던 나무 시집 <귀의 말>------------------------   사진/홍영수 ‘다산초당 가는 길’ 문학은 정서와 감정에 바탕을 둔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익혀야 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의 멋대로 해석하는 ‘감정의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된다. ‘莊子’라는 책을 젊었을 때와 중장년의 시기에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한 편의 시를 읽을 때도 시기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름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이 결합하여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문학작품의 독법에 때론 일탈하고 싶고, 정형화된 문학의 이론과 프로그램화되어 규정지어진 틀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문학의 장르에 따라 이론이 변화 발전해 왔고 문예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할 때 나만의 문학적 독법, 해석 또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문학의 이론과 실재에 벗어나더라도. 스무 번째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을 옮겨보았다.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중세 암흑기에는 모든 문학과 예술은 종교적 색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굳건한 법칙에서 깨부술 수 없는 관념이 존재했다. 하나의 세계인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종교적 틀이라는 엄청난 큰 바위를 쇠망치로 내리 까부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다다이즘’이라는 사조다. 한스 아르프는 찢긴 종잇조각을 허공에서 떨어뜨려 캔버스에 안착한 종이들을 그 자리에 붙인다. (우리의 조각보 같다) 바로 우연의 법칙이다. 올봄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하며 보았던 마르셸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도 작품의 의미보다는 작가의 우연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사실은 지극히 필연으로 찾아온 것들이며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우연으로 생성된 것이다. 시를 보자. ‘바위 틈새를 비집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등의 표현을 보자면 시적 화자는 벚나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 시켜 안타까움과 끈질긴 생명력을 얘기하고 있다. 감정이입’이란 시적 화자의 감정을 어떤 대상에 투영시켜 그 대상도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절망적인 환경을 딛고 활짝 핀 꽃을 피운 벚나무의 자태를 보면서 말없이 서있는 완성된 벚나무의 침묵만으로도 고고한, 저토록 늠연한 그늘 아래 큰절 하고 싶다고 느낄 것이다. 넙죽 엎드려. 그렇다. 4연의 다소 불편한 시적 전개가 거슬리지만, 시의 호불호를 떠나 이 시를 읽으면서‘우연’과 ‘필연’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라 우연과 필연이라는 의미를 화자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 상관물인 벚나무의 입장에서 화자에게 감정을 이입시켜보고자 한다. 일반적 시의 감상은 시적화자의 입장에서 독법을 하지만 화자가 감정이입을 시키고 있는 시적 상관물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셈법이 아닐까 한다.  씨앗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고 있다. 어디에 착지하는지 모른다. -산보객들의 자드락길이든 아니면 비좁은 바위 틈새든- 씨앗은 벼룻길이든, 바위 틈새든, 벼랑 끝이든 떨어진 장소를 탓하지 않고 발아한다. 그리고 자라서 종족 보존을 위해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 벚나무의 입장에서 벚나무를 보자. 벚나무는 자기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화자가 더 안타까운 것이다. 씨앗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 떨어진 장소를 우연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필연이다.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시선의 以我觀物은 반목과 불평이 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以物觀物의 시선은 화해와 용서와 양보가 있다. 필자 또한 수없이 등산을 하면서 봤던 바위 틈새에서 자란 소나무를 보고 ‘왜 하필 힘들게 바위 틈새에서 살고  있지’라고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인의 시선은 다르고 顚覆적이어야 한다. 벚나무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씨앗의 떨어진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필연으로 생각하며 인간이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탄식과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의식하지 않기에 폭풍한설과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얼마 전 jtv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에서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했다.  우연과도 같은 필연. 세계적인 뇌 과학자 디크 스왑Dick Swaab은 우리가 행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뇌의 필연적인 역할들로 탄생한다고 했다. 벚나무 또한 바람에 의해 착지하는 씨앗이라는 뇌의 필연적 생장점에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9-05
  • 딱, 하나/윤별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딱, 하나/윤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10대엔 엿가락처럼 시간이 늘어져 짜증났었지 멋모르던 풋내기 사춘기엔 턱밑이 거뭇한 고딩 오빠도 참 늙어 보였어 19살 숫자는 넘나 징그러웠지 풋풋한 이십 청춘엔 서른이라는 말이 서늘했어 그 고개 넘으면 괜한 걱정 했다고 웃게 돼 금세 마흔 닥치면 다 산 인생 같아 맥이 빠지지 만 나이까지 들먹이며 삼십 대로 뻐팅겨도 별 수 없어 마흔이나 쉰은 그게 그거야 여기저기 시달리며 단내도 나고 쉰내도 풍겨 군인이나 경찰이 어려 보이면 늙은 거야 어어 하다가 환갑이 목전 환갑은 싸~아 하니 느낌이 좀 다르더라 서글퍼지다가 홀가분하다가 헷갈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전철도 공짜로 타면 어느새 칠십 문턱 가만있어도 데려갈 텐데 자살도 하더라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나 봐 아니, 죽고 사는 게 만만해지나   난 어떠냐구 나이 먹으면 다를 것 같지 다른 거 하나도 없어 누구나 내일은 똑같이 몰라 나도 처음 늙어보는 거야 그래도 한마디 듣고 싶다면,   그냥, 마음이 끄는 대로 살아봐 -------------------------   화자는 칠순을 넘기지 않았다. 랩을 좋아한걸까, 아님 랩을 잘하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시 자체가 랩송이다. ‘지’, ‘여’,‘라’, ‘야’등의 rhyme이 그것이다. 각운의 리듬에 맞춰 읽어 가면 독자로 하여금 시의 비유를 떠나 흥얼거리게 한다. 재밌다. 시적 시어를 떠나,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리며 노래했다. 이 시를‘방탄소년단’이 보면 작곡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그들은 의식 있고, 철학적, 시적인 노랫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의 3대 요소에 중에 ‘음악적 요소’가 있다. 시어에서 느끼는 운율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는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를 읽으면서 ‘순수시’를 지향했던 ‘시문학파’를 생각게 한다.   시는 운문이다. 이 시처럼 라임에 맞춰 흥얼거리면 하나의 노래가 되고 쉽게 읽히며 와 닿는다. 굳이 시론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낯익게 하기’이다. 굳이 시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면 ‘낯익게 하기’를 ‘낯익게 하게’하는 것이 또 다른 ‘낯설게 하기’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독백조로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아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랩의 가락으로 읊조리고 있다. 읊조린 게 아니라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화두처럼 툭툭 던지듯 하고 있다. 화자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겪었을 층층의 시절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아 독자의 생각을 붙잡아 두고 있다. 필자도 두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다. 그의 곡 <피아노 협주곡 2번>를 찾아 듣는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면서 종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종소리를 그려내는데 심혈을 기울인 합창 교향곡 <종> 이 떠올라서이다.   그의 세속적 합창교향곡 op.35 ‘종’, or 'The Bells', op. 35 에드거 앨런 포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다고 한다. 이 시는 종소리를 세월의 흐름,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포우의 시는 태어난 유년 시절에서 늙음에 이르는 삶의 흐름을 종소리에 대비시키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도 여기에 착안해 인간이 태어나 결혼하고 살면서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과정(生老病死)을 위대한 작곡가답게 각각 은종, 금종, 동종, 철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논어의 ‘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얘기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 살에 설 수 있었으며,(三十而立) 마흔 살이 되어 미혹함이 없었고,(四十而不惑) 쉰이 되어 천명을 알았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이 되어 귀가 순하게 되고,(六十而耳順) 일흔 살이 되어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였다.“   화자는 사십 대까지는 공자와는 좀 결이 다른 내용이다. 물론 공자와 화자와 같은 사고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대 이후부터는 비슷한 생각 겹치고 있다. “환갑 진갑 지나면 홀가분하고 죽음도 두렵지 않고. . . ”그럴 수밖에 없다. 천성과 천리를 깨우치고 귀가 순해지는 즉,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경지의 나이, 한마디로 득도와 무욕의 경지에 이름에서야 무엇에 얽매일 것인가. 그러면서 걸어왔던 내 발자취를 한 번쯤 뒤돌아봐야 할 이유는 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그 발자국 어지러이 하지 말지라 今日我行跡 오늘 남기는 내 발자욱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음에 양보해야 한다. 젊음은 직선이고 충동이지만 늙음은 곡선이고 여유다. 곡선과 여유를 가지고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자. 그리하여 헨델의 ‘라르고’나, 드뷔쉬의 ‘꿈’처럼 유려한 선율로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며 꿈같은 삶을 살아보자.   나이와 관계된 시를 읽다가 생각난 서산대사의 마지막 법어를 보자.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칠십 전인 화자가 칠십 고개를 넘어서는 어떤 가락으로 풀어낼지 기다려진다. 랩이 아닌 시김새가 있어서 멋진 감흥이 일어나는 그늘 있는 천구성의 판소리 풍이 아닐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8-19
  • 파격/이은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파격/이은숙     친구가 전화를 했다 아파트 앞에 벚꽃도 피고 진달래도 피었다고 그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가 대뜸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   어쩌자고 피었는지 내일쯤은 꽃에게 물어야겠다.     이은숙 <그해 봄 바다> ----------------------------------     얼마 전 파스칼 키냐르의 <파스칼 키냐르의 말 : 수다쟁이 고독자의 인터뷰>라는 대담형식의 책을 보았다. 그 내용 중에 “글쓰기는 ‘흔적을 해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물의 분비물이나 식물들의 풍경, 계절의 순환하는 자연 현상, 천체의 움직임 등”   계절은 봄이다. 흔한 얘기로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시적 화자는 중년의 여성일 것이다. 젊음과 나이 듦이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꽃 앞에서 무슨 차이와 구별이 있겠는가. 화자는 친구와의 일상적인 통화 중에 뜬금없는 말을 듣는다.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   오뉴월, 아파트 창문 너머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눈에 담긴 꽃에서 ‘계절과 자연의 섭리’를 해독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피어오른 아지랑이와 함께 중년 여인네의 가슴엔 숨겨진 연정에서 피어오른 기분 좋은 슬픔 같은 감정들이 해독되면서 해체되고 있다.   화자는 갑작스럽고 도발적인, 다소 과감한 어투로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라는 어구에, 특히‘지랄’이라는 단어에 말초신경의 더듬이가 멈춰 섰을 것이다. 화자도 어쩜 ‘지랄’이라는 용어의 쓰임과 독백의 문법이어야 할 문장을 의문문으로 대치 시기는 것에 대해 파격이라는 시제를 떠 올리지 않았을까 한다. 꽃피어 향기 퍼뜨려서 맘 설레고 기분 좋은데 왜 ‘지랄’같다고 할까. -물론 역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시인이란 자고로 수학공식과 같은 도식적인 사고를 싫어한다.   장조와 단조의 상반된 조합, 진양조와 휘모리의 이질적인 조화의 방식처럼 서로 충동하는 논리에서 답 없는 답을 시인은 창조한다. 다만 의문과 질문은 항시 열려 있어야 한다. 시인은 문인 같은 공자보다는 ‘호접몽’에서 보듯 샤먼의 장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담론이 아니고 극단의 언어이다.   완연한 봄기운이 스민 여인의 가슴에 침묵 한 조각 심고 혼자서 돼 뇌이며 왜 꽃이 피었는지 꽃에게 묻고 싶단다. 묻는다고 꽃이 답할 일도 없지만.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라는 구절에 많은 생각과 심연에서 올라온 심상을 펼치며 아래의 시구 같은 의미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화락천지정花落天地靜 꽃 문득 떨어지니 천지가 고요하고 화생천지동花生天地動 꽃 문득 피어나니 천지가 움직인다.   시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고취하는 것이리라. 에드거 엘런 포가 말했듯이 “소박하고 마음에 사무치는 짧은 시”가 마음을 달래는 시라고 한다. 위대한 시인보다 때론 음유의 시인이 좋고, 일상에 지친 피로와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비록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시인의 시에서 공감을 얻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이 시의 작가가 무명시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염천지절이다. “왜 밤인데도 더위는 식지 않고 지랄이라니”   글/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7-30
  • 꽃이 몸을 벗는다/김양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꽃이 몸을 벗는다  -홍랑묘를 찾아서   젖은 마당이 길을 막는다 발이 빠지고 땅이 깊이 패이고 마침내 왔구나 청석골* 좁은 골목 안 창백한 도라지꽃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펄럭인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단 한 번으로 건너버린 이승 함관령***과 詩 사이에서 시간이 명료해지고 왈칵 쥐었다 풀어지는 빗줄기가 잔가시를 쏟아낸다 순도 높은 눈물이 몸 밖으로 흐른다   손톱 끝 발바닥까지 뜨겁게 지져대던 그 여름 내 몸 어디쯤으로 건너오는지 혀 아래 삼키지 못한 말이 펄펄 끓는다 몸 안에 칼금 긋고 제단 위로 눕거나 용암으로 넘쳐나거나 펄펄 끓어오르는   꽃이 몸을 벗는다.     *파주 교하면 다율리 소재 **“묏버들 갈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홍랑의 시 ***홍랑이 최경창과 헤어진 곳   김양숙 <지금 뼈를 세우는 중이다>. 시와산문사.      홍랑지묘     ‘몸은 천민이요, 눈은 양반’이라는 말처럼 이중적 신분 구조 속에 위치했던 妓女, 조선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유∙무형의 문화재로 위치해야 할 예술인임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왜곡된 性의 상품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필자는 詩書畵에 능했던 몇 명의 기생 및 여류 문인들의 음택을 꽤 오랫동안 답사했었다. 그 후 난, 만능 예술인인 그들을 ‘妓生’이 아닌 ‘伎生’으로 이름 짓고자 했다. 이 또한 딜레탕트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시인은“젖은 마당이 길을 막고”, “발이 빠지고 땅이 깊이 팼다”고 한다. 묘역을 찾아가는 길에서‘마음도 젖고, 깊은 땅 속에 발이 빠지는’ -당시에는 논밭 두렁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했다.- 느낌이 들었으리라. 왜냐면 시인은 논밭을 만나면 곡식이 되어주고, 산을 만나면 계곡물이 되고, 소나기를 만나면 폭포가 되는, 시인은 본질적으로 페르소나를 갖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청석골’은 고죽 최경창과 홍랑의 음택 근처의 지명이다. 드디어 마을에 도착해서 주민들에게 위치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때 주민들의 표정이 다소 궁금해진 이유는 뭘까.   문학, 예술인들은 의식주와 예술의 살핏점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문학은 예속을 벗어나는 역량이다”라고 블랑쇼가 얘기했듯이. 문학인, 특히 시인은 돈 버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익히 아는바 이다. 그러다 보니 물질 만능의 사회에서는 심한 박탈감과 이방인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시를 써야만 하는 정언명령과 같은 의무감이나 그 자체가 선이라 생각하고 느끼는 창작의 희열과 기쁨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피는 워낙 뜨거워서 시심이 끓어올라 시상의 꽃을 피우고 한 편의 시는 열락의 불새가 되어 난다. 거기에 뒤따르는 고독과 고통은 어차피 시인의 식량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酒∙歌∙舞와 같은 관능적 향락은 성정(性情)을 흐리게 한다 해서 극히 금기시 한 시대였다. 이 시기에 대문장가인 孤竹 최경창과 기녀 홍랑은 짧은 만남을 통해 雲雨之情을 나누면서 號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듯이 홍랑은 외로운 대나무의 벗이 되어준다   그러나 어찌하랴. 다음 해 봄 서울로 발령을 받아 떠나는 고죽 앞에 홍랑은 첫사랑의 애틋한 정을 가눌 길 없어 영흥까지 따라나섰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함관령(咸關嶺)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왜냐면, 당시에는 평안도나 함경도 사람은 서울에 못 들인다는 금법인 兩界의 禁을 어겼다는 죄명이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홍랑에겐 분노의 장벽이었을 것이고, 혀 안엔 죽은 단어만 고였을 것이다. 고죽 또한 머루알 같은 그녀의 손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놓았을 것이다   헤어짐의 사랑앓이에 딱딱한 빵을 씹고 있는 애틋한 사연 앞에 시인의 말처럼 함관령과 시 사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명료해지고 그로 인해 순도 높은 눈물이 눈앞을 가릴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또한 뜨거운 여름의 몸 안, 혀 속에서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아님 제 몸 안에 칼금을 긋고서 제단 위에 누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들 사이의 연정에 스며들어 단장의 비애를 읊조리고 있다. 답사를 떠나기 전 시인은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공부했음이 역력해 보인다.   결국 고죽은 이러한 일로 파직 되었고 홍랑은 눈물을 뿌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고향으로 옮겨야만 했다. 창가에 드니 날은 저물고, 이별을 위로한 것인지 아니면 슬퍼하는 것인지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홍랑은 길가에서 물 오른 묏버들을 꺾어 고죽에게 보내며 심회를 읊었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단 나린가도 녀기쇼셔.   단 세 개의 구로 된 짧은 평시조이다. 관념을 표출한 사대부들과는 달리 솔직하고 애상적이고 여성적인 표현을 하면서 떠나는 임에게 홍랑도 느꺼운 감정을 드러냄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임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고, 첫 구절의 “임의 손대”처럼 도치법을 써서 묏버들을 꺾어 주는 의미를 강조하고, 버들가지에 파릇파릇 돋아나오는 새잎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여자의 섬세함을 연상케 하는 표현력은 홍랑이 엘레지(elegy)의 詩妓임에 틀림이 없다.   울연한 마음, 얼마나 애가 끓었기에 버들가지를 꺾어 보내며 창밖에 심어 놓고 보아달라고 애원을 했겠는가! 그러면서 새잎 나거든 애련의 이별을 상기 시켜 달라는 홍랑. 그녀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고, 문학사에서 아름다운 戀詩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黃鳥歌’를 비롯해서 고려가요인 ‘서경별곡’ 정지상의 ‘送人’ 황진이의 시조와 김소월의 ‘진달래꽃’등의 문학작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홍랑이나 고죽 또한 만만치 않다. 時時變轉하는 요즘의 ‘사랑법’을 되새겨본다.   그 뒤 최경창과는 소식이 끊겼다가 3년 뒤 고죽이 병이 드러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홍랑은 그날로 길을 재촉하여 밤낮을 걸어서 일주일 만에 서울의 고죽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성을 담아 간호를 하며 곁에 있어 주었다.   그 후 고죽의 사망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고,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홍랑은 곧바로 마음을 추슬러 객사를 한 고죽을 위해 시묘살이를 했다.   “꽃이 몸을 벗는다.” 왜 꽃이 몸을 벗어야만 했을까? 시인은 함축적이고 숨겨진 시니피에는 버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니피앙만 남겨 놓았다.    글/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7-17
  • 운필運筆/박용섭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운필運筆/박용섭       가뭄이 길었던 해 아버지 가슴도 논바닥처럼 타고 있었다 비단실 같은 빗줄기 촉촉하니   쟁기를 지고 멍에 메워 큰 소를 앞세우고 논으로 가신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주 한 사발 소에게 먼저 권하며   힘들지   해 그림자에 비치는 논고랑은 예서체를 펼쳐놓은 것 같다   모를 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을 눈물이라도 찔끔 고이면 행서체로 내가 써레질해야지.   시집 <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쌍겨리/단원 김홍도   한 가뭄에 타는 논바닥, 갈라 터지고 흙먼지 일으키는 논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엷은 홑바지를 입은 아버지와 헐렁한 몸빼를 입은 어머니가 일구는 농사철, 알바도, 시간제 근무도 없었던 시절엔 곡식 한 알, 채소 한 포기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산골 다랑논은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시인은 강원도 삼척의 두메산골에서 어렸을 땐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시인이면서 서예가로서 한 획을 긋고 있다. 그래서 떠 올리는 것이 모내기철 논갈이와 써레질을 行筆에 빗대어 시상을 전개한다. 시란 관념적인 것보다 체험적인 요소에서 탄생할 때 더 잘 쓰이고 빛날 수 있다.   농부에겐 한 해 논밭의 수확은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그야말로 삶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큰 가뭄이라도 들면 가슴이 타들어 가고 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 내리는 비는 비록 비단실처럼 가느다란 빗줄기지만 一滴甘雨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논바닥을 촉촉이 적셔주어 아버지는 급히 쟁기를 짊어지고 나선다.    지금은 이앙기, 트랙터 등을 이용하지만 당시에 다랑논은 오직 소와 사람의 힘으로 일구는 농사 방법이었다. 논갈이 할 때면 가끔 보습이 깨져 나가거나 찌그러지면 낭패를 보지만 그래도 볏에서 볏밥이 곱게 갈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엔 어느덧 풍년을 예약한다.   농사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이기에 가끔 쉬어야 한다. 자신의 휴식을 떠나 오직 한 살림 밑천이요 저당 잡힌 대학 등록금인 소를 위함이다. 부리망을 벗겨주고 먹이를 주며, 텁텁한 한 잔 술도 소에게 먼저 권하는 것이다. 소는 가축 이전에 가족이었다. 그리고 영물이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심우도(尋牛圖)’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아 마음을 깨닫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종삼 시인의 시 한편을 보자. ‘묵화(墨畵)’이다. (낭송/ 유부식)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dFmyg0DPWvI‘묵화’   쟁기 끝에서 곡식 영근 소리를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시인은 훗날 서예의 대가가 되어 豪端有聲, 한지 위의 붓끝 놀림에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이 일치할 때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꾸민 감동은 가짜다. 삶의 체험에서 나온 감동은 보고 읽는 이에게 빠른 감화를 준다. 고통의 골목을 지나지 않고 어찌 환희의 광장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논이라는 한지 위에 쓰인 예서체의 논갈이를 보고 있다.   쟁기질 후, 모내기하기 위해선 논바닥을 고르게 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농기구가 써레이다. 어린 나이에는 모내기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몫이 아니다. 초보자가 해서가 아닌 초서에 가까운 행서라니, 아마도 써레질이나 쟁기질은 단정한 해서체 보다는 좀 흘려 쓴 행서체가 나올 것이다. 아니, 초보 써레질의 運筆이 서툴러서 行書가 될 것이다. 그렇다 점 하나, 획 하나가 사람의 신체조건에 해당 하듯 시인은 永字八法을 익히고 六書에 깊이 다가섰을 것이다. 삼척의 화전 밭뙈기와 층층 다랑논의 서체를 기억하면서. 시제를 ‘운필運筆)로 하고, 그리고 그 서체의 주인공인 아버지를 떠 올리고 있다. 말 없음의 큰 울림으로 깨우침을 주셨고 빛 없음으로 빛을 발하셨던, 언제나 빛나지 않고 빛나셨던 眞光不輝의 아버님!   삶에서 일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근본이다. 그 행위 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는 중요치 한다. 다만, 농사짓는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신성한 노동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작물을 평생 일구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는 대표적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이다.   필자의 아버님도 본인이 쟁기질 하셨던 그 밭에 땅보탬이 되어 계신다. 낮에는 논밭갈이 하시고 이 시간엔 곤히 주무실 것이다. 三更이다.   “그때는 시골 살림이 너 나 없이 가난하여 배불리 밥 먹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지도 모른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전 화전 밭뙈기 쟁기질하는 소를 몰고 아버지 따라나서면 해거름이 되어서야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온다. 사랑방에는 장죽을 탕탕 터는 훈장 앞에서 글 읽는 소리가 노래, 그이상의 연주보다 아름답다. 아무리 농사일이 힘들어도 책을 펼치고 있는 아들은 밭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심통을 부리면 “나중에 성한테 배우면 되지 아버지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가난이 켜켜이쌓여도 부모님은 쇳덩이도 녹일 기세였다.“ -시인의 어록에서 발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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