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예술/창작
Home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실시간뉴스

실시간 부천의 문학향기 기사

  •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낯선 이국땅 이방인 길 찾듯이 심쿵하며 더듬는 볼살 위 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시끄러워 가만히 들어보니   청춘을 돌려 달라 아우성치는 듯하다 열여덟에 피어난 여드름 자국 위에 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 만추의 울타리에 착각한 덩굴장미 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   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 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   인생이란 덧없이 흘러가는 강줄기 위 삶이란 배를 띄워 노 저으며 73세 황혼 녘 남모르게 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   시집 『73세의 여드름』, 도서출판 글벗, 2022.     시집을 구입할 때 특히 제목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시집 내용을 보거나 미리 준비한 시집을 사지만, 제목이 눈에 띄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요즘은 출판되자마자 대부분의 책들이 사장된다. 온 정성 쏟아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인데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집의 제목은 시집의 맛을 느끼게 하는 키워드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심이 깊숙이 배어 있다. 왜냐면, 요즘처럼 독서 하지 않는 현실 속에 독특하고 눈에 띄는 인상적인 제목이어야만 독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집의 내용이나 제목에 함축된 특별한 그 무엇(something special)에 관심을 둔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은 시집 제목의『73세의 여드름』의 표제시다. ‘여드름’은 청춘의 심볼이다. 그 청춘의 상징인 ‘여드름’을 의인화했다. 그래서 1연의“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2연의 “청춘을 돌려 달라//아우성치는 듯하다”처럼 73세, 늘그막의 얼굴에서 여드름이 떼창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여드름을 의인화시킨 다음 거기에 청각적 이미지로‘여드름’을 형상화했다.   “열여덟에 피어난//여드름 자국 위에//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라고 한다. 어쩜 화자는 얼굴의 여드름이 생긴 것을 보고‘회춘(回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비록 고희(古稀)의 나이지만, 신체적인 연륜을 떠나 젊음의 표상인 여드름에서 그 옛날의 젊음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이팔청춘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때론, 나이가 들면 특별할 것 없는 것에서도 애착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 무상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믿을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만추의 울타리에//착각한 덩굴장미//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이렇듯 늦가을 울타리에서 피었다가 때가 되어 사라지는 덩굴장미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라고 한다. 이렇듯 시인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고정관념과 자동화된 시선은 버려야 한다. 타성에 젖은 익숙한 질문이 아닌 보다 의미심장한 물음표를 가지고 경생상외(境生象外) 즉, 깊은 뜻이 형상 너머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4연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73세 황혼 녘 남모르게//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라고 한다. 화자와 비슷한 나이라면 어쩜 이 시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 덧없이 지나가는 게 인생살이다. 칠순의 황혼 녘, 술잔에 노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싶은 시간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닌, 아름답게 물들어야 한다. 늘그막의 여드름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층층이 쌓인 세월의 퇴적층에서도 꽃과 나무가 피고 자라듯, 김시습의 시구처럼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처럼 얼굴의 여드름은 젊디젊은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무료한 나날에 잠들지 말고 눈을 불끈 뜨고 참나를 찾으라는 죽비인 것이다. 시인은 밤낮 가림없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왜냐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잘한 씨앗의 시간들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아플 때 우린 그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행과 연(聯)갈이가 다소 변칙적인 시이지만, 칠순의 시 한 수 읊조리며 조조의 아들 조식의 시 한 수 시인에게 올리고 싶다.   인생은 하루를 더 살아도 아쉽고 하루를 덜 살아도 충분하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2-10-25
  • 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누군가 따라 걷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발끝만을 바라보며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 나를 닮아 있습니다.   양지쪽 흰 눈은 파르라니 몸을 녹이고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 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 나도 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돌아가려니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곳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 내가 멈춰 서 있는 이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고   또 나아갈 곳이라는 것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   가슴 가득 들여 마셨던 맑은 공기는 가슴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이 가장 행복한 세상일 테니까요.     ▶시낭사(시를 낭송하는 사람들) 대표     ------------------------------   시인은 사물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많은 의미를 시어로 응축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보다는 단순하면서 순수한 사고를 해야 한다. 헤겔은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라고 했다. 그렇듯 시제의 <내가 머무는 세상>에서 펼쳐진 내용을 보면 작가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작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연에서의 ‘문득’이라는 시어를 보자. ‘문득’은 의도를 가지고 뒤돌아보는 게 아니라 우연히 뒤를 돌아본다는 의미이다. 도연명 <음주> 5에서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누나)“의 ‘유연히’와 같은 맥락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뒤돌아봄인 것이다. 그 순간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나를 닮아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화자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3연에서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는 하늘이 화자를 삼켜 채색시킨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이 바라본 하늘에 스스로 물들어가는, 즉 “대나무를 그리려면 대나무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 것과 같이 자연과의 합일하는 화자의 순수 자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 돌부리를 만나면 디딤돌로 만들면서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에서 보듯 인생사 오고감에 초탈한.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의 순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다.   이것은 평소 작가의 자연 순응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의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4연의 “그런데도 돌아가려니/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푸르스트의 시 “아직도 잠들기 전에 갈 길이 조금 남아 있다.”는 시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 돌아 가자꾸나/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는 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로”라는 <귀거래사> 또한 함께 생각게 한 시구이다. 이렇듯 시상의 전개가 자연과의 교감 속 인간의 본향인 자연의 자궁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생각하고 느낄 수 없이 내 안에 존재한다. 7연의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에서 보듯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멈춰 있는 곳이 돌아갈 곳이고, 나아갈 곳이고, 그곳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라면서 읊조리고 있다. 그곳이 이니스프리인지 유토피아인지, 무릉도원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러한 곳이기에 그렇다.   모든 사람의 내적 성찰의 밑바닥에는 자신을 응시하면서 뒤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화해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9연의“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와 같이 말입니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서 나온다. 이 시를 보면 함축적이기보다는 조붓한 숲속을 거닐다 만난 깊은 산골의 옹달샘 물맛이요 광천수 물맛이다.   내 안의 나를 너무 밖으로 내보내지 말자. 그래서 내 안에서 껍데기로 존재하게 하지 말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떼어내어 그에게 또 다른 세계의 삶과 알찬 영혼을 주어 하나의 개체적 ‘나’로 키우자.   지금, 이 순간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 그리고 생각하는 이곳, 바로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다. 그렇기에 가장 행복한 세상이다. 여기서 종교적 성찰과 믿음, 철학과 사상의 책받침이 무슨 필요로 하겠는가.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Now and Here, 지금 여기가 바로, 행복이 있는 곳이다. 카르페 디엠.    글/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2-06-19
  • 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세상이 내 삶을 데려다주고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처럼 짧은데도 벌써 80년   주변에 버팀목은 유명을 달리하고 남은 생 어림짐작하지만 잘 모르고 막연히 망 구의 언덕에 올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동녘에는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지구의 한 지점에 내가 중심점 원을 그리며 우주를 품고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   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 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 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    시집 「한 잔 그리움 추억에 얼룩질 때」. 도서출판 글벗, 2022.   청계천 징검다리 사진-홍영수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만남과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생명체들의 섭리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듯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이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다, 화자는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이라면서 속세의 만남과 이별 속 정한을 읊조리고 있다. 그러면서 “짧은데도 벌써 80년”이란다. 여기서 “벌써”라는 수식어에 주목해 볼 수 있다. ― 시 제목의 “미수(米壽)”는 쌀 “米”字를 파자하면‘八’이 두 개 있어 88세를 가리키는 말인데 화자는 팔순을 미수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듯 세속의 나이 80년이면 일반적으로 거의 1세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긴 세월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벌써”라면서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으로 치환하고 있다. 화자는 80이라는 높은 고갯길에서 걸어왔던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순간 눈송이 하나가 장작불에 떨어지는 순간으로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떠오른 서산대사 휴정의 마지막 법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가 떠오른 이유는 왜일까?   화자는 팔십 고개를 지나 망구(望九) 고개의 언덕으로 향하면서 지나온 추억과 기억들을 떠올린다. 걸음걸음마다 맺힌 인연의 끈과 고리들, 그토록 긴 여정으로 생각했던 한 생의 앞날이 벌써“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삶이란 ‘찰나’적임을 간파고 하고 있다. 그러하니 더욱 아쉬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구나 옆지기마저 이미 훗승길로 가고 없으니“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비록 지구의 중심점에 우주를 품고 있을지라도 자기를 한껏 낮추며 살아가는 자세는 3연의 마지막 행“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잘나고 못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결국엔 한 떨기 이슬처럼 사라져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에서는 어쩜 화자는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 덕목의 실천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굴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것은 베푼다는 의식 없이 맑고 밝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연의 마지막 행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와 같이 화자는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이상세계에 가기 위해 어쩜 “시심”이 고해의 바다인 듯 징검돌 하나하나를 건넌다고 하고 있다. 그 건넘이 바로 고해의 징검돌일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에 시심이라는 징검돌을 놓아가며 고해의 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 나온 것이 아닐까.   화자는 고해의 길목을 그냥 건너는 게 아니라 징검다리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시는 하고픈 말을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함축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고 할 때, 여기서 시인은 실제 경험과 상상적인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호소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2-05-26
  • 나비 걸음/이상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나비 걸음/이상호   꽃바람 공원길을 낡은 유모차 하나 느릿느릿 사람들 사이를 건너가고 있다 아기에게 처음으로 세상 구경시켜 주었을 5월의 하늘 속보다 더 깊은 등 굽은 유모차에 접힌 박스, 찌그러진 빈 페트병 철 지난 신문지가 실려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처럼 세월의 모퉁이 섶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아기의 아기가 되어 이팝나무 꽃길을 지나가고 있다 아카시아 꽃길을 지나가고 있다 물푸레나무 그늘 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걸어가고 있다   ▸2019년 『Moment』 신인상 수상   ----------------------------------------------   시인은 어찌 보면 고통스러움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왜냐면, 삶과 죽음, 극과 극을 동시에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생과 사를 아파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피어난 시 한 송이는 독자에게 진한 감동의 향기를 풍긴다. 물론, 어느 예술 장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시인은 극단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와 할머니를 대비시킨 화자의 시적 진술이 돋보인다. 우리가 나비를 좋아하는 것은 나비 자체라기보다는 애벌레에서 羽化(우화)하고 난 뒤 훨훨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그 과정을 사랑한 것이다. 화자는 폐지를 줍는 등 굽은 할머니의 걸음에서 나비의 우화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것은 유모차의 아이가 지금의 할머니로 변화하는 과정에서이다. 그냥 놓치기 쉬운 일상의 풍경들에 입김을 불어 넣고 눈으로 더듬으며 때론, 귀로 마시면서 묘사를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라고 할 때 시적 화자는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이렇듯 관조로 이루어진 작품일수록 시적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등 굽은 유모차에’는 파릇파릇한 5월의 새싹 같은 어린아이가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접힌 박스, 찌그러진 빈 페트병’ 등이 실려 있다. 새싹 돋는 ‘5월과 아기’, ‘철 지난 신문지와 모퉁이 진 세월의 섶다리’를 통해 화자는 극한 대비를 시키고 있다. 그리고 ‘철 지난 신문지’에서 이미 저물어가는 황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시상의 흐름에서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왜냐면, 시제의 ‘나비 걸음’에서 ‘나비’는 곡선(여성적)의 날갯짓으로 변화무쌍하게 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등 굽은 유모차’와 ‘접힌 박스’, ‘찌그러진 페트병’, 그리고 ‘철 지난 신문‘ 등의 표현은 할머니의 상징이며 또 다른 이름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물처럼/세월의 모퉁이 섶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에서 굽이쳐 돌아가는 강물같이 모퉁이 세월의 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직유의 화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굽은 허리에 매달린 고독 한 바구니와 곰삭힌 침묵 한 종지, 나비 걸음과 함께 걷는 한숨 소리에서 화자는 가슴 아린 감정의 흐름을 느끼면서 인고와 희생의 삶을 살았을 할머니의 辛酸(신산)한 삶을 떠올리고 있다.   봄바람처럼 속삭이는 바람이든, 엄동설한의 폭풍이든, 봄 햇볕 같은 따사로움이든,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든 아무리 현실이 반어적으로 다가와서 몰아치더라도 ‘폐지와 찌그러진 페트병’과 같은 것을 주워야 한다. 그것이 삶의 방식이고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는 일에 대한 귀천이 없음은 물론일뿐더러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비본질적인 존재가 아닌 본질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팝나무 꽃길’, ‘아카시아 꽃길’, ‘물푸레나무 그늘 속’을 걸어가는 할머니의 나비 걸음은 결코 허무도 아니고 헛됨도 아니다. 비록, 가녀린 발걸음은 비록 몸짓 가벼운 걸음이지만 그 걸음 자체에서 삶의 호흡을 감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자는‘아기의 아기가 되어’‘꽃길’과‘나무 그늘 속’을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걷고 있다고 한다. 여기 할머니 걸음에서 화자는 차라리 삶의 역동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과거에 대한 회한과 덧없음에 몸서리칠 필요도 없고, 불안한 미래에 떨 필요도 없다. 아직은 나비의 걸음걸이를 할 수 있고 자유로운 날갯짓을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흔들리고 휘청이는 걸음일지라도 사뿐사뿐 걷는 ‘나비 걸음’은 삶의 몸부림이고 영혼의 발걸음이다. 커다란 목표가 없더라도 5월의 파란 하늘의 공기 아래 걸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산자락에서 바라보는 산과 산속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이렇듯 화자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겉모습만 봤다면 한 마리의 나비도, 그 나비의 발걸음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모차와 할머니’, 꽃길을 지나고 있는 ‘아기의 아기’, 그 아기의 발걸음은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천사의 옷깃처럼 가벼운 아기의 발걸음이다. 그 발걸음엔 소리가 없다. 침묵의 메아리만 있을 뿐이다. 고치 속에 갇힌 과거를 회상하면서 더 높은 곳을 날기 위한 아름다운 곡선과 부드러운 침묵의 걸음, 그것은 ‘나비 걸음’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2-01-11
  •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기다림은 행복을 찾는 순간일까, 서정적인 평시조 한 수 읊조리며 누굴 저리도 애타게 기다릴까.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임은 오지 않을까? 성엣장 같은 차가운,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은 깊어 가는데 …… 송도삼절의 조선 최고의 뮤즈인 황진이, 밤중에 가슴에서 부화한 그리움 한 줌 안겨준 그이는 하룻밤 풋사랑이었을까 아님, 정 주고 떠난 풍류객의 사대부였을까? 누가 되었던 그 임이 언제 올지 몰라 기나긴 밤의 시간을 한 토막 잘라낸다니, 비록 기녀의 신분이지만 순수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그녀, 얼마나 겨울밤 동치미 같은 맛 난 표현인가.   그 시간을 봄바람 같은 따스한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거든 펴 드린다니, 이토록 으늑한 정성, 장작불에 달궈진 사랑방 구들장인들 이보다 더할까.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풍류객이 사실 여부를 떠나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직에 부임하기도 전 파직 당할 만하지 않은가. 한 번쯤 황진이 같은 여성에 젖어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 嚴冬雪寒에……   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가 임이 오길 바라는 밀물의 기다림이었다면 폭풍한설에 실연의 아픔을 안고 방황을 하며 괴로운 심사를 토해내면서 겨울 여행을 떠나는 썰물의 떠남이 있다.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곡 왕 슈베르트다   죽기 한 해 전, 빌헬름 뮐러의 시에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짓는데 그 마지막 곡이 ‘Der Leiermann 거리의 악사’이다. 빌헬름 뮐러는 연인에게 배신당한 뒤 그 어떤 세속적인 욕망이나 미련도 다 벗어 던지고 애통한 마음으로 시를 썼다. 그러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독감과 사무친 고뇌의 심정으로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안식을 얻는다. 슈베르트는 바로 이 빌헬름 뮐러의 보고 <겨울 나그네>라는 걸작을 탄생시킨다.   황진이와 슈베르트는 기다림과 떠남의 엇갈린 운명을 노래한다. 기다림은 떠남을 예고하고 떠남은 또 다른 기다림을 예약하는 모순의 진리 속에 동일성의 사유를 발견한다.   황진이가 시조 한 수 짓고서 밤새도록 임 그리며 읊조린 것처럼 슈베르트 또한 ‘거리의 악사’를 마치 250여 년 앞선 황진이 시조처럼 길게 늘어뜨리며 우울하게 슬픈 곡조로 여운을 남긴다. 사랑하는 임의 곁을 떠나면서 차마 떠나기 싫은 마음에서일까. 슈베르트와 같은 나이(31세)에 세상을 등진 명동백작 시인 박인환도 그랬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법화경’에서 말한 會者定離(회자정리) 이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진다.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한 것이리라. 또한 去者必返(거자필반)처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 이 또한 거슬릴 수 없는 인생의 순리이다.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과 만남 속, 인생은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고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는 순리 앞에 황진이나 <겨울 나그네> 속 주인공도 순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시를 짓고 노래를 읊조린 것이다.   실연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 우린 그 누구도 타인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시조 한 수의 문학과 노악사의 음악, 오감으로 스며든 향기여! 난 동짓날을 얼마 앞두고 삼경의 겨울밤에 이 곡을 들으며 황진이와 겨울 나그네가 되어 본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https://www.youtube.com/watch?v=7OvZWtHH3mI&list=RD7OvZWtHH3mI&start_radio=1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12-05
  •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온 하루하루 오르막길 내리막길 희로애락 그 세월들 열두 달도 끝자락인데   밤을 새며 뒤척이던 베갯잇에 묻은 사연 무어 그리 서러워서 고개고개 스무고개 아쉬움에 긴 한숨   동지섣달 기나긴 밤 정든 님은 어디 가고 칼바람 황소바람 문풍지에 부딪혀서 시퍼렇게 멍이 들고   돌아오는 길을 잃어 어디선가 그대도 긴긴밤 허리춤을 굽이굽이 홀로 새며 두고 온 님을 그리는지   낙엽 구르는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훠이훠이 눈물 바람 그 누가 이내 설움 행여나 아실까나 기다린 세월만큼 원망도 깊어가네.   시집 <내 그리움의 끝은 언제 너였다>, 미디어저널, 2021.   덕유산 정상-사진/홍영수  ---------------------------- 너에게 나는 간다. 그렇지만 다가가지는 못한다. 보고픈 맘 간절하기에 원망도 안타까움도 커지지만, 어찌하랴, 너에게 다가설 수 없는 이 현실을. 그래서 갈망할 수밖에.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듯이. 이 순간만은 진실이고 진심이다. 이때의 열정과 욕망, 그리고 그리움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갈망이기에 감추려 해도 낭중지추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안다. 널 가질 수 없다는 이 현실과 이 순간을. 아니 어쩜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계절은 겨울, 대설과 소한 사이다. 숨 가쁘고 바삐 살아온 한 해가 저문다. 1연의 “오르막길 내리막길//희로애락 그 세월들”의 대구법을 쓰면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아쉬움을 강조하고 있다.   춘향가 <쑥대머리> 사설 중에 전전반측(輾轉反側)에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를 반영하듯 “밤을 새며 뒤척이던”의 전전반측하는 화자의 심정 또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베갯잇에 묻은 사연/무어 그리 서러워서” 분명코 베갯잇에 속 울음으로 흐느끼며 눈물 자국을 흘렸을 것이다. ‘베개’는 잠을 잘 때 사용하는 꿈을 실은 물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선 세계에 노니는 ‘유선침遊仙枕’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화자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까 하는‘여의침如意枕’의 베개를 베고 돌아누워 있다.   길고 긴 한겨울 밤이다. 3연의“칼바람 황소바람”은 강력한 ‘추위’의 강력한 청각적 은유다. 그 추위가 “문풍지에 부딪쳐서/시퍼렇게 멍이 들고”라고 한다. 화자는 이러한 추위 속에서 혹여 “돌아오는 길을 잃어”, “긴긴 밤 허리춤을/굽이굽이 홀로 새며”라고 하면서 임을 걱정한다. 이 숭고한 여인네의 사랑 앞에 한 번쯤 다가가 보고 싶은 것이 모든 남정네의 욕망이라면 지나친 걸까? 더욱이“낙엽 구르는 소리에/버선발로 뛰어나가”라고 하니 더욱더 그러하지 않은가.   여인네의 사랑은 베갯잇에 적신 눈물과 한숨으로부터 새어 나온 것일까, 임을 기다리는 화자의 그리움은 전전반측하는 몸부림에서 새어 나온 것일까. 눈물과 한숨, 그리움의 늪에 빠져 긴 긴 밤을 지새우면서 원망하는 듯 원망하지 않고 흐느끼고 호소하면서 기다리는 화자의 절절한 사랑은 가난했던 백석을 평생토록 잊지 못하는 순수 사랑의 자야 김영한을 떠 올리게 한다.   문학에서는 ‘꿈’을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토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긴장의 통로로 이용하기도 한다. 화자는 잠깐 잠든 사이에서도 벌떡 깨어나 폭풍 한설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그리고 차갑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서 보듯, 동짓달 기나긴 밤과 교응하는 소리를 “훠이훠이 눈물 바람”으로 환치하며 설움과 원망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설움과 원망은 또 하나의 그리움에 대한 역설의 장치일 뿐이다    시상에 흐르는 운율은 서구적 운율이나 악기가 아닌 전형적인 동양적 리듬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섧디섧게 흐르는 거문고 가락이기도 하다. 그 가락 속엔 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속‘설움’과‘원망’을 특히 겨울 특유의 청각적 운율을 통해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는 연정가(戀情歌)이다.   「동지섣달 긴긴밤에」의 시를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원망과 설움보다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한 올 한 올 직조한 한 필의 비단결 같은 서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단 폭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네의 정한과 정조가 무늬로 채색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쓰라림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이지만 누구나 사랑과 이별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모티브가 되었을 황진이를 만났다. 500년 지난 후 또 다른 황진이, 지금쯤 그녀의 곁에는 분명코 백호 임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10-24
  • 訪曹處士山居(방조처사산거)- 박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訪曹處士山居(방조처사산거)- 박순(1523~1589, 중종 17~선조 22) 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취해 자던 신선 집 깨어보니 의아하다 白雲平壑月沈時 (백운평학월침시) 흰 구름은 골 가득 메우고 달이 지는 새벽녘 翛然獨出脩林外 (소연독출수임외) 주인 몰래 혼자 나와 긴 숲길 벗어나니 石逕筇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에게 들켰네. 술 취한 후 희미하게 눈을 뜨니 너붓한 반석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으늑한 장면, 좋은 벗과 주거니 받거니, 달무리로 주안상 차리고, 솔잎 향 몇 방울 술잔에 떨어뜨리며 명지바람에 실려 온 실솔(蟋蟀) 울음소리로 세속의 찌든 귀 헹구면서, 맴도는 흰 달빛도 초대한 깔축없는 분위기에 실컷 마시고 쓰러졌다. 깨어보니 너부러져 있는 술상 앞에 주인은 쓰러져 코를 골고 주변을 살펴보니 골을 메운 흰 구름 雲海를 이뤘다. 밤새도록 마신 달도 취해 서녘으로 어슷하게 비틀거릴 무렵 미안한 마음에 슬며시 일어나 숲길 나서는데 돌길에 그만 지팡이 소리가 난다. 아뿔사! 잠자던 새에게 들키고 말았다. 상영소견(觴詠消遣), 어찌 벗과 자연과 술잔 기울이며 시 한 대접 선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자의 자연에 대한 관조, 곰살궂은 마음씨, 익살미의 ‘宿鳥知’에서 순수를 읽는다. 박순은 ‘숙조지선생(宿鳥知先生)’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300년 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는 결곡한 대학자 박순에게 헌정하듯 곡 하나 짓는다. ‘달빛’(Clair de lune)‘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고 단지 느끼게 한다. 바로 ‘분위기 음악’이다. 베를렌느의 시 ‘달빛’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1위에 선정되기도 한 곡이다. 知音의 벗과 달빛 친구 삼아 이슥토록 술잔 기울일 때, 적요가 적요롭게 숲에 내려앉을 때, 나뭇잎 사이를 타고 흐르는 곡 ‘달빛’, 몽환적 운율의 우주성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달빛이 내게 와서 빛나는 것일까. 내가 달빛 속에서 달이 된 것일까. 잡을 수 없는 신비로움 애매한 윤곽, 모호한 선에 핀 인상주의 모네와 르누아르 드뷔시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함으로 흐르는 멜로디 말하려 하지도 않고 느끼게 할 뿐 달빛의 몽환 꿈속의 달빛. -필자의 드뷔시 <달빛>에 대한 斷想-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음악듣기/드뷔시-달빛 https://www.youtube.com/watch?v=zpIgoy3Q1OE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8-25
  •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던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든 고단한 숨소리를 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 이 절절한 모순 앞에 나의 심장에서 잊혀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지는 두려움을 꽉 찬 공허의 그리움으로 동살 잡히는 새벽녘까지 당신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홍영수 시인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7-24
  • 눈 먼 사랑/이천명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눈 먼 사랑/이천명    사랑에 눈이 멀어 눈 먼 사랑을 한다   백일의 해맑은 눈동자 허공을 맴돌다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 첫사랑이었다   웃는 모습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 웃음 소리 귓가에 맴돌지만   함께 해서 더 황홀했던 순간도 세월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슴 아픈 짝사랑이었나 보다   밤을 새워도 한 줄의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   첫사랑은 눈 먼 사랑으로 자라나 세월 담은 기다림만 가득하다    산문집. <섬 그리고 자유>. 산과들. 2013   ---------------------------------------------------   나는 너에게로 가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욕망은 앞서지만 안타까움 속 닿을 수 없는, 어릴 적 목숨도 바칠 것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사랑, 그 순간만은 분명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순수와 진실한 사랑은 딱 한 번, ‘첫사랑’이 아닐까. 그렇기에 화자는 ‘해맑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심장이 쿵’ 하는 ‘첫사랑’이라고 단정 짓는다. 사실 살아가면서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지만,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첫사랑만큼 무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몰의 서해에서 바라보는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괜스레 눈시울이 적셔지고 눈으로 노을 한 점 당겨 와인 잔에 부어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리라. 사라지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머문 상태라면 굳이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 변하기에 아름답고 변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랑, ‘첫사랑’,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도 바로 그러한 성정 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눈 앞을 가리고, 뭔가 낀 눈먼 사랑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미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미리 짐작하기에 화자는 시제를 ‘눈 먼 사랑’이라 했고, “눈먼”의 맞춤법마저 일탈해서‘눈이 멀다’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눈 먼’이라 띄어쓰기를 했다. 인간은 사랑할 때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첫사랑’이라면야.   시인이 되려면 화산의 불구덩이로 빠져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얼마나 웃는 모습이 심쿵했으면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라고 할까. 그리고 웃음소리는 활화산에서 쉼 없이 뿜어져 오르는 마그마의 뜨거움이 되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첫사랑’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때도 있지만 중고시절에 이웃집 오빠, 또는 친구의 오빠를 친구 몰래 만나게 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인 첫사랑의 방식이다. 첫사랑! 세간의 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렇기에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그 고통을 넘어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성 간에서 오는 고통 속 쾌락, 은밀하게 마음을 휘어잡고 관통하며 지속시키는 내적 충만감. 라깡이 말한 “주이상스(jouissance)”다. 그래서 화자는 함께 해서 ‘황홀했던 순간’이 세월 지나 ‘가슴 아픈 짝사랑’ 곧 ‘첫사랑’ 라고 한다. 참혹한 기쁨의 첫사랑.   필자의 중고등 시절은 펜팔이 대단히 유행했다. 말 그대로 오직 펜으로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이기에 초 멋진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밤새워 글을 쓴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유치함을 넘어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때 그 시절의 펜팔이라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문학지망생들에게 초석이 되지는 않았을까. 라디오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고, - 혹시 편지가 올까 하는 마음에 - 시선은 동구밖에 서성이고. ‘밤을 새워도’,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의 화자의 심상을 보면 다분히 공감할 수 있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항상 첫사랑에게 돌아간다”라는 어느 나라 속담이 있다. 시인의 세월을 지팡이가 짚고 가는 지금, ‘세월을 담은’‘기다림만 가득하다’고 한다. ‘첫사랑’,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그 첫사랑의 행복은 이미 깃을 잃고 추락한 행복일 뿐이다. 천하의 백거이도 - 첫사랑이었던,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했던 - “남몰래 이별”하는 사랑을 했다.   潛別離/白居易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울 수 없어요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말할 수 없어요 남몰래 사랑해야 하기에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몰라 깊은 새장 한밤에 갇혀 홀로 깃든 새 봄날 날카로운 칼날에 잘린 연리지 황하 강물 탁하지만 맑아질 날 있고 까마귀 머리 검지만 희어질 날 있으리 오로지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우리 만날 기약 없음을 감수해야 하리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7-21
  • 바깥잠/ 구미정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바깥잠/ 구미정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까맣게 쏟아진 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보다 무거운 버스 요금 앞에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을 본다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신발이 된 사내는 눈 감아야 보이는 세상으로 걷는다. 흔들흔들 기점을 돌아온 원점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바깥잠 사내가 내렸다 비를 몰고 바람이 휘돌아 간다   * 월간 시 31회추천시인상     -------------------------------------- 스스로, 아님, 사회적 제도, 또는 의도치 않게 소속된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인생이 끝났다거나, 낙오되었다고 할 수 없다. 스스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타인에 의했을 경우는 힘들겠지만, 스스로 마음을 접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화자는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까맣게”쏟아진다며 왠지 어두운 분위기를 예감한다. 그때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그 무게가 버스 요금보다 무겁다고 하는 “바깥잠”이 승차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어쩜 IMF 이후부터 우리의 주변, 특히 지하철 역, 공원의 벤치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등에 얹힌 짐”과 “양손에 든 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속에 옷가지와, 딱딱한 바닥에 펴고 자야 할 이불 같지 않은 이불 등이 순서도, 질서도 없이 빼꼭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저들이 살아오면서 일구고 가꿔놓은 삶의 텃밭과 경작지, 그 위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화자는 이미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하는 그의 말이 차라리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줄임표(……)”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언어 너머의 뜻(言外之意)을 알아차린 시인은 신호등의 불빛처럼 번뜩이며 반짝이는 시선으로 “바깥잠”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은 머리로 사는 게 아니라 심장의 고동으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비참하게 된 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화자의 시선은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대중교통인 버스를 운행하면서도 “바깥잠”을 살펴보는 화자는 버스 요금을 내지 않고 승차한 ‘무임승차’너머의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출근길 내리는 비의 모습을 “툭!/ 툭”’으로 행갈이 해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느낌을 더해주었고, 또한 “툭”이라는 단어 옆의“!” 은 빗방울을 형상화 시킨 일종의 상형의 그림시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It’s raining」처럼 도형화시켜 “바깥잠”의 메마르고 황폐한 그의 가슴속에, 그리고 영양실조 걸린 고요한 혈맥에 한 줄기 수액으로 내리게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빗줄기의 리듬을 자장가 삼은 그가 잠이 들었다.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자는 쪽잠일지언정 어쩜 그는 “호접몽”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왜냐면, 어린 날의 기억들이 꿈속에서나마 떠올라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나비가 나였는지 내가 나비였는지 비몽사몽간에 기점으로 돌아온 버스에서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욕망으로 가득한 숨을 허공을 향해 내쉬고 있는 세상 속으로. 사회적, 또는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좀 허름하고 허술하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정신까지 허름, 허술하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인간의 정신은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 등이 단순하지 않다. 커다란 저택에 살든 지하 쪽방에 살든, 삶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본질을 떠나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것으로 가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점을 익히 경험했던 것 같고 더 나아가 스스로 내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지혜는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록 가난할지언정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는 누구의 말대로 ‘우아한 가난’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대체수단을 통해서 실천해야 한다. 참으로 어렵고 어렵지만 어찌하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은 되지 않은가?   디오게네스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줄이기 위해 노숙인보다 못한 생활을 자처했다 한다. 그 어딘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의 소유를 거부해버리는 게 그의 삶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바깥잠”은 노숙인의 삶으로만 반드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표층적인 그의 겉모습이 아닌 심층적인 내면에는 또 다른 디오게네스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추구했던 “가지지 않은 것처럼 가져라”라는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 수준 이하의 경제적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인간성마저 말살과 동의어로 부추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람이 비를 데리고 휘돌아 가게 하고 있다”젖지 않고, 춥지 않게. “바깥잠”을 향한 화자의 시선이 따스하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6-22
  • 생의 바다/이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생의 바다/이부자   전철 속 마주한 군상들이 졸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눈꺼풀 위에 얹고 찰나 충전의 시간   내리실 손님은 오른쪽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놀란 인생의 주인 황망히 뛰어내린다. 매달린 삶의 무게를 달고   몸부림치듯 세파를 가르며 종일 피라미만큼의 생존의 떡과 노래미 같은 자식을 위한 처절함과 지친 무릎, 힘을 다해 바다로 간다.   생존으로 흘린 눈물처럼 짜디짠 생의 바다로 간다   시집 <생의 바다를 건너다>. 에세이아카데미. 202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우린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중요하다. 더욱이 속도전 시대에는 압박감과 억압감 때문에 자칫 자기만의 리듬감을 잃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한낱 부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독서, 등산, 낚시, 숲길을 거닐거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쉽사리 실행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삶의 향기를 갖지 못하고 어떤 삶의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기는 천천히 걸어야 맡을 수 있고, 내 몸에 향기가 머물 수 있다. 그러나‘생의 바다’에 던져진 거친 삶, 먹고사니즘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바다’에 던져진 우린 삶의 영위를 위해 출근을 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의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삶의 눈꺼풀 위에 얹고” 졸음이 순간적으로 온다. 그 찰나적 시간 속에서 눈을 뜨면 대부분 한두 정거장 전이거나 한두 정거장 더 갈 때도 있다. 이럴 때의 상황을 화자는 “황망히 뛰어내린다.”라고 한다. 늘 그렇듯 친절한 안내 방송은 변함이 없다. 특히 출퇴근 시간, 붐비는 역에서는 어쩌다 신발 한 짝 벗겨지면 그대로 인파에 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듯 어깨에 “매달린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린, 먹고사니즘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광경을 다람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쳇바퀴 돌 듯”이라고 하지 않을까.   주변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위해 “세파를 가르며” , “무릎”에 힘을 다해 삶의 터전인 고해의 바다로 향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다고 보면 벌써 눈앞에 또 다른 고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이다. 정말 ‘삶의 리듬감’과 ‘향기 있는 삶’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속도와 경쟁의 시대,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느낌 있고 향기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리듬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경쟁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좀 더 여유 있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자. 삶의 향기와 삶의 리듬감은 속도감과 욕심이 앞서면 저 멀리 사라진다.   장자는 입신출세를 주장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 자아를 비우고 세상에 노니라고 한다. 허기유세虛己遊世, 얽매이지 말고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이리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라는 책을 썼다.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을 즐기라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좀 의아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방향으로 –주 4일제 – 흘러가는 것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대단히 시스테믹한 사회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던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점에서 좀 특별한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으르고 싶은 권리가 있어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우리에게 스스로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다는 것, “짜디짠/생의 바다로 간다”라며 화자는 시를 끝맺고 있다.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때론 게으르고 느리게 생의 바다를 항해한다면 메말라가는 우리의 허기진 혈맥에 한 줄기 수혈이 될 것이다. 어둠 속 항해는 아직 밝아오지 않는 새벽일 뿐, 비록 고해의 삶일지언정 바다가 품고 있는 욕망은 푸르름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21
  •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속은 뜨겁다. 900도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다가, 뜨겁게 한번 살아보자   다시 냉전이다, 차갑게 식은 우리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그림도 그리고 또 다른, 색색의 옷을 입힌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 지난번, 온몸과 마음을 다 준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1250도 뜨겁게 더 뜨겁게, 밖에서는 모른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갈 일이다   뜨겁게 사랑한 결과물이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깨지지 마라 살아만 있어라, 1250도 불구덩이 속으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들어간다.       시집 <상자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 시선사, 2018. 부천 시소리낭송회 회원   국보310호 백자 달항아리   ---------------------------------------   흙을 구워서 만든 넓은 의미의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나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고, 섭씨 700~1000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지고.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고 유약을 입혀서 섭씨 1000~1100도에서 번조燔造한다. 화분이나 떡시루 같은 기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태토가 유리질화 된 반투명체다.   시적 화자는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번조 하고 있다. 사랑, 모든 예술과 문학, 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결코 삶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중년의 그윽한 눈빛 사랑, 칠십, 팔십 노년에게도 사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고, 대마초와 모르핀 같은 환각제이다. 화자는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뜨겁게 살아보자“ 에서 보듯 사랑은 가마의 불 구덩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자고 한다. 도자기기가 불의 예술이듯 사랑 또한 불꽃의 타오름이다.   기물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한다. - 요즘은 가스가마, 전기가마 사용하기에 그렇지 않다 – 사랑 또한 한 번 빠지면 입구나 출구가 없다.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기에 형체가 있어도 볼 수 없다.   더 아름답고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표면에 얇은 유리질막, 즉 유약을 덧씌운다. 이것은 광택과 색깔을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색색의 옷을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예뻐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변신을 하듯이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결말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한다.   시인은 사람과 언어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더 나아가 우주와 존재를 이어주는 큐피드이자 헤르메스가 된다. 점진적인 불꽃의 소멸로 인해 태어난 도자기란 존재는 불꽃의 울부짖음이듯, 시 또한 시인 자신이 소멸하면서 모든 걸 포용하며 탄생한 존재의 울음이다.   드디어 사랑의 완성을 위해 1250도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마, 승염식이든 오름 가마든 상관없이 어떠한 작품이 완성될지 모른다. 다만,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에서 보듯 ‘달항아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뜨겁게 타오른 사랑이라는 가마 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듯 말이다.   달항아리는 너무 커서 물레에서 한 번에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아래의 몸통을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빚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반듯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달항아리는 정형화된 조형미보다는 부정형의 달덩이 같은 항아리가 구워진다.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졌을 때의 기묘한 빛깔을 낸다. 그래서 같은 백자 달항아리도 乳白, 牙白, 純白 등등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자는 단순 명료한 사랑보다는 둘 사이의 사랑은 단조롭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색상으로 조각조각 붙여 만든 조각보, 상보 같은, 치맛자락, 바짓자락을 끌고 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도자기도 구우면서 생기는 빙렬(氷裂)로 인해 더 가치 있듯이 사랑 또한 때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는 엷은 틈새 같은 식은태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보면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라고도 했다. 1250도의 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고, 영웅이 아닌 민초의 삶일지라도 “그냥 깨지지 말고”,“살아만 있어라”이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고 경건함이다.   온몸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예술인, 문학인일지라도 결코 진정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멀쩡한 눈을 멀게 하고, 사막에서도 촉촉한 이슬을 맺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힘,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사랑부터 하자’그 사랑에 에고이즘이 싹을 트면 둘 사이의 융복합은 현실적으로 멀어진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이 동반되더라고 사랑하자.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   화자는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기 위한 과정에서‘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떠 올리며 달항아리 굽듯 사랑의 달항아리를 희망하며 가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 어린 히틀러 마져도 에바 브라운에게는 순정으로 대해주었고, 하물며 베를렌느와 랭보, 그 둘의 사랑은 동성애를 나눴던 사이였다. 그뿐인가, 백석의 사랑 ‘자야(김영한)’는 그 짧은 동거 끝에 이별하고 평생을 잊지 못해 지금의 성북동에서 요정집을 운영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그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지금은‘길상사’로 변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렇게 해서 잉태된 자야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10
  •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만 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 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 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찌’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7
  •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세월호 100일 후,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가 있었다   이것은 구명조끼의 아랫단을 묶고 나란히 피아노 속으로 걸어간 메아리들에 대한 이야기   제1의 조명탄이 반복적인 아르페지오로 이름을 부른다 제2의 조명탄이 트릴로 따라간다 제3의 조명탄이 물 위에 손을 얹고 밤바다를 어루만진다 제4의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낸다 제…… 10의 조명탄이 누구도 함부로 잊혀서는 안 된다고 물의 지문을 센다 아가야 내 아가 ……. 제50의 조명탄이 물비늘 빛나는 보름사리의 먼 바다에까지 이름을 찾는다 ……. 제100의 조명탄이 흰 갈기로 일렁인다……. 제200의 조명탄이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인다……. 제300번째 조명탄 아래 깊게 눌린 검은 건반이 마지막 이름을 부른다 어둠 속에서 뒤척이며 한껏 멀어진 양손을 건반 한가운데로 모은다……. 제304번째의 조명탄이 오른손으로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풍랑을 쓰다듬는다   영혼들의 격랑이 창백해진 물보라로 일어선다 수평선 너머 선율이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물의 건반과 한 몸을 이룬다. 건반 위로 오른 울음들이 물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제주 제7항구로 내달리는 유속이 빨라진다 산맥처럼 몰려든 터지지 않는 울음, 물의 흰 건반이 일제히 물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앉는다 해저 수만 마일 아래 갇힌 발목들을 인양중이다 다 못 읽힌 악보가 다치지 않도록 겉봉투를 뜯는 세심한 파문, 파문들 심해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빛의 날갯짓, 회오리치던 조류와 수평을 맞춘 피아노 선율의 밀물이 긴 잠의 귓전에 가 닿는다   상현달이 양의 뿔처럼 밤하늘에 걸린다   *바그너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곡       시집 <사라진 포도월>. 현대시. 2020   NEWSIS에서 가져옴-편집자 주  ------------------------------------------------------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8월 중순 오후, 팽목항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깃발과 애도의 글들이 휘날리고 즐비했다. 평소 같으면 듣기 좋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 소리가 갑자기 곡비의 슬픈 곡조 같았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은 아픈 상처 부위에 염장을 했었다.   건축가 노베르 그 슐츠는‘장소의 魂’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장소에 스며든 喜怒哀樂과 삶의 발자취, 역사가 켜켜이 쌓아져 만들어진 장소를 말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필자가 찾은 ’장소의 혼‘인 팽목항은 喜樂’은‘세월호’와 함께 심연으로 수장되고 오직‘怒哀’만이 찾는 이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을 뿐이었다.   화자는 기억하기도 싫은 커다란 참사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를 소재로 시상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바닷속 깊이 잠들었을, 그들을 찾기 위해 불 밝히는 조명탄을 음악적 이미저리로 끌어와 감각적인 전개를 하면서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를 함께 상기시킨다.   ‘조명탄’은 아르페지오로 음을 펼치고 이름을 부르면서, 트릴의 물결로 이어간다. 밤바다를 어루만지고, 조명탄은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질치고, 드디어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 낸다’ 피아노 건반은 ‘파와 솔’, 시와 도‘사이는 ’검은건반‘이다. - 여기서‘검은건반’은 죽음을 의미한 또 하나의 장치다 -. 그러면서 지문을 세어보며‘아가야 내 아가…….’라고 오직 부모만이 성인의 자식에게 호칭할 수 있는 부르짖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부르며 찾고 찾는다. 이 얼마나 침통하고 애절한 시상의 전개인가.   그리고 마지막 304번 째의 조명탄은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풍랑을 어루만짐에서 보듯이 화자는 청각적 상상력과 촉각적 이미지의 씨 날줄로 직조한 한 필의 진혼곡을 헌정하고 있다.   “갑작스런 죽음은 혼을 동요시키고 적의나 원한을 품게 한다. 생명이 갑자기 끊어졌을 때 죽은 자의 혼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 근처에서 일상생활로 남겨진 일들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상상한다.”  -엘리아데의 글 부분-   그렇다. ‘갑작스런 죽음’, 아이(자식)를 잃은 슬픔과 고통,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하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시켜 끌어안고 그냥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차라리 자학하며 살아가는 수준일 것이다. 슬픔, 아픔, 고통의 크기와 넓이를 낮추고 줄이며 오직 버틸 뿐, 누구의 哀悼(애도)도 동정도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며 …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봇물 터지듯 치솟으면 큰 사고 나고, 언어 또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고 거친 언어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터지고 넘치는 물과 언어의 함수 관계. 낮고 비좁은 천막에서‘물의 잠을 위해 아르페지오’를 뜯는 유족들 곁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고 누군가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향해 징그럽게 (?)쳐 먹는다고 했잖은가.‘물과 언어’ 물속은 생명수가 넘쳐야 하고 사람의 말속에는 숨겨진 신비와 비밀이 있어야 하는데 불순물과 광기 서린 언어가 웬 말인가. 세월호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을 규탄하고 비난하는 사회, 그렇게 만연되어 있는 선과 악의 顚倒(전도)를 우린 이미 目睹(목도) 했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생각보다 인간은 잔인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일 때 보다 집단적일 때 잔인성은 더한 것 같다. 중세시기 이단자로 내몰린‘마녀재판’이 성행하면서 화형 시키는 무렵의 수사형(水死刑)이 떠올려진다. 물에 던져진 여자가 떠오르면 마녀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고, 가라앉아서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끝이다. 시인이 읊조리고 있는 시상을 펼쳐보며 수사형(水死刑)이 떠 올려지는 것은 비단 필자일 뿐일까.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영양괘각羚羊掛角’을 떠올리는 게 하는 한 행으로 마무리를 한다. 송나라 엄우의 시론서인 <滄浪詩話>에 나온 얘기다. 영양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 발자국 흔적을 없앴듯이 탄생의 발자국인‘죽은 자의 이름’을 상현달의 뿔에 걸어 버렸으니 흔적이 사라질 수밖에. 이렇듯 화자는 죽은 혼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상현달 바라보고 있다. 밤하늘에 걸린 그 상현달을.     https://www.youtube.com/watch?v=2jMdRxeZEkQ (백건우가 당시 연주했던 곡 중 하나인 ‘비창’)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2
  •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민들레 홀씨로 피어나다”
     부천시는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개발하고 상표출원을 완료했다.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영문명칭 Bucheon Diaspora Literary Award, 이하 문학상)은 국제 문학상을 말한다. 이는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 네트워크와 함께 문학을 통해 세계의 연대와 환대, 협력의 정신을 고양하고자 제정한 것이다. 현재 2021년 첫 수상작 선정과 제1회 시상식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아울러, 부천시에서 이번에 개발한 문학상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바람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낯선 땅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홀씨’를 모티브로 한다.   흩날리는 홀씨는 디아스포라의 확장성과 창의성,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또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고 분열된 세계를 잇고자하는 디아스포라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부천시는 이를 친숙하게 전달하고 응용이 가능하도록 문학상 명칭(워드마크) 대신 이미지(심볼마크) 중심으로 로고를 디자인하였다. 시는 2월부터 문학상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바탕으로 상패 디자인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다.     한편‘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은 한국어나 영어로 출판된 현존 작가의 디아스포라 주제 장편소설이 심사대상이다. 총 상금은 6,000만원 (작가 5,000만원, 번역가 1,000만원)으로, 매년 1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시상할 예정이다.   아울러 제1회 문학상의 경우 현재 작품 접수와 예비심사(추천위원회)를 거쳐 올 1월부터 본심사(심사위원회)에 돌입했다. 심사위원회 심사가 완료되면 문학상 운영위원회 승인을 거쳐 7월 중에 첫 번째 수상작을 결정한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위원 명단과 최종후보작(shortlist, 최대 12개 작품)은 수상작 발표 시 함께 공개하며, 상패 디자인 역시 함께 발표한다. 시상식은 10월 중 개최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부천문학창의도시 블로그(https://blog.naver.com/bucheon_unesco)에서 확인하면 된다.  
    • 예술/창작
    • 영화/만화
    2021-02-03
  • 책 읽는 시민, 2021년 ‘부천의 책’ 선정
    부천시는 시민과 함께 ‘2021년 부천의 책’을 선정했다. 2021년 부천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는 ▲일반분야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팩토리나인)’, ▲아동분야 ‘담을 넘은 아이(김정민, 비룡소)’, ▲만화분야 ‘연의 편지(조현아, 손봄북스)’ 다.          도서선정위원회는 10월부터 시민 공모와 독서 관련 기관을 통해 추천받은 총 528종 800권의 도서 가운데 일반, 아동, 만화 분야별 5권의 후보도서를 선정했다. 이후 53개소 투표판과 홈페이지를 통해 시민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분야별 후보도서 2권을 추렸다. 지난 19일 시민선정단과 도서선정위원이 참여한 가운데 온라인으로 비대면 투표를 실시하여 최종 ‘2021 부천의 책’3권을 선정했다.   ‘2021 부천의 책’ 도서선정위원회 고경숙 위원장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어려운 시기에 희망 쪽을 바라보면서 세대 간 주제를 놓고 토론할 수 있는 세대를 관통한 책”이라며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꿈은 있어도 현실의 상황이 많이 비껴간’ 사람들이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어떤 꿈을 살 것인지 토론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독서 내내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아동분야 시민선정단 주어진 어린이는 “<담을 넘은 아이>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며 “내 안에 오랜 시간 있었던 담을 넘어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마음을 합쳤던 효진이와 선비, 푸실이처럼 모든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도서선정 위원 김종옥 위원은 “만화 분야 <연의 편지>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해, 폭력성의 과도한 노출보다는 폭력의 현장에 제3자로 존재하는 무수한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라며 “학교폭력을 둘러싼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통해 ‘선한 영향력’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냈으며 정감 가는 그림체와 아름다운 색감으로 만화적 완성도를 높인 따뜻한 작품”이라고 추천 사유를 설명했다.   시는 2021년 1월 중 ‘2021 부천의 책’을 누구나 읽어볼 수 있도록 부천시립도서관, 작은도서관, 학교 등에 비치할 계획이다.   부천의 책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추진한다. 2월부터 부천의 책 선포식과 작가와의 만남 북 콘서트를 시작으로 독서 릴레이, 작가초청 강연회, 찾아가는 독서 토론회, 청소년 독서 캠프까지 약 8개월간 범시민 독서 운동을 펼쳐 책 읽는 문화도시 부천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부천시립도서관 홈페이지(www.bcl.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23
  • 여행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행 / 조은영 날마다 같은 길 걸으며같은 얼굴 바라보며    익숙한 풍경 속엔나는 없고 남루한 습관만 남아더 이상 퍼 올릴 수 없는빈 우물   메마른 마음 밭 사막이 될 때저만치 기다리는 오아시스신기루일지라도    우리가 두고 온 가지 않은 길그 갈림길 근처 잠시배회해 보며나도 모르는나를 만난다. <은유의 속내>, 산과들, 2020   성주사지 터 3층 석탑. 2020/10/31, 사진/홍영수              지금은 기술복제의 시대이다. 또 한 CCTV 등, 어느 곳, 어느 위치에서도 감시하기도 하고 또한 당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 제한하고, 족쇄가 되어 가두리 양식장에 양식되어가며 서로가 물어뜯고 어울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정보화 시대, 핸드폰, 컴퓨터 등에서의 SNS, 유투브 등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정보사회에서 딱 꼬집을 수 있는 중심 사조가 없이 시각과 촉각만을 자극하는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고독과 적요의 공간에 갇히게 된다. 이럴 때, 매일 반복되는 시계추 같은 획일화된 일상의 시스템을 벗어나 앙리 마쇼의 시학 같은 무브망mouvement이 필요하다. 움직임의 여행이다. ‘자유함’이고 ‘떠남’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가정은 안식처이자 곧, 감옥이다”했다. -─ 이율배반적 표현 속 존재의 양면성을 얘기한 것이리라 ─   가정에서‘안식’과 ‘감옥’의 불편한 동거는 서로를 갉아먹고 서로에게 기댄다. 이미 성장해버린 자식들과의 거리에서 오는 괴리감, 작금의 데이터 황사 현상, 자욱이 안개 낀 정보의 바다에서 화자는 난파된 자의식을 이렇게 발견한다. “날마다 같은 길 걸으며/같은 얼굴 바라보며”라고 하면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겉치레로 살지 말고, 비본질적으로도 살지 말고, 마땅히 되려는 것을 살라” 했다. 그렇다. “나는 없고 습관만 남아”에서 보듯 화자는 이미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붕어빵 같은 삶에서 ‘실존’이나 ‘참나’를 퍼 올리고 싶어 한다. 비록 “빈 우물”에서일지라도. 필자의 책장 위에 있는 많은 LP판의 곡들은 잠들어 있다. 소리로 탄생하지 않은 음악은 죽은 것이다.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순간 살아나며 비로소 음악이 된다. ‘여행’, 마음과 머릿속에 머물게 하지 말고 단어 그대로 떠나자. 그때가 비로소 여행의 시작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왠지 혼자인 것 같고, 외롭기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어서이다. 그것은 메마른 황무지이며 사막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자는 “오아시스”를 찾아 건조된 영혼에 촉촉한 수분을 적시고 싶어 한다. 비록 가보면 여전히 사막인 ”신기루일지라도“.   영혼이 휴식할 수 없는 공간, 그것은 세트장이며 박제된 공간일 뿐이다. 변화 없는 공간은 재빨리 포맷해야 한다. 인생은 놀라우리만큼 짧다. 뒤돌아보면 섬광처럼 훅 지나가고 만화 책장 넘기듯 순식간이다. ”메마른 마음 밭 사막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새로워져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머무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 집시나 노마드가 되어야 한다. 통념과 습관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나는 행위 한다, 고로 존재한다“ 행동으로 옮기자. 떠나자.   ”가지 않은 길“, 예를 들면 외국 여행을 갔을 때 ─화자는 외국 여행을 많이 한 듯하다─ 이국적인 정서와 풍경에서 낯섦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낯섦과 두려움에서 설렘과 신선함, 해방감을 맛보기도 하고 때론 소통되지 않는 언어는 오히려 두려움보다는 소통할 수 없어 차라리 자유함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복잡다단하게 머리도 굴릴 필요도 없다. 여행이 가져온 즐거움이고 해방감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곰팡이 핀 우유병을 빨지 말고 낯섦과 설렘의 싱싱한 여행의 젖을 빨자.   보통 여행하면 관광지 구경이나 기념물, 유적,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가지고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행의 즐거움은 우연히 마주친, 또는 물끄러미 바라본 그 무언가에서 포착되는 시선의 파편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도시인이 산촌을 가든지, 시골 사람이 대도시를 오던지 자기들의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나도 모르는 나를 만난다“와 같이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떠나면 비로소 만나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이 바로 ‘새로운 나’가 아닐까.   원고를 쓰면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본다. 그때 밑줄 그어놓은 존 러스킨의 얘기다. 그는 여행하면서 스케치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을 굳히려면 “말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방법 즉, ”잔디는 녹색이고, 땅은 회색을 띤 갈색이었다“뿐 아니라 그 장소를 심리적 언어로 분석하는 ”풀은 대담해 보이고, 땅은 소심해 보였다“라고 ”“말 그림“으로 표현하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이다. 시인이 새겨둘 얘기다.   여행하며, ‘종묘’에서 유교의 지문을 보았고, 최근에 다녀왔던 보령의 ‘성주사자 터’에서는 신라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17
  • 인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생/명실   쌓여지는 날들의 두께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       *부천 디카시 회원     ---------------------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다가오고 누군가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어떤 인생살이는 하루하루가 새털처럼 가볍고 날아갈 듯한 세월이라면 또 다른 인생은 세월의 무게가 천만 근의 짓누름으로 깊은 심연만큼이나 버거울 것이다. 삶이란 그렇듯 시대적, 개인적인 상황 논리에 따라 공통분모가 있고 교집합이 있고, 배타적,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한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시가 시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시인의 삶 또한, 시로 연결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없다. 어쩜 시인은 줄 아래의 땅과 줄 위의 허공 사이에서 어름을 타는, 시와 삶 사이를 아슬아슬 버티고 서는 어름사니가 아닌가 싶다.   시인의 눈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메마른 나무가 표의 문자로 다가오기도 하고 하얀 눈이 쌓인 초가지붕의 이미지에서 시라는 문자의 옷을 입기도 한다. 조선 시대 대학자 정인지는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을진대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을 것이다”했다. 어쩜 조선 초기에 이미 디카시를 예언한 말 같이 들리기도 한다. 특히 디카시를 쓰는 시인은 눈에 잠기고, 담긴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짧은 시행으로 시의 혼을 불어넣을 때 무겁고 버겁게, 때론 가볍게 다가올 것이다.   화자의 바로 눈앞에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상징하는 일력日曆이 놓여 있다. 하루가 지나면 젊은이들은 그냥 의미 없이 확 찢어 버릴 얇디얇은 하루를 화자는 모아 모아 놓고 비록 지난 날일 망정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그런데 그 풍경이 풍경으로 보인 게 아니고 인생살이의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한 스투디움이 아닌, 푼크툼으로 확 박힌 것이다.   바로 지난 하루(16일)와 지금의 오늘(17일) 사이에서 꾹 집어놓고 바라본 저 두께, 그래서일까 17일의 하루는 반듯한데 지난날들은 지나갔다는 듯 옆으로 돌려놓았다. 저렇게 쌓인 날들의 웅변하는 침묵 속에서 디카시라는 침묵의 울림으로 화자는 단단히 깊어져 가는 삶을 건져 올리고 있다. 화자는 분명 무거운 나이이다.   8월,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날이다. 더구나 17, 18일이면 중순이다. 얼핏 보아도 탁상용 일력日曆이 분명하다. 한 주의 쉼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인 17일 맞는다. 아니, 어쩜 하루가 기우는 오후쯤, 일요일의 휴식 한 장을 떼어내어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하루라는 종잇장도 감정을 잃고 붉게 물들어 일요일로 누워있다. 하루하루의 시간과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두께도 꽤 두터워 보인다. 화자는 그 지난날을 “쌓여 지는 날들의 두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두꺼운 만큼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이라 얘기하며 시제의 제목처럼 “인생”을 “두께”와 “단단하고 깊은 삶”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뜯어내어 차곡차곡 쌓아 놓은, 흘러가면서 존재하는 시간과 세월 속에서.   17일의 날짜에 당나라 시인 우세남의 <매미>의 시가 적혀있어 완본을 옮겨본다.   垂緌飮淸露(수유음청로) 드리운 빨대로 맑은 이슬 마시며 流響出疏桐(유향출소동) 오동나무에서 울음소리 울려 퍼진다 居高聲自遠(거고성자원) 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 非是籍秋風(비시적추풍) 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   혹여 화자는 우세남의 시를 보고 시상을 떠 올렸을지 모른다.“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했듯이 화자는 인생이란 그 무엇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두터워져 가는 삶이 바로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만물은 生成하고 死滅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 잡고 막을 수 없으며 시간 또한, 멈출 수도 없다. 이렇게 소멸하고 생성하는 커다란 자연 앞에서 일력이라는 자그마한 이미지를 보고 ─다소 거창하고 과한 듯한─ “인생”을 발견한다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다.   디카시에서 이미지는 시인의 의식 속에 내재 되어 문자 언어와 함께 태어난다. 그러므로 문자와(시)와 이미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디카시가 성립된다. 이렇다고 할 때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문자에 예시되지 않고 문자 또한 이미지를 설명하듯 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곧 이미지가 문자이고 싶어하고 문자가 이미지이고 싶어 할 때 좋은 디카시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론이나 시학에 앞서 태초부터 대자연의 수북한 풍경이 주는 주머니 속에서 시혼을 일깨워 끄집어내는 시인들의 생각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이다. 저 얇고 엷은 종잇장과 셰익스피어는 “간결은 지혜의 상징”이라 했듯이, 단 2행의 글 줄 앞에 여백마저 시이게 하는, 그래서 진한 페이소스가 전해오는 한 편의 디카시다.   디카시는 이미지의 언어로 빚는 장엄한 시혼이 아닐까.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2-09
  • 텅 빈 가슴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텅 빈 가슴/조용수    새벽 세 시 현관문 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옆자리가 허전하다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 고요한 이 밤   바람 마중 갔다 온 것인지 냉기가 돈다 들어오자마자 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 애써 잠을 청하며 누웠는데 감기지 않는 눈가 촉촉하고 엄마 부르는 소리 기다리는 두 귀 쫑긋 세운다 적막이 흐르는 새벽 창가에 비친 달과 별빛도 가쁜 한숨 소리에 무겁다 소나기라도 세차게 내렸으면        시집 <관성의 법칙>, 시산맥사, 2020.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피에타(Pietà)> 像을 볼 때마다 유난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이다. 여섯 살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이성과 감성은 이미 증발해버리고 오직 고통과 슬픔의 고체 덩어리로 굳어 있다.   어린 자식을 품속에 안고 한 손은 여린 손가락을 만지고, 한 손은 턱에 고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 고고의 성을 터뜨린 분만의 고통을 넘어 또 다른 탯줄을 자른 것 같은 아픔이 혈관을 타고 흐르다 갑자기 멈춰버린 표정이다. 작품의 분위기마저 경직된 우울증으로 박제된 듯하다. 로맹 롤랑은 이 작품을 보고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라고 했다던가.   이른 새벽, 4更에서 5更으로 접어든 시간‘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이른 출근일까 아님, 야근 뒤의 퇴근일까.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하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걸 보면 밤새워 근무하고 퇴근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옆자리가 허전하다.’고 한다. 화자의 옆지기가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들어오자마자’,‘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를 보면 그렇다.    왜 하필이면 ‘빈방’일까. 그리고 왜 ‘한숨 짓는’ 것일까. 우린 시상의 전개에서 慘慽(참척)의 아픔과 슬픔을 알 수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 특히 엄마의 심장은 아픈 기억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고 자식을 잃은 슬픔은 되새길수록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비록 인생살이가 生住異滅(생주이멸)의 변화 속 삶일지라 하더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는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어 잠을 못 이루고 늘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아니라 상처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선가 특히 적막의 밤이면 현관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것 같고 창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를 것 같은, 그래서 화자는 ‘두 귀 쫑긋 세운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부를 것 같은 환청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신의 행복을 덜어내서 아니, 다 모아 모아서 자식의 행복에 보태는 것이 부모 마음이기에 더 그렇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죽은 자식도 소생시키지 않을까.   허난설헌의 <哭子(곡자)> 라는 한시 일부를 보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연이어 딸 아들을 잃고서 비탄에 젖어 피눈물 흘리며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 곡진한 슬픔으로 흐느끼는 허난설헌의 극한적 모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句에서는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극한적 슬픔 토로하고 있다. ─ 필자는 경기도 광주, 중부고속도로 아래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소를 두 번 갔다. 그녀의 묘역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봉분이 바로 아들, 딸의 무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면 참척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술을 준비하지 못해 야생화 몇 송이 상석에 놓고 왔다. ─   어찌 콜비츠와 허난설헌만 그랬겠는가. 너무나 잘 알려진 고려 시대 가사인 <청산별곡>에서도 “올리도 갈리도 없는 밤일랑 또 어찌하오리까”에서 보듯 창가에는 별빛 달빛마저 가쁜 숨소리로 울먹이고 있다. 분명히 그가‘올리도 갈리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을 잃은 비애를 읊은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도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와 같은 느낌으로 화자는 ‘별빛 달빛이 가슴 깊이 박히고’ 있는 가운데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를 떠올린 순간 차라리 세찬 소나기라도 맞으며 잠시라도 잊고 싶었을 것이다.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그 다섯 번째의 마지막 강이 ‘레테’이다. 죽은 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망각의 강’이다.   그렇게 전생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온을 얻는다고 한다. 비단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린 세상을 살면서 비탄과 고통, 때론 증오, 분노 등을 겪는데 이런 것들을 대부분 잊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비록 자식 잃은 슬픔이 무엇보다 클지라도 이제는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서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치료를 할 때다. 슬프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지금의 상황에 충실 할 때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결국,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 달을 품은 그 품속에 다시 품은 것이다.   어머니 앞에 자식의 죽음이란 없다. 다만 곁에 없을 뿐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1-28
  • 매창의 무덤 앞에 서다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창의 무덤 앞에 서다/김문배    해마다 배롱꽃은 피고 지는데 세월은 모든 걸 거두어 가버렸네 거문고 뜯던 가냘픈 손가락 그 따스한 온기는 간데없고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던 시절 매창*과 같이한 술상 앞에서 시담을 주고받던 선비의 못다 한 사랑 이야기만 분분하다   봄날 배꽃으로 피어나 백일홍으로 여름을 지내고 가을은 낙엽으로 겨울엔 냉가슴에 따뜻한 불을 지핀 무수한 세월들 한평생 한 몸으로 모자라 뭇 선비의 가슴에 점만 찍는다   누군가 따라 논 무덤 앞 술잔이 외롭지 않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매창공원이 있음   시집 <번짐의 속성>. 문학공간. 2020.     홍영수 시인이 매창의 시비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   ’무릉도원‘이란 공원의 둘레길을 산책했다. 늦가을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무엇으로 불태우길래 저리도 푸를까. 얼마나 잘 연소시켰기에. 내 삶의 대부분은 불완전하게 태워져서인지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고 재채기하며 살아왔는데……   만약에 남녀의 사랑이 이렇듯 불완전 연소가 된다면 굳이 사랑할 이유가 없다. 활활 타올라 남은 재마저 불태워도 모자랄 판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이 아닌 연기만 피운 미지근한 사랑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렇듯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고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져가는 어쩔 수 없는 사랑 아닌 사랑을 해야 하는 기구한 숙명적 사랑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신분이 있다. 바로 기생(통상적 호칭)이다. 필자는 무슨 癖 때문인지 몇 번에 걸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인들의 음택, 그 가운데 기생의 음택을 몇 군데 찾아 답사했다. 이 중에 부안의 매창뜸은 문학단체의 기행 때 어쭙잖은 앎으로 필자가 길라잡이를 했다. 기생의 역할은 고구려 벽화의 무용총에서 보듯 삼국시대부터 歌와 舞를 담당해 왔다.   여성과 남성의 만남. 그때나 지금이나 배신 없는 사랑이 있을까? 하물며 신분의 계급이 뚜렷하고 조선 시대, 그것도 천한 기생의 신분이라면 그 어떤 남성도 마음과 마음으로 엮이어 매듭짓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창 또한 원하면 언제든지 떠나라고 하면서 ‘난 울지 않고, 불평하지 않아요’라고 했지만, 어찌 정분을 주고받는 남녀 사이에 울지 않고, 떠난 자에게 불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한 역설로 읽힐 뿐이다. 평생 촌은 유희경을 사랑하고 그리며 살아서 행복할 것 같았지만 전해지는 그녀의 작품, 한시 57수와 시조 1수 중 한시는 대부분 恨과 기다림이 중심을 이룬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엮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신분, 그걸 받아들인 매창, 그래서 오히려 매창은 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진정한 의미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신분 사회에서 나름대로 거문고를 뜯으며 시조 한 수 짓고 읊조렸던 그녀는 온데간데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매창과 술상을 마주하고 직접 옛 선비가 되어 그녀의 못다 했던 사랑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서화악에 능한 종합예술인으로서 지금까지도 전통무용 등은 계승 발전해 오고 있는데 그들의 신분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던 시절’의 천인 계급이었다. 그렇지만 기생들의 만남은 王侯將相부터 무명의 閑良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화자는 윗자리 아랫자리 가리지 않고 21세기의 매창과 술상 앞에 손목을 부여잡으며 ‘시담을 주고받던 선비’가 되어 정담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면 시인의 가슴은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뜨겁고 항상 끓어오르기 때문에. 또한 解語花, 은유와 상징으로 무장한 시인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꽃 앞에서라면 더욱 불타오를 수밖에.   노래 한 곡을 상기해보자. 상징과 풍자가 넘친 고려 시대 속요인 <쌍화점>의 ‘만두가게 회회 아비’, 나 ‘삼장사 절 지주’, ‘술 파는 집 아비’ 등이 한결같이 여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밀애를 나누고 있지 않던가. 더구나 매창과 같은 시서악에 능하고 미인이 - 비록 무덤 앞이지만 – 화자의 눈앞에 謫仙來가 되어 나타나면 천하의 정지상이나 이규보가 그랬듯이 화자 또한 향렴시香奩詩 한 잔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봄날 배꽃’, ‘여름의 백일홍’, ‘가을의 낙엽’, ‘겨울의 냉가슴’ 사계절의 흐름을 그녀의 인생에 이입시켜 꽃, 낙엽, 냉가슴‘ 등의 시어로 표현했다. 어찌 보면 그녀에게 계절은 봄 여름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염염焰焰한 영혼으로 妖妖한 꽃다움으로 홀연히 37세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몸으로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인 가슴에 뭇 선비들이 찍어 놓은 점들뿐이다. 매창의 가슴은 한 폭의 슬픈 점들이 스며든 점묘화로 점철되어있을 것이다. 서경덕과 황진이, 허균, 이귀 등과의 매창, 기생은 이렇듯 수많은 시인 묵객들과의 교류에서 시가 탄생 되어 국문학사에 전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의 대부분 여류시인은 기생들이었다. 사대부들의 도학적 유학적인 시가 아닌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으로 사랑을 노래하기에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뭇 선비의 가슴에 점만 찍는다‘에서 ’점‘은 분명 사랑의 ’점‘임은 분명하다.   천하 미인 西施도 술에 취하면 비실비실하며 취한 모습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다고 했던가. 그렇다. 누구도 매창뜸의 시비 앞에서 서면 묵념의 자세가 아닌 술 한잔을 따르면서 시담도 주고받고, 적당히 취해 ’持花者‘ 하면서 꽃을 쥐고 춤추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십 년도 훨씬 지난 기생 김부용의 묘 앞의 술잔은 여전히 그날의 나를 담고 있을 것이다. ’지화자持花者‘하면서.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0-11-17
비밀번호 :
작업수행시간 :: 0.276802778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