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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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의 퍼즐/홍명근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꿈의 퍼즐/홍명근       살다보니 열망과 갈등의 순간 위에 오래 머물고 머물러보니 기다림은 시계바늘을 흔든다.   초침 따라 달려가던 시절에는 별 하나 꽃 한 송이조차 두근거렸다   이제는 꽃이 피어도 별이 반짝여도 설레임 희미하지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겹쳐 만난 인연은 실타래처럼 길다.   실매듭을 풀어 나무가 기둥처럼 자라는 언덕에 둥지를 틀고 학이 되어 바라보는 길 끝에 담쟁이 넝쿨 한 겹 더 두른 너는 또 하나의 울타리.   살아가는 것이 순간이 쌓여 가는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깊어져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별 모양의 담쟁이 잎 넝쿨 너머 꽃 같은 저 무지개는 열정을 향해 여전히 손짓하고 있다.   시집 <꿈의 퍼즐>. 미디어 저널. 2019   그렇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침, 분침보다는 1초라는 짧은 순간을 소리 내며 똑딱이는 모습은 인간의 활동상으로 비유한다면 초침은 분명코 역동적 젊은 시절에 해당할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거쳐 청소년기엔 내가 최고이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 한편으로는 달과 별의 반짝임과 이름 모를 들꽃의 하늘거린 모습에서 괜스레 가슴 설레고 뭉클해지는 그래서 시절의 짐을 벗지 못한 가련한 시인이 되는 시절이 있다. 그런데 어찌하랴! 젊은 날의 초침은 더욱 빨리 돌아가고 보이지 않았던 시, 분침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슬픔의 중량이 늘어난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물위에서 노래함>의 가사처럼 “아, 이슬 젖은 날개를 가진 세월은 스쳐가네 이 흔들리는 물 위의 나에게서”그렇지만 세월을 털어버릴 수는 없잖은가. 때론 서녘 노을 같은 중년이 아름답지 않은가.   사람은 때가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그 어떤 배움과 지식을 떠나 그 나이가 되어야만 보이는 것들, 젊어서 놓친 것들이 나이 들면서 보이는 것이 있다. 이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였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왜냐면 사고와 의식이 확장되지 못하고,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지성과 판단력을 가진 젊은 시절은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의 말을 빌리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이 보이나니 보인다고 다 모으면, 그것은 모으는 것이 아니리(원래의 뜻 ).” 여기에‘사랑’대신‘살다’를 대입시켜도 무방하리라.   이때 보이는 것처럼 화자는 지나온 날과 앞으로의 길을 떠올리며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그 무엇도 독립적이고 스스로 홀로 발생하는 것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시인은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학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鶴은 생물학적인 새가 아닌 인문학적인 표현이다. 수많은 한시에 등장하는 학, 고고한 모습을 선비적 특성으로 묘사되어서 일까. 시인이 학의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살아온 과정에서 혜안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하고 한편으로는 學의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지혜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초탈한 시선으로 삶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 시인은 무념무상으로 세상과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이다.   도연명의 <飮酒>중 5수에 “동쪽 울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멀리 남산을 보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와 고산 윤선도의 <漫興>이라는 시를 보자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이처럼 두 시인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바라본 게 아니다.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비우는 것이고, 보려고,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고개 들어 먼 곳(남산)을 바라볼 때, 그때 시야에 들어온 광경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앞에 ‘남산’처럼 우연히 보이는 넝쿨 두른 담쟁이, 이렇게 자신을 잊고 비우며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고산의 詩題처럼(漫興) 저절로 흥취가 생겨난 것이다.   화자의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종교적 체험과도 연관된 듯싶다. 종교적 삶의 기본태도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잊는 것이고, 부정하는 것이다. 흔히 말한 죄를 뉘우치는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즉 메타노이아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서는 것, 가치와 의식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 그래서 실재를 꿰뚫어 보는 일이다. ‘나’를 살기 위해 나를 비우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말대로 “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성령님을 갈망하는 자의 영성은 비움이 듯.   삶이란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어가듯 매 순간순간의 축적이다. 그 축적된 삶이 깊어지면 그 자체가 걸어왔던 길의 역사이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미래의 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 신체적 조건들은 변화를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언제나 청춘이듯 저 너머에 피어오른 무지개는 “당신은 아직 젊고 할 일이 많다”라며 일곱 색깔의 빛으로 응원하고 있다. 누구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다.   언젠가 인사동 길거리에서 구입해 벽에 걸린 조각보를 쳐다본다. 옛 여인들의 버려진 천 조각 하나하나를 버리지 않고 능숙한 시침질과 감침질로 통짜기하여 완성시킨 작품을 생각하며 내가 꿈꾸는 생의 퍼즐을 맞춰 나만의 쩍말없는 조각보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슈베르트의 가곡 연주를 들으며. 아, 시간은 이슬의 날개를 달고. . . https://www.youtube.com/watch?v=mCBPRmt_al8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2-08
  • 아름다운 잠입/손영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잠입/손영      빗방울이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망설임 없이   강물은 싫은 기색 없이 비를 받아들인다   빗물이 스미는 소리 강물은 한 가족으로 비를 맞이한다 물과 물이 합쳐지는 순간 나타나는 둥근 파문 빗줄기는 소리로 계약서를 쓴다 수많은 물도장을 찍는다 이것은 오래 전 둘만의 약속 한 번도 파기한 적 없는 물도장 계약서가 사방에 낭자하다   청아한 톤이 강물에 찍히는 소리 수많은 비의 음성   강물은 떨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세운다 빗소리를 녹취하고 쏟아지는 하늘을 저장중이다.     시집 <공손한 풀잎들>       -------------------------   공기 속 수분의 입자들이 떠돌다 뭉쳐 지구의 중력에 의해 빗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추락에서 때론 우리의 슬픔도 느낀다. 이러한 것은 시인에게는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고, 가뭄의 단비 같은 고마운 존재로 다가오기보다는 수직으로 때론 바람에 실려 사선으로 내리는 빗소리에서 시의 영감과 신의 호흡과 음성을 듣기도 하고 비 그친 뒤의 무지개를 기약하기도 한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태어나 지구의 표면에서 죽는다. 죽을 때는 최고의 속력으로 미친 듯 창공을 내리 가르며 죽어간다. 정작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르면서. 슬픈 인생이다. 한 번 뛰어내리면 절대로 그곳을 올라갈 수 없는 운명이다. 추락만 안고 태어난 슬픈 삶이기에 대지와 또는 강물을 만나면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만나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 시냇물, 강물, 오대양으로 흐르다 다시금 증발해서 똑같은 순환의 반복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시인은 유한한 삶 앞에 무한의 실마리를 찾기보다는 순환적인 자연의 섭리를 과감히 접고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빗소리를 녹취하고 저장한다.   저 먼 낯선 곳에서 뛰어내린 비를 이유 불문하고 가족으로 맞이하는 강물의 포용력, 수직의 허공에서 거침없이 착지하여 온전한 강물의 식구가 되는 모습에서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창조는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융합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강이 빗물을 배불리 담아 둘이 하나 되어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나 껴안고 악수하는 곳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물과 물이 하나 되어 경계를 지우며 일으키는 둥근 파문은 한 울림의 맥놀이가 되어 가슴 저민다. 시가 아니면 건 널 수 없는 강을 시인은 건너고 있다. 머리가 아닌 웅숭깊은 가슴으로.   이때 보이는 또 하나, 강물은 빗방울의 雅號인 소리로 白文의 陽刻으로 낙관을 찍는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아니 世世年年 변함없이.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대지의 강물과 하늘의 빗물이 하나가 되기 위해 안고 안긴다. 不一不二이기에 강물은 싫어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청산리 벽계수의 물도 쉬이 감을 자랑하지 않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떨어져 인연 따라 흘러간다. 그렇기에 강물은 비를 안고 흐른다. 시인은 하늘의 빗방울과 대지의 강물을 대립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는 너를 안고 너는 나를 베는’, 자아주의自我主義을 벗어나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되어 조화로운 상생으로 자연의 현묘한 품에 안기는 모습을 읽고 있다.   맑고 우아한 빗방울 소리가 강의 옆구리를 찌르고 귀에 소곤거리며 하늘과 대지와의 벽을 허물며 하나가 됨을 하늘은 녹음 하는 중이다. 독자 또한 임장감을 느낀다.   한국의 문화는 벽을 쌓고 높이는 문화가 아니다, 벽을 허물고 낮추는 문화이다. 그러한 문화에 익숙한 시인은 빗물과 강물이 하나가 되어가며 하늘과 대지의 벽을 허무는 순간을 냉철한 시인은 눈으로 매섭게 묘사하고 있다. 빗방울이 쓰는 마지막 시는 ‘경계 지움’이다. 하늘을 우러러보아 천문을 읽고 굽어보아 지리를 살피는 仰觀俯察하는 시인의 글두름손이 돋보인다.   서양의 로고스 중심적인 線彫적 양태를 벗어던지고 한국적인 순환적 구조로 전위성을 창조해 나가야 함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시이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표현하는 자의 무게만큼 들리고 다가온다.   立冬이 지났다. 조석으로 싸늘한 기온이 감도는데 창밖에는 느닷없이 천둥 번개 소리에 때마침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흐른다. 이때다 싶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찾는다.       글-홍영수 시인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1-10
  • 月下孤吟/김현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月下孤吟/김현구 달이 기척 없이 떠와 하늘에 걸리고벌레 하나 지껄이지 않는  이 밤 玲瓏한 沈黙!    때도 그 걸음을 멈추운 듯고요한 달빛 아래꽃가지 잡습니다   天理가 그윽한 밤 三更  無我한 나는달 아래佇立합니다.     永劫의 一隅에 서서  슬픔과 기쁨을 떠나나는不死身이 되오리까   -시집(비매품) <현구시집> 김현구(오른쪽 두 번째)와 김영랑(왼쪽 첫 번째)이 지인들과 경주 분황사 여행 중에 촬영한 기념사진(1940.5.26.) (출처. 강진군청)   --------------------------- 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달밤이 아니던가. 누구나 청명한 시골의 밤하늘을 쳐다보면 발걸음 멈추어 달빛에 젖어 보고 싶어 한다. 시인의 고향 강진 밤하늘이 얼마나 청명하고 고요하기에 –자동차도 가로등도 흔치 않은 시절- 벌레마저 울음을 멈춘 가을의 달밤, 오죽했으면 침묵마저 영롱하다고 하겠는가.  시인 이백이 달빛 아래 외로이 술잔을 들었다면(月下獨酌), 시인은 달빛 풍경을 홀로 읊조리고 있는 모습에서(月下孤吟) 禪詩 한 수를 접한 느낌이다. 덩달아 우리도 시적 진술에 의해 강진만의 달빛 아래 서서 꽃가지를 잡고 서 있는 듯하고 아님 이백처럼 此忘憂物에 취하는 듯하기도 하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다가오는 것을 시인은 적고, 쓰는 것이다. 시인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비우지 않으면, 한마디로 自我가 죽지 않으면 다가오려는 시도 도망가고 사라져버린다. 시가 시인에게 다가올 때 시인은 내 안에 들어앉은 누군가를 죽여야 그 빈자리에 시가 들어와 채운다.  ‘無我’란 불변의 나, 진정한 나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정한 연기적 관계 속에서 내가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아’란 나를 그 안에 가두는 틀이 된다. 이러한 틀을 깨부수고 넘어서야 하는 것이 ‘무아’라고 할 때 시인은 이미 지금의 ‘나’를 벗어나 넘어서고 있다. 어쩜 신앙적 체험이나 깊은 명상에서 오는 몽환적 환상의 황홀경, 엑스터시의 상태처럼 보인다. 한밤중인 삼경, 가을의 달밤, 나를 벗어나 내가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자기도 모르게 天理를 터득하며 스스로 젖어든 것이다. 동서양 미학의 차이는 서양은 형이상학적이고 동양은 일원론적이다. 흔히 플라톤이 말했듯이 서양은 사물에는 실재하는 이데아가 있고, 동양은 사물 자체가 본질이고 실재이다. 주객을 초월한다. 스테이스 교수가 말했듯이 “초주관적”적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달을 보고 달이 시인을 보고 있는, 시적 화자와 달의 이미지가 합일된 경지를 초월한 무아지경의 상태에 있다. 얼마나 가을 달빛에 도취되었으면 아니, 달빛과 자신을 초탈했으면 영겁의 한 모퉁이에 서서 일희일비하는 속세를 떠나 불사조가 되고 싶었을까. 며칠 전(9/28) 경남 하동군의 ‘禪詩’공모전의 시상식장에 다녀왔다. 시의 특성상 불교적이기에 ‘해인총림 방장, 벽산 원각’ 큰스님께서 직접 시상하셨다. 이때 하신 말씀이 선이란  선악과 호불호, 彼我와 장단고저 등등을 떠나면 “隨處作主,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어 선 자리에 바로 참다운 삶이 된다”라고 하셨다. 슬픔과 기쁨을 떠나고자 한 시인 자신이 ‘禪’이다. ‘禪詩’공모전의 대상 작품을 보자.   여여 如如/구정혜(부천)   산길을한 시간쯤 걷다보니나무의자 하나 별 생각 없이 기냥 누웠다걷는 동안 따라오던 잡다한생각들 온데 간데 없다. 허공과 하나 되어 누운 몸에하늘과 나무와 숲이모두 들어온다 내가 있는데 내가 없고만물이 가득한데만물이 없는 듯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알 수 없는 그 말의 경계를 헤맨다. 오래전 와불이 누워서 바라본하늘이 이러하였을까생각에 생각을 포개고 있다. 시집 <아무 일 없는 날>, <말하지 않아도>   오래전, ‘서편제’ 촬영지였던 완도군 청산도를 갔다가 막 배를 놓치고 예비로 들어오는 배를 차 안에서 기다렸다. 선착장 잔물결에 일렁이는 달빛을 보면서 cd로 듣는 드뷔시가 작곡한 ‘달빛’, 몽환의 선율을 듣는 게 아니라 마시고 있었다. 은빛의 학꽁치도 함께. 조석으로 서늘한 가을이다. 시인이 달빛에 젖어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듯이 드뷔시의‘달빛Debussy Clair de lune ’을 들으며 필자도 잠시 취해본다.   덧붙이며전라남도 강진 출생. 본명 현구(炫耉). 시인은 1930년대 김영랑 시인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으로 지금은 매우 활발한 조명을 받고 있다. 주요작품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1930년 박용철(朴龍喆)이 주관하던 《시문학(詩文學)》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寂滅)》 등 4편을 발표하고, 그 뒤 《문예월간(文藝月刊)》과 《문학(文學)》지를 통해 1934년 4월까지 8편의 시를 더 발표하였다. 그 후 낙향하여 계속 시를 썼으며, 그것을 묶어 《무상(無常)》이라는 제목의 시집 발간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김현구 시인의 차남 김문배 님이 현재 부천에 거주하고 있다. 홍영수 시인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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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19-10-01
  •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산길을 걷다가울퉁불퉁 드러난 벚나무 뿌리를 본다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처럼드러난 상처 다발로 송두리째 뻗어 있다 그래도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땅과 하늘의 경계에서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서 있는 벚나무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도저렇게 자기를 버티고 서 있는 나무죽음을 앞에 두고도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 잠시 신발을 벗어놓고나갔다 돌아온 주인처럼해마다 새싹이 돋아넉넉하게 그늘을 품어주던 나무 시집 <귀의 말>------------------------   사진/홍영수 ‘다산초당 가는 길’ 문학은 정서와 감정에 바탕을 둔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익혀야 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의 멋대로 해석하는 ‘감정의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된다. ‘莊子’라는 책을 젊었을 때와 중장년의 시기에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한 편의 시를 읽을 때도 시기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름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이 결합하여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문학작품의 독법에 때론 일탈하고 싶고, 정형화된 문학의 이론과 프로그램화되어 규정지어진 틀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문학의 장르에 따라 이론이 변화 발전해 왔고 문예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할 때 나만의 문학적 독법, 해석 또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문학의 이론과 실재에 벗어나더라도. 스무 번째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을 옮겨보았다.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중세 암흑기에는 모든 문학과 예술은 종교적 색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굳건한 법칙에서 깨부술 수 없는 관념이 존재했다. 하나의 세계인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종교적 틀이라는 엄청난 큰 바위를 쇠망치로 내리 까부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다다이즘’이라는 사조다. 한스 아르프는 찢긴 종잇조각을 허공에서 떨어뜨려 캔버스에 안착한 종이들을 그 자리에 붙인다. (우리의 조각보 같다) 바로 우연의 법칙이다. 올봄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하며 보았던 마르셸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도 작품의 의미보다는 작가의 우연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사실은 지극히 필연으로 찾아온 것들이며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우연으로 생성된 것이다. 시를 보자. ‘바위 틈새를 비집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등의 표현을 보자면 시적 화자는 벚나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 시켜 안타까움과 끈질긴 생명력을 얘기하고 있다. 감정이입’이란 시적 화자의 감정을 어떤 대상에 투영시켜 그 대상도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절망적인 환경을 딛고 활짝 핀 꽃을 피운 벚나무의 자태를 보면서 말없이 서있는 완성된 벚나무의 침묵만으로도 고고한, 저토록 늠연한 그늘 아래 큰절 하고 싶다고 느낄 것이다. 넙죽 엎드려. 그렇다. 4연의 다소 불편한 시적 전개가 거슬리지만, 시의 호불호를 떠나 이 시를 읽으면서‘우연’과 ‘필연’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라 우연과 필연이라는 의미를 화자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 상관물인 벚나무의 입장에서 화자에게 감정을 이입시켜보고자 한다. 일반적 시의 감상은 시적화자의 입장에서 독법을 하지만 화자가 감정이입을 시키고 있는 시적 상관물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셈법이 아닐까 한다.  씨앗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고 있다. 어디에 착지하는지 모른다. -산보객들의 자드락길이든 아니면 비좁은 바위 틈새든- 씨앗은 벼룻길이든, 바위 틈새든, 벼랑 끝이든 떨어진 장소를 탓하지 않고 발아한다. 그리고 자라서 종족 보존을 위해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 벚나무의 입장에서 벚나무를 보자. 벚나무는 자기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화자가 더 안타까운 것이다. 씨앗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 떨어진 장소를 우연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필연이다.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시선의 以我觀物은 반목과 불평이 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以物觀物의 시선은 화해와 용서와 양보가 있다. 필자 또한 수없이 등산을 하면서 봤던 바위 틈새에서 자란 소나무를 보고 ‘왜 하필 힘들게 바위 틈새에서 살고  있지’라고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인의 시선은 다르고 顚覆적이어야 한다. 벚나무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씨앗의 떨어진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필연으로 생각하며 인간이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탄식과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의식하지 않기에 폭풍한설과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얼마 전 jtv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에서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했다.  우연과도 같은 필연. 세계적인 뇌 과학자 디크 스왑Dick Swaab은 우리가 행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뇌의 필연적인 역할들로 탄생한다고 했다. 벚나무 또한 바람에 의해 착지하는 씨앗이라는 뇌의 필연적 생장점에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9-05
  • 딱, 하나/윤별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딱, 하나/윤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10대엔 엿가락처럼 시간이 늘어져 짜증났었지 멋모르던 풋내기 사춘기엔 턱밑이 거뭇한 고딩 오빠도 참 늙어 보였어 19살 숫자는 넘나 징그러웠지 풋풋한 이십 청춘엔 서른이라는 말이 서늘했어 그 고개 넘으면 괜한 걱정 했다고 웃게 돼 금세 마흔 닥치면 다 산 인생 같아 맥이 빠지지 만 나이까지 들먹이며 삼십 대로 뻐팅겨도 별 수 없어 마흔이나 쉰은 그게 그거야 여기저기 시달리며 단내도 나고 쉰내도 풍겨 군인이나 경찰이 어려 보이면 늙은 거야 어어 하다가 환갑이 목전 환갑은 싸~아 하니 느낌이 좀 다르더라 서글퍼지다가 홀가분하다가 헷갈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전철도 공짜로 타면 어느새 칠십 문턱 가만있어도 데려갈 텐데 자살도 하더라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나 봐 아니, 죽고 사는 게 만만해지나   난 어떠냐구 나이 먹으면 다를 것 같지 다른 거 하나도 없어 누구나 내일은 똑같이 몰라 나도 처음 늙어보는 거야 그래도 한마디 듣고 싶다면,   그냥, 마음이 끄는 대로 살아봐 -------------------------   화자는 칠순을 넘기지 않았다. 랩을 좋아한걸까, 아님 랩을 잘하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시 자체가 랩송이다. ‘지’, ‘여’,‘라’, ‘야’등의 rhyme이 그것이다. 각운의 리듬에 맞춰 읽어 가면 독자로 하여금 시의 비유를 떠나 흥얼거리게 한다. 재밌다. 시적 시어를 떠나,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리며 노래했다. 이 시를‘방탄소년단’이 보면 작곡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그들은 의식 있고, 철학적, 시적인 노랫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의 3대 요소에 중에 ‘음악적 요소’가 있다. 시어에서 느끼는 운율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는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를 읽으면서 ‘순수시’를 지향했던 ‘시문학파’를 생각게 한다.   시는 운문이다. 이 시처럼 라임에 맞춰 흥얼거리면 하나의 노래가 되고 쉽게 읽히며 와 닿는다. 굳이 시론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낯익게 하기’이다. 굳이 시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면 ‘낯익게 하기’를 ‘낯익게 하게’하는 것이 또 다른 ‘낯설게 하기’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독백조로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아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랩의 가락으로 읊조리고 있다. 읊조린 게 아니라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화두처럼 툭툭 던지듯 하고 있다. 화자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겪었을 층층의 시절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아 독자의 생각을 붙잡아 두고 있다. 필자도 두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다. 그의 곡 <피아노 협주곡 2번>를 찾아 듣는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면서 종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종소리를 그려내는데 심혈을 기울인 합창 교향곡 <종> 이 떠올라서이다.   그의 세속적 합창교향곡 op.35 ‘종’, or 'The Bells', op. 35 에드거 앨런 포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다고 한다. 이 시는 종소리를 세월의 흐름,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포우의 시는 태어난 유년 시절에서 늙음에 이르는 삶의 흐름을 종소리에 대비시키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도 여기에 착안해 인간이 태어나 결혼하고 살면서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과정(生老病死)을 위대한 작곡가답게 각각 은종, 금종, 동종, 철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논어의 ‘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얘기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 살에 설 수 있었으며,(三十而立) 마흔 살이 되어 미혹함이 없었고,(四十而不惑) 쉰이 되어 천명을 알았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이 되어 귀가 순하게 되고,(六十而耳順) 일흔 살이 되어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였다.“   화자는 사십 대까지는 공자와는 좀 결이 다른 내용이다. 물론 공자와 화자와 같은 사고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대 이후부터는 비슷한 생각 겹치고 있다. “환갑 진갑 지나면 홀가분하고 죽음도 두렵지 않고. . . ”그럴 수밖에 없다. 천성과 천리를 깨우치고 귀가 순해지는 즉,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경지의 나이, 한마디로 득도와 무욕의 경지에 이름에서야 무엇에 얽매일 것인가. 그러면서 걸어왔던 내 발자취를 한 번쯤 뒤돌아봐야 할 이유는 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그 발자국 어지러이 하지 말지라 今日我行跡 오늘 남기는 내 발자욱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음에 양보해야 한다. 젊음은 직선이고 충동이지만 늙음은 곡선이고 여유다. 곡선과 여유를 가지고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자. 그리하여 헨델의 ‘라르고’나, 드뷔쉬의 ‘꿈’처럼 유려한 선율로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며 꿈같은 삶을 살아보자.   나이와 관계된 시를 읽다가 생각난 서산대사의 마지막 법어를 보자.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칠십 전인 화자가 칠십 고개를 넘어서는 어떤 가락으로 풀어낼지 기다려진다. 랩이 아닌 시김새가 있어서 멋진 감흥이 일어나는 그늘 있는 천구성의 판소리 풍이 아닐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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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8-19
  • 파격/이은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파격/이은숙     친구가 전화를 했다 아파트 앞에 벚꽃도 피고 진달래도 피었다고 그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가 대뜸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   어쩌자고 피었는지 내일쯤은 꽃에게 물어야겠다.     이은숙 <그해 봄 바다> ----------------------------------     얼마 전 파스칼 키냐르의 <파스칼 키냐르의 말 : 수다쟁이 고독자의 인터뷰>라는 대담형식의 책을 보았다. 그 내용 중에 “글쓰기는 ‘흔적을 해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물의 분비물이나 식물들의 풍경, 계절의 순환하는 자연 현상, 천체의 움직임 등”   계절은 봄이다. 흔한 얘기로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시적 화자는 중년의 여성일 것이다. 젊음과 나이 듦이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꽃 앞에서 무슨 차이와 구별이 있겠는가. 화자는 친구와의 일상적인 통화 중에 뜬금없는 말을 듣는다.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   오뉴월, 아파트 창문 너머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눈에 담긴 꽃에서 ‘계절과 자연의 섭리’를 해독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피어오른 아지랑이와 함께 중년 여인네의 가슴엔 숨겨진 연정에서 피어오른 기분 좋은 슬픔 같은 감정들이 해독되면서 해체되고 있다.   화자는 갑작스럽고 도발적인, 다소 과감한 어투로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라는 어구에, 특히‘지랄’이라는 단어에 말초신경의 더듬이가 멈춰 섰을 것이다. 화자도 어쩜 ‘지랄’이라는 용어의 쓰임과 독백의 문법이어야 할 문장을 의문문으로 대치 시기는 것에 대해 파격이라는 시제를 떠 올리지 않았을까 한다. 꽃피어 향기 퍼뜨려서 맘 설레고 기분 좋은데 왜 ‘지랄’같다고 할까. -물론 역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시인이란 자고로 수학공식과 같은 도식적인 사고를 싫어한다.   장조와 단조의 상반된 조합, 진양조와 휘모리의 이질적인 조화의 방식처럼 서로 충동하는 논리에서 답 없는 답을 시인은 창조한다. 다만 의문과 질문은 항시 열려 있어야 한다. 시인은 문인 같은 공자보다는 ‘호접몽’에서 보듯 샤먼의 장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담론이 아니고 극단의 언어이다.   완연한 봄기운이 스민 여인의 가슴에 침묵 한 조각 심고 혼자서 돼 뇌이며 왜 꽃이 피었는지 꽃에게 묻고 싶단다. 묻는다고 꽃이 답할 일도 없지만. “왜 꽃은 피고 지랄이라니?”라는 구절에 많은 생각과 심연에서 올라온 심상을 펼치며 아래의 시구 같은 의미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화락천지정花落天地靜 꽃 문득 떨어지니 천지가 고요하고 화생천지동花生天地動 꽃 문득 피어나니 천지가 움직인다.   시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고취하는 것이리라. 에드거 엘런 포가 말했듯이 “소박하고 마음에 사무치는 짧은 시”가 마음을 달래는 시라고 한다. 위대한 시인보다 때론 음유의 시인이 좋고, 일상에 지친 피로와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비록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시인의 시에서 공감을 얻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이 시의 작가가 무명시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염천지절이다. “왜 밤인데도 더위는 식지 않고 지랄이라니”   글/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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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7-30
  • 꽃이 몸을 벗는다/김양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꽃이 몸을 벗는다  -홍랑묘를 찾아서   젖은 마당이 길을 막는다 발이 빠지고 땅이 깊이 패이고 마침내 왔구나 청석골* 좁은 골목 안 창백한 도라지꽃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펄럭인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단 한 번으로 건너버린 이승 함관령***과 詩 사이에서 시간이 명료해지고 왈칵 쥐었다 풀어지는 빗줄기가 잔가시를 쏟아낸다 순도 높은 눈물이 몸 밖으로 흐른다   손톱 끝 발바닥까지 뜨겁게 지져대던 그 여름 내 몸 어디쯤으로 건너오는지 혀 아래 삼키지 못한 말이 펄펄 끓는다 몸 안에 칼금 긋고 제단 위로 눕거나 용암으로 넘쳐나거나 펄펄 끓어오르는   꽃이 몸을 벗는다.     *파주 교하면 다율리 소재 **“묏버들 갈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홍랑의 시 ***홍랑이 최경창과 헤어진 곳   김양숙 <지금 뼈를 세우는 중이다>. 시와산문사.      홍랑지묘     ‘몸은 천민이요, 눈은 양반’이라는 말처럼 이중적 신분 구조 속에 위치했던 妓女, 조선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유∙무형의 문화재로 위치해야 할 예술인임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왜곡된 性의 상품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필자는 詩書畵에 능했던 몇 명의 기생 및 여류 문인들의 음택을 꽤 오랫동안 답사했었다. 그 후 난, 만능 예술인인 그들을 ‘妓生’이 아닌 ‘伎生’으로 이름 짓고자 했다. 이 또한 딜레탕트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시인은“젖은 마당이 길을 막고”, “발이 빠지고 땅이 깊이 팼다”고 한다. 묘역을 찾아가는 길에서‘마음도 젖고, 깊은 땅 속에 발이 빠지는’ -당시에는 논밭 두렁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했다.- 느낌이 들었으리라. 왜냐면 시인은 논밭을 만나면 곡식이 되어주고, 산을 만나면 계곡물이 되고, 소나기를 만나면 폭포가 되는, 시인은 본질적으로 페르소나를 갖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청석골’은 고죽 최경창과 홍랑의 음택 근처의 지명이다. 드디어 마을에 도착해서 주민들에게 위치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때 주민들의 표정이 다소 궁금해진 이유는 뭘까.   문학, 예술인들은 의식주와 예술의 살핏점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문학은 예속을 벗어나는 역량이다”라고 블랑쇼가 얘기했듯이. 문학인, 특히 시인은 돈 버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익히 아는바 이다. 그러다 보니 물질 만능의 사회에서는 심한 박탈감과 이방인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시를 써야만 하는 정언명령과 같은 의무감이나 그 자체가 선이라 생각하고 느끼는 창작의 희열과 기쁨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피는 워낙 뜨거워서 시심이 끓어올라 시상의 꽃을 피우고 한 편의 시는 열락의 불새가 되어 난다. 거기에 뒤따르는 고독과 고통은 어차피 시인의 식량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酒∙歌∙舞와 같은 관능적 향락은 성정(性情)을 흐리게 한다 해서 극히 금기시 한 시대였다. 이 시기에 대문장가인 孤竹 최경창과 기녀 홍랑은 짧은 만남을 통해 雲雨之情을 나누면서 號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듯이 홍랑은 외로운 대나무의 벗이 되어준다   그러나 어찌하랴. 다음 해 봄 서울로 발령을 받아 떠나는 고죽 앞에 홍랑은 첫사랑의 애틋한 정을 가눌 길 없어 영흥까지 따라나섰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함관령(咸關嶺)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왜냐면, 당시에는 평안도나 함경도 사람은 서울에 못 들인다는 금법인 兩界의 禁을 어겼다는 죄명이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홍랑에겐 분노의 장벽이었을 것이고, 혀 안엔 죽은 단어만 고였을 것이다. 고죽 또한 머루알 같은 그녀의 손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놓았을 것이다   헤어짐의 사랑앓이에 딱딱한 빵을 씹고 있는 애틋한 사연 앞에 시인의 말처럼 함관령과 시 사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명료해지고 그로 인해 순도 높은 눈물이 눈앞을 가릴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또한 뜨거운 여름의 몸 안, 혀 속에서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아님 제 몸 안에 칼금을 긋고서 제단 위에 누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들 사이의 연정에 스며들어 단장의 비애를 읊조리고 있다. 답사를 떠나기 전 시인은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공부했음이 역력해 보인다.   결국 고죽은 이러한 일로 파직 되었고 홍랑은 눈물을 뿌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고향으로 옮겨야만 했다. 창가에 드니 날은 저물고, 이별을 위로한 것인지 아니면 슬퍼하는 것인지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홍랑은 길가에서 물 오른 묏버들을 꺾어 고죽에게 보내며 심회를 읊었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단 나린가도 녀기쇼셔.   단 세 개의 구로 된 짧은 평시조이다. 관념을 표출한 사대부들과는 달리 솔직하고 애상적이고 여성적인 표현을 하면서 떠나는 임에게 홍랑도 느꺼운 감정을 드러냄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임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고, 첫 구절의 “임의 손대”처럼 도치법을 써서 묏버들을 꺾어 주는 의미를 강조하고, 버들가지에 파릇파릇 돋아나오는 새잎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여자의 섬세함을 연상케 하는 표현력은 홍랑이 엘레지(elegy)의 詩妓임에 틀림이 없다.   울연한 마음, 얼마나 애가 끓었기에 버들가지를 꺾어 보내며 창밖에 심어 놓고 보아달라고 애원을 했겠는가! 그러면서 새잎 나거든 애련의 이별을 상기 시켜 달라는 홍랑. 그녀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고, 문학사에서 아름다운 戀詩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黃鳥歌’를 비롯해서 고려가요인 ‘서경별곡’ 정지상의 ‘送人’ 황진이의 시조와 김소월의 ‘진달래꽃’등의 문학작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홍랑이나 고죽 또한 만만치 않다. 時時變轉하는 요즘의 ‘사랑법’을 되새겨본다.   그 뒤 최경창과는 소식이 끊겼다가 3년 뒤 고죽이 병이 드러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홍랑은 그날로 길을 재촉하여 밤낮을 걸어서 일주일 만에 서울의 고죽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성을 담아 간호를 하며 곁에 있어 주었다.   그 후 고죽의 사망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고,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홍랑은 곧바로 마음을 추슬러 객사를 한 고죽을 위해 시묘살이를 했다.   “꽃이 몸을 벗는다.” 왜 꽃이 몸을 벗어야만 했을까? 시인은 함축적이고 숨겨진 시니피에는 버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니피앙만 남겨 놓았다.    글/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7-17
  • 운필運筆/박용섭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운필運筆/박용섭       가뭄이 길었던 해 아버지 가슴도 논바닥처럼 타고 있었다 비단실 같은 빗줄기 촉촉하니   쟁기를 지고 멍에 메워 큰 소를 앞세우고 논으로 가신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주 한 사발 소에게 먼저 권하며   힘들지   해 그림자에 비치는 논고랑은 예서체를 펼쳐놓은 것 같다   모를 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을 눈물이라도 찔끔 고이면 행서체로 내가 써레질해야지.   시집 <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쌍겨리/단원 김홍도   한 가뭄에 타는 논바닥, 갈라 터지고 흙먼지 일으키는 논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엷은 홑바지를 입은 아버지와 헐렁한 몸빼를 입은 어머니가 일구는 농사철, 알바도, 시간제 근무도 없었던 시절엔 곡식 한 알, 채소 한 포기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산골 다랑논은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시인은 강원도 삼척의 두메산골에서 어렸을 땐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시인이면서 서예가로서 한 획을 긋고 있다. 그래서 떠 올리는 것이 모내기철 논갈이와 써레질을 行筆에 빗대어 시상을 전개한다. 시란 관념적인 것보다 체험적인 요소에서 탄생할 때 더 잘 쓰이고 빛날 수 있다.   농부에겐 한 해 논밭의 수확은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그야말로 삶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큰 가뭄이라도 들면 가슴이 타들어 가고 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 내리는 비는 비록 비단실처럼 가느다란 빗줄기지만 一滴甘雨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논바닥을 촉촉이 적셔주어 아버지는 급히 쟁기를 짊어지고 나선다.    지금은 이앙기, 트랙터 등을 이용하지만 당시에 다랑논은 오직 소와 사람의 힘으로 일구는 농사 방법이었다. 논갈이 할 때면 가끔 보습이 깨져 나가거나 찌그러지면 낭패를 보지만 그래도 볏에서 볏밥이 곱게 갈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엔 어느덧 풍년을 예약한다.   농사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이기에 가끔 쉬어야 한다. 자신의 휴식을 떠나 오직 한 살림 밑천이요 저당 잡힌 대학 등록금인 소를 위함이다. 부리망을 벗겨주고 먹이를 주며, 텁텁한 한 잔 술도 소에게 먼저 권하는 것이다. 소는 가축 이전에 가족이었다. 그리고 영물이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심우도(尋牛圖)’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아 마음을 깨닫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종삼 시인의 시 한편을 보자. ‘묵화(墨畵)’이다. (낭송/ 유부식)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dFmyg0DPWvI‘묵화’   쟁기 끝에서 곡식 영근 소리를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시인은 훗날 서예의 대가가 되어 豪端有聲, 한지 위의 붓끝 놀림에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이 일치할 때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꾸민 감동은 가짜다. 삶의 체험에서 나온 감동은 보고 읽는 이에게 빠른 감화를 준다. 고통의 골목을 지나지 않고 어찌 환희의 광장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논이라는 한지 위에 쓰인 예서체의 논갈이를 보고 있다.   쟁기질 후, 모내기하기 위해선 논바닥을 고르게 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농기구가 써레이다. 어린 나이에는 모내기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몫이 아니다. 초보자가 해서가 아닌 초서에 가까운 행서라니, 아마도 써레질이나 쟁기질은 단정한 해서체 보다는 좀 흘려 쓴 행서체가 나올 것이다. 아니, 초보 써레질의 運筆이 서툴러서 行書가 될 것이다. 그렇다 점 하나, 획 하나가 사람의 신체조건에 해당 하듯 시인은 永字八法을 익히고 六書에 깊이 다가섰을 것이다. 삼척의 화전 밭뙈기와 층층 다랑논의 서체를 기억하면서. 시제를 ‘운필運筆)로 하고, 그리고 그 서체의 주인공인 아버지를 떠 올리고 있다. 말 없음의 큰 울림으로 깨우침을 주셨고 빛 없음으로 빛을 발하셨던, 언제나 빛나지 않고 빛나셨던 眞光不輝의 아버님!   삶에서 일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근본이다. 그 행위 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는 중요치 한다. 다만, 농사짓는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신성한 노동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작물을 평생 일구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는 대표적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이다.   필자의 아버님도 본인이 쟁기질 하셨던 그 밭에 땅보탬이 되어 계신다. 낮에는 논밭갈이 하시고 이 시간엔 곤히 주무실 것이다. 三更이다.   “그때는 시골 살림이 너 나 없이 가난하여 배불리 밥 먹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지도 모른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전 화전 밭뙈기 쟁기질하는 소를 몰고 아버지 따라나서면 해거름이 되어서야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온다. 사랑방에는 장죽을 탕탕 터는 훈장 앞에서 글 읽는 소리가 노래, 그이상의 연주보다 아름답다. 아무리 농사일이 힘들어도 책을 펼치고 있는 아들은 밭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심통을 부리면 “나중에 성한테 배우면 되지 아버지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가난이 켜켜이쌓여도 부모님은 쇳덩이도 녹일 기세였다.“ -시인의 어록에서 발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6-20
  • 광고/김원준
    문학창의 도시, 부천, 시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5-29
  • 일천 개의 鏡/양성수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일천 개의 鏡/양성수   큰스님 선문답하듯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말하지 말라   산속에 물 있고 물속에 산 있느니   보이는 대로 보려 하지 말고 생각되는 대로 생각하려 하지 말라   보여지는 생각되어지는 것들은 얼룩진 거울 속에 비친 네 마음이려니   산에서 물을 물에서 산을 보라 산과 물은 태초부터 하나였음을 알게 되리니   디카시집 <자제 밥은 먹고 다니시는가>   사진/홍영수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물론 성철 스님 때문에 그렇지만 이미 선불교의 화두로 백운선사나 경봉 스님이 즐겨 썼던 말이다. 물론 ‘청원 유신(靑原 惟信)’선사가 처음 했던 말이다.   참선에 몰입한 그는 30년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높은 스님을 만나 깨침을 얻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山不是山 水不是水)‘으로 보였다. 그 후 진실한 깨침을 얻고 나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다(山祗是山 水祗是水)’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설법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평상시에 눈에 보인 그대로의 긍정적 순간의 태도일 것이고, 두 번째는 보인 대로가 아닌 다른 눈, 즉 부정적인 시각의 태도이다. 세 번째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대긍정을 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큰 스님들이 화두로 삼았던 이 말을 오히려 역설적이게 큼 다소 거칠고 단호하게 확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승들의 깨우쳐가는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산은 산, 물은 물’의 입장은 우리들의 상식적으로 본 일상적인 세계관이다. 말하자면 실재주의에 입각한 긍정의 입장이다. 이원론적이고 나의 자의식을 중심으로 본 그대로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로 보는 것이다. 화엄사상의 ‘事法界’로 보는 단계이다. 그래서 화자는 이러한 사고의 단계를 벗어나라고 하면서 선문답하듯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산속에 물이 있고, 물속에 산이 있단다.’ 화자는 연기적 세계관을 피력한 것이다. 눈에 보인 일체의 현상들은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연기법은 곧 相入相卽의 연쇄관계의 구조를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신라시대 이차돈의 순교 당시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 솟아오르고, 하늘이 어두워지며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때 베인 목에서 흘렀을 피나 당시 하늘에서 내린 비는 다시 땅 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순환 고리에 따라 시냇물, 강물, 그리고 바닷물이 되어 증발되고 다시 땅에 떨어져 스며들어 지금의 우리가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한다고 할 때, 이러한 섭리가 바로 상입상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구절 보자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순수의 전조’중 일부   우주 자연의 본질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서로 속에 들어가 하나 됨을 말한다. 즉 모든 사물의 이치가 하나로 융합하여 구별이 없어진다는 ‘圓融’을 일컫는다. 수많은 사물의 요소들이 인연에 의해 상호의존해서 성립되어 있고 이것, 저것을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가리킨다. ‘산과 물, 물과 산’의 상호의존적 緣起를 시인은 말하고 있다.   여러 조건들이 서로에게 개입하고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에 결코 영원불변함이란 없는 것이고, 개체적 동일성을 갖는 자아도 결코 없다는 것이다. 이게 불교에서 말한 無常이고 無我이다.   모든 법의 이치가 완전히 하나로 융합하여 구별이 없어진다는 사상. 일상의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에 회의를 느끼며 2연에서는 1연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없고,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理法界’의 원리를 깨닫고 있다.   그러면서 3, 4연에서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눈에 보인 사물과 현상들을 ’보이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보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과 현상들을 보는 시각과 생각들이 보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얼룩진 거울’의 의미는 각자의 보는 시각일 것이고, 詩題의‘일천 개의 鏡’은 저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5연에서는 세 번째 단계인 ‘산은 정말로 산이고, 물은 정말로 물’이라는 현상세계의 참모습을 꿰뚫어보고 있다. 부정의 부정, 곧 대긍정의 경지를 얘기한다. 바로 ‘산과 물’을 선악과 미추, 주객의 대립된 세계가 아닌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넘어선 횡단적세계관을 얘기하고 있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山水不二’다.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많은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一中一切多中一, 卽一切多卽一)”라고 했던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떠 올려본다.   한 편의 시는 때론,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티끌 속에 우주가 찰나 속엔 영겁이. . .   어둠속 진한 고요가 내 마음을 헹구어주는 三更에 자연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사유하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는 왕유의 시 한 수를 감상하며 펜을 접는다.   溪淸白石出 개울 맑아 돌이 희게 나왔고 天寒紅葉稀 하늘 추워 붉은 잎 드무네 山路元無雨 산길에는 원래 비가 없는데 空翠濕人衣 허공의 푸른 빛깔이 옷깃 적시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5-14
  • 페르소나/박선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페르소나/박선희       병원 1층 로비 띄엄띄엄 환자들 모여 앉았다 박수소리에 섞인 웃음소리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껑충 키 큰 남자 우스워 죽겠다는 듯 허리를 꺾었다 편다 노란 꽃 달린 머리띠를 하고 목에는 청진기를 걸고 뱅글뱅글 눈알이 그려진 안경을 쓰고 완강히 닫힌 문처럼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소리만 요란한 얼굴들 몇 차례 시키는 대로 따라 웃더니 움찔, 굳은 표정이 풀린다 억지로 웃었던 웃음인데 서서히 허물처럼 벗겨진 가면 웃음은 가면으로부터 얼굴을 꺼내는 일 웃음의 힘은 무섭다   치매는 앓는 아버지, 요양원에 두고 급히 돌아 선 등으로 억지웃음을 시키며 웃음을 삼킨 웃음 치료사 오늘도 가면을 쓰고 산다.   시집 <건반 위의 여자> ---------------------------     문학회 기행에서 하회마을에 갔을 때‘하회 탈’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양반의 두 얼굴을 가면과 웃음을 통한 풍자극이었다. 페르소나(가면)는 라틴어로‘연기자의 가면(Actor’s Mask)’,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예술, 특히 문학에서의 페르소나는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한 바를 어떤 인물을 통해 드러낸 것을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하기를“존재는 거미줄의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양극단의 중간자적 존재라는 의미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여러 상황 속에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거나 마음속 동의를 하게 되는데, 이 때 우린 페르소나를 갖게 된 것이다. 하회탈춤을 보더라고 할미탈, 각시탈, 양반탈, 이매탈 등의 가면을 보면 배역을 알 수 있고, 동작을 보고 이해를 하게 된다. 누구의 삶이든 연극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가며 마주치는 사람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바뀐 역할을 하게 된다. 때론 사람들은 다중인격자라 하지만 그건 아니다. 왜냐면, 어느 누구든 동일한 모습으로는 살 수 없다. 내면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르소나는 타인을 속이기 위한 나쁜 의미의 가면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신분과 체면을 지키며 사회에 적응을 위한 필요한 가면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진실을 원한다면, 그에게 가면을 주어라.”라고 했다.   방탄소년단은 올 4월 12일 미니 앨범 ‘MAP OF THE SOUL : PERSONA’를 발표했다. 전 세계에 엄청난 팬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고 있는 글로벌 가수, 그들이 7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이 앨범의 ‘intro’로 ‘Persona’를 소개하고 있다. 나의 진짜모습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이 앨범의 ‘MAP OF THE SOUL(영혼의 지도)’는 융이 쓴 책이 아닌 융의 연구가인 머리 스타인이 지은 ‘융의 영혼의 지도’라는 책을 기초로 한 곡이라고 한다.   인간의 정신은 ‘그림자’와 ‘페르소나’로 짝을 이룬다. 한마디로 페르소나는 사회적 가면이다. 그 시대의 요구에 맞춰야하고 사람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목적과 바램에 맞춰야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자식은 자식다운 역할이 바로 일종의 페르소나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하나의 페르소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목적, 열망, 다움 등에 맞춰야 하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방탄소년단은 ‘융의 영혼의 지도’를 통해서 사회의 한 축을 이루며 성장해 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시‘페르소나’를 읽으면서 오버랩 된 것이 BTS의 ‘페르소나’였다. 가사 일부를 보자.   내가 기억하고 사람들이 아는 나 날 토로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나 Yeah 난 날 속여왔을지도 뻥쳐왔을지도 But 부끄럽지 않아 이게 내 영혼의 지도 (persona’의 가사 일부)   영화에서 영화감독은 배우를 내세워 의도고자 하는 표현을 할 것이고, 문학에서 또한 작가가 구상이나 상징성 등을 페르소나를 통해 표출한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 병실에서 나와 1층의 좀 넓은 장소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허리를 구부리며, 배꼽을 쥐기도 하고 펴면서 웃기도 한다. 무엇이 저들을 웃게 하고 울게 하는 걸까. 웃고 있는 얼굴의 마음속에는 우울감을 안고 사는, -특히 감정노동이 많은 오늘 날- ‘가면 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 환자들은 아닐까. 병원의 배려로 아님, 의례적인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치료사가 온 날임은 분명해 보인다.   ‘웃음 치료사’는 자신을 감추고 웃음을 유발하는 말과 행동이라는 가면을 쓰고 환자들 앞에 서 있다. 그의 행동과 말을 보고 들은 환자들은 그의 역할을 보고 웃다가 때론 울기도 하면서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물론 반복되는 이러한 효과는 환자들, 특히 우울증이나 정신적 이상, 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특히 웃음의 치료가 효과적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광경을 직접 목도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왜냐면 시인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숨겨진 이면을 오감으로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웃음 치료사는 ‘웃음’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심리적, 신체적 역기능의 환자들을 치료한다. 이때‘웃음’은 자신의 분신이자 상징이다.   시인은‘가면’을 쓴 웃음치료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치료사의‘페르소나’가 아닌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지난날의 정상적인 삶과 지금 환자가 되어 치료를 받는 과정을 상기시키면서 억망울의 피, 억만 줄기의 눈물로 얼룩진 환자들의 페르소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 소리 없는 무표정의 얼굴, 억지웃음일지언정 감추거나 뒤집어쓴 허물이 벗겨진 것을 보고 있다. 시인은 저들이 刻苦勉勵하며 삶에 충실했고 상황에 대처하는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린 얼마나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때그때 새로운 가면들을 들쳐 사용하고 있는가.   장자는 나만의 페르소나를 벗고 객관적으로 살펴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道에 이른다고 했다. 우린 부부, 동창, 회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계들 속에서 살기에 다양한 가면을 가지고서 바꾸어 쓴다. 장자는 자신만의 가면을 고집하지 말고 道의 관점에서 바라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가면이 필요 없는 세상이 있을까.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 우린 얼마나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가. 때론 감정에 솔직해져 볼 일이다. BTS (방탄소년단)의 MAP OF THE SOUL : PERSONA 의 앨범에서 'Persona'를 들어보자. 철학적, 문학적 가사가 맘에 든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5-01
  • 사랑이 예약된 당일 아침/유부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사랑이 예약된 당일 아침/유부식       아침 공기가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재즈의 선율이 내 온몸을 휘감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고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그려보고 저녁에 만나는 순간까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나와 그 순간이 약속된 이여! 나와 하나 되기로 선약된 이여! 사랑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는 죽어서도 잊지는 말자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시집 <카카오 스토리>     시라는 장르 자체가 다의성과 시인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제의 의미는 결혼하는 날을 의미한 것으로 읽히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읽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든 젊은 남녀 간의 만남이든. 남녀 사이의 사랑 행위를 보고는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른 아침의 공기가 예전과는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평소의 공기가 아니고 고급의 산소가 있다면 최고의 산소를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때마침 재즈의 선율이라니. 들뜬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아마도 마일즈 데이비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등 재즈 뮤지션들의 선율이 아니었을까 한다. 산뜻한 아침에 들리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소리를 몸에 휘두르고 집을 나선다.   2연에서는“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어린 왕자의 명대사를 생각나게 한다. 시인은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에 이른 아침부터 행복해지고 있다. 아침 식사는 굳은 빵이 아닌 갓 구운 부푼 사랑의 빵을 씹고 있는 중이다. 행복의 부피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작은 풍선이 아닌 창공에 띄운 애드벌룬만큼이나 팽팽히 부풀고 있다.   평생지기의 반려자가 될, 아니면 사랑하는 여자이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그녀의 수줍음에 홍조 띤 모습을 생각하며 기대감 속의 벅찬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견고한 이성의 벽이 풍선처럼 부푼 흥분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럴 때는 이성이 감성에 묻혀봄직 하다.   문학사가들이 저주의 작가라고 분류하는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 사회에서 두 가지 무질서를 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다. 에로티즘과 죽음, 이 둘은 둘이 아니고(不二) 하나라고 한다. 한마디로 에로티즘의 순간은 죽음과 같은, 작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삶의 충동을 에로스로 불렀던 것과 짝을 맞추어, 마르쿠제는 죽음의 충동을 죽음의 신 이름을 따서 타나토스라 불렀고, 이후 이 둘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불리기도 한다.   몸은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성을 추구하게 된다. 존재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불연속적인 존재끼리의 결합을 통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절정의 순간, 엑스타시의 경험을 하게 되는 성적 결합이다. 그렇다. 3연을 보자. ‘순간이 약속’되고, ‘하나가 되기’그리고‘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등에서는 곧 결혼 첫날의 꽃잠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황홀경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존재의 연속성을 구현코자 한 것이리라. 에로티시즘은 시와 맞닿아 있다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를 통해 ‘너와 나’로 연속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미술에서 영원한 주제는 에로티시즘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등,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가 문학에서도 서정주의 시‘화사’나 고려가요의 남녀상열지사인 ‘쌍화점’ 등 많은 고전 문학, 미술 작품에서도 에로티시즘이 주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조신 시대 가사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기생 진옥과 나눈 에로틱한 시 한 편을 보자   옥이 옥이라 커늘 반옥(半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송강 정철(鄭澈)의 노래가 끝나자 가야금을 뜯던 진옥(眞玉)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수하기를......   철(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攝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예술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너무 관능적인 것을 추구할 때는 저속하게 느껴져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지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불필요한 시어를 없애고 화려하지 않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솔직담백한 시적 진술로 관능적 에로티시즘을 넘어서고 있다.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난 당신 안에서 당신을 찾고 내 안은 당신으로 넘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삶의 연속입니다.   사랑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하듯 틀에 박힌 연주 스타일을 벗어던진 비밥 시대의 재즈 한 곡을 듣는다. Miles Davis의 ‘So What’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4-16
  • 봄소식/김옥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봄소식/김옥동   동구 밖 실천 여는 싱그러움 파고든다 겨우내 텅 빈 가슴 핏기 잃은 산자락들 움트는 박동소리가 새 기운을 끼얹다.   고드름 낙수소리 소절(小節)로 띄워 진다 지붕 밑 움츠리다 기지개 켠 토방마당 부화된 햇병아리도 물가래만 쪼인다.   화신의 전령들이 이심전심 꿈틀댄다 지난봄 못다했던 소망들이 되새겨나 고개든 버들강아지 파란 꿈만 그린다.    시조시집 <두메산골>   할미꽃   -----------------------   시조는 三章六句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章과 句의 다양한 변형을 주어 멋스러움을 추구하는데 단시조든 연시조든 행갈이 등을 통해 다채로운 운율의 묘미를 살려 시조의 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조의 기본 틀인 3장 6구는 시조의 골격이고 구성법이다. 그리고 기승전결에 의해 짜인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 구성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 구성법을 따르는 것이 시조 짓기의 기본형식이 된다. 또한 12음보에 45자 이내로 정형화된다. 이 또한 반드시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승전결은 소설, 수필 등의 장르에서도 적용되는데 정형시에서 초장의 起는 시상을 일으키고 중장에서는 그것을 이어받아(乘)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전환했다가(轉) 작품을 마무리한다(結) 종장이 끝나면 한 편의 작품이 내용상으로 완성될 뿐만 아니라 리듬도 완성이 되는 구조를 이룬다. 시조의 이와 같은 절묘한 구조를 絶句 詩의 한시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여서 비교되기도 하지만 한시와 정형시조의 차이는 분명 있는 것이다. 절구의 한시를 시조로, 시조를 한시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봄이 오고 있다. 먼 곳에서 아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 걸음걸음 다가오는 봄이 중앙공원의 연초록 빛 나무들 가지 끝에 매달려있다. 시인 셸리는 읊었다 “푸른 대지 속, 봄을 맞는 잎새 들의 움직임 속에는 바로 우리들의 가슴과 통하는 어떤 은밀한 교감이 있다”고   그렇다 봄이 오는 소리는 분명 닫힌 옷깃을 풀어헤치고 나들이 하고 싶은 계절이다. 산자락을 산이 누르고, 개울물은 스스로의 소리를 삼키며 얼음장 밑을 흐를 때 북풍한설의 매서운 바람은 실개천의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달렸을 것이다. 다소 거친 예를 들어본다. 주자의 시구에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도 꿈을 깨기 전(未覺池塘春草夢)”이다. 그러나 동구 밖은 이미 아지랑이가 똬리를 틀고 봄바람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첫 수, 동토의 긴장감으로 텅 비웠던 겨울산은 계곡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움츠려 느려졌던 심장의 박동소리를 이완시키며 키우고 있다. 그 박동소리는 새로운 기운이 얹혀 힘차게 쿵쾅거린다. 작은 숨소리의 실개천도 제법 소리를 내고 있다. 봄은 그렇게 산자락에 스미어 심장의 박동소리로 전이되어 온다.   둘 째 수, 초막의 긴 고드름도 한 소절의 리듬이 되어 제 몸을 푼다. 이 때 초막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點點滴滴不差移) - 시인은 태공의 ‘효행‘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 겨우내 숨죽였던 토방 앞마당, 봄 햇살을 노랗게 입고 물 한금에 봄 하늘 한 번 쳐다보는 햇병아리, 봄은 앞마당 ‘병아리’의 부리에 쪼이며 토방 밑으로 스며들고 있다.   셋 째 수, 얼어붙은 세계가 봄볕에 꿈틀대니 동면의 씨앗들은 발아를 꿈꾸고 따사로운 훈풍에 수목들은 염화미소로 화답하며 꿈틀대고 있다. 봄의 전령사 버드나무는 지난봄에 못 다 이룬 꿈을 소망하며 꽃망울 터뜨려 파란 꿈을 꾸고, 버들강아지가 냇물을 간지럽힐 때 봄 햇살은 시냇물을 뛰어넘어 다니다 미끄러지며 함께 흐른다.   예로부터 버드나무 가지는 남녀 사이의 애절한 정과 이별의 징표로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절양류(折楊柳)라하여 임이 떠날 때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애타는 정을 노래하는 시가 많다. 대표적인 시가 기녀 홍랑이 고죽 최경창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며 애절하게 보낸 “묏버들 갈해 것거”로 시작하며 읊조리는 서정적 평시조이다. 이렇다고 할 때 ‘지난 봄 못다 했던 소망들이 되새겨나‘의 시구는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조는 율격의 측면에서 정형시에 속함으로 정해진 형식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음수율 또한 45자 이내의 형식을 취하지만 변형된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파격을 가하지 않고 음수를 지켜 시조의 호흡과 리듬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3수로 된 연시조이다. 영혼이 곧으면 글도 곧듯이 봄볕을 거머쥔 시조가락에 시가 빛나고 있다. 첫 째 수와 둘 째 수, ‘박동소리, 낙수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에서 아장걸음으로 오는 봄소식이 들려오고 세 번째 수의 ‘파란 꿈’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약동하는 파란 봄이 꿈처럼 펼쳐진다. 봄이 오는 소리를 시인은 청각과 시각의 이미지로 형상화시켜 봄나물 무치듯 조물조물 버무려서 ‘봄소식’이라는 나물요리 한 접시 내놓고 있다.    글/ 시인 홍영수jisrak@hanm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3-23
  • 물거울/양정동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물거울/양정동    실바람이 간간히 스쳐가는 연못 위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나무 가지를 타고 참새가 연못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내 얼굴을 호수가 보고 있어 내 마음도 보려고 손 컵으로 물을 뜨니   찡그린 표정으로 조용히 두고 보라 한다.   마음은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시집 <나는 여기에 있다>     -------------------------------------   조용한 연못을 스치는 실바람 소리에서도 작곡가는 시의 리듬을 들을 수 있고, 파란 하늘에 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고 한 줄의 시를 띄울 수 있고,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세속적인 합창 교향곡의‘종’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복음을 생각하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바로 옆 소나무 가지를 오락가락하며 뛰어노는 참새 떼가 물속에 투영된다. 참새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할 뿐 물속에 자신의 그림자를 담그려 하지 않고 물 또한 그들을 물속으로 잡아당길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보일뿐 허상은 자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화자는 외연을 확장시켜 좁고 얕은 연못에서 넓고 깊은 호수를 끌어드려 호수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 시를 보면서 두 시인의 시가 떠 올려졌다. 20여 년 전, 강화 길상면에 있는 백운거사 이규보 묘소를 답사했던 기억이 난다. 三酷好로 불리기도 했던 그의 천하의 절창 오언절구 ‘우물에 비친 달을 읊다’와 시인 이상의 ‘거울’이다.   詠井中月 우물에 비친 달을 읊다/이규보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병속에다 물과 함께 길어서 담았는데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절에 이르면 응당 깨닫게 되리,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도 없어진다는 것을.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서인지 불교의 空사상이 담긴 절간의 달빛 풍경을 그리고 있다. 산속의 물에 비친 달, 마음에 담듯 병 속에 달빛을 담는다. 절간에 돌아와 병에 담아온 물을 따르니 달이 없다. 물에 비친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實像)의 그림자(虛像)에 불과할 뿐이다. 그걸 모를 바 없는 문장의 대가 이규보이다.   술과 거문고와 시를 좋아했던 이규보는 달빛을 병에 담아와 空사상을 건진 반면 詩聖이라 일컫는 시인 이태백은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손에 움켜쥐려다가 빠져 죽었으니 시인은 자신의 총체적 삶과 시를 통해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띄우고 짓는다.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빠져 죽어 수선화로 피어올랐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과 실제를 보자. 허상과 허구에 속지 말고.   시인은 호수가 자기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한다. 호수에 잠긴 자신의 얼굴에서 본마음인 참나를 보려고 자그마한 컵에 담으려고 한다. 비록 담긴다 한들 담긴 얼굴이 참모습일까. 실상인 자신의 얼굴을 잊은 채 물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서 마음을 건지려고 하니 찡그린 표정으로 그냥 두고 보란다. 본마음을 보지 않고 가짜의 마음을 건지려 하니 호수는 찡그릴 수밖에.   이 때 호수가 하는 말 “마음은/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그렇다 시인은 연못과 물거울 비친 허깨비인 그림자를 통해서 마음을 보는 이치를 터득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용히 바라보는 것 즉,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응시하며 지긋이 보는 것이리라. 아흔 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한 시바타 도요 『약해지지 마』의 시집을 꺼내본다. <나Ⅰ>라는 시에 “눈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귀는 바람의 속삭임 듣고 있다. “ 그렇다. 참나를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도 잘 알려져 있듯이 거울을 소재로 삼아 ‘현실적 자아’인 거울 밖의 나와 ‘내면적 자아’인 거울 속의 나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나타내고 있다. 살아가면서 만난 타인들은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는 일부이고, 난 그들 속에 비친 모습에서 나를 찾고 발견한다. 시인이 호수라는 물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깨닫듯이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고 자아를 형성해 가야 하지 않을까.   구글의 엔지니어인 모 가댓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거울 안에 있는 자신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아냐,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돼.” 최고의 위치와 부족함 없는 그이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선 그도 역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거울이든 어떤 거울이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끔 들여다보면서 반추해 볼 일이다.    -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3-12
  • 경계境界/김경식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경계境界/김경식   수덕사修德寺 가는 길   난데없는 겨울 소나기라니,   일주문에 서서 비를 긋는다   산중엔 따로 울을 두르지 않느니   문안의 비와 문 밖의 비가 다르지 않아   바람은 빗물 따라 산을 내려가고   어둔 귀 하나 문설주에 기대어     저녁 법고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집『적막한 말』     수덕사 법고   ------------------------------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첫 번째 세워진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가람에 문은 문짝이 없다. 문은 공간 분할만하고 상징적일 뿐이다. 그리고 주변엔 울(담장)도 없다. 산중 사찰은 대부분 개방적이다. 불교는 오고 감에 자유자재 한다. 부처님을 여래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속세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한 마음으로 통하는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상징의 문. 일심을 깨달은 분이 부처요 잃은 자가 곧 중생이기에 일주문을 들어서는 구도자에게는 信心을 가져한다. 시인은 일주문에 서 있다.   한 줄로 선 기둥은 세속의 진애(塵埃)에 오염된 비뚤어진 마음을 떨쳐버리고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의미이다. 그래서 ‘一心’을 뜻한다. 한마디로 此岸에서 彼岸으로, 사바의 세계에서 정토의 세계로 가는 첫 번째 문이다. 문 밖은 俗界이고 문안은 眞界라 하여 일주문을 들어설 때 一心에 귀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덕숭총림 수덕사를 가는 길이다. 계절답지 않게 내리는 소나기,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일주문에 서 있다. 난데없이 내리는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온몸을 화두로 적신다. 그 순간 평소의 시선이 아닌 一心의 눈이 뜨인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고 보였던 것이 새롭게 보인다. 원래 없었던 울이 갑자기 보이고 쏟아지는 소나기가 문 밖과 안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 보인다. 시인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이라는 존재 유무의 벽을 깨부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설명이 아니고 체험이고 깨우침이라면 화자는 이미 종교적이다.   시인은 문설주에 기대어 저녁 예불 시간의 법고소리를 기다린다. 사찰에서는 북을 법고라고 한다.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듯 불법의 진리로 중생의 마음을 울려 ‘一心’을 깨우친다는 의미이다. 붓다의 진리를 전하는 수단이다. 범종이 중생의 구원하는 상징성을 가진다면 법고는 길짐승을 제도하는 의미를 지닌다. 북의 양면은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사용하는데 이는 음양을 맞추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소리, 화합의 소리, 조화의 소리이다. 중생의 심금을 울리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상징성을 띄는 四物 중 하나인 法鼓.   시인은 그 법고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두 개의 북채로 마음 ‘心’자를 그리며 두드리는 일심의 소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오래된 번뇌의 내의를 입고 겉옷만 바꿔 입는 우매함을 벗어던지고 심장을 후비며 파고든 법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둡던 귀를 열어 불법을 전하는 한 울림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한 마음을 깨닫고 마음의 눈을 떠서 어둔 귀를 밝히고 맑은 눈을 뜨려 하고 있다.   시인의 시집『적막한 말』에서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이미 내면의 절간을 몇 채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내 안의 성찰이고 기도이다. 설산 고행의 석가나 거친 황야에서 방황한 예수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표류하듯 우린 자신만의 고독한 섬 하나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어디에 붙들어 맬 수는 없을까. 때론 시인처럼 절간을 찾아 법고 소리에 매달아 허공에 띄우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잘 닦은 거울에 영혼을 비추어 성찰하는 행위이다. 집착을 벗어나 五蘊의 무상함을 깨닫자. 정적을 뒤울리는 동심원의 파문 으늑한 절간에 티 없는 소리 공양 귀로 들으면 들리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야 들리는 한 울림의 법고소리 두드리는 자의 마음만큼 울리는 그 울림의 숲에서 온몸 비우며 진리 한 자락 휘감고 싶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2-25
  • 마음의 무게/임내영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마음의 무게   임내영   몸이 아프면 솔직해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욕심이 생겨 악다구니로 버텼는가 싶다가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해 나중에 전부 포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죽지 못해 모든 걸 내려놓기보다는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아플 때 무게가 줄어들겠지 걱정 한 줌 꽃씨처럼 날려 버린다   - 시집 <눈물의 농도>     에드바 뭉크의 ‘칼 요한 거리의 저녁’     -------------------------------- 千尺絲綸直下垂 천척 사륜직 하수 一波纔動萬波隨 일파 재동 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 한어 불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 공재 월명 귀   천 길 물 밑에 낚시 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렁이자 만 물결이 따라 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물고기는 물지 않고 빈 배에 달빛 가득 싣고 돌아오네. -冶父道川 禪師- ------------------------------------------------- 한가한 오후 시간, 낚시터에 앉아 고요를 물고 있는 찌를 바라본다. 잠자리 한 마리 연신 꼬리를 담근다. 꼬리가 담긴 순간 오수에 젖은 수면 위에 자그마한 파문이 인다.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이내 수초 사이로 사라진다.   물결 하나 일렁이니 더 많은 물결이 인다. 살며, 살아가며 칠정과 오욕이 하나 둘 내 맘속을 비집고 들어와 채우지 못한 맘을 더욱 부채질하며 닦달한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결국 지친 나머지 무게감으로 인해 아파오는 영혼과 육체. 내려놓지 못하고 하 많은 욕심을 지키려 악다구니로 버티어 보지만 다가오는 건 마음을 짓누른 견딜 수 없는 압박뿐.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다양한 가치, 이념, 종교, 문화 등과 마주치고, 획일적 체계의 직장에서 오는 피로감, 부모로서의 의무감,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촉수와 감각으로 삶의 무늬를 탁본해야 하는 시인의 고뇌에 찬 시선의 무게들. 누군가의 말처럼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솔직해진다’며 깨닫는 시인. 그 아픔은 다름 아닌 ‘무게(채움)’일 것이고, 솔직함은 ‘덜어냄(비움) 일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인 냥 챙겨서 쌓고, 저장하고, 담아둔 것들. 어찌 한 순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내려놔야 하고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인의 뒤늦은 빠름의 깨달음.   획일적이고 규격과 표준화된 일상적인 삶을 복제하지 말고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가며 살아있는 지도를 그려나가자. 오만과, 이기심, 욕망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우린 그들의 시선이라는 끈에 묶인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봉인된 자의식을 해제하자.   에드바 뭉크의‘칼 요한 거리의 저녁’를 보자. 당시 최신 유행의 옷차림으로 활보한 저들, 길거리를 걷는 저들의 표정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눈동자는 초점이 흐리고 안색은 어둡고 초조함이 묻어있다. 누가 봐도 상류층인 저들, 무언가의 무게감에 억압되어 있는 듯한 모습에서 우린 불안과 초조와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저들과는 다른가, 지금 우리가 위치한 현실을 반추해보자.   유한성인 생명 속에 무한성의 욕망을 추구하며 권력과 명성,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픈 욕심, 갈수록 심해지는 가족과 이웃들 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 등은 분명 마음의 무게로 우릴 짓누른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이 생각난다.‘불안은 욕망의 하녀’라고. 욕망이 낳은 ‘불안’그 불안의 무게가 춧돌 되어 우릴 억누르고 있는 삶.   행복한 삶이란 경제적 풍요와 물질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님을 기억하자. 언제든 마음을 짓누르고 억눌러서 불편하게 하는 무게들을 捨離하자, 그리고 한 발 물러서 나 자신에 沈潛하자.   삶이 가볍고 생생할 수 있는 것은 표상과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상이 얼마나 커다란 무게의 욕망 덩어리였는지. 무게를 무게로 느끼면 가벼워질 수 있지만 무게를 무겁다고 느끼지 못하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느껴야 하고 자각해야 한다. 꽃씨 한 줌 허공에 날리듯이, 빈 배에 달빛 가득 싣고 오듯이.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2-12
  • 엄마의 가을/김옥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엄마의 가을/김옥순   틀니를 두고 놀러 나갔다 종일을 잇몸으로 살고 저녁 식탁에도 잇몸으로 앉는다   공원에 간다고 부채는 한 보따리 챙기고 옷은 반소매 위에 가을옷 모자 밑으로 땀방울이 주르르   염색은 아흔여섯까지 하겠다더니 아직 아흔셋인데 말이 없다 밥을 한 끼니도 안 먹었다고 난처하게 하고, 꼭 챙기던 용돈도 이제는 챙기지 않는다.       시집 <11월의 정류장>.        ---------------------------- ‘엄마의 가을’ 詩題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여성은 생물학적 性이다. 여성과 남성 외에 또 하나의 性을 정의 하고 싶다면 필자는 당연히‘엄마의 性’, 즉 ‘母性’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의된 여자로서의 성이 아닌 모성은 여자의 성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한정시킬 수 없는 ‘엄마의 성’이다. 어쩜 모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래서 ‘엄마’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가엔 물기가 서리며 입시울이 떨린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고 결실의 계절이며 단풍의 계절이다. 그래서 때론 숙연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을은 소멸과 죽음의 계절이다. 약동하는 희망의 봄, 푸르게 성숙시키는 여름, 그리고 가을, 이후의 풀벌레들은 본향인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 그 섭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백의 시에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다(夫天地者 萬物之逆旅)’라고 했듯이 우린 잠깐 동안 이 세상을 빌려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인’이라 하면 구시대적 가치관과 굳어진 사고가 뿌리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硬化된 시간은 노인들에게는 그 자체가 존재다. 노인을 노인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매 순간 누구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시인은 치매에 걸린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 같다. 점점 잃어가는 기억력과 예전 같지 않은 행동의 패턴들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자. 어쩜 시인은 눈앞의‘보임’이 아닌 그 너머의‘감춤’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부채는 구순 할머니 세대에는 더위를 날리는 도구 외에 낯선 사람이나 특히 남자를 만날 때는 얼굴 한 면을 다소곳이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 또한 여성스러움의 품위 유지였고 몸에 밴 행동이었다. 부채 몇 개를 챙기는 것에 무게를 두지 말자. 그 시대, 무의식 속에 잠재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여름에 반소매의 옷을 입어도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인데 그 위에 여름옷도 아닌 가을 옷을 입으셨다니. 필자의 어머님이 살아계셨다면 올해 92세가 된다. 이 시대의 여인들은‘감춤’이라는 생래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땡볕 더위에 옷가지 하나 더 준비해 덧입는 것은 무더위에 앞서 살갗 하나 보여서는 안 되는 시대적 배경에서 드러난 철저한 자기관리의 다름 아니다. 비록 구순의 나이에 풀어헤쳐 헝클어진 은빛을 이고 바늘귀가 헛보일지라도 어찌 확 벗어던져 노출 시킨 서양 것들과 비교하겠는가. 욕망과 욕정을 단속하고 감싸는 견인주의(堅忍主義)적 저 여인네의 은근미 앞에, 남몰래 흐른 눈물 깨물어 옷고름에 적시는 엄마 앞에, 소리 내어 웃지 못한 웃음은 슬몃 뒤돌아서 손등에 떨어뜨린 우리들 엄마 앞에.   틀리를 두고 나가고, 염색할 것을 잊고, 용돈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들을 목격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혼란을 겪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고 있는 시인. 그러기 이전에 그 시절 삶의 방식을 되새겨 보면 보이지 않고,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이 보이고 다가온다. 생물학적이고 경제적인 생계형의 삶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삶의 현상학적 통찰을 통해‘보임’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성의 삶,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고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새 생명의 잉태로 인한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고 걸어가는 엄마의 저 숭고한 극치. 콧물감기엔 엄마의 품이 약이고, 영육이 메말라가고 마비되어가는 우리의 혈맥에 청심제가 되어주신 엄마. 우리에게‘엄마’는 새벽녘 햇귀이고 어둑새벽을 깨우는 한 울림의 종소리다.   베토벤은“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했다. 5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고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버림받아 외로웠던 베토벤. 얼마나 어머니와 고향이 그리웠을까. 그의 작품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Beethoven, Piano Sonata No.21, Op.53 'Waldstein')을 들어보자. 3악장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1-30
  • 마당을 쓸며/박미현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마당을 쓸며  박미현     촛불이 타고 있는 새벽 산사 빈 마당에 빗질을 한다   젊은 스님이 다가와 무얼 쓸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쓸고 있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멋쩍게 대답을 한다   빗질을 할 때마다 잔돌이거나 박힌 잎이거나 흙먼지거나가 벌떡, 벌떡 일어선다   백팔번뇌가 십팔번뇌로 떠오르던 법당!   빗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죽비를 맞은 것 같다     시집 <일상에 대한 모독>   ---------------------------------   부처가 성불하고 맨 처음 가르친 것이 바로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겹의 길이다. ‘苦集滅道’와‘八正道’이다.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란 우리의 삶은 괴롭고. 그 괴로움은 집착에서 오고, 그 집착을 끊어야 할 길, 그게 바로 팔정도이다.   어쩜 시인은 속애(俗埃)에 지친 삶의 괴로움과 번뇌의 일상탈출을 하고파 서슴거리다 힐링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산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본래의 마음은 밝고 깨끗함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육신 등의 욕망이란 끈에 매달려 뜨락 잠기락 하는 게 우리들의 삶이기에 더욱 더 그러하리라.   절간의 새벽녘이면 산천 대천의 작은 생명이 頓悟頓修, 아님 頓悟漸修로 깨어나는 때다. 시인은 촛불이 타고 있는 새벽의 산속 절간에서 빗자루를 잡고 마당에 서 있다. 禪방엔 소지(掃地)를 둘 정도로 청소는 절간의 일과이고 입산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다.   절 마당에서 비질하는 사이 새벽 찬 공기에 실려 들려오는 화두 같은 스님의 물음에 시인은‘지금 마당 쓸고 있습니다.’라고 보통은 답을 할 텐데‘쓸고 있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멋쩍어하고 있다. 그 대답 속에 시인은 이미 범부 보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내가 더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고 말했듯이 시인은 마당을 쓸다 말고 ‘쓰는 것’보다는 ‘쓸고 있는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표를 던진다.   먼지나 나뭇잎 등 어지럽혀진 것들을 쓸 때마다 박힌 돌멩이, 잎, 먼지 등이 벌떡, 벌떡 일어선다. 쓸어도 쓸어도 다시 일어서는 그 무엇들, 삼독(三毒)인 탐진치(貪嗔癡)의 다름 아니다. 탐욕과 지나친 욕구, 증오와 노여움 등에 의해서 사리 분별에 어둡고 어리석음 등에 의해 삼독이 쌓여 헛된 망상과 번뇌에 마음이 물든 것이다.   마음의 먼지와 때를 지혜의 비로 쓸어 없애듯이 그 물든 마음을 쓸고 닦는 행위 자체가 수행의 한 방편이다. 그래서 마당을 비질하는 행위를 보면 스님은 마음 수행과 공부의 깊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쓸고 나니 법당엔 백팔 번뇌가 십팔 번뇌로 떠오른다고 한다. 六根과 六塵에 관한 불교식 셈법을 하지 않더라도 시인은 이미 많은 번뇌의 사라짐을 경험하고 있다. 청소라는 수행을 통해서. 그러나 아직도 미망에 사로잡혀서인지 비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죽비를 맞고 있단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온전히 비울 수 없어 오욕과 칠정에 지르숙해서 실오라기라 하나라도 걸쳐 있다면 죽비를 맞을 수밖에. 아니, 시인 내면의 의식 속엔 죄임성의 죽비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승대덕의 悟道頌을 입시울로 읊조리면서.   그리고 움켜쥔 화두 하나,‘얼마나 더 많은 죽비를 맞아야 결 고운 비질을 할 수 있고, 새벽 달빛을 쓸 때 온전한 자취를 없앨 수 있을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9-01-13
  • 구멍/구정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구멍 구정혜     썰물이 나간 사이 갯벌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작은 게 한 마리 찰진 흙 온몸에 뒤집어쓰고 구멍을 파고 있다   산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일 구멍만큼이나 자기 세상이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완벽을 노력했지만 내 마음 뒤집어 보면 곳곳에 구멍 투성이다.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오고 햇볕도 파고들고 친구도 왔다 간다   더러는 달도 제 짝 인 듯 넌지시 맞춰 보는      필자는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다만, 북적거리는 여름 해변보다는 한적해서 홀로 걸으며 썰물 때 드러난 갯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날아든 조류들, ‘드러냄과 들어옴’의 드나듦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시인은 썰물의 갯벌에서 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작은 집게발로 펄을 파고 구멍을 내어 드나들고 있다.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다. 얼마 후 밀려올 밀물, 그 밀물은 또 다시 빈 갯벌을 채울 것이고 영양을 공급할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 동해의 바닷가가 아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 갯벌을 찾았을 것이다. 게의 구멍은 그냥 텅 빈 구멍이 아니고 살아가는 공간임을 알아차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의 구멍 또한 그 크기만큼이 자기의 세상이고 누구든 들어 올 수 있는 열린 공간임을 게의 활발한 움직임과 구멍을 파는 현상을 관찰하며 느끼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서재의 책장을 바꿀 때가 있다. 창문을 가린 겨울의 책장을 다른 쪽으로 옮기면 따사로운 햇살이 창 유리문을 통해 방의 빈 공간으로 들어온다. 장자가 말한 ‘虛室生白’이다. 텅 비운 방, 방 한편에서 뿜어 나오는 햇살이라니 얼마나 따사로운가. 이 엄동설한에. 그렇다. 방을 비우니 햇빛이 들어오듯 돌담이 태풍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나는 네가 되고 넌 내가 되며, 서로가 서로를 베고 눕고, 낮추고 얹히며 틈새의 구멍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빈 틈 없는 형태나 색상으로 가득한 회화는 답답하고 부담스럽다. 책잡히지 않고 완벽해지려고 했던 시인, 이제는 너그럽고, 생각과 감상자의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그려 넣고 그림과 대화 할 수 있는 여백의 동양화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며 구멍을 발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멍 아니, 여백의 공간을 의식하고 있다. 친구도, 친척도 비바람도 드나들며 놀다 갈 수 있는 공간이란 멍석, 그것을 펼쳐 놓은 것이다. 펼쳐 놓은 멍석인데 어찌 놀다 가지 않겠는가.   막힘은 질식을 유발하지만 열림은 타인에겐 환희이고 충만함이다. 이렇게 끝없이 열린 상태의 受納적 태도에서 구멍은 뚫리고 공간이 열린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시금 밀물이 채우고 밀물은 썰물을 위해 빠져나가며 갯벌의 공간을 확보해준다. 이렇게 상반된 존재들의 존재 방식을 염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해지는 것이一動一靜(일동일정) 서로 그 뿌리가 되면서 互爲其根(호위기근)’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逆의 合一’이다. 상극의 상생이고 다름과 다른 사물들의 상호작용이며 순환하는 역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은 지금까지‘완벽’과 ‘책잡히지 않음’과 같은 빈 틈 없고 허튼 공간하나 없이 전인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우연히 떠난 여행길에서 아님, 시인의 예리한 촉으로 구멍을 파는 게를 보며 자신을 살피면서 ‘완벽’의 대극이라 할 수 있는 ‘부족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바닷물의 드나듦은 달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시인은 1연의 썰물과 마지막 연의 달을 마음속에 병치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구멍과 틈새와 공간을 내어 채움의 발걸음을 기다린다. 다른 듯 다르지 않은 ‘逆의 合一’로 설명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네가 반 웃고 내가 반 웃고’는 언젠가 어느 현수막에서 보았던 글이다. 그렇다면‘네가 반 비우고 내가 반 비우고’나면 너와 나의 삶이 채워지지 않을까. 구멍과 확장성의 공간이 필요한 삶, 완벽함은 부족함의 또 다른 이름이고 부족함은 완벽함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8-12-31
  • 쉰이 넘어서야 강을 보았습니다/금미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쉰이 넘어서야 강을 보았습니다 금미자        대책 없이 밀려 밀려온 여기 세상이 잠시 숨을 죽입니다 세찬 바람이 가슴을 휘몰아 간 오후 지금은 맑고 조용합니다   노송 한 그루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장작을 패고 따뜻하게 쌓는 일 구수한 밥 냄새에 뭉근한 기다림을 배웁니다 황망히 떠나버린 시간속의 사람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정표를 잃은 내가 서있고 또 다시 바람이 일렁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도 성근 볕이 들고 분주했던 시간들이 차례차례 줄을 섭니다 쉰 고개 넘어, 이제야 나는 강을 보았습니다 넉넉함으로 나를 푸근히 안고 느릿느릿 바다로 함께 갈 강을 만났습니다.       시집 <정적의 끝에는 흔들림이 있다>    여행이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곳으로 떠남이다. 삶의 여정 또한 이렇다고 할 때 태어난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마주침 속에 살며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 탄생과 죽음을 겪게 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고 자동기술 되듯 살아온 어느 날 갑자기 닫힌 마음에 문을 여는 그 무엇을 만나게 된다. 연륜이라는 생각의 노크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고 했다. 이렇듯 삶 속에서 늘 부딪침과 만남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한결같음을 지향하나 동일하지 않은 차이를 느끼고,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엷은 막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린 존재의 고독을 느낀다.   그 장벽에 막혀 이정표를 잃고 서 있는 시인은 적나라한 통찰 속에 허무와 고독을 곧바로 인지하고 있다. 거칠고 세찬 바람의 세월을 보내고 난 뒤, 삶의 오후가 고요에 잠기는 때. 산 자와 산 자 사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이에 서서 시인은 지난 과거를 해체하고 한 그루의 노송이 되어 장작불에 가마솥 이밥이 뜸 들일 때까지 기다림을 배우고 있다. 어찌하랴! 관계의 미학이라는 익숙함에 젖은 시인은 곁을 떠나고 또는 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버린 이별과 마주치게 된다. 영원할 것 같은 ‘너와 나’ 그 사이에 놓인 보일락말락 한 섬에 또다시 일렁이는 바람. 그러나 곧바로 추스르는 마음 한편엔 성근 볕이 비추고 지내온 시간도 차분히 줄지어 서 있다.   1寸인 부모와 자식, 2寸간의 형제 사이에도 ‘寸’이라는 좁은 틈새가 자리하고 하물며 無寸인 부부 사이, 그리고 연인, 친구 사이에서도 어떤 막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어쩜 공기와 천사 사이에도 엷디엷은 막이 존재하지 않을까. 타자가 나일 수 없고 내가 타자일 수 없는, 우린 그 막을 잊고 하나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슬픔의 근원인 엷은 막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마르셀 뒤샹의 표현을 빌리자면 ‘앵프라맹스(inframince)’다.   쉰이라는 세월 앞에 겸허히 옷깃을 여미고 고개 숙이며 자기를 낮춘 시인의 모습을 본다. 知天命이라는 경전은 익숙함에 젖어 잠든 시인의 눈을 부릅뜨게 하는 자명종이다. 이때 눈에 비쳐 만난 강물은 예전의 강물이 아니고 강물 너머의 강물이다. 사유의 시선은 지나온 경험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듯 쉰이라는 체험을 통해 시인은 비본질적이 아닌 본질을 만났다.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사이’, ‘틈새’를 쉰 살 경험의 축적으로 포착한 시인 특유의 감각과 내면 의식 속에 주체적 개인을 만난 것이다.   앵프라맹스(薄膜)를 만난 시인. 그 얇은 꺼풀의 강을 건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넉넉함과 푸근함을 안겨준 天命을 알게 하는 나이 듦일까 아님, 타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 또는 신뢰일까. 혹은 종교의 궁극적 실제에 대한 비손이었을까. 어떠한 것이든 모든 것을 용해하는 바다를 가기 위해 시인은 강물을 보았고, 만났다. 그 강물에 흐르고 있는‘實存의 나’를 건져 올리기 위해.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8-12-20
  • 허난설헌/이가은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허난설헌 이가은       깊은 밤 규원가에 문풍지 우는 소리 일찍이 능한 시문詩文 치마 두른 원죄 앞에 부용꽃 서늘한 이마 돌아서서 지우고   난蘭 곁에 다소곳한 버들가지 하얀 송이 가을 날 우뚝 솟은 연꽃 같은 노래마저 진흙 벌 캄캄한 속을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골안개 자오록이 온몸으로 젖는 날은 뼈끝으로 새긴 곡자* 삼구홍타* 예감하고 불살라 거두었던 시혼 먼 땅에서 빛나고…   *곡자(哭子) : ‘두 자녀의 죽음에 울며’라는 시 *삼구홍타(三九紅墮) : 난설헌이 지은 「夢遊鑛桑山詩」에서 스물일곱 송이 꽃이 붉게 떨어지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본인이 죽을 것을 암시한 시.  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 특히 현대 시조는 고유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서 그 안에 현대적 주제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정형시라는 틀을 벗어나 형식의 확장을 부분적으로 추구하는 작품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정형시의 미학은 언어의 절제와 긴장을 통해 현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학교 때 배웠던 수많은 시편 중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등,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율독(律讀)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을 경험하면서 기억의 촉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至精無文이라고 했던가. 지극히 가까운 정분이나 지극히 절박한 감정에서는 글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더욱이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 앞에서 차마 어찌 글을 짓겠는가. 그래서일까 시인은 동병상련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西河之痛의 아픔을 토해낸다. 그가 바로 허난설헌이다.   첫 수에서는 규방가사의 ‘규원가閨怨歌’를 통해 미녀의 또 다른 이름인 부용꽃과 그의 타고난 시적 재능 그리고 난설헌의‘ 三恨‘(왜 조선 땅에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에 표출된 남존여비의 인습과 규범에 묶여 컴컴한 봉건주의의 시대적 배경에서 재능을 뿌리내릴 수 없는 여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수에서 시인은 許蘭雪軒 호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그녀의 호‘蘭雪軒’은 여성의 미덕을 칭송하는‘난혜지질蘭蕙之質’에서‘蘭’을 가져왔고‘雪’은 버들가지 하얀 송이(서설絮雪)를 눈에 비유하는데, 이는 지혜롭고 고결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여성 즉, 허난설헌을 의미하며 시인 자신과의 동일성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   마지막 수에서‘삼구홍타’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늘어져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차가운 달빛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위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三九’는 허난설헌 자신이‘3×9=27’로써 죽음을 미리 예상하는 것이고,‘紅墮’는‘붉게 떨어지다’는 의미로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상징하는 시어로써, 27세에 죽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시참(詩讖)과 함께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너희 오누이 넋이야 응당 알지니,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어울려 놀겠지.   두 자녀를 잃고 쓴 위의 시‘哭子’라는 난설헌의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斷腸之哀를 읊조리고 있다. 그리고 부모는 잃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게 아니라 뼈에 새긴다고 한다. 마지막 행의‘먼 땅에서 빛나고…’는 조선에서 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알려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말줄임표로 아퀴 지으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수로 된 연시조, 각 수의 종장을 행갈이로 갈무리 한 것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짐작컨대 시인은 어느 날 ‘哭子’라는 한시를 읽다 차마 다 읽지 못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을 것이다. 애써 목석연하듯 하지만 잠시 후엔 뼈에 새겨 놓은 자식을 떠 올리며 목소리의 통곡을 접고 성엣장의 시린 가슴을 삼키며 붓으로 토해냈을 것이다. 시조 가락에 역사적 인물을 끌어와 내실을 다진 시인의 아름다운 시조 미학에 시선이 머문다. 정지용의 시‘유리창’이 떠오른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그녀의 글,‘閒見古人書(한가 할 때는 옛 사람을 글을 보라)’를 가슴에 탁본하며 허난설헌(1563년-1589)과 같은 해 태어난 존 다울랜드(John Dowland,1563-1626)의 ‘라크리메Lachrimae(류트와 비올을 위한 일곱 개의 눈물)’를 들으며 펜을 접는다.   글/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8-12-07
  • 기울기/안금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기울기 안금자   기운다는 건 팽팽함을 내려놓는다는 것 꼿꼿하던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본다는 것   뜨거운 가슴을 서서히 식히며 서쪽으로 기우는 해처럼 지나간 시간 쪽으로 한껏 기울어   비로소 너를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이렇듯 계절의 변화란 지구의 23.5도 기운 삐딱함 때문이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적 사고를 벗어난 코페르니쿠스, 그의 발상의 전환에 의해 지동설이 나왔고 이는 시야를 달리한 결과물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makes strange)’란 ‘거꾸로 보기’,‘삐딱하게 보기’라고 했다. 결국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을 낯설게 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지금 우물 밖을 보려면 우물이라는 틀의 시각을 벗어나야 볼 수 있듯이(井座之蛙) 인습적인 사고와 가치체계, 고착되고 편협한 시야의 각도를 확 벗어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자기중심의 自我主義의적 관점을 접어두고 無我主義적인 더 넓은 시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뜨거움을 식히며 사계절을 토해내는 지구 기울기를 보며. 그렇다, 어린애들이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고개를 밑으로 숙여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시인은 수평적(팽팽함)이고 수직적(꼿꼿함)인 시각을 내려놓고 고개 숙여 바닥을 들여다보며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 시인이란 시선의 탈바꿈으로 낯선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동다송의 초의 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읊은 시에서‘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眼花枝?却了/好山仍在夕陽天)’라고 했다. 기울어짐과 삐딱함, 낯설게 보기의 시각은 결국 넓은 시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평소 바라보는 시야의 한계를 벗어나 상하좌우의 각을 넓히면서 놓친 알짬의 관점을 걸터듬질하며 온전한 그리움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서정주가 <화사(花蛇)>에서 징그러운 뱀을‘꽃대님보다 아름답다’고 했듯이. 팽팽함을 느슨하게, 꼿꼿함을 구부림의 시선으로 환기해 보자. 詩仙 두보는 술잔에서 달을 건져 올리고, 酩酊 40년의 수주도, 三酷好 이규보도 취한 도수만큼 멋진 시를 쓰지 않았던가. 보들레르는 “한 편의 시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 자체가 그 무엇인가다.”고 했다. 현실과 시의 세계에 시인은 살고 있다. 시인이 쓴 시는 시인을 떠나 독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시인은 현실에 남는다. 창작된 시는 현실 세계로 들어가 스스로 ’공명‘, 아님 ’수축‘ 될 것이다. 열린 시각엔 다른 풍경이 보이지만 닫힌 시각엔 보인 풍경만이 보인다. 다르게 보인 풍경은 독자의 심연에‘공명’의 맥놀이 현상으로 다가오리라. 난, 몇 도의 각도로 기울고 있으며 몇 도의 알코올로 취하고 있는 것일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8-11-27
  • 물끄러미/박수호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물끄러미                     박수호   이 가을 물가에 늦은 수련 한 송이 그 옆 빈 배 누굴 기다리고 있을까.   晩秋의 계절, 滿山紅葉에 두리번거리는 낭만객의 시선이 아닌 제목이 말해주듯 얼혼이 흔들리는 현실을 초탈한 시선으로 오감의 솜털을 세워 시인은 물끄러미 강가를 바라보고 있다. 강가에는 7~8월에 피어 이미 시들었을, 그렇지만 무슨 연유로 수련 한 송이는 가을 찬 이슬 감겨든 자세로 피어있을까. 꽃말처럼 ‘당신의 사랑은 알 수 없습니다.’의 뜻을 새기고 있는 것일까. 늦가을 차가운 서리에 꽃잎을 여는 수련 한 송이에서 가슴에 고요의 울림으로 다가선 물음표를 매단 시인의 視. 다소 禪적이고 하이쿠 같은 시다. 소멸의 계절, 늦가을의 스산함과 누굴 위해서가 아닌 무념무상의 자태로 강가에 홀로 핀 수련, 또한 그 곁에는 詩眼이라 할 수 있는 한 척의 빈 배(虛舟)라니, 절묘한 분위기와 언어의 배열 속에 독자의 상상력을 소환하면서 시인은 결국 하고픈 말을 한다. 빈 배는‘누굴 기다리고 있을까’ 시인은 허난설헌이 ‘採蓮曲’에서 읊조렸듯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고(花 深 處 繫 蘭 舟)‘ 연인을 기다리는 풍경으로 보았을까. 아님, 누굴 기다리고 있는 빈 배가 아닌 이미 강을 건너고 난 뒤 과감히 버린 배를 가리키는 패러독스가 아닐까.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라는 부처의 말처럼 참나로 거듭나기 위해 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하는 진리 앞에서 빈 배에 시선이 얹혔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욕망이 욕망을 낳은 속세의 질병들을 망각하고파 레테의 강을 이미 건너가지는 않았을까. 시를 읽는 독자는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한 송이의 꽃 앞에서, 마음속에 매어둔 빈 배에 스며든 시혼 앞에 언제든 떨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독자는 행복하다   글/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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