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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발간과 출판기념회 소식 - '내 마음의 실루엣'을 출간한 김명숙 시인의 녹슬지 않는 꿈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에는 많은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15일 시집 "내 마음의 실루엣" 출판기념회를 겸한 문학강연을 연 김명숙 시인의 녹슬지 않는 꿈을 소개합니다. 김명숙 시인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제1회 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2008년 국립국악원 생활음악 「화전놀이」가 공모 당선되었고, 2011년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천재교육)에 「새싹」이 등재되었다. 가곡, 동요 작사가이기도 하며 작품으론 가곡 「달에 잠들다」 외 45곡, 동요 「새싹」 외 80곡이 있다.시집으론『그 여자의 바다』와『내 마음의 실루엣』이 있다. 김명숙 시인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제1회(사)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 수상(동시 등단)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 "새싹" 저자 ▲작시: 가곡 ‘달에 잠들다’ 외 47곡/ 동요 ‘새싹“ 외 80곡과 제54회, 57회 4.19혁명 기념식 행사곡 "그 날", 제60회 현충일 추념식 추모곡 "영웅의 노래" ▲수상:부천예술상, 한국동요음악대상, 도전한국인대상(문학부분), 문예마을 문학상, 시흥문학상 우수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방송대문학상 수상 외 다수 ▲부천문인협회,(사)한국아동문학회, 고흥작가회 등 다수의 회에서 활동. ▲현)부천시노인복지관 작문강사, 방과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명숙 시인 시집 발간과 출판기념회 소식 2023년 10월 15일 오후 3시~5시김명숙 시인의「내 마음의 실루엣」출판기념회 및 문학 강연이 경기도 부천 교보문고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내빈으로 참여한 박노진 교보문고 지점장, 국민 가곡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얼굴” 작곡가인 신귀복 작곡가, 최숙미 부천문인협회 회장, 조영훈 부천시 원미노인복지관 관장이 덕담과 축하의 말을 전했다. 북 사인회 출판기념회 1부는 문학 강연 및 북 사인회, 2부는 김명숙 시인의 시로 진행하는 시낭송과 시극, 시인이 작사한 가곡, 동요 공연이 있었다. 작가의 말을 겸한 문학강연 <꿈은 녹슬지 않는다.>에서 “어릴 적 꿈이 하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노래하는 가수(성악가), 그리고 잘했던 것은 글쓰기였고 노래 부르기였다.” 고 밝혔다. 역경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노래를 좋아해 성악가가 되고자 했던 꿈은 작사가가 되어 가곡 47곡, 동요 81곡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래를 성악가처럼 주업으로 무대에서 부르진 않아도 작사를 하여 음반에 수록되고 제 이름이 기재된 여러 곡이 방송과 무대에서 불러지고 있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 또한 복지관, 학교 등에서 강사를 하고 있어 흡족 친 않지만 가르친다는 점에서 나름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시 '고래의 꿈'은 수능 학습 저작물과 강남 인강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두 권의 시집을 펴내 오늘 여러분 앞에서 출판기념회 및 문학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제 꿈은 녹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신귀복 작곡가 꿈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 기회가 나를 찾아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며,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꿈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보시기 바란다는 인사 후 북 사인회가 열렸다. 2부 공연엔 시낭송가 민준기, 신영기, 문회숙, 이호봉이 출연해 김명숙 시인의 시(詩) <아리랑>,<밤의 눈>,<가지를 익히며>,<혼자가 아닌 여럿은>을 낭송하였고, 복사골 시낭송 예술단 이현주· 김성숙· 이희· 정나래 시낭송가들이 김명숙 시인의 시 <억새>, <어미>, <엄마바지>, <목욕재계>, <누름돌>을 각각 낭송하고 <고흥 유자차를 마시며>를 시극으로 꾸며 시 퍼포먼스를 선물했다. 신귀복 작곡가의 곡으로 김명숙 시인이 작사한 가곡 “산길에서, 그대 그리워, 어느 날 오후”와 동요 3곡이 있는데 출판기념회에선 “그대 그리워”와 “어느 날 오후”가 각각 연주되었고 소프라노 유미자 성악가의 <그대 그리워>와 <달에 잠들다(이재석 작곡)>, 베이스 이용찬 성악가의 <어느 날 오후>와 <비와 나그네(조원경 작곡)> 열창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단체사진 김명숙 시인이 작시한 동요 4곡이 연주되었다. 김종명 작곡가가 작곡한 <새싹>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린 곡으로 부천상일초 3학년 최영연 학생이, 전준선 작곡의 <빗방울 여행>은 부천상일초 3학년 이지민 학생이, 오세균 작곡의 <통통볼>은 인천청호초 2학년 정다원 학생이, 김춘남 작곡의 <허수아비와 고추 잠자리>는 이지민· 최영연· 정다원 학생의 중창으로 합창해 관객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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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처음 내게, 보령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마주한 보령 바다는 한 자락의 푸른 옷깃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섬 한 채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수평선은 한 줄의 단호한 문장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읽어 낼 수 없는 바다의 안부 말수 적은 아버지 같았다 어둑한 저녁의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구석진 마당가에 빈 지게로 우두커니 서서 발 디딜 곳 없는 어둠을 부려 놓곤 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수평선은 고단한 생의 시작과 끝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을 알아챈 건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삶도 저토록 붉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었을까. 다시 잿빛으로 타다 남은 검붉은 밑불로 남아 세상의 바닥을 단 한 번만이라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을까 아버지의 핏빛 노을은 하늘로 번지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 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해후의 마중물 같은 검붉은 노을의 심장은 뜨거웠다 온몸을 휘감고 도는 바람의 잔등은 차가웠다 거칠고도 짠 아버지의 비릿한 냄새는 노을과 함께 그렇게 바닷속으로 잠잠히 젖어 들어 갔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한순간 뜨겁게 불살랐으나 어느 순간 차갑게 스러져 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 시인은 쌀 한 톨에서 나뭇잎 하나, 바람 한 줄기에서 시를 따고 집어 들 듯, 시적 화자는 말 없던 보령 바다가“잔잔한 파도가 섬 한 채를 들었다 조였다가”라고 한다. 그러한 바다에 귀를 기울이다가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에서 찬란하고 붉게 타오르는 아버지의 삶을 떠올린다. 이 순간 시인의 머릿속의 잠든 초인종을 눌렀던 것은 바로 ‘노을’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마지막 연 첫 행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화자는 노을이라는 심상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로 이미지화한다. 그 한 권의 노을이라는 책 속에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억, 그리움, 기억 등이 페이지마다 구구절절이 노을빛의 붉은 해서체로 때로는 초서체로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 보령 바다의 노을, 그 노을을 차마 어찌 한 잔 마시고 싶지 않았겠는가? ‘노을’이라는 실존적 현상에서 아버지에 대한 정체성과 내면성을 들어내면서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시상을 펼치고 있다. 표층적 심상인 보령의 앞바다에서 심층적 이미지인 노을을 형상화해 아버지를 그리는 것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보령 앞바다보다 더 넓고 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관통하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있을 수 없다. 노을빛 한 줌 한 알을 가슴으로 느끼며 푸른 옷깃의 바다와 노을빛 바다의 대칭적 표현으로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시인의 시혼에 두 손을 잡는다. 그 어떤 문학, 예술작품에서 커다란 울림을 만난다는 것은 속 깊은 가슴 인연이다. 감동을 주는 작품도 때론, 스쳐 지나간 바람에 묻힌 향기처럼 날아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긴 여운으로 영혼에 스미고 마음의 살갗에 무늬로 박히는 작품이 있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의 시가 그러하다. 그렇다. 햇귀를 맞이하며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수평선과 벌겋게 물들며 해를 집어넣는 수평선은 시작과 끝의 연속이다. 이러한 수평선에 반해 우리 아버지들의 삶은 시작의 끝에도 끝의 끝에도 오직 자식만 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들에게 모든 걸 다 내주고 나면, 아버지는 저토록 서녘의 형형한 노을빛처럼 빛나는 것일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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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김석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삶이란/김석심 앞만 보며 달려왔던 인생이었지 건강과 얽힌 실타래 푸는 동안 서산에 노을은 짙어만 갔네 어느덧 남편은 한줄기 구름과 바람으로 왔다가 떠나가고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 찾았으니 허전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출발점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기고 종점이 가까워질 때 유일한 내 친구는 문학의 길이라네! 알량하게 쓰는 글이지만 글 한 편이 나의 애인이고 자식이고 친구일세! 유통기한이 없는 글을 쓰고 언제까지 정신력 잃지 않은 삶으로 뜨락에서 피어나는 수채화 같았으면. 시·수필집 『인생의 숲을 통해서』, 해드림출판사, 2021 ---------------------------------------------------------- 최근엔 노년의 삶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에이지즘(ageism)’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즉 노인들을 경원시하고 고립시키면서 차별화하는 의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건강한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것 못지않게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삶이란> 이라는 시제에서 이미 삶의 연륜이 두터움을 느낄 수 있다. 1연에서의 “앞만 보며 달려왔던 인생이었지//건강과 얽힌 실타래를 푸는 동안”에서 그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오직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서산에 노을은 짙어만 갔네”라고 한다. 이제야 뒤돌아보니 서녘에 지는 붉은 노을이 보인 것이다. 그 사이 평생지기인 남편은 “바람으로 왔다가 떠나가고”에서 보듯 남편은 이미 이승을 떠나 훗승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나면 헤어지고, 떠나면 반드시 만난다고 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다 화자는 삶의 뒤안길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 3연의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을 찾았으니” , 자식들은 장성해서 이미 부모 곁을 떠나고 없다, 뒤돌아보니 마음이 허전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노년의 삶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고고의 울음을 터뜨렸던 인생의 시작점은 점점 멀어져가고 끝점이 서서히 다가옴을 알 수 있다(“출발점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기고//종점은 가까워질 때”) 예로부터 ‘품 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자식과 떨어진 노년의 삶이 결코, 외로워서는 안 되고 또한, 외롭지도 않다. 시인 존던은 “누구도 외딴섬일 수는 없다 No one is an island”라고 했다. 노년의 삶은 세월로 층층이 쌓아 올린 하나의 높은 탑이다. 그 탑에 켜켜이 쌓인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깊고 높은 역량으로 외딴섬도 아니고 무인도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섬이 되기 위해 화자는 “유일한 내 친구는 문학의 길이라네!” 하면서 느낌표까지 달아놓았다. 이렇듯 ‘문학’을 의인화해서 서녘을 물들이는 노을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애인’,‘자식’, ‘친구’로 삼아 白髮의 길을 걸어간다니 얼마나 멋진 황혼 녘 삶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그러면서 “유통기한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당연히 문학은 무통기한이다. “언제까지 정신력을 잃지 않은”에서 보듯 나이 듦에서 오는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하면서 그래도 “삶의 뜨락에서 피어나는//수채와 같았으면” 하면서 <삶이란>의 시를 아퀴짓고 있다. 분명 화자가 희망하는 삶의 뜨락에는 수채화가 유통기한 없이 꾸준히 피어날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이 듦에서 오는 여러 상황을 이미지화해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노인들을 경제적 시선의 잣대로 한계치를 바라보는 외눈박이 시선은 던져버려야 한다. 그들 삶의 세월은 수없이 많은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에 섰고, 겪었던 노하우가 있다. 또한, 체험적 요소에서 우러나는 축적된 층층 탑 같은 살아있는 풍부한 연륜 등, 그것은 소중한 자산이다. 쓸데없이 낭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노인 자신도 변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고정불변의 사고방식과 변치 않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장자에서 보듯 스스로 자신의 상喪을 치뤄야 한다(吾喪我) 이분법적인 의식을 버리려면 스스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의식의 변화 없는 배타적 고정관념은 절대로 변화 없는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옹고집을 버려야 한다. 아래의 시 한 수로 글을 맺고자 한다. 生也一片 浮雲起(생야일편 부운기) 死也一片 浮雲滅(사야일편 부운멸) 浮雲自體 本無實(부운자체 본무실) 生死去來 亦如然(생사거래 역여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다.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무상함이니 삶과 죽음의 오고 감이 역시 이와 같도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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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낯선 이국땅 이방인 길 찾듯이 심쿵하며 더듬는 볼살 위 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시끄러워 가만히 들어보니 청춘을 돌려 달라 아우성치는 듯하다 열여덟에 피어난 여드름 자국 위에 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 만추의 울타리에 착각한 덩굴장미 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 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 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 인생이란 덧없이 흘러가는 강줄기 위 삶이란 배를 띄워 노 저으며 73세 황혼 녘 남모르게 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 시집 『73세의 여드름』, 도서출판 글벗, 2022. 시집을 구입할 때 특히 제목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시집 내용을 보거나 미리 준비한 시집을 사지만, 제목이 눈에 띄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요즘은 출판되자마자 대부분의 책들이 사장된다. 온 정성 쏟아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인데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집의 제목은 시집의 맛을 느끼게 하는 키워드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심이 깊숙이 배어 있다. 왜냐면, 요즘처럼 독서 하지 않는 현실 속에 독특하고 눈에 띄는 인상적인 제목이어야만 독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집의 내용이나 제목에 함축된 특별한 그 무엇(something special)에 관심을 둔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은 시집 제목의『73세의 여드름』의 표제시다. ‘여드름’은 청춘의 심볼이다. 그 청춘의 상징인 ‘여드름’을 의인화했다. 그래서 1연의“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2연의 “청춘을 돌려 달라//아우성치는 듯하다”처럼 73세, 늘그막의 얼굴에서 여드름이 떼창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여드름을 의인화시킨 다음 거기에 청각적 이미지로‘여드름’을 형상화했다. “열여덟에 피어난//여드름 자국 위에//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라고 한다. 어쩜 화자는 얼굴의 여드름이 생긴 것을 보고‘회춘(回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비록 고희(古稀)의 나이지만, 신체적인 연륜을 떠나 젊음의 표상인 여드름에서 그 옛날의 젊음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이팔청춘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때론, 나이가 들면 특별할 것 없는 것에서도 애착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 무상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믿을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만추의 울타리에//착각한 덩굴장미//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이렇듯 늦가을 울타리에서 피었다가 때가 되어 사라지는 덩굴장미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라고 한다. 이렇듯 시인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고정관념과 자동화된 시선은 버려야 한다. 타성에 젖은 익숙한 질문이 아닌 보다 의미심장한 물음표를 가지고 경생상외(境生象外) 즉, 깊은 뜻이 형상 너머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4연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73세 황혼 녘 남모르게//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라고 한다. 화자와 비슷한 나이라면 어쩜 이 시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 덧없이 지나가는 게 인생살이다. 칠순의 황혼 녘, 술잔에 노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싶은 시간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닌, 아름답게 물들어야 한다. 늘그막의 여드름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층층이 쌓인 세월의 퇴적층에서도 꽃과 나무가 피고 자라듯, 김시습의 시구처럼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처럼 얼굴의 여드름은 젊디젊은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무료한 나날에 잠들지 말고 눈을 불끈 뜨고 참나를 찾으라는 죽비인 것이다. 시인은 밤낮 가림없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왜냐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잘한 씨앗의 시간들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아플 때 우린 그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행과 연(聯)갈이가 다소 변칙적인 시이지만, 칠순의 시 한 수 읊조리며 조조의 아들 조식의 시 한 수 시인에게 올리고 싶다. 인생은 하루를 더 살아도 아쉽고 하루를 덜 살아도 충분하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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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누군가 따라 걷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발끝만을 바라보며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 나를 닮아 있습니다. 양지쪽 흰 눈은 파르라니 몸을 녹이고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 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 나도 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돌아가려니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곳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 내가 멈춰 서 있는 이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고 또 나아갈 곳이라는 것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 가슴 가득 들여 마셨던 맑은 공기는 가슴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이 가장 행복한 세상일 테니까요. ▶시낭사(시를 낭송하는 사람들) 대표 ------------------------------ 시인은 사물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많은 의미를 시어로 응축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보다는 단순하면서 순수한 사고를 해야 한다. 헤겔은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라고 했다. 그렇듯 시제의 <내가 머무는 세상>에서 펼쳐진 내용을 보면 작가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작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연에서의 ‘문득’이라는 시어를 보자. ‘문득’은 의도를 가지고 뒤돌아보는 게 아니라 우연히 뒤를 돌아본다는 의미이다. 도연명 <음주> 5에서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누나)“의 ‘유연히’와 같은 맥락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뒤돌아봄인 것이다. 그 순간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나를 닮아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화자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3연에서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는 하늘이 화자를 삼켜 채색시킨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이 바라본 하늘에 스스로 물들어가는, 즉 “대나무를 그리려면 대나무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 것과 같이 자연과의 합일하는 화자의 순수 자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 돌부리를 만나면 디딤돌로 만들면서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에서 보듯 인생사 오고감에 초탈한.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의 순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다. 이것은 평소 작가의 자연 순응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의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4연의 “그런데도 돌아가려니/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푸르스트의 시 “아직도 잠들기 전에 갈 길이 조금 남아 있다.”는 시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 돌아 가자꾸나/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는 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로”라는 <귀거래사> 또한 함께 생각게 한 시구이다. 이렇듯 시상의 전개가 자연과의 교감 속 인간의 본향인 자연의 자궁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생각하고 느낄 수 없이 내 안에 존재한다. 7연의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에서 보듯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멈춰 있는 곳이 돌아갈 곳이고, 나아갈 곳이고, 그곳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라면서 읊조리고 있다. 그곳이 이니스프리인지 유토피아인지, 무릉도원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러한 곳이기에 그렇다. 모든 사람의 내적 성찰의 밑바닥에는 자신을 응시하면서 뒤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화해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9연의“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와 같이 말입니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서 나온다. 이 시를 보면 함축적이기보다는 조붓한 숲속을 거닐다 만난 깊은 산골의 옹달샘 물맛이요 광천수 물맛이다. 내 안의 나를 너무 밖으로 내보내지 말자. 그래서 내 안에서 껍데기로 존재하게 하지 말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떼어내어 그에게 또 다른 세계의 삶과 알찬 영혼을 주어 하나의 개체적 ‘나’로 키우자. 지금, 이 순간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 그리고 생각하는 이곳, 바로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다. 그렇기에 가장 행복한 세상이다. 여기서 종교적 성찰과 믿음, 철학과 사상의 책받침이 무슨 필요로 하겠는가.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Now and Here, 지금 여기가 바로, 행복이 있는 곳이다. 카르페 디엠. 글/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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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세상이 내 삶을 데려다주고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처럼 짧은데도 벌써 80년 주변에 버팀목은 유명을 달리하고 남은 생 어림짐작하지만 잘 모르고 막연히 망 구의 언덕에 올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동녘에는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지구의 한 지점에 내가 중심점 원을 그리며 우주를 품고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 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 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 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 시집 「한 잔 그리움 추억에 얼룩질 때」. 도서출판 글벗, 2022. 청계천 징검다리 사진-홍영수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만남과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생명체들의 섭리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듯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이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다, 화자는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이라면서 속세의 만남과 이별 속 정한을 읊조리고 있다. 그러면서 “짧은데도 벌써 80년”이란다. 여기서 “벌써”라는 수식어에 주목해 볼 수 있다. ― 시 제목의 “미수(米壽)”는 쌀 “米”字를 파자하면‘八’이 두 개 있어 88세를 가리키는 말인데 화자는 팔순을 미수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듯 세속의 나이 80년이면 일반적으로 거의 1세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긴 세월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벌써”라면서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으로 치환하고 있다. 화자는 80이라는 높은 고갯길에서 걸어왔던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순간 눈송이 하나가 장작불에 떨어지는 순간으로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떠오른 서산대사 휴정의 마지막 법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가 떠오른 이유는 왜일까? 화자는 팔십 고개를 지나 망구(望九) 고개의 언덕으로 향하면서 지나온 추억과 기억들을 떠올린다. 걸음걸음마다 맺힌 인연의 끈과 고리들, 그토록 긴 여정으로 생각했던 한 생의 앞날이 벌써“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삶이란 ‘찰나’적임을 간파고 하고 있다. 그러하니 더욱 아쉬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구나 옆지기마저 이미 훗승길로 가고 없으니“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비록 지구의 중심점에 우주를 품고 있을지라도 자기를 한껏 낮추며 살아가는 자세는 3연의 마지막 행“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잘나고 못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결국엔 한 떨기 이슬처럼 사라져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에서는 어쩜 화자는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 덕목의 실천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굴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것은 베푼다는 의식 없이 맑고 밝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연의 마지막 행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와 같이 화자는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이상세계에 가기 위해 어쩜 “시심”이 고해의 바다인 듯 징검돌 하나하나를 건넌다고 하고 있다. 그 건넘이 바로 고해의 징검돌일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에 시심이라는 징검돌을 놓아가며 고해의 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 나온 것이 아닐까. 화자는 고해의 길목을 그냥 건너는 게 아니라 징검다리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시는 하고픈 말을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함축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고 할 때, 여기서 시인은 실제 경험과 상상적인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호소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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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빈자리/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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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빈자리/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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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이천명
-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눈 먼 사랑/이천명 사랑에 눈이 멀어 눈 먼 사랑을 한다 백일의 해맑은 눈동자 허공을 맴돌다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 첫사랑이었다 웃는 모습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 웃음 소리 귓가에 맴돌지만 함께 해서 더 황홀했던 순간도 세월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슴 아픈 짝사랑이었나 보다 밤을 새워도 한 줄의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 첫사랑은 눈 먼 사랑으로 자라나 세월 담은 기다림만 가득하다 산문집. <섬 그리고 자유>. 산과들. 2013 --------------------------------------------------- 나는 너에게로 가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욕망은 앞서지만 안타까움 속 닿을 수 없는, 어릴 적 목숨도 바칠 것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사랑, 그 순간만은 분명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순수와 진실한 사랑은 딱 한 번, ‘첫사랑’이 아닐까. 그렇기에 화자는 ‘해맑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심장이 쿵’ 하는 ‘첫사랑’이라고 단정 짓는다. 사실 살아가면서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지만,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첫사랑만큼 무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몰의 서해에서 바라보는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괜스레 눈시울이 적셔지고 눈으로 노을 한 점 당겨 와인 잔에 부어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리라. 사라지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머문 상태라면 굳이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 변하기에 아름답고 변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랑, ‘첫사랑’,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도 바로 그러한 성정 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눈 앞을 가리고, 뭔가 낀 눈먼 사랑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미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미리 짐작하기에 화자는 시제를 ‘눈 먼 사랑’이라 했고, “눈먼”의 맞춤법마저 일탈해서‘눈이 멀다’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눈 먼’이라 띄어쓰기를 했다. 인간은 사랑할 때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첫사랑’이라면야. 시인이 되려면 화산의 불구덩이로 빠져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얼마나 웃는 모습이 심쿵했으면 ’활화산 되어 가슴에 피고’라고 할까. 그리고 웃음소리는 활화산에서 쉼 없이 뿜어져 오르는 마그마의 뜨거움이 되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첫사랑’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때도 있지만 중고시절에 이웃집 오빠, 또는 친구의 오빠를 친구 몰래 만나게 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인 첫사랑의 방식이다. 첫사랑! 세간의 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렇기에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그 고통을 넘어서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성 간에서 오는 고통 속 쾌락, 은밀하게 마음을 휘어잡고 관통하며 지속시키는 내적 충만감. 라깡이 말한 “주이상스(jouissance)”다. 그래서 화자는 함께 해서 ‘황홀했던 순간’이 세월 지나 ‘가슴 아픈 짝사랑’ 곧 ‘첫사랑’ 라고 한다. 참혹한 기쁨의 첫사랑. 필자의 중고등 시절은 펜팔이 대단히 유행했다. 말 그대로 오직 펜으로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이기에 초 멋진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밤새워 글을 쓴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유치함을 넘어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때 그 시절의 펜팔이라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문학지망생들에게 초석이 되지는 않았을까. 라디오의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고, - 혹시 편지가 올까 하는 마음에 - 시선은 동구밖에 서성이고. ‘밤을 새워도’, ‘기막힌 문장이 오지 않는 날들’의 화자의 심상을 보면 다분히 공감할 수 있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항상 첫사랑에게 돌아간다”라는 어느 나라 속담이 있다. 시인의 세월을 지팡이가 짚고 가는 지금, ‘세월을 담은’‘기다림만 가득하다’고 한다. ‘첫사랑’,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그 첫사랑의 행복은 이미 깃을 잃고 추락한 행복일 뿐이다. 천하의 백거이도 - 첫사랑이었던,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했던 - “남몰래 이별”하는 사랑을 했다. 潛別離/白居易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울 수 없어요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말할 수 없어요 남몰래 사랑해야 하기에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몰라 깊은 새장 한밤에 갇혀 홀로 깃든 새 봄날 날카로운 칼날에 잘린 연리지 황하 강물 탁하지만 맑아질 날 있고 까마귀 머리 검지만 희어질 날 있으리 오로지 남몰래 이별해야 하기에 우리 만날 기약 없음을 감수해야 하리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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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이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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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잠/ 구미정
-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바깥잠/ 구미정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까맣게 쏟아진 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보다 무거운 버스 요금 앞에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을 본다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신발이 된 사내는 눈 감아야 보이는 세상으로 걷는다. 흔들흔들 기점을 돌아온 원점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바깥잠 사내가 내렸다 비를 몰고 바람이 휘돌아 간다 * 월간 시 31회추천시인상 -------------------------------------- 스스로, 아님, 사회적 제도, 또는 의도치 않게 소속된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인생이 끝났다거나, 낙오되었다고 할 수 없다. 스스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타인에 의했을 경우는 힘들겠지만, 스스로 마음을 접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 “바깥잠 사내가 버스에 올랐다”. 화자는 예고 없이 내리는 비를 “까맣게”쏟아진다며 왠지 어두운 분위기를 예감한다. 그때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과 “양손에 들린 보따리”그 무게가 버스 요금보다 무겁다고 하는 “바깥잠”이 승차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어쩜 IMF 이후부터 우리의 주변, 특히 지하철 역, 공원의 벤치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등에 얹힌 짐”과 “양손에 든 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속에 옷가지와, 딱딱한 바닥에 펴고 자야 할 이불 같지 않은 이불 등이 순서도, 질서도 없이 빼꼭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저들이 살아오면서 일구고 가꿔놓은 삶의 텃밭과 경작지, 그 위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화자는 이미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지갑을 두고 왔다고……”하는 그의 말이 차라리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줄임표(……)”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언어 너머의 뜻(言外之意)을 알아차린 시인은 신호등의 불빛처럼 번뜩이며 반짝이는 시선으로 “바깥잠”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은 머리로 사는 게 아니라 심장의 고동으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비참하게 된 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화자의 시선은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대중교통인 버스를 운행하면서도 “바깥잠”을 살펴보는 화자는 버스 요금을 내지 않고 승차한 ‘무임승차’너머의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출근길 내리는 비의 모습을 “툭!/ 툭”’으로 행갈이 해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느낌을 더해주었고, 또한 “툭”이라는 단어 옆의“!” 은 빗방울을 형상화 시킨 일종의 상형의 그림시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It’s raining」처럼 도형화시켜 “바깥잠”의 메마르고 황폐한 그의 가슴속에, 그리고 영양실조 걸린 고요한 혈맥에 한 줄기 수액으로 내리게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빗줄기의 리듬을 자장가 삼은 그가 잠이 들었다.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자는 쪽잠일지언정 어쩜 그는 “호접몽”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왜냐면, 어린 날의 기억들이 꿈속에서나마 떠올라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나비가 나였는지 내가 나비였는지 비몽사몽간에 기점으로 돌아온 버스에서 “눈 뜨면 보이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욕망으로 가득한 숨을 허공을 향해 내쉬고 있는 세상 속으로. 사회적, 또는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좀 허름하고 허술하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정신까지 허름, 허술하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인간의 정신은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 등이 단순하지 않다. 커다란 저택에 살든 지하 쪽방에 살든, 삶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본질을 떠나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것으로 가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점을 익히 경험했던 것 같고 더 나아가 스스로 내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지혜는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록 가난할지언정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는 누구의 말대로 ‘우아한 가난’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대체수단을 통해서 실천해야 한다. 참으로 어렵고 어렵지만 어찌하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은 되지 않은가? 디오게네스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줄이기 위해 노숙인보다 못한 생활을 자처했다 한다. 그 어딘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의 소유를 거부해버리는 게 그의 삶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바깥잠”은 노숙인의 삶으로만 반드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표층적인 그의 겉모습이 아닌 심층적인 내면에는 또 다른 디오게네스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추구했던 “가지지 않은 것처럼 가져라”라는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 수준 이하의 경제적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인간성마저 말살과 동의어로 부추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람이 비를 데리고 휘돌아 가게 하고 있다”젖지 않고, 춥지 않게. “바깥잠”을 향한 화자의 시선이 따스하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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