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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의 바다/이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생의 바다/이부자   전철 속 마주한 군상들이 졸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눈꺼풀 위에 얹고 찰나 충전의 시간   내리실 손님은 오른쪽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놀란 인생의 주인 황망히 뛰어내린다. 매달린 삶의 무게를 달고   몸부림치듯 세파를 가르며 종일 피라미만큼의 생존의 떡과 노래미 같은 자식을 위한 처절함과 지친 무릎, 힘을 다해 바다로 간다.   생존으로 흘린 눈물처럼 짜디짠 생의 바다로 간다   시집 <생의 바다를 건너다>. 에세이아카데미. 202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우린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중요하다. 더욱이 속도전 시대에는 압박감과 억압감 때문에 자칫 자기만의 리듬감을 잃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한낱 부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독서, 등산, 낚시, 숲길을 거닐거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쉽사리 실행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삶의 향기를 갖지 못하고 어떤 삶의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기는 천천히 걸어야 맡을 수 있고, 내 몸에 향기가 머물 수 있다. 그러나‘생의 바다’에 던져진 거친 삶, 먹고사니즘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바다’에 던져진 우린 삶의 영위를 위해 출근을 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의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삶의 눈꺼풀 위에 얹고” 졸음이 순간적으로 온다. 그 찰나적 시간 속에서 눈을 뜨면 대부분 한두 정거장 전이거나 한두 정거장 더 갈 때도 있다. 이럴 때의 상황을 화자는 “황망히 뛰어내린다.”라고 한다. 늘 그렇듯 친절한 안내 방송은 변함이 없다. 특히 출퇴근 시간, 붐비는 역에서는 어쩌다 신발 한 짝 벗겨지면 그대로 인파에 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듯 어깨에 “매달린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린, 먹고사니즘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광경을 다람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쳇바퀴 돌 듯”이라고 하지 않을까.   주변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위해 “세파를 가르며” , “무릎”에 힘을 다해 삶의 터전인 고해의 바다로 향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다고 보면 벌써 눈앞에 또 다른 고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이다. 정말 ‘삶의 리듬감’과 ‘향기 있는 삶’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속도와 경쟁의 시대,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느낌 있고 향기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리듬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경쟁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좀 더 여유 있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자. 삶의 향기와 삶의 리듬감은 속도감과 욕심이 앞서면 저 멀리 사라진다.   장자는 입신출세를 주장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 자아를 비우고 세상에 노니라고 한다. 허기유세虛己遊世, 얽매이지 말고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이리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라는 책을 썼다.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을 즐기라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좀 의아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방향으로 –주 4일제 – 흘러가는 것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대단히 시스테믹한 사회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던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점에서 좀 특별한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으르고 싶은 권리가 있어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우리에게 스스로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다는 것, “짜디짠/생의 바다로 간다”라며 화자는 시를 끝맺고 있다.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때론 게으르고 느리게 생의 바다를 항해한다면 메말라가는 우리의 허기진 혈맥에 한 줄기 수혈이 될 것이다. 어둠 속 항해는 아직 밝아오지 않는 새벽일 뿐, 비록 고해의 삶일지언정 바다가 품고 있는 욕망은 푸르름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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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21
  •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속은 뜨겁다. 900도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다가, 뜨겁게 한번 살아보자   다시 냉전이다, 차갑게 식은 우리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그림도 그리고 또 다른, 색색의 옷을 입힌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 지난번, 온몸과 마음을 다 준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1250도 뜨겁게 더 뜨겁게, 밖에서는 모른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갈 일이다   뜨겁게 사랑한 결과물이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깨지지 마라 살아만 있어라, 1250도 불구덩이 속으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들어간다.       시집 <상자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 시선사, 2018. 부천 시소리낭송회 회원   국보310호 백자 달항아리   ---------------------------------------   흙을 구워서 만든 넓은 의미의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나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고, 섭씨 700~1000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지고.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고 유약을 입혀서 섭씨 1000~1100도에서 번조燔造한다. 화분이나 떡시루 같은 기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태토가 유리질화 된 반투명체다.   시적 화자는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번조 하고 있다. 사랑, 모든 예술과 문학, 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결코 삶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중년의 그윽한 눈빛 사랑, 칠십, 팔십 노년에게도 사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고, 대마초와 모르핀 같은 환각제이다. 화자는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뜨겁게 살아보자“ 에서 보듯 사랑은 가마의 불 구덩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자고 한다. 도자기기가 불의 예술이듯 사랑 또한 불꽃의 타오름이다.   기물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한다. - 요즘은 가스가마, 전기가마 사용하기에 그렇지 않다 – 사랑 또한 한 번 빠지면 입구나 출구가 없다.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기에 형체가 있어도 볼 수 없다.   더 아름답고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표면에 얇은 유리질막, 즉 유약을 덧씌운다. 이것은 광택과 색깔을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색색의 옷을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예뻐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변신을 하듯이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결말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한다.   시인은 사람과 언어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더 나아가 우주와 존재를 이어주는 큐피드이자 헤르메스가 된다. 점진적인 불꽃의 소멸로 인해 태어난 도자기란 존재는 불꽃의 울부짖음이듯, 시 또한 시인 자신이 소멸하면서 모든 걸 포용하며 탄생한 존재의 울음이다.   드디어 사랑의 완성을 위해 1250도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마, 승염식이든 오름 가마든 상관없이 어떠한 작품이 완성될지 모른다. 다만,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에서 보듯 ‘달항아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뜨겁게 타오른 사랑이라는 가마 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듯 말이다.   달항아리는 너무 커서 물레에서 한 번에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아래의 몸통을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빚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반듯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달항아리는 정형화된 조형미보다는 부정형의 달덩이 같은 항아리가 구워진다.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졌을 때의 기묘한 빛깔을 낸다. 그래서 같은 백자 달항아리도 乳白, 牙白, 純白 등등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자는 단순 명료한 사랑보다는 둘 사이의 사랑은 단조롭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색상으로 조각조각 붙여 만든 조각보, 상보 같은, 치맛자락, 바짓자락을 끌고 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도자기도 구우면서 생기는 빙렬(氷裂)로 인해 더 가치 있듯이 사랑 또한 때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는 엷은 틈새 같은 식은태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보면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라고도 했다. 1250도의 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고, 영웅이 아닌 민초의 삶일지라도 “그냥 깨지지 말고”,“살아만 있어라”이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고 경건함이다.   온몸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예술인, 문학인일지라도 결코 진정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멀쩡한 눈을 멀게 하고, 사막에서도 촉촉한 이슬을 맺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힘,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사랑부터 하자’그 사랑에 에고이즘이 싹을 트면 둘 사이의 융복합은 현실적으로 멀어진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이 동반되더라고 사랑하자.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   화자는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기 위한 과정에서‘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떠 올리며 달항아리 굽듯 사랑의 달항아리를 희망하며 가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 어린 히틀러 마져도 에바 브라운에게는 순정으로 대해주었고, 하물며 베를렌느와 랭보, 그 둘의 사랑은 동성애를 나눴던 사이였다. 그뿐인가, 백석의 사랑 ‘자야(김영한)’는 그 짧은 동거 끝에 이별하고 평생을 잊지 못해 지금의 성북동에서 요정집을 운영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그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지금은‘길상사’로 변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렇게 해서 잉태된 자야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4-10
  •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만 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 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 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찌’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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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의 문학향기
    20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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