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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발간과 출판기념회 소식 - '내 마음의 실루엣'을 출간한 김명숙 시인의 녹슬지 않는 꿈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에는 많은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15일 시집 "내 마음의 실루엣" 출판기념회를 겸한 문학강연을 연 김명숙 시인의 녹슬지 않는 꿈을 소개합니다. 김명숙 시인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제1회 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2008년 국립국악원 생활음악 「화전놀이」가 공모 당선되었고, 2011년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천재교육)에 「새싹」이 등재되었다. 가곡, 동요 작사가이기도 하며 작품으론 가곡 「달에 잠들다」 외 45곡, 동요 「새싹」 외 80곡이 있다.시집으론『그 여자의 바다』와『내 마음의 실루엣』이 있다. 김명숙 시인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제1회(사)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 수상(동시 등단)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 "새싹" 저자 ▲작시: 가곡 ‘달에 잠들다’ 외 47곡/ 동요 ‘새싹“ 외 80곡과 제54회, 57회 4.19혁명 기념식 행사곡 "그 날", 제60회 현충일 추념식 추모곡 "영웅의 노래" ▲수상:부천예술상, 한국동요음악대상, 도전한국인대상(문학부분), 문예마을 문학상, 시흥문학상 우수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방송대문학상 수상 외 다수 ▲부천문인협회,(사)한국아동문학회, 고흥작가회 등 다수의 회에서 활동. ▲현)부천시노인복지관 작문강사, 방과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명숙 시인 시집 발간과 출판기념회 소식 2023년 10월 15일 오후 3시~5시김명숙 시인의「내 마음의 실루엣」출판기념회 및 문학 강연이 경기도 부천 교보문고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내빈으로 참여한 박노진 교보문고 지점장, 국민 가곡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얼굴” 작곡가인 신귀복 작곡가, 최숙미 부천문인협회 회장, 조영훈 부천시 원미노인복지관 관장이 덕담과 축하의 말을 전했다. 북 사인회 출판기념회 1부는 문학 강연 및 북 사인회, 2부는 김명숙 시인의 시로 진행하는 시낭송과 시극, 시인이 작사한 가곡, 동요 공연이 있었다. 작가의 말을 겸한 문학강연 <꿈은 녹슬지 않는다.>에서 “어릴 적 꿈이 하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노래하는 가수(성악가), 그리고 잘했던 것은 글쓰기였고 노래 부르기였다.” 고 밝혔다. 역경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노래를 좋아해 성악가가 되고자 했던 꿈은 작사가가 되어 가곡 47곡, 동요 81곡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래를 성악가처럼 주업으로 무대에서 부르진 않아도 작사를 하여 음반에 수록되고 제 이름이 기재된 여러 곡이 방송과 무대에서 불러지고 있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 또한 복지관, 학교 등에서 강사를 하고 있어 흡족 친 않지만 가르친다는 점에서 나름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시 '고래의 꿈'은 수능 학습 저작물과 강남 인강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두 권의 시집을 펴내 오늘 여러분 앞에서 출판기념회 및 문학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제 꿈은 녹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신귀복 작곡가 꿈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 기회가 나를 찾아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며,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꿈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보시기 바란다는 인사 후 북 사인회가 열렸다. 2부 공연엔 시낭송가 민준기, 신영기, 문회숙, 이호봉이 출연해 김명숙 시인의 시(詩) <아리랑>,<밤의 눈>,<가지를 익히며>,<혼자가 아닌 여럿은>을 낭송하였고, 복사골 시낭송 예술단 이현주· 김성숙· 이희· 정나래 시낭송가들이 김명숙 시인의 시 <억새>, <어미>, <엄마바지>, <목욕재계>, <누름돌>을 각각 낭송하고 <고흥 유자차를 마시며>를 시극으로 꾸며 시 퍼포먼스를 선물했다. 신귀복 작곡가의 곡으로 김명숙 시인이 작사한 가곡 “산길에서, 그대 그리워, 어느 날 오후”와 동요 3곡이 있는데 출판기념회에선 “그대 그리워”와 “어느 날 오후”가 각각 연주되었고 소프라노 유미자 성악가의 <그대 그리워>와 <달에 잠들다(이재석 작곡)>, 베이스 이용찬 성악가의 <어느 날 오후>와 <비와 나그네(조원경 작곡)> 열창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단체사진 김명숙 시인이 작시한 동요 4곡이 연주되었다. 김종명 작곡가가 작곡한 <새싹>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린 곡으로 부천상일초 3학년 최영연 학생이, 전준선 작곡의 <빗방울 여행>은 부천상일초 3학년 이지민 학생이, 오세균 작곡의 <통통볼>은 인천청호초 2학년 정다원 학생이, 김춘남 작곡의 <허수아비와 고추 잠자리>는 이지민· 최영연· 정다원 학생의 중창으로 합창해 관객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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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처음 내게, 보령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마주한 보령 바다는 한 자락의 푸른 옷깃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섬 한 채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수평선은 한 줄의 단호한 문장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읽어 낼 수 없는 바다의 안부 말수 적은 아버지 같았다 어둑한 저녁의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구석진 마당가에 빈 지게로 우두커니 서서 발 디딜 곳 없는 어둠을 부려 놓곤 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수평선은 고단한 생의 시작과 끝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을 알아챈 건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삶도 저토록 붉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었을까. 다시 잿빛으로 타다 남은 검붉은 밑불로 남아 세상의 바닥을 단 한 번만이라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을까 아버지의 핏빛 노을은 하늘로 번지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 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해후의 마중물 같은 검붉은 노을의 심장은 뜨거웠다 온몸을 휘감고 도는 바람의 잔등은 차가웠다 거칠고도 짠 아버지의 비릿한 냄새는 노을과 함께 그렇게 바닷속으로 잠잠히 젖어 들어 갔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한순간 뜨겁게 불살랐으나 어느 순간 차갑게 스러져 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 시인은 쌀 한 톨에서 나뭇잎 하나, 바람 한 줄기에서 시를 따고 집어 들 듯, 시적 화자는 말 없던 보령 바다가“잔잔한 파도가 섬 한 채를 들었다 조였다가”라고 한다. 그러한 바다에 귀를 기울이다가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에서 찬란하고 붉게 타오르는 아버지의 삶을 떠올린다. 이 순간 시인의 머릿속의 잠든 초인종을 눌렀던 것은 바로 ‘노을’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마지막 연 첫 행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화자는 노을이라는 심상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로 이미지화한다. 그 한 권의 노을이라는 책 속에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억, 그리움, 기억 등이 페이지마다 구구절절이 노을빛의 붉은 해서체로 때로는 초서체로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 보령 바다의 노을, 그 노을을 차마 어찌 한 잔 마시고 싶지 않았겠는가? ‘노을’이라는 실존적 현상에서 아버지에 대한 정체성과 내면성을 들어내면서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시상을 펼치고 있다. 표층적 심상인 보령의 앞바다에서 심층적 이미지인 노을을 형상화해 아버지를 그리는 것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보령 앞바다보다 더 넓고 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관통하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있을 수 없다. 노을빛 한 줌 한 알을 가슴으로 느끼며 푸른 옷깃의 바다와 노을빛 바다의 대칭적 표현으로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시인의 시혼에 두 손을 잡는다. 그 어떤 문학, 예술작품에서 커다란 울림을 만난다는 것은 속 깊은 가슴 인연이다. 감동을 주는 작품도 때론, 스쳐 지나간 바람에 묻힌 향기처럼 날아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긴 여운으로 영혼에 스미고 마음의 살갗에 무늬로 박히는 작품이 있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의 시가 그러하다. 그렇다. 햇귀를 맞이하며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수평선과 벌겋게 물들며 해를 집어넣는 수평선은 시작과 끝의 연속이다. 이러한 수평선에 반해 우리 아버지들의 삶은 시작의 끝에도 끝의 끝에도 오직 자식만 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들에게 모든 걸 다 내주고 나면, 아버지는 저토록 서녘의 형형한 노을빛처럼 빛나는 것일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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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김석심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삶이란/김석심 앞만 보며 달려왔던 인생이었지 건강과 얽힌 실타래 푸는 동안 서산에 노을은 짙어만 갔네 어느덧 남편은 한줄기 구름과 바람으로 왔다가 떠나가고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 찾았으니 허전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출발점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기고 종점이 가까워질 때 유일한 내 친구는 문학의 길이라네! 알량하게 쓰는 글이지만 글 한 편이 나의 애인이고 자식이고 친구일세! 유통기한이 없는 글을 쓰고 언제까지 정신력 잃지 않은 삶으로 뜨락에서 피어나는 수채화 같았으면. 시·수필집 『인생의 숲을 통해서』, 해드림출판사, 2021 ---------------------------------------------------------- 최근엔 노년의 삶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에이지즘(ageism)’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즉 노인들을 경원시하고 고립시키면서 차별화하는 의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건강한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것 못지않게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삶이란> 이라는 시제에서 이미 삶의 연륜이 두터움을 느낄 수 있다. 1연에서의 “앞만 보며 달려왔던 인생이었지//건강과 얽힌 실타래를 푸는 동안”에서 그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오직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서산에 노을은 짙어만 갔네”라고 한다. 이제야 뒤돌아보니 서녘에 지는 붉은 노을이 보인 것이다. 그 사이 평생지기인 남편은 “바람으로 왔다가 떠나가고”에서 보듯 남편은 이미 이승을 떠나 훗승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나면 헤어지고, 떠나면 반드시 만난다고 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다 화자는 삶의 뒤안길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 3연의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을 찾았으니” , 자식들은 장성해서 이미 부모 곁을 떠나고 없다, 뒤돌아보니 마음이 허전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노년의 삶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고고의 울음을 터뜨렸던 인생의 시작점은 점점 멀어져가고 끝점이 서서히 다가옴을 알 수 있다(“출발점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기고//종점은 가까워질 때”) 예로부터 ‘품 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자식과 떨어진 노년의 삶이 결코, 외로워서는 안 되고 또한, 외롭지도 않다. 시인 존던은 “누구도 외딴섬일 수는 없다 No one is an island”라고 했다. 노년의 삶은 세월로 층층이 쌓아 올린 하나의 높은 탑이다. 그 탑에 켜켜이 쌓인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깊고 높은 역량으로 외딴섬도 아니고 무인도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섬이 되기 위해 화자는 “유일한 내 친구는 문학의 길이라네!” 하면서 느낌표까지 달아놓았다. 이렇듯 ‘문학’을 의인화해서 서녘을 물들이는 노을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애인’,‘자식’, ‘친구’로 삼아 白髮의 길을 걸어간다니 얼마나 멋진 황혼 녘 삶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그러면서 “유통기한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당연히 문학은 무통기한이다. “언제까지 정신력을 잃지 않은”에서 보듯 나이 듦에서 오는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하면서 그래도 “삶의 뜨락에서 피어나는//수채와 같았으면” 하면서 <삶이란>의 시를 아퀴짓고 있다. 분명 화자가 희망하는 삶의 뜨락에는 수채화가 유통기한 없이 꾸준히 피어날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이 듦에서 오는 여러 상황을 이미지화해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노인들을 경제적 시선의 잣대로 한계치를 바라보는 외눈박이 시선은 던져버려야 한다. 그들 삶의 세월은 수없이 많은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에 섰고, 겪었던 노하우가 있다. 또한, 체험적 요소에서 우러나는 축적된 층층 탑 같은 살아있는 풍부한 연륜 등, 그것은 소중한 자산이다. 쓸데없이 낭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노인 자신도 변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고정불변의 사고방식과 변치 않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장자에서 보듯 스스로 자신의 상喪을 치뤄야 한다(吾喪我) 이분법적인 의식을 버리려면 스스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의식의 변화 없는 배타적 고정관념은 절대로 변화 없는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옹고집을 버려야 한다. 아래의 시 한 수로 글을 맺고자 한다. 生也一片 浮雲起(생야일편 부운기) 死也一片 浮雲滅(사야일편 부운멸) 浮雲自體 本無實(부운자체 본무실) 生死去來 亦如然(생사거래 역여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다.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무상함이니 삶과 죽음의 오고 감이 역시 이와 같도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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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조인형 낯선 이국땅 이방인 길 찾듯이 심쿵하며 더듬는 볼살 위 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시끄러워 가만히 들어보니 청춘을 돌려 달라 아우성치는 듯하다 열여덟에 피어난 여드름 자국 위에 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 만추의 울타리에 착각한 덩굴장미 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 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 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 인생이란 덧없이 흘러가는 강줄기 위 삶이란 배를 띄워 노 저으며 73세 황혼 녘 남모르게 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 시집 『73세의 여드름』, 도서출판 글벗, 2022. 시집을 구입할 때 특히 제목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시집 내용을 보거나 미리 준비한 시집을 사지만, 제목이 눈에 띄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요즘은 출판되자마자 대부분의 책들이 사장된다. 온 정성 쏟아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인데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집의 제목은 시집의 맛을 느끼게 하는 키워드이다. 그래서 저자의 고심이 깊숙이 배어 있다. 왜냐면, 요즘처럼 독서 하지 않는 현실 속에 독특하고 눈에 띄는 인상적인 제목이어야만 독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집의 내용이나 제목에 함축된 특별한 그 무엇(something special)에 관심을 둔다. ‘73세에 피어난 여드름’은 시집 제목의『73세의 여드름』의 표제시다. ‘여드름’은 청춘의 심볼이다. 그 청춘의 상징인 ‘여드름’을 의인화했다. 그래서 1연의“여드름 부대가 떼창 하듯”, 2연의 “청춘을 돌려 달라//아우성치는 듯하다”처럼 73세, 늘그막의 얼굴에서 여드름이 떼창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여드름을 의인화시킨 다음 거기에 청각적 이미지로‘여드름’을 형상화했다. “열여덟에 피어난//여드름 자국 위에//황혼에 돋아난 철없는 너를 보며”라고 한다. 어쩜 화자는 얼굴의 여드름이 생긴 것을 보고‘회춘(回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비록 고희(古稀)의 나이지만, 신체적인 연륜을 떠나 젊음의 표상인 여드름에서 그 옛날의 젊음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이팔청춘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때론, 나이가 들면 특별할 것 없는 것에서도 애착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 무상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믿을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만추의 울타리에//착각한 덩굴장미//피었다가 서리에 //얼어 죽은 최후 생각나//은근슬쩍 겁이 났지만” 이렇듯 늦가을 울타리에서 피었다가 때가 되어 사라지는 덩굴장미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나는 청춘이란 착각에//여드름 짜면서 즐기고 있구”라고 한다. 이렇듯 시인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고정관념과 자동화된 시선은 버려야 한다. 타성에 젖은 익숙한 질문이 아닌 보다 의미심장한 물음표를 가지고 경생상외(境生象外) 즉, 깊은 뜻이 형상 너머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4연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73세 황혼 녘 남모르게//여드름 만지며 미소 감추네”라고 한다. 화자와 비슷한 나이라면 어쩜 이 시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 덧없이 지나가는 게 인생살이다. 칠순의 황혼 녘, 술잔에 노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싶은 시간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닌, 아름답게 물들어야 한다. 늘그막의 여드름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층층이 쌓인 세월의 퇴적층에서도 꽃과 나무가 피고 자라듯, 김시습의 시구처럼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처럼 얼굴의 여드름은 젊디젊은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무료한 나날에 잠들지 말고 눈을 불끈 뜨고 참나를 찾으라는 죽비인 것이다. 시인은 밤낮 가림없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왜냐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잘한 씨앗의 시간들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아플 때 우린 그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행과 연(聯)갈이가 다소 변칙적인 시이지만, 칠순의 시 한 수 읊조리며 조조의 아들 조식의 시 한 수 시인에게 올리고 싶다. 인생은 하루를 더 살아도 아쉽고 하루를 덜 살아도 충분하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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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정현우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누군가 따라 걷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발끝만을 바라보며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 나를 닮아 있습니다. 양지쪽 흰 눈은 파르라니 몸을 녹이고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 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 나도 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돌아가려니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곳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 내가 멈춰 서 있는 이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고 또 나아갈 곳이라는 것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 가슴 가득 들여 마셨던 맑은 공기는 가슴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이 가장 행복한 세상일 테니까요. ▶시낭사(시를 낭송하는 사람들) 대표 ------------------------------ 시인은 사물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많은 의미를 시어로 응축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보다는 단순하면서 순수한 사고를 해야 한다. 헤겔은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라고 했다. 그렇듯 시제의 <내가 머무는 세상>에서 펼쳐진 내용을 보면 작가는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작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1연에서의 ‘문득’이라는 시어를 보자. ‘문득’은 의도를 가지고 뒤돌아보는 게 아니라 우연히 뒤를 돌아본다는 의미이다. 도연명 <음주> 5에서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누나)“의 ‘유연히’와 같은 맥락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뒤돌아봄인 것이다. 그 순간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나를 닮아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화자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3연에서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는 하늘이 화자를 삼켜 채색시킨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이 바라본 하늘에 스스로 물들어가는, 즉 “대나무를 그리려면 대나무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 것과 같이 자연과의 합일하는 화자의 순수 자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 돌부리를 만나면 디딤돌로 만들면서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에서 보듯 인생사 오고감에 초탈한.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의 순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다. 이것은 평소 작가의 자연 순응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의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4연의 “그런데도 돌아가려니/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푸르스트의 시 “아직도 잠들기 전에 갈 길이 조금 남아 있다.”는 시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 돌아 가자꾸나/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는 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로”라는 <귀거래사> 또한 함께 생각게 한 시구이다. 이렇듯 시상의 전개가 자연과의 교감 속 인간의 본향인 자연의 자궁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생각하고 느낄 수 없이 내 안에 존재한다. 7연의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에서 보듯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멈춰 있는 곳이 돌아갈 곳이고, 나아갈 곳이고, 그곳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듯싶습니다”라면서 읊조리고 있다. 그곳이 이니스프리인지 유토피아인지, 무릉도원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러한 곳이기에 그렇다. 모든 사람의 내적 성찰의 밑바닥에는 자신을 응시하면서 뒤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화해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9연의“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와 같이 말입니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서 나온다. 이 시를 보면 함축적이기보다는 조붓한 숲속을 거닐다 만난 깊은 산골의 옹달샘 물맛이요 광천수 물맛이다. 내 안의 나를 너무 밖으로 내보내지 말자. 그래서 내 안에서 껍데기로 존재하게 하지 말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떼어내어 그에게 또 다른 세계의 삶과 알찬 영혼을 주어 하나의 개체적 ‘나’로 키우자. 지금, 이 순간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 그리고 생각하는 이곳, 바로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다. 그렇기에 가장 행복한 세상이다. 여기서 종교적 성찰과 믿음, 철학과 사상의 책받침이 무슨 필요로 하겠는가.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Now and Here, 지금 여기가 바로, 행복이 있는 곳이다. 카르페 디엠. 글/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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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수의 새벽 기도/김은자 세상이 내 삶을 데려다주고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처럼 짧은데도 벌써 80년 주변에 버팀목은 유명을 달리하고 남은 생 어림짐작하지만 잘 모르고 막연히 망 구의 언덕에 올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동녘에는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지구의 한 지점에 내가 중심점 원을 그리며 우주를 품고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 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 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 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 시집 「한 잔 그리움 추억에 얼룩질 때」. 도서출판 글벗, 2022. 청계천 징검다리 사진-홍영수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만남과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생명체들의 섭리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듯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이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다, 화자는 “만남과 이별의 이중주가/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이라면서 속세의 만남과 이별 속 정한을 읊조리고 있다. 그러면서 “짧은데도 벌써 80년”이란다. 여기서 “벌써”라는 수식어에 주목해 볼 수 있다. ― 시 제목의 “미수(米壽)”는 쌀 “米”字를 파자하면‘八’이 두 개 있어 88세를 가리키는 말인데 화자는 팔순을 미수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듯 세속의 나이 80년이면 일반적으로 거의 1세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긴 세월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벌써”라면서 “고개 한번 돌리는 순간”으로 치환하고 있다. 화자는 80이라는 높은 고갯길에서 걸어왔던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순간 눈송이 하나가 장작불에 떨어지는 순간으로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떠오른 서산대사 휴정의 마지막 법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가 떠오른 이유는 왜일까? 화자는 팔십 고개를 지나 망구(望九) 고개의 언덕으로 향하면서 지나온 추억과 기억들을 떠올린다. 걸음걸음마다 맺힌 인연의 끈과 고리들, 그토록 긴 여정으로 생각했던 한 생의 앞날이 벌써“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삶이란 ‘찰나’적임을 간파고 하고 있다. 그러하니 더욱 아쉬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구나 옆지기마저 이미 훗승길로 가고 없으니“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비록 지구의 중심점에 우주를 품고 있을지라도 자기를 한껏 낮추며 살아가는 자세는 3연의 마지막 행“아주 작은 씨앗으로 살아간다”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잘나고 못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결국엔 한 떨기 이슬처럼 사라져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합장하면서 불경을 듣는 아침//주어진 삶이 건안 하길 빌며//버팀과 발전이 영글기를 기도하며” 에서는 어쩜 화자는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 덕목의 실천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굴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것은 베푼다는 의식 없이 맑고 밝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연의 마지막 행 “고해 길목에 시심의 징검다리 건넌다”와 같이 화자는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이상세계에 가기 위해 어쩜 “시심”이 고해의 바다인 듯 징검돌 하나하나를 건넌다고 하고 있다. 그 건넘이 바로 고해의 징검돌일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에 시심이라는 징검돌을 놓아가며 고해의 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 나온 것이 아닐까. 화자는 고해의 길목을 그냥 건너는 게 아니라 징검다리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시는 하고픈 말을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함축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고 할 때, 여기서 시인은 실제 경험과 상상적인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호소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실시간 부천의 문학향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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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바다/이부자
-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생의 바다/이부자 전철 속 마주한 군상들이 졸고 있다 저마다의 삶을 눈꺼풀 위에 얹고 찰나 충전의 시간 내리실 손님은 오른쪽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놀란 인생의 주인 황망히 뛰어내린다. 매달린 삶의 무게를 달고 몸부림치듯 세파를 가르며 종일 피라미만큼의 생존의 떡과 노래미 같은 자식을 위한 처절함과 지친 무릎, 힘을 다해 바다로 간다. 생존으로 흘린 눈물처럼 짜디짠 생의 바다로 간다 시집 <생의 바다를 건너다>. 에세이아카데미. 202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우린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중요하다. 더욱이 속도전 시대에는 압박감과 억압감 때문에 자칫 자기만의 리듬감을 잃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한낱 부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독서, 등산, 낚시, 숲길을 거닐거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쉽사리 실행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삶의 향기를 갖지 못하고 어떤 삶의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기는 천천히 걸어야 맡을 수 있고, 내 몸에 향기가 머물 수 있다. 그러나‘생의 바다’에 던져진 거친 삶, 먹고사니즘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바다’에 던져진 우린 삶의 영위를 위해 출근을 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의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지옥 속에서도 “삶의 눈꺼풀 위에 얹고” 졸음이 순간적으로 온다. 그 찰나적 시간 속에서 눈을 뜨면 대부분 한두 정거장 전이거나 한두 정거장 더 갈 때도 있다. 이럴 때의 상황을 화자는 “황망히 뛰어내린다.”라고 한다. 늘 그렇듯 친절한 안내 방송은 변함이 없다. 특히 출퇴근 시간, 붐비는 역에서는 어쩌다 신발 한 짝 벗겨지면 그대로 인파에 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렇듯 어깨에 “매달린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린, 먹고사니즘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광경을 다람쥐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쳇바퀴 돌 듯”이라고 하지 않을까. 주변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위해 “세파를 가르며” , “무릎”에 힘을 다해 삶의 터전인 고해의 바다로 향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다고 보면 벌써 눈앞에 또 다른 고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이다. 정말 ‘삶의 리듬감’과 ‘향기 있는 삶’은 저 멀리 있는 것일까? 속도와 경쟁의 시대,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느낌 있고 향기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리듬감’이다. 빠른 속도감과 경쟁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좀 더 여유 있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자. 삶의 향기와 삶의 리듬감은 속도감과 욕심이 앞서면 저 멀리 사라진다. 장자는 입신출세를 주장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 자아를 비우고 세상에 노니라고 한다. 허기유세虛己遊世, 얽매이지 말고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것이리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라는 책을 썼다.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을 즐기라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좀 의아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방향으로 –주 4일제 – 흘러가는 것 같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대단히 시스테믹한 사회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론>을 집필했던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점에서 좀 특별한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으르고 싶은 권리가 있어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우리에게 스스로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다는 것, “짜디짠/생의 바다로 간다”라며 화자는 시를 끝맺고 있다.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때론 게으르고 느리게 생의 바다를 항해한다면 메말라가는 우리의 허기진 혈맥에 한 줄기 수혈이 될 것이다. 어둠 속 항해는 아직 밝아오지 않는 새벽일 뿐, 비록 고해의 삶일지언정 바다가 품고 있는 욕망은 푸르름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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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창작
-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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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바다/이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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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김은혜
-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김은혜 속은 뜨겁다. 900도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다가, 뜨겁게 한번 살아보자 다시 냉전이다, 차갑게 식은 우리 사랑이다.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그림도 그리고 또 다른, 색색의 옷을 입힌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 지난번, 온몸과 마음을 다 준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 1250도 뜨겁게 더 뜨겁게, 밖에서는 모른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갈 일이다 뜨겁게 사랑한 결과물이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깨지지 마라 살아만 있어라, 1250도 불구덩이 속으로, 흙으로 만든 기물을 끌고 들어간다. 시집 <상자를 벗어나려는 여인의 몸부림>, 시선사, 2018. 부천 시소리낭송회 회원 국보310호 백자 달항아리 --------------------------------------- 흙을 구워서 만든 넓은 의미의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나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고, 섭씨 700~1000도의 낮은 온도에 구워지고. 도기는 토기보다 단단하고 유약을 입혀서 섭씨 1000~1100도에서 번조燔造한다. 화분이나 떡시루 같은 기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태토가 유리질화 된 반투명체다. 시적 화자는 도자기를 구우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번조 하고 있다. 사랑, 모든 예술과 문학, 인간의 영원한 주제이다. 결코 삶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중년의 그윽한 눈빛 사랑, 칠십, 팔십 노년에게도 사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고, 대마초와 모르핀 같은 환각제이다. 화자는 “불구덩이로 들어간다.”, ‘뜨겁게 살아보자“ 에서 보듯 사랑은 가마의 불 구덩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자고 한다. 도자기기가 불의 예술이듯 사랑 또한 불꽃의 타오름이다. 기물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며칠 동안 나오지 못한다. - 요즘은 가스가마, 전기가마 사용하기에 그렇지 않다 – 사랑 또한 한 번 빠지면 입구나 출구가 없다.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기에 형체가 있어도 볼 수 없다. 더 아름답고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표면에 얇은 유리질막, 즉 유약을 덧씌운다. 이것은 광택과 색깔을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색색의 옷을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로가 예뻐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변신을 하듯이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온전하고 성숙한 결말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한다. 시인은 사람과 언어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물, 영혼과 육체, 더 나아가 우주와 존재를 이어주는 큐피드이자 헤르메스가 된다. 점진적인 불꽃의 소멸로 인해 태어난 도자기란 존재는 불꽃의 울부짖음이듯, 시 또한 시인 자신이 소멸하면서 모든 걸 포용하며 탄생한 존재의 울음이다. 드디어 사랑의 완성을 위해 1250도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마, 승염식이든 오름 가마든 상관없이 어떠한 작품이 완성될지 모른다. 다만, “오랜 진통 끝에 태어난 달항아리”에서 보듯 ‘달항아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뜨겁게 타오른 사랑이라는 가마 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듯 말이다. 달항아리는 너무 커서 물레에서 한 번에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아래의 몸통을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빚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반듯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달항아리는 정형화된 조형미보다는 부정형의 달덩이 같은 항아리가 구워진다. 도자기는 너무 구워졌거나 덜 구워졌을 때의 기묘한 빛깔을 낸다. 그래서 같은 백자 달항아리도 乳白, 牙白, 純白 등등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화자는 단순 명료한 사랑보다는 둘 사이의 사랑은 단조롭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색상으로 조각조각 붙여 만든 조각보, 상보 같은, 치맛자락, 바짓자락을 끌고 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도자기도 구우면서 생기는 빙렬(氷裂)로 인해 더 가치 있듯이 사랑 또한 때론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는 엷은 틈새 같은 식은태가 있어야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에 보면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라고도 했다. 1250도의 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이고, 영웅이 아닌 민초의 삶일지라도 “그냥 깨지지 말고”,“살아만 있어라”이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고 경건함이다. 온몸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예술인, 문학인일지라도 결코 진정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멀쩡한 눈을 멀게 하고, 사막에서도 촉촉한 이슬을 맺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힘,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사랑부터 하자’그 사랑에 에고이즘이 싹을 트면 둘 사이의 융복합은 현실적으로 멀어진다. 비록 불안하고 고통이 동반되더라고 사랑하자.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 화자는 불가마 속에 도자기를 굽기 위한 과정에서‘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떠 올리며 달항아리 굽듯 사랑의 달항아리를 희망하며 가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광기 어린 히틀러 마져도 에바 브라운에게는 순정으로 대해주었고, 하물며 베를렌느와 랭보, 그 둘의 사랑은 동성애를 나눴던 사이였다. 그뿐인가, 백석의 사랑 ‘자야(김영한)’는 그 짧은 동거 끝에 이별하고 평생을 잊지 못해 지금의 성북동에서 요정집을 운영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그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지금은‘길상사’로 변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렇게 해서 잉태된 자야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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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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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만 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 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 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찌’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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