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기울기/안금자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의 부천의 문학향기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8.11.27 20:13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기울기

안금자
 
기운다는 건
팽팽함을 내려놓는다는 것
꼿꼿하던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본다는 것
 
뜨거운 가슴을 서서히 식히며
서쪽으로 기우는 해처럼
지나간 시간 쪽으로 한껏 기울어
 
비로소 너를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nonam2.jpg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이렇듯 계절의 변화란 지구의 23.5도 기운 삐딱함 때문이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적 사고를 벗어난 코페르니쿠스, 그의 발상의 전환에 의해 지동설이 나왔고 이는 시야를 달리한 결과물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makes strange)’란 ‘거꾸로 보기’,‘삐딱하게 보기’라고 했다. 결국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을 낯설게 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지금 우물 밖을 보려면 우물이라는 틀의 시각을 벗어나야 볼 수 있듯이(井座之蛙) 인습적인 사고와 가치체계, 고착되고 편협한 시야의 각도를 확 벗어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자기중심의 自我主義의적 관점을 접어두고 無我主義적인 더 넓은 시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뜨거움을 식히며 사계절을 토해내는 지구 기울기를 보며.
그렇다, 어린애들이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고개를 밑으로 숙여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시인은 수평적(팽팽함)이고 수직적(꼿꼿함)인 시각을 내려놓고 고개 숙여 바닥을 들여다보며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 시인이란 시선의 탈바꿈으로 낯선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동다송의 초의 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읊은 시에서‘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眼花枝?却了/好山仍在夕陽天)’라고 했다. 기울어짐과 삐딱함, 낯설게 보기의 시각은 결국 넓은 시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평소 바라보는 시야의 한계를 벗어나 상하좌우의 각을 넓히면서 놓친 알짬의 관점을 걸터듬질하며 온전한 그리움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서정주가 <화사(花蛇)>에서 징그러운 뱀을‘꽃대님보다 아름답다’고 했듯이. 팽팽함을 느슨하게, 꼿꼿함을 구부림의 시선으로 환기해 보자. 詩仙 두보는 술잔에서 달을 건져 올리고, 酩酊 40년의 수주도, 三酷好 이규보도 취한 도수만큼 멋진 시를 쓰지 않았던가.
보들레르는 “한 편의 시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 자체가 그 무엇인가다.”고 했다. 현실과 시의 세계에 시인은 살고 있다. 시인이 쓴 시는 시인을 떠나 독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시인은 현실에 남는다. 창작된 시는 현실 세계로 들어가 스스로 ’공명‘, 아님 ’수축‘ 될 것이다.
열린 시각엔 다른 풍경이 보이지만 닫힌 시각엔 보인 풍경만이 보인다.
다르게 보인 풍경은 독자의 심연에‘공명’의 맥놀이 현상으로 다가오리라.
난, 몇 도의 각도로 기울고 있으며 몇 도의 알코올로 취하고 있는 것일까.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태그

전체댓글 0

  • 56069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울기/안금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
작업수행시간 :: 0.445782899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