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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을 위한 연가 - 11회

박희주 중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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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2.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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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째 되는 아침, 까닭 없이 몸이 굼실거리는 느낌이었다. 몸을 씻지 못한 탓이거니. 젊은 날 못지않았던 그의 욕정도 시들어가는 듯했다. 나를 다시는 뺏기지 않겠다는 듯이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꼭 안고서 손을 움직이던 첫날과는 달리 이내 바르게 누워 자다간 어쩔 땐 등까지 보였다. 나도 그게 오히려 편했다. 그렇게 맛있던 라면도 처음만 못하고 데워먹는 햇반도 금방 한 압력밥솥의 맛보다 못했다. 웬일일까, 이제 겨우 이틀 밤을 보냈을 뿐인데 내 손길에 빛이 나던 우리 집 주방이 눈에 선했다. 좁은 텐트 안이 갑갑하다 못해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늑이 의심스러웠다. 침낭을 빠져나와 옷을 입고 텐트 지퍼를 내리는데 조금 열리다 얼었는지 잘 열리지 않았다. 그를 깨웠다.

오빠, 지퍼가 안 열리네?”

어디 가려고?”

그가 눈도 뜨지 않고 꾸물거렸다. 그런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화장실.”

큰 거야, 작은 거야?”

어이가 없어 짜증이 다 일었다. 그게 물어볼 일인가? 큰 거면 어떻고 작은 거면 어쩔 것인가. 그에게 어이가 없다는 걸 느끼는 내가 또한 어이가 없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지퍼를 올렸다가 힘을 주어 세게 내렸다. 그대로 열렸다. 바람이 그리 불지 않고 해가 떴어도 산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텐트와 떨어져 눈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오줌을 누웠다. 노란 오줌이 눈을 녹여 구멍을 냈다. 다 싸고 나니 오싹한 한기가 몰려와 진저리가 쳐졌다. 오줌발의 흔적이 보기 싫어 발로 눈을 쓸어 덮었다. 그런 내가 우습게 느껴져 실소가 터졌다. 이 무슨 청승이란 말인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게 고작 이런 것이었나? 문득 설악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백의 산에 불손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은. 이건 뭔가 잘못 되었다! 환상이 아름다운 건 환상에 머물 때뿐인가.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둘러 텐트 안으로 들어가 말했다.

오빠, 어서 일어나요. 이제 가요.”

이제 가요. 엉겁결에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아니 어디를?”

그가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는 침낭 속에 웅크렸다. 어제는 아무렇지도 않던 그의 부스스한 머리와 눈가에 낀 눈곱이 거슬렸다. 톡 쏘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어디는 어디에요, 서울로 가야지요.”

서울로?”

.”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상스럽게도 집이 몹시 그리웠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이 느닷없는 변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뭐가 그르고 옳은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왜?”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도 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내 감지하고는 아무 소리도 않고 빠르게 옷을 입고 짐을 챙겼다. 기대로 부풀었던 텐트가 한순간에 쓰러졌다. 환상으로만 보이던 동화의 나라가, 모든 풍경들이 유치하고 어설프게만 느껴졌다. 얼굴도, 손도, 발도 다 시렸다. 나는 더 이상 천년백설이 아니었다. 나는 무책임했다. 또 다른 나에게도, 그에게도,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도,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도, 내 존재의 세계에도. 그토록 존귀하게 여겨지던 내 사랑마저 너무나 시시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는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별 얘기를 않다가 이따금씩 물었다. 내게 실망했니? 내가 네게 부담을 준 거니? 이렇게 헤어지면 우리가 만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지는 않니?

나는 대답을 못했다. 확실한 것은 지난 사흘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기분이었다. 그것과 함께 답답하게 얹혀 있던 묵은 체증이 싹 가시고 보는 내내 부담스러웠던 무대의 막이 비로소 끝났다는,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눈에 익숙한 아파트 풍경이 보였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워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떠날 때 했던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요, 오빠. 우리는 그냥 우리가 만났던 시간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조건 빨리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쳐다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서늘한 기분이 들며 남편의 차가 그 많은 차들 중에서 쳐다봐 주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 시간에, 해도 넘어가지 않은 그 시간에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검은 제네시스. 같은 차종일지라도 나는 남편 차만큼은 귀신같이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너무 이상하여 번호를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시동이 걸린 채로 조수석에 여자가 있었다. 나보다 한창 젊은. 가슴이 철렁이더니 피가 머리끝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려던 방향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차에서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까스로 화단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경비실을 지나쳐 나오는 단정한 양복이 아닌 캐주얼 차림의 남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이 환하게 느껴질 만큼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에게서만 나는 향기가 순간적으로 확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출장 때나 들고 다니는 가방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출장을 위해 항상 내가 미리 챙겨놓곤 하는 가방이었다. 남편이 차에 다가가자 뒤 트렁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고 가벼운 동작으로 가방이 감춰지더니 차는 이내 날렵하게 아파트단지를 벗어나버렸다.

내가 무엇을 본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에게 어디 가느냐고,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 없는 내가, 배신이라는 말도 쓸 수 없는 내가 고소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갈 곳이 없었다. 내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런 나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바람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려왔다. , 이런 날이 있었다. 분명히 이런 감정에 휩싸여 나를 될 대로 되라며 내팽개쳐버린 적이 있었다. 그게 결혼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안심이 되는가. 빌어먹을 경험조차 약이 된다는 말인가. 마른 콩깍지에 물기가 스며드는 것만 같은 기분은 왜 드는가. 물고 물리는, 그래서 빚 질 게 없다는 얄팍한 심사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으랴, 하는 자포자기로? 넓게 생각하자. 무슨 짓을 했든 누구나 돌아가잖은가.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고. 그래, 일단은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나는 일어섰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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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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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주 시인. 소설가. 전북 임실 출신. <월간문학>신인상.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 『네페르타리』 소설집『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시대의 봉이』 장편소설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현 부천문협 회장
 galbeolhee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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