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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소사삼거리에서 무엇을 했나-

이재학의 소새울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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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3.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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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이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가 되면서 부천의 작가들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부천이 고향이거나, 부천에 잠시 머물렀거나 부천과 인연이 있는 작가들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이렇게 알아낸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부천시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개편으로 없어졌지만 소사구에는 범박동에는 목일신 동요작가가 있고, 심곡본동에는 펄벅 소설가가 있고, 소사본동에는 소사삼거리에서 생활했던 정지용 시인이 있다. 이들 작가는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으로 범박동의 목일신은 동요 ‘자전거’등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무수한 동요로 국민동요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심곡본동의 펄벅은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대가일 뿐 아니라 심곡본동에 1960년대 ‘소사희망원’을 설립하여 혼혈아동을 돌보아주는 사회사업을 하였다. 

 

180709 성주산 가족산책로.jpg
성주산 가족 산책로 - 정지용 향수 길
 

 소사삼거리의 정지용 시인은 소사본동의 대표적인 문학적 자산으로 2019년 가을에는 서울신학대학에서 시작하여 산새공원, 진영고등학교 입구까지의 길에 ‘정지용 향수 길’이라는 정지용 문학공원이 만들어진다. 정지용 문학공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계기로 부천 소새울에 산다는 정지용의 부천에서의 삶, 즉 부천 소사본동 소사삼거리에서의 정지용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정지용의 소사삼거리에서의 삶을 알아보는 것은 단지 이름뿐인 소사본동의 정지용이 아닌 소사본동의 주민들이 정지용의 삶을 알고 주민들의 삶속에 녹아든 정지용으로 새롭게 기억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사리 소사삼거리로 이사 온 정지용은 아마도 소사천의 둑 방 길을 시나브로 많이 걷지 않았을까. 소사본동 한 가운데를 흐르는 소사천을 따라 걸으며 정지용은 고향도 생각하고, 나라 걱정도 하고, 자신의 미래도 염려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지금은 정지용이 걸었던, 소사본동의 한 가운데를 흘러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소사천이 복개되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정지용은 천주교 신자라 소사삼거리로 이사 온 다음에는 아들과 함께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 답동성당으로 미사를 보러 다녔다. 그때까지 부천에는 성당이 없었다.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인천 답동성당으로 미사를 보러 다니던 정지용은 우연히 소사삼거리 집 근처에 소사공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근처에 소사공소를 두고 멀리 인천으로 미사를 보러 다니던 정지용은 소사공소를 알게 되고는 소사공소의 가장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소사공소는 소사삼거리에 살고 있는 전마리아 할머니의 집 단칸방에 차린 것이었다. 전마리아 할머니는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여우고개 넘어 소래면 대야리의 대골공소를 오랫동안 다녔다. 대골공소는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부천의 함박리와 소래의 대야리로 숨어든 신자들이 만든 것으로 이미 1880년대부터 운영되고 있었다. 부천에는 성당은 물론 공소마저 없어 여우고개 넘어 대야리의 대골공소로 미사를 드리려 다니던 전마리아 할머니는 소사삼거리에서 대야리까지 십여리 길을 걸어 다니는 게 힘에 부쳐 지인의 협조를 얻어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마련했다. 이것이 부천 천주교의 씨앗이 되는 소사공소의 시작이다.
 정지용을 비롯한 소사공소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열의는 대단했다. 소사공소가 잘 운영되자 신자들은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모셨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소사공소의 신도들이 모여 공소에 신부님을 모시는 방안을 의논하는데 신부님이 오시면 식사가 제일 문제라고 하자 정지용이 신부님의 식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신부님은 공소에 기거하고 식사는 정지용의 집에서 하기로 하고 신부님을 모시기로 한 그날로 정지용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정지용이 계속 찾아와 간청을 하자 임세빈 신부를 소사공소에 파견하였다. 임세빈 신부가 소사공소에서 첫 미사를 드린 게 1945년 12월 24일 성탄전야였다.

 

소새울 4홍 정지용.jpg
정지용 시와 사진 - 소새울 마을 벽화

 
 소사공소에 신부님이 오시자 소사공소의 신자들은 더 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당을 마련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조금한 단칸방의 공소에 신부님이 계신 것도 과분한 일인데 성당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허무맹랑한 일처럼 보였으나 소사공소 신자들은 성당을 마련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성당을 마련하는 일에도 역시 정지용이 발 벗고 나섰다. 정지용은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성당을 마련하고 싶다는 소사공소의 뜻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임세빈 신부와 정지용은 인천 답동성당 임종국 신부와 함께 적산관리소를 거의 매일 방문하다시피 했다. 소사삼거리 원미산 밑에 성당 자리로 보아둔 일본인이 소유했던 소림별장이 적산가옥이라 사용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적산가옥 소림별장의 사용허가를 받은 소사공소 신자들은 1946년 4월 5일 소림별장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소림별장에서 시작한 소사성당은 부천의 첫 번째 성당이고, 부천 성당역사의 시작이다. 소사성당의 초대 신부는 임세빈 신부였다.
 소사성당이 첫 미사를 드린 그 해(1946년)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 되어 소사삼거리를 떠났다. 정지용은 소사삼거리에 사는 3년 동안 작품 활동은 하지 않아 절필을 한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신앙생활에 더욱 매진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사공소에 신부님을 모셔오고, 소사성당을 세우는데 있어서 정지용의 역할이 지대했다. 부천의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정지용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면 섭섭한 이유이다. 현재 소명사거리에 있는 소사성당(1960년 10월 20일)은 소림별장 자리에서 옮겨온 것으로 지금까지 부천 천주교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음은 정지용의 간절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시(詩)다.

 

또 하나 다른 태양
 
온 고을이 받들 만한
장미 한 가지가 솟아난다 하기로
그래도 나는 고하 아니하련다.
나는 나의 나이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웁다.
이제 태양을 금시 잃어버린다 하기로
그래도 그리 놀라울 리 없다.
실상 나는 또 하나 다른 태양으로 살았다.
사랑을 위하여 입맛도 잃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설지라도
- 정지용 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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