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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과 한국의 인연 3- 이재욱 작가의 문학칼럼

두 번째 방문 그리고 또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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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6.0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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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에게 삶을 나누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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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욱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서사문학 연구위원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서 닷새쯤 머물 예정이며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작품인 <무지개>를 출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행 중 한명이 가족에 대해 물었더니 너무 많아 방정식같이 풀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몸소 낳은 딸은 36세의 백치, 특수학교에 다니는 늙은 아이라고 했다. 두 양자, 두 양녀가 있고 한국, 일본, 인도의 고아들과 혼혈아들로 구성된 5명의 양손주들을 기르고 있다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부산 시민을 위한 야외강연 연단에 도착하자 많은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연단아래서 장난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윙크를 보내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연단에 오른 펄 벅은 다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에게 삶을 나누어 주고, 있는 나라는 없는 나라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한다고 했다. 특히 지성을 농촌에 주입시켜야 한다면서 실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않는 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부산시가 마련한 오찬 석상에서는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관한 소책자라도 쓰겠다는 언질을 주었으며 부산시는 한국에 관한 책들을 더 많이 번역해 읽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2천여 명이 참석한 부산여자고등학교 강연에서는 미래의 인류세계에 관한 견해를 피력했다.

 이제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르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농민들과 함께 나누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모든 책임은 각자의 어깨위에 있는 것일뿐더러 그것은 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이 대목은 당시만 해도 우매했던 농촌계몽활동을 적극 권장했다는 것에 펄 벅의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안목이 돋보이고 있다. 하루를 더 부산에서 보낸 펄 벅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해운대 해변을 산책하고 유엔군 묘지를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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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기념관에 있는 펄벅여사 사진

 

 지방여행에서 돌아 온 펄 벅은 다시 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8일은 이화여자대학교를 방문했다. 채플에서 미국여성의 실정과 특권 남용에 관해 강연을 가진 후 오후에는 문리과대학생들을 위해 체험, 상상, 인간적인 표현이라는 강연을 가지기도 했다. 이화여대의 교과과정을 살펴 보건데 아주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것이라 하였고 머지않아 지금 이 자리의 학생들이 한국문학을 번역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바란다고 했다. 의욕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는 인간의 역사와 여성의 위치에 관해 강연을 진행했다.

나는 요 며칠 동안 수백 명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오늘날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이때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보다 큰 책임을 가져야합니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의 많은 시간을 펄 벅은 강연에 할애했다. 학생들에게 지식인들에게 당면한 국가를 위해 할 일들을 제시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들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강조했다.

 

 9일 밤 8,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당에서 개최되는 환영 음악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펄 벅은 한국에서의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다. 1110, 열흘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펄 벅은 이화여고 합창단의 석별의 노래를 들으며 CAT 항공편으로 한국을 떠났다.

 

 두 번째 방문 그리고 또 그 이후.

 펄 벅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은 1963년 봄이었다.

 두 번째 방문기간 동안 여사의 자세한 동정을 보도한 기사들이 별로 없다. 아마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에 대해 일단은 관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4.19혁명을 거쳐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탄생한 한국정부를 무너트린 군사정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고 펄 벅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정치인들과의 교류는 자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이 기간 중에는 한국에 산재해 살고 있는 불우한 한국전쟁 고아들의 실상을 눈여겨봤을 것이고 이들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했으리라 짐작된다.

 

 1964년 펄 벅은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개설하게 되는데 이 재단은 전쟁 중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는 재단이었다. 펄 벅은 이 혼혈아들을 아메라시언(미국인과 아시아인 혼혈아)이라 불렀고 다분히 미국인들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으며 따라서 미국은 이들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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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전시된 펄벅 여사의 식탁

 

 네 번째 방문은 75회 생일을 한 달 앞둔 1967626일에 이루어 졌다. ‘펄 벅 재단이사장 데오더 헤리스씨를 대동하고 혼혈아들을 위한 복지센터를 한국에 건립하기 위해 오전 1130JAL기편으로 내한했다. 공항에는 희고 까맣고 노란 피부의 혼혈아들이 갑사치마 등 한복을 입고 버리고 간 아버지를 대신해 온정을 베풀러 온 펄 벅 할머니에게 흰 국화로 쌓여진 빨간 카네이션을 걸어주고 키스했다.

 펄 벅은 75회 생일기념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7개국(한국,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자유중국(타이완), 타일랜드, 베트남.)에 복지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며 그 모델케이스로 한국 서울근교에 복지센터를 세우기 위해 내한했다고 말했다. 이때 말한 서울근교라는 지역은 부천 소사의 심곡동이었으며 이미 사전 작업이 꽤나 많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어서 3주 동안 한국에 머무르며 복지센터 기공식까지 마치고 돌아 갈 예정이라 했다. 아시아지역 복지센터 건립기금은 이제까지 출판된 자신의 소설과 TV나 영화에서 나오는 수입 등 7백만 달러(일부 매체에서는 1112천 달러라고 혹은 1102천 달러라고 보도함)로 충당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 복지센터는 학교나 고아원과는 다른 형태로 기술부와 재활(再活)부를 두어 혼혈아뿐만 아니라 다른 전쟁고아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형편이 어려운 혼혈아들의 어머니들에게는 생활안정을 위한 직업보도 교육도 할 것이라고 함께 자리한 데오더 헤리스재단 이사장이 부언 설명했다. 이어서 펄 벅은 우수한 고아들에게는 특별장학금을 주어 미국에 유학할 기회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출판 예정인 새해라는 소설은 한국 혼혈아를 주제로 혼혈아의 비극을 다루었다고 하며 혼혈아의 책임은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을 비롯해 아시아인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여생을 아시아에 산재해 있는 고아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도 함께 전했다.

   

 펄 벅은 칼럼, 강연, 그리고 소설에서까지 미국이 참전했던 아시아 각국의 아메라시언을 보고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며 불우한 아메라시언들의 실상을 꾸준히 알려 왔다. 결국 이런 아메라시언을 도와야 한다는 펄 벅의 뜻에 약 700여명의 많은 동조자들이 호응해 왔다. 모나코의 그레이스왕비, ‘로버트 케네디상원의원, ‘아이젠하워전 대통령, 등의 명사들도 스폰서가 되어 매달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펄 벅은 부천 심곡동에 소사희망원’(Sosa Opportunity Center)을 건립한 이후에도 네 차례나 한국을 더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소사희망원에 몇 주, 혹은 몇 달간씩 머물며 혼혈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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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기념관 공원의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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