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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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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9.0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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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산길을 걷다가
울퉁불퉁 드러난 벚나무 뿌리를 본다
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처럼
드러난 상처 다발로 송두리째 뻗어 있다
그래도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땅과 하늘의 경계에서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서 있는 벚나무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도
저렇게 자기를 버티고 서 있는 나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
잠시 신발을 벗어놓고
나갔다 돌아온 주인처럼
해마다 새싹이 돋아
넉넉하게 그늘을 품어주던 나무
시집 <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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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수 산길.png
사진/홍영수 ‘다산초당 가는 길’

문학은 정서와 감정에 바탕을 둔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익혀야 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의 멋대로 해석하는 ‘감정의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된다. ‘莊子’라는 책을 젊었을 때와 중장년의 시기에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한 편의 시를 읽을 때도 시기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름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이 결합하여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문학작품의 독법에 때론 일탈하고 싶고, 정형화된 문학의 이론과 프로그램화되어 규정지어진 틀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문학의 장르에 따라 이론이 변화 발전해 왔고 문예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할 때 나만의 문학적 독법, 해석 또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문학의 이론과 실재에 벗어나더라도. 스무 번째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을 옮겨보았다.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중세 암흑기에는 모든 문학과 예술은 종교적 색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굳건한 법칙에서 깨부술 수 없는 관념이 존재했다. 하나의 세계인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종교적 틀이라는 엄청난 큰 바위를 쇠망치로 내리 까부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다다이즘’이라는 사조다.
한스 아르프는 찢긴 종잇조각을 허공에서 떨어뜨려 캔버스에 안착한 종이들을 그 자리에 붙인다. (우리의 조각보 같다) 바로 우연의 법칙이다. 올봄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하며 보았던 마르셸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도 작품의 의미보다는 작가의 우연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사실은 지극히 필연으로 찾아온 것들이며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우연으로 생성된 것이다.
시를 보자. ‘바위 틈새를 비집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등의 표현을 보자면 시적 화자는 벚나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 시켜 안타까움과 끈질긴 생명력을 얘기하고 있다. 감정이입’이란 시적 화자의 감정을 어떤 대상에 투영시켜 그 대상도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절망적인 환경을 딛고 활짝 핀 꽃을 피운 벚나무의 자태를 보면서 말없이 서있는 완성된 벚나무의 침묵만으로도 고고한, 저토록 늠연한 그늘 아래 큰절 하고 싶다고 느낄 것이다. 넙죽 엎드려.
그렇다. 4연의 다소 불편한 시적 전개가 거슬리지만, 시의 호불호를 떠나 이 시를 읽으면서‘우연’과 ‘필연’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라 우연과 필연이라는 의미를 화자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 상관물인 벚나무의 입장에서 화자에게 감정을 이입시켜보고자 한다. 일반적 시의 감상은 시적화자의 입장에서 독법을 하지만 화자가 감정이입을 시키고 있는 시적 상관물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셈법이 아닐까 한다.
 씨앗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고 있다. 어디에 착지하는지 모른다. -산보객들의 자드락길이든 아니면 비좁은 바위 틈새든- 씨앗은 벼룻길이든, 바위 틈새든, 벼랑 끝이든 떨어진 장소를 탓하지 않고 발아한다. 그리고 자라서 종족 보존을 위해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 벚나무의 입장에서 벚나무를 보자. 벚나무는 자기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화자가 더 안타까운 것이다.
씨앗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 떨어진 장소를 우연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필연이다.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시선의 以我觀物은 반목과 불평이 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以物觀物의 시선은 화해와 용서와 양보가 있다. 필자 또한 수없이 등산을 하면서 봤던 바위 틈새에서 자란 소나무를 보고 ‘왜 하필 힘들게 바위 틈새에서 살고  있지’라고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인의 시선은 다르고 顚覆적이어야 한다. 벚나무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씨앗의 떨어진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필연으로 생각하며 인간이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탄식과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의식하지 않기에 폭풍한설과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얼마 전 jtv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에서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했다.  우연과도 같은 필연. 세계적인 뇌 과학자 디크 스왑Dick Swaab은 우리가 행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뇌의 필연적인 역할들로 탄생한다고 했다. 벚나무 또한 바람에 의해 착지하는 씨앗이라는 뇌의 필연적 생장점에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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