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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부천에 오다 - 3회

이재학 단편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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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0.0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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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할머니는 ‘웰컴하우스’라는 단체를 만들어 처음에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웰컴하우스는 사업을 확대하여 혼혈 아이와 소수민족 아이로 시작해서 장애아까지 수용하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많은 혼혈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군인과 아시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혼혈 아이들은 마치 펄벅 할머니가 중국에도 미국에도 속하지 못했던 것처럼 백인도 동양인도 아니었기에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차별을 받았습니다. 펄벅 할머니는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교육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꾸준히 사회사업을 해왔던 펄벅 할머니는 1964년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인 700만 달러를 내놓아 미국에서 ‘펄벅재단’을 설립했습니다. 펄벅 재단에서 하는 일은 혼혈아, 전쟁, 기아 등으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세계 도처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펄벅 재단에서는 미국계 아시아 혼혈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한민국에는 1965년 부천 심곡본동(깊은구지)에 펄벅 재단 한국지부가 설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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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옆에 펄 벅 동상이 보인다.

 

8

정아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펄벅 할머니는 어떻게 대한민국에 오셨나요?”

“펄벅 할머니는 조선일보사와 여원사의 초청으로 1960년 11월 1일 대한민국에 오셨단다.”

“선생님 펄벅 할머니가 대한민국에 와서 한 일들을 이야기해주세요?”

“펄벅 할머니가 대한민국에 오셔서 많은 곳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선생님이 한 가지만 이야기해 줄게.”

[펄벅 할머니가 늦가을 한창 추수가 바쁜 저녁 무렵 경주 들판을 지날 때 한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진 채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볏단도 달구지에 실으면 될 텐데 농부는 왜 고생을 사서하는 것일까?’

펄벅 할머니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농부에게 다가갔다.

“소달구지에 볏단을 실으면 되지 왜 직접 볏단을 지고 가는 겁니까?”

농부는 오히려 질문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오늘 우리 소는 종일 밭을 갈았소. 그러니 집에 갈 때만이라도 좀 가볍게 해 줘야 하지 않겠소?”

농부의 말을 들은 펄벅 할머니는 가축의 고단함까지 헤아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미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크게 감탄했다.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집필하고 싶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였다고 했다.](펄벅과 부천을 말 한다 p39인용)

“펄벅 할머니는 대한민국을 소재로 1951년 <한국에서 온 두 처녀>, 1963년 <살아있는 갈대>, 1968년 <새해>로 세 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갈대>는 1881년부터 일본의 패망하는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 말까지로 4대 걸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치밀한 고증작업과 극적인 구성으로 형상화한 대작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뉴욕타임지를 비롯한 언론에서 <대지> 이후 최대의 걸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펄벅이 한국에 보내는 애정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펄벅과 부천을 말 한다 P56인용)

“그래서 펄벅 할머니가 대한민국을 좋아하게 되셨군요.”

“그렇지 펄벅 할머니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인간미에 흠뻑 빠지신 거지. 1960년 방문 이후 자주 방문을 하셨으니까. 더군다나 1965년에는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했지.”

“혼혈 아이들을 위한 재단 말인가요.”

“그렇지 혼혈 아이들을 위한 재단이지. 대한민국의 펄벅재단을 필두로 일본 필리핀 대만 태국 베트남에도 펄벅재단이 세워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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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기념관 앞 펄 벅 공원

  

9

1965년 세워진 펄벅재단은 1967년 부천 심곡본동(깊은구지)에 소사희망원을 세웠습니다. 깊은구지에서 뱀내장(신천리)으로 넘어가는 성주산 하우고개 근처에 위치한 소사희망원은 성주산 밑의 아담한 곳에 자리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펄벅 할머니가 소사희망원을 서울에 세우지 않고 왜 우리 동네에 세울 생각을 하셨을까요?”

정아의 어른스러운 질문에 놀란 듯 딸을 바라보던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습니다.

“저도 우리 정아와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이야 이곳이 주변에 건물도 많고 해서 별로 외진 곳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 이곳은 산 밑이고, 부천역에서 성주산 쪽으로 한참을 올라오는 곳으로 당시에는 외진 곳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성주산 밑 구석진 곳에 소사희망원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맞아요. 사실 이곳은 성주산 밑이고 부천역에서도 한참을 와야 하는 외진 곳인데 다들 어떻게 이런 곳에 소사희망원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의아해들 하시죠.”

정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빠의 말씀처럼 외진 곳이죠?”

“외진 곳이지. 그런데 정아야 펄벅 할머니가 이곳에 소사희망원을 세운 것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란다.”

“네, 특별한 인연이요.”

아빠도 선생님의 특별한 인연이란 말에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물었습니다.

“그 특별한 인연이 뭔데요?”

“유한양행 아시죠?”

“알다마다요. 대한민국 사람치고 유한양행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정아야, 너도 유한양행이 뭔지 아니?”

선생님이 정아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네, 알아요.”

“유한양행이 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직한 회사요.”

유한양행이 정직한 회사가 된 것은 유한양행을 만든 유일한 할아버지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한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녹두를 사러 갔을 때 녹두를 파는 가게가 아주 작고 초라해보였습니다. 유일한 할아버지는 그 작은 가게가 도저히 많은 양의 녹두를 팔 수 있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녹두를 팔아서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할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하여 낮에 약속한 녹두 가게의 사장님 집에 가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장님 집이 너무 크고 호화스러웠습니다. 사장님도 가게에서 본 초라한 사람이 아닌 멋쟁이 신사로 명품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는 유일한 할아버지에게 사장님은 나라에 세금 다 내고 정직하게 사업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일한 할아버지는 사장님과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들이 모두 잘 살 수 있다. 이 생각을 유일한 할아버지는 평생 사업을 하면서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직한 회사라고?”

“네,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직한 회사라고.”

“그래 맞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직한 회사. 그럼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직한 회사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겠네.”

“네, 알아요. 유일한 할아버지요.”

“그런데 유한양행의 유일한 할아버지하고 소사희망원하고 무슨 관련이 있죠?”

“소사희망원이 있던 이곳이 유일한 할아버지의 유한양행 자리지요.”

----------계속

 

 

이재학2.jpg

이재학

마라토너/ 복사골문학회, 부천수필협회

소새울 소통미디어 협력단 대표

저서/ 나는 마라토너다, 길에서 다시 찾은 행복마라톤, 황소도 말처럼 뛰나

부천 소새울에 산다(1,2,3,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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