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20(일)

빨래와 여인 / 황정순 수필가

그녀는 항상 나보다 먼저 새벽바람에 빨래를 넌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자분자분 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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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1.0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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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은 작은 연립 한 동이다. 집의 크기는 우리 집과 비슷하지만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 우리 집과는 담장하나로 내 집과 옆집으로 나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낮은 창고가 있다. 그 창고 지붕위에는 두 개의 빨래 줄이 걸려 있다.

 

사본 -DSC_10021신문2020년 1월.jpg
황정순 수필가

 내가 손빨래를 들고 옥상 계단을 오르는 시간은 아침 10시쯤이다.

언제부터인지 창고 지붕 위에 널려 있는 옆집 빨래를 내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흔해터진 빨래에 매력을 느끼다니….’

 그 허접한 창고위에 매달려 있는 빨래는 참 깨끗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빨래는, 이른 아침 물 빠진 바닷가에 물기를 흠뻑 머금은 해초의 미끈함처럼 신선하다.

 내 집 빨래를 빨래줄에 허리 반 토막 걸치듯 매달아 놓고 빨래집게로 한 번 집는 것에 비하여, 옆집 빨래는 양품점의 옷걸이에 쫙 펴놓은 듯 반듯하다. 펼쳐놓은 속옷에서 가끔은 남세스러움도 느끼지만, 잊기로 했다.

 내 집 빨래는 손빨래를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깨끗한 것은 아니다. 팔 힘이 부치다 싶으면 대충대충 비벼서 넌다. 논일한 바지 흙 떨어 널 듯할 때도 있다. 옷 색깔이 선명하냐면 그렇지도 못하다. 오래도록 입어서다. 내 집 양말 짝을 기왓장에 고추 말리듯이 펼쳐놓는 것에 비하여, 옆집 양말 짝은 빨래줄에 스카프 매달 듯하였다. 내 집 빨래가 고전적 분위기라면 옆집 빨래는 현대적 분위기라고 말해볼까. 그것은 내가 고전적 성품이라면 그녀는 현대적 성품을 지녔을 것이라고 말함이다.

 하늘 높은 날이면 옆집의 빨래들이 바람에 맞춰 율동을 한다. 축축한 빨래 위에 아침햇살이 움실움실 거린다. 한낮 햇살에 빨래가 슬쩍 드러누워도 본다. 가을바람에 빨래가 바스라질 듯하다. 그 빨래 뒤에 얼굴만 살짝 가린 채 고추 마당에서 숨바꼭질하던 기억의 삽화가 뛰쳐나온다.

 연립 뉘 집의 빨래일까. 한두 번 봄 직한 옆집 사람들의 얼굴을 빨래 속에 비춰본다. 할머니의 파자마며 손주들의 옷가지를 볼 때면 할머니가 그려진다. 할머니가 살림을 맡아서 하는 듯하다. 시골에서 손주들을 위해 갑자기 올라오신 분일까. 또 다른 빨래줄에는 아기의 옷이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 새댁이다. 늘 세탁기 빨래로 대충해서 널은 것처럼 구겨져 있다. 허름한 색상이 반가움을 가시게 한다. 한 번만 삶아 빨면 빨래가 보송보송 할텐데 아직 살림살이에 서투른 듯하다.

 그렇다면 저 소담스럽고 깨끗한 빨래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어느 여인의 손끝이란 말인가. 그 여인이 빨래 속에서 하늘빛을 만끽한다. 그 여인의 하얀 얼굴이 햇빛과 마주하고 있다. 그 여인의 눈동자가 빨래 속에서 나를 쳐다본다.

 교복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 또래인 듯도 싶다. 도회지서 나고 자란 여인인가 싶기도 하다. 그녀는 항상 나보다 먼저 새벽바람에 빨래를 넌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자분자분 널고 간다. 누가 빨래를 걷는지는 알 수도 없다. 그녀는 마치 성안의 여인인 듯하다. 나에게 있어 성안의 여자는 그림으로만 가능하다. ‘그 여자의 식탁에 놓은 음식은 예쁜 접시에 담겨 있을 거야’ 그 여자에게 어울리는 남편은 어떤 모습일까?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나의 시선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사본 -5월13 고양 꽃 박람회DSC_0797신문2020년 1월신문2020년 1월.jpg

 우연히 그녀인 듯한 여인이 창고 지붕 위에 나타났다. 내 집 안방 창문으로 내려다보인다. 그녀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빨래를 매만지는데 몰두하고 있다. 보통 가정주부들이 슬리퍼에 바지 차림으로 쑥 나오는데 비하여, 그녀는 스커트를 입고 앞치마를 둘렀다. 나에게 있어 그녀가 귀족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내 집보다 그녀의 집이 훨씬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 성 밖으로 나온 여자는 얼굴을 햇빛가리개로 가렸다. 직장에 다니는 여자일까. 웬만하면 얼굴을 한두 번은 보았을 텐데 밖을 잘 나오지 않는 가정주부일까. 그녀는 머리를 올려서 핀으로 꽂았다. 흰 목덜미가 학처럼 길고 곱다. 빨래를 매만지는 손끝이 마냥 희다. 그녀는 잠시 옷자락만 보이듯 뒷모습만 살짝 보인 후 달맞이꽃처럼 사라졌다. 하얀 빨래 뒤로 또 숨었다. 저 신선한 빨래들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는다. 빨래 자락에 그녀가 보일 듯 안보일 듯 숨어버렸다.

 그녀와 나의 숨바꼭질은 매일 아침 계속된다. 나는 그녀를 찾는 술래다.

 

황정순 프로필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 수필분과회장()

수필시대 등단 (2005)

수필집예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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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집이

자랑스스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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