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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이순정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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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1.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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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이순정 


흐르다 뒤엉켜 돌아서 가고
돌아서 넘지 못하면 기다릴 줄 아는 겸손
기다리다 지치면 하늘로 올라
무거워진 눈 그림자 물로 풀어 놓는다
돌고 돌아가고 오는 길
들어와 나가지 못하면 썩은 자리 하나 차지하고
들어와 나가면 그것이 사는 법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면서 여럿이 아닌
뭉침과 버림을 반복하며 비워감을 알게 한다
무심한 말言들이 바람에 흩어져
습하면 썩는 자연의 법을 거슬러
비워내지 못해 울음으로 토해낸다
막혀오는 숨통 트이기 위해 남술 들숨 숨을 고르고
살 속을 헤집어 길을 만든다
모든 것을 담아내고 비틀어 버리는
얄궂은 잔망
가벼우면서 가볍지 못한 무게로
나약함을 가장한 채 흐르고 있다.
 
시집 <껍데기 어디있냐>, 한맥, 2015.
 
홍영수.png
출처: 다음카페, 백수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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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지배했던 노장사상의 핵심은 無爲이다. 그러면서 무위를 주장하며 드는 예가 바로 물이다. 노자의 <도덕경> 8장을 보자.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만물과 다투지 않으며,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거해도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물은 거의 ‘道’에 가깝다.”
이렇듯, 물은 다투지도 않고, 빈 곳은 채우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며 굽은 곳은 굽어 흐르고, 급한 곳은 급하게,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며 沼를 이루기도 한다.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는개, 이슬비, 소나기 등과, 작은 입자 같은 안개, 때로는 육각형의 눈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오고 찬 서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물의 특성을 간파한 화자는 “넘지 못하면 기다릴 줄 아는 겸손”에서 비움과 채움의 역설을 얘기하고, “지치면 하늘로 올라가는”, 물의 순환논리와 자연의 섭리 앞에 더듬이가 닿으면 눈이 내려 물에 잠기듯 삶에 지친 무거운 눈을 맑은 물에 담아보기도 한다.
 물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모습이 변화하고 때론 격렬한 소용돌이로 잔잔한 물결로 솟구치고 침잠하며 세상의 만물과 감응하며 흐른다. 천편일률적인 습성을 짓밟아 버리고 스스로의 몸짓으로 하늘로 올라 먹구름 속에 가두기도 한다.
고이면 썩는 것은 비단 물뿐이 아니다. 변화와 혁신 없는 고정된 관념과 깨트릴 수 없는 틀을 가진 세계관은 굳어서 풀리지 않고, 응고된 짧은 생각은 이분법에 얽매어 편견의 나락으로 흘러들어 상한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다. 정지되고 정체된 영혼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부패하지 않고 냄새나지 않게 사는 법이다.
바닷물을 보자, 수 없이 많은 개개의 하천수가 강으로 흘러들고 강은 또 오대양으로 흘러든다. 이렇듯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 물(H2O) 또한 수소2와 산소1으로 이뤄져 있다 一 불교의 인간관이라 할 할 수 있는‘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화자는 물의 성격과 특성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곧 나와 너, 타인과 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심화시켜 시인의 눈과 감성으로 보고 느끼며 물이 비우고 흐르며 쓰는 문장을 방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살며 살아가며, 우리는 여울물 같은 잔잔함으로, 때론 폭포수 같은 강렬함으로 그냥 흘러버린 듯, 또는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에겐 치명적이고 비수로 꽂히기도 한다. 그것을 안고 있으면 상처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기에 울음을 토해 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막혀오는 숨통을 트이기 위해 화자는 들숨 날숨으로 벗어나고자 살 속을 헤집어 길을 만들어간다.
물의 특성은 흐름이고 증발이다. 흘러간 자리는 다시 흘러 들어오고 증발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움과 채움의 반복이고 순환 원리다. 광화문 광장도 비워져야 집회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모든 주체는 비워야 한다. 무언가로 채우려 하고 채운다면 주체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객체일 뿐이다. ‘뭉침과 버림’,‘들어감과 나옴’이라는 물의 원리 앞에 화자는 사람과의 관계와 삶의 방식을 ‘물의 원리’에서 가져와 물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자기 비움”의 의미를 기독교에서 케노시스(Kenosis)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비워 자기 마음 안에 주님으로 가득 채우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케노시스의 영성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도 비워지지 않은가. 니체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덧없는 그림자다’고 했듯이, 삶을 의미로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하나의 그림자로 남은 삶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생명의 근원인 물은 시인에게는 자연의 사물을 들여다보는 시적 감수성의 매개체이다. 시적 화자는 가볍지 못한 무거움으로 물처럼 흐르고 있다. 비록 나약함처럼 비추일지언정. 시인은 비워짐이다. 텅 빈 마음의 공간을 매우고 채우기 위해 시를 쓴다. 결여된 공간이 없으면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자기 자신이고 자아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물의 이야기”는 시인 자신이고 물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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