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15(수)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20.02.12 18:54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고양이로 하여금 쓰레기 봉지를 찢도록 한 것은
생선 찌꺼기의 비린내였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 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객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 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고양이는 쓰레기 봉지를 거침없이 찢어놓고
사라졌다 쓰레기 봉지를 테이프로 봉합하며
너덜거리는 내 생은 무엇으로 봉합하나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천년의 시작. 2002
 
홍영수-김충규 시.png
알베르토 자코메티 , 사진/홍영수, 장소/한가람미술관. 2018년

 -----------------------------------------------------------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이 사라지거나 공상 같은 현실이 눈앞에 번뜩 나타날 때는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분신을 통하여 자아의 죽음을 부정하면서 한 줄기 희망을 품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이 분신이라 여기는 것과 마주할 때 억압되어있는 절망이나 죽음의 공포를 떠 올리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Uncanny(두려운 낯섦)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이 모습에서 화자가 처한 작금의 상황과 비슷한, 어쩜 데자뷔의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굶주리며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새끼들을 위해 비닐을 찢고 있는 어미 고양이. 생선 뼈 한 조각 얻기 위한 고양이의 눈은 어둠의 터널과 같은 것이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화자는 두렵게 다가온 낯설음(Uncanny)’ 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고양이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은 생의 의미, 관계의 의미 등 다양한 의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런 의미들이 때론 눈앞의 현실에서 멀어지거나 또는 흩어져 버린다. 니체의 표현대로 나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낼 모레면 불혹의 나이다. 어찌하랴 젊디젊은 나이에 폐결핵을 앓고 있는 화자는 무엇 하나 보탬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방인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 비록 철없는 자식들일 망정 툭툭 던지는 말 한미다가 가시가 되어 폐부 깊숙이 찌른다. 아프다. 어쩜 삶에서 가장 아픈 아픔일 것이다. 지쳐버린 영혼의 근육에 등불을 켜지 못하는 가장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에서 보듯 도망치듯이 의미는 뭔가에 쫓기듯 급히 달아나는 모습이다. 어쩜 아내가 도망치듯이라는 표현은 쉽게 쓸 수 없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폐결핵을 앓고 있는 화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픈 가슴에 출근하는 아내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헉헉거렸는지도 모른다. 이때 먹는 알약은 목에 넘기는 순간 바로 배설되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아버지로서의 위치에 따른 가족부양 등을 실현코자 하나 현실이 따라주지 못한 상황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특히 대부분 문화 예술인들이 그러하듯 경제적 관념에 밝지 못한 시인이기에 더욱 그렇지 않을까. 가족을 짊어져야 할 책임감, 그 멍에를 걸머지는 가장의 강박관념은 때론 의도치 않게 다른 방향으로 흐르다 폭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디오니소스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멀게 느껴지는 관계망에 사로잡히면 소화불량에 걸릴 수밖에 없다. 생각의 힘줄을 키우며 스스로 비우고 의도적인 망각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거북스러운 뱃속이 상쾌해지고 걸머진 멍에의 창문을 닫을 수 있다.

 

가끔 거울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거울 속의 나를 어찌하든 꺼내어 자신의 눈을 후벼 파고 싶었을까.

 

고양이는 시인 자신이다. 봉지를 찢고 다시 봉합하는 고양이지만 정작 현실의 화자는 그 무엇으로도 봉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고양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자신을 닮은 두렵고 두려운 낯선 언캐니의 현실이지만.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현실의 나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것이다.

 

죽기 며칠 전, 화가인 고흐가 동생 테오와 그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자. “내 생활은 뿌리가 뽑히고, 내 걸음걸이도 휘청휘청한다. 나는 내가 너희들의 저주스러운 짐짝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음악가 라벨이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 요양원에서 탄식하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 조각씩 사라져 간다.”라고.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태그

전체댓글 0

  • 22444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