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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회(夜會)- 1회

김찬숙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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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5.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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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동(三冬)에 놈이 산으로 도망친 것부터가 무슨 조화 속임이 분명했다. 황노인은 그것이 어쩌면 억수로 퍼붓는 눈발 속에 신비의 자태를 감추고 있는 저 소래산이 부리는 조화가 아닐까 싶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소래산을 진산이니 성산이니 신산이라고들 불러왔고, 밤만 되면 산은 온통 도깨비 세상으로 변해, 천지에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고, 길 잃은 나그네들이 여인에 홀려 길을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는 전설을 즐겨 말해오지 않았던가. 자고 깨면 언제나 거기 얼굴을 마주해 온 산, 돌이켜보면 한 평생을 저 산의 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보지 못한 것부터가 이미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의 이끌림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걸음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면서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산정을 향해 한사코 씩씩거리며 내딛고 있는 황노인의 모습은 흡사 한 마리 늙고 병든 살쾡이를 연상케 했다. 본디 살점 한번 제대로 세워보지 못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며칠씩(그것이 이틀쯤인지, 사흘쯤인지,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여러 날이었는지 황노인으로서는 도저히 셈할 수가 없었지만)이나 미음 한술 뜨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덕지덕지 엉겨 붙은 눈곱 사이로 비치는 충혈된 눈과 봉두난발의 몰골은 늙은 살쾡이 그 자체였다. 이놈아, 어리석은 놈아! 네가 도망친다고 어디까지 칠 게여, 어디까지! 들판을 지나고 서낭 앞을 지나 산문에 들어서자 노인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지 더욱 거칠게 씩씩거렸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한때의 절규도 어느새 젖어드는 넋두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본 -DSC_3624신문2020년 5월.jpg

 

 

겨울철로서는 좀체 보기 힘든 흙먼지 바람이 미친년처럼 앙칼진 소리를 내며 먹장구름 떼를 몰고 소래산으로부터 내리던 날, 그래서 단숨에 저 아래 마을 계수동 일대까지 마치 일식하는 날처럼 캄캄하게 어두워오던 날, 바로 그날부터 황노인의 악몽도 함께 시작되었다. 생전에는 한 번도 흡족스레 다루어보지 못했던 죽은 아내 우심의 알몸뚱이가 어느 때는 죽어 자빠지는 황소처럼 무겁게 얼굴에 덮쳐오고, 또 어느 때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해괴한 짓거리로 덤벼들어 그때마다 황노인은 까무러치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까무러치고 깨어나 다시 까무러치기를 거듭하는 날들이 대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오늘(그것이 아침 무렵인지 또는 저녁 무렵인지도 황노인으로서는 확신이 안 섰지만) 황소가 집을 나가기까지 악몽에 시달려 온 날들이 과연 며칠간이었는지 황노인으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무르팍을 훨씬 웃도는 눈이 쌓였고, 또 그렇게 쌓인 눈이 방금 내린 눈 같지 않게 꽤 솔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꽤 여러 날이 지났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 소래산으로부터 미친 흙먼지 바람이 내리던 날만 해도, 그러니까 황노인이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하던 그날까지만 하더라도 눈이 올 징후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지 않았던가.

아닌 게 아니라 황노인은 잠(그것을 잠이라고 불러야할지, 까무러침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는 꿈이라도 불러야 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속에서도 다만 억수로 퍼붓고 있는 눈발을 보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 잠 속에서 뿐만 아니라 잠깐 잠깐 깨어나서도 그때마다 또한 억수로 퍼붓고 있는 눈발을 보았었다. 그러니까 끝도 없이 덤벼드는 죽은 아내 우심의 망측스러운 알몸뚱이에 깔려 까무러칠 그때마다, 까무러친 잠속에서, 또한 깨어서는 깨어있는 대로 다만 퍼부어오는 눈발을 보고 있은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흰 눈발이 시야를 어지럽히던 그때, 그 눈발사이로 우뚝 모습을 드러낸 망할 놈의 황소, 놈은 분명 부엌 아궁이 건너편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할 터인데, 소 방울을 울리며 커다란 궁둥짝을 보인 채 유유히 흰 눈발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망할 놈 같으니라구! 이젠 네 놈 까지 날 버리겠다구? 망할 놈! 망할 놈!

 

-다음회에 계속 

 

김찬숙.png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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