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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임동석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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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7.1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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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모과나무/임동석

    

당신의 마당가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바람을 궁글리어 푸르게 짓는 그늘

빈손의 가을이어도 향기만은 짙었지

 

매달린 아홉 식구 가지 휘청 휘어져

감겨오는 마디마다 꿈 하나로 다그쳐 온

익숙한 동구밖 길에 젖은 눈길 하염없네

 

빈 나무에 기대앉은 등 굽은 그림자가

접힌 자국 지워가며 길 끝은 다독이는

어머니 가녀린 손을 묵은 향이 잡아주네.

      

2016시조문학사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모과나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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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에서 은유는 시니피앙(signifiant)(시니피에signifier)가 상호 배제되며 이루어지는 공간이면서 의미작용의 기초가 되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징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이나 문학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독자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어떤 때는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이런 점에서 상징은 독자를 옭아매는 장치이기도 하다.

 

작품을 보자모과나무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상징물이다. ‘푸르게 짓는 그늘의 젊은 시절엔 비록 텅 빈 곳간이나 쌀이나 보리를 넣어놓은 뒤주가 휑하더라도 자식들의 성장하는 모습으로 흠뻑 채워 마음만은 옴팡졌으니 흔한 표현으로 텅 빈 충만의 생활이 아니었겠는가.

 

알다시피 모과나무는 굉장히 단단하면서 樹皮는 매끈하지만 줄기는 딱딱하다. 벌레 등의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함인지 가지는 거칠어 다루기 힘들다.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모과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 즉 어머니가 화자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는것이다.

 

모과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매달고 있다. 사람이나 과일나무나 가을의 결실은 뭐니 뭐니해도 열매이다. 단단한 나뭇가지일지라도 한 가지에 아홉 열매를 맺었으니 휘청일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아홉 개의 열매에 햇빛과 수분, 질 좋은 토양만으로도 힘겹고 어려운데 때론 천둥과 번개, 暴風寒雪의 시기도 넘겨야 한다. 그러하니 어찌 百骸九竅에 상처 없고 아픔이 없으며 깨물러 아픈 손가락이 없겠는가. 그래도 어떤 시련과 역경, 험난한 길도 자식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밟고, 딛고 견디며 일어서야 하는 운명의 여신 아난케Ananke, 바로 어머니이다. 이러한 어머니에게도 여러 겹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면서 키워 온 꿈들이 살그머니 눈가로 다그쳐 온다. 동구 밖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 훔치며 혹여 걷는 모습이 익숙한 걸음걸이인가 살펴본다. 이때 화자는 젖은 눈시울에서 묻어나온 가슴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시골에서 모닥불을 피울 때 타오르는 불꽃의 심장 속으로 뛰어든 불나비, 하루살이를 무모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면 어떤 흔적도 없는 완벽한 사라짐. 자신을 버리고 此岸에서 彼岸의 세계로 향하는, 채우기 위해 버려야 하는, 어머니의 삶이란 바로 자신을 버리고 또 남은 찌꺼기까지 씻어내어 다 나눠주고 퍼주는 비움의 삶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젠 세월이 흘렀다. 모든 열매를 떨군 뒤의 빈 나뭇가지,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낸 동병상련의 등 굽어 가 된 어머니. 그동안 서로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고, 그러나 지금은 서로가 쓸쓸하다고, 외롭다고, 휘어졌다고 그리고 적적하다고, 묵은 향으로 다잡아 준다고, 그래서 김종삼의 <묵화>가 생각난다고……

 

김종삼의 묵화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조에서 초심자가 3수로 연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무조건 늘인다고 연시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시어들만의 배열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립된 주제가 각 수에 통하며 통일성과 조화가 있어야 하기에 연시조 창작은 매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시어들의 배치인 行馬法과 특히 율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에 초심자는 단시조부터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데도 유장한 호흡과 율격처리, 그리고 주제의 연결성에 성공한 작가는 초심자임에도 불구하고 정형시 3 연수의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수많은 창작 실기의 고통과 고뇌의 시간으로 몸소 습득한 결과물이리라

 

첫수에서는 푸르러서인지향기가 짙었고셋째 수에서는 노년의 길목이어서인지 묵은 향이 되어 잡아준다고 했다. 발상의 飛躍이 아닐 수 없다. 창조의 능력 없이는 어렵다. ‘바람을 궁글리는힘찬 나무가 휘청 휘어져지고, 이젠 빈 나무가 되었다. 어머니의 일생을 초년, 중년, 노년으로 구분하여 맺고 푸는 시어와 문장의 배열이 놀라운 詩作임이 틀림없다. 평범한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한다는 것, 그래서 시인을 見者라고 할 것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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