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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회(夜會)- 5회

김찬숙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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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7.21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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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숙 소설가

황노인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온 천지는 온통 흰 눈으로 덮였고, 언제부터인가 보름달이 검푸른 달무리를 안고 떠 있었다. 집을 나서 산으로 오르던 때의 그 미친 듯이 휘날리던 흰 눈발들의 군무는 정녕 꿈이었는가. 그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만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달은 검은 구름들 사이를 지나 소래봉 위에 걸려 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고개를 돌려 멀리 안골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다. 거기 어둠 속에 온통 눈을 뒤집어 쓴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노인은 흰 눈 속 마을 위에 내리는 별빛을, 절반쯤 눈에 묻힌 채 바라다보았다. 결코 자기의 몫일 수 없는, 온전히 다른 사람들만의 몫인 달빛을 노인은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별들은 또 하나의 마을을 만들어 다정하게 함께 어우러져 빛나고 있었다. 황노인은 영영 누릴 수 없는 빛나는 하늘 마을, 그 마을의 온기가 오직 그에게만은 그토록 시리게 느껴졌다. 그는 가느다랗게나마 한번 울어보고 싶었지만 기운이 다해서인지 도저히 울음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죽어서도 저 하늘 마을의 일원으로 살 수 없으리란 걸, 저에게는 작은 울음조차 허용되지 않으리란 걸,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멀리 큰 바위 위의 등성이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제 집 드나들듯 하루에도 몇 번씩 내달음 치던 곳, 먼 남의 일이 될 것이다. 거기에 황소는 있기나 한 걸까. 그럴 리 없지! 황소도 늙은 내가 싫어졌을 테지. 그럴 거야, 모두가 그랬으니까. 모두 어디론가 멀리 멀리 가버렸겠지. 흔적을 감춘 우심이처럼. 또 땅꾼 서씨와 야반도주한 어머니처럼, 그리고 어린 자기를 이 세상에 내팽개친 채 죽어간 아버지처럼.

 

그가 어둠 속에 달빛 받은 흰 눈을 입에 쑤셔 넣자 이제까지와 달리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 세상은 오직 황노인 자신에게만 가멸차고 한 점 정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우심 또한 그를 늘 가슴 아리고 쓸쓸하게 만들었었다. 쉬이 몸을 허락하지도 않았고, 소래산 도깨비 장군상만을 끌어안은 채 그에게는 더 없는 욕망과 허기, 갈증만을 허락했다. 다시 눈을 입에 쑤셔 넣어 보았지만 설움만이 몰려 왔다. 그러자 가슴 깊은 곳에서 굉음과 함께 울분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노인의 심장에 쩍쩍 금이 가더니 이내 심장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은 엉엉엉엉 온 몸을 들썩이며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resized_20160119_071926_1618985811신문2020년 7월.jpg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래봉에 걸렸던 달이 숨자 멀리 화사한 불빛들이 황노인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때마다 여름날이면 이 일대를 뒤덮었던 도화(桃花) 향기가 한 겨울임에도 꽃향기와 함께 꽃비가 되어 날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리에 결계를 치듯 복숭아나무들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나무에서 흘러나온 꽃잎들이 노인을 감싸 돌았다. 그러자 아뿔싸!! 쾌자와 패랭이를 쓴 열여덟 앳된 아내 우심이 망자를 떠나보내는 씻김굿을 하던 그 차림으로 한 무리의 사당패와 어울려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뭐여! 이제 내게 마지막 굿판이라도 벌릴 셈인가.

노인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멍 했다. 조금 전 꿈에서 본 그대로 온 천지는 일시에 황홀하게 도깨비 불꽃들이 일렁이며 급속도로 물들어 가는가 싶더니 이내 징소리와 장구, 피리소리가 실린 굿판의 격렬한 울림이 이어졌다. 앳된 우심이 징소리와 함께 혼맞이 무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도깨비 탈을 쓰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소리를 냈다. 황노인 스스로가 도깨비에 홀렸구나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이처럼 황홀하게 물들이는 굿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을 드러낸 검은 하늘과 온통 백색 눈에 휩싸인 소래산 중턱에 정령처럼 불꽃이 일자, 이것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확신과 함께 결코 자기의 몫일 수 없었던, 온전히 다른 사람들만의 몫이었던 우심이의 굿판을 볼 요량으로 가슴이 뛰었다. 자기 곁을 떠나 어디론가 멀리 멀리 가버린 황소, 또 어린 자식을 버리고 떠나간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기를 이 세상에 내팽개친 채 죽어간 아버지, 죽은 아내 우심이의 혼들이 돌아와 오직 자신을 위한 씻김굿을 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었다.

제 집 지나들듯, 이 산문(山門) 어느 한 곳도 그의 체취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있을까. 소래산 도깨비만큼 그의 쓸쓸함을 알아주는 이 또 누가 있을까.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우심이를 불러들여 굿판을 열고, 굿판이 끝난 뒤 노인의 혼을 앗아간들 그는 이제 아무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온 천지에 굿거리 소리가 자욱하게 퍼져나가고 춤꾼들의 형체가 사그라질 무렵, 그를 굽어보는 검은 그림자를 그는 보았다. 거기에 황소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서 타야해요! 어서!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해 황소의 등판에 올라탔다. 그리고 흰 눈이 쌓이는 소래산을 뒤로 하고 그는 황소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 끝 --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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