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24(목)

순환을 꿈꾸며/이종숙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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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0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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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순환을 꿈꾸며/이종숙


이것은 미칠 듯한 방황이었다 
세상 것의 대한 미련은
허공을
무수히 떠다니고
한순간 분해될지 모를
생의 기도는
순환을 꿈꾼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살다가 살다가  
가벼운 무게조차 이길 수 없을 때
나는
넓디 넓은 허공이 되겠다
깊고 깊은 침묵이 되겠다.
시집 <이름도 외로움을 탄다>. 산과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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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해남 풍경/ 홍영수. 2019.

 

우린 태어나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주어진 시간 속에 살아간다. 시계의 초. 분침을 쳐다본다든지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인식하기도 한다. 특히 생의 황혼기에 뒤돌아보는 삶의 발자취는 걸어온 만큼 축적되어 쌓인 시간이다. 우린 이미 주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노예였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적이고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한다.
이에 반해 아이온의 시간은 크로노스에 균열을 내며 갑자기 다가오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뭔가 ‘되어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나를 압박해 와서 나를 나답게 느끼게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시간을 가지고 사건을 전개한 사람이 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입사해서 정년퇴임하고 입학해서 졸업하는 등의 크로노스의 시간과 살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서 내가 변하는 순간 등의 아이온(Aion)의 시간. 이 두 시간은 내 안에서 함께 공존한다.
작품을 보자. 순환을 꿈꾸기 위해 ‘미칠 듯한 방황’을 했다. 이미 크로노스와 아이온이라는 병존의 두 가지 시간을 겪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느끼며 겪고 있다.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의 겹이 두꺼워진 나이, 즉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이 석양을 향하고 있을 때 아이온의 순간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미치게 방황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삶의 뒤편에서 돌아다보는 발자국, 내 모든 것들의 기억이고, 과거이고, 흔적이기에 미련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젠 허공에 흩뿌리고 날려야 한다. 그렇지만 간절한 기도가 순간 허공에 분해되어 휘날릴지라도 ‘삶과 죽음’즉,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아니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은 꼭짓점에서 부활을, 윤회를, 순환을 꿈꾸어 본다.
그러나 화자는 알고 있다. 이미 ‘순환을 꿈꾸며’라는 제목이 말하듯 ‘순환’은 ‘꿈’이라는 것을. 여기서 ‘순환’은 그리스도교의‘부활’, 이라기보다는 불교적‘윤회’를 뜻하는 게 아닐까 한다. ‘부활’과 ‘윤회’는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아님 종교적 색채를 피하기 위한 중성적 의미의 표현일 수도 있다. ― 불교에서의 윤회는 생명이 순환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뜻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해탈’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환생과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환하는 것이다. 해탈이 아닌 순환을 꿈꾸며 기도하지만 어느 순간 와해됨을 화자는 알고 있다.
마지막 연의 ‘살다가 살다가/가벼운 무게조차 이길 수 없을 때’는 이미 화자는 지금까지 태어나 살며, 살다가, 살아오는 과정 속의 티끌만한 무게조차 견딜 수 없을 때, 아니, 견딜 수 없음을 알고서 이젠 ‘허공’과 ‘침묵’이 되겠다고 한다.
타나토스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 종교적 세계관의 사유를 떠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쉼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순환’을 꿈꾸어 보지만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을 화자는 간파하고 있다.
사약을 마시기 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있다(확실치는 않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神만이 알 것이다.” 계절이 변하고 젊음에서 늙음으로 변하듯 삶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로 자기중심적인 나에게서 정신적인 나에게로의 해방적 변화를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삶도 죽음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과거의 나에서 현재의 나, 미래의 나로 변해야 한다. 어느 스님의 偈頌을 보자
生也一片 浮雲起 생야일편 부운기 /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 浮雲滅 사야일편 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사라짐이다.
浮雲自體 本無實 부운자체 본무실 / 구름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느니.
生死去來 亦如然 생사거래 역여연/ 삶과 죽음 오고감이 이와 같도다.
내가 없는데 내가 되려고 한다. 내가, 내가 되면 내가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 순간일 때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니어야 하는데 자꾸 내가 되어가려고 하는 순간 화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를 비워서 ‘虛空’이 되고 ‘沈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허공’과 ‘침묵’은 바로 나를 비운 ‘虛心’에서 나온 ‘無我’일 것이다.‘무아’는 ‘我’의 있고 없음의 유무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諸法無我’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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