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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향기-월정사 전나무 숲길

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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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0.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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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천년 향기-월정사 전나무 숲길

강수경

 

온 우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한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일주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산도産道를 뚫고 태어난 것인지

한 알 씨앗이 된 것인지

 

수행자의 상아詳雅한 비질이 품은 숨결

맨발로 전해져 오는 다지고 다져진

연한 흙의 기운

살과 살이 맞닿는 부드럽고 상쾌한 몸살

 

하늘 향해 뻗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을

침묵 수행자 되어 걷노라면

온몸에 푸른 물이 들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금강교 밑으로 흐르는

우통수 계곡물 소리

넉넉히 품는 사람 되라는 설법처럼 들리고

아리도록 차가운 물에 세족洗足하고

숲길을 돌아 일주문에 닿으면

순풍, 천년 향기로 세상에 던져진다

 

*계간 미래시학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 회원

 

오대산 월정사 일주문신문2020년 7월.jpg
오대산 월정사 일주문

 

필자는 사찰 답사를 자주 하곤 하는데, 어느 해 겨울,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아가는 길에 월정사를 들렀을 때 뜻하지 않게 절간에서 대규모로 김장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선하다. 월정사대가람의 김장하는 울력에서 사찰의 전통을 보았었다.

 

一柱門은 기둥이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란히 한 줄로 되어있어서 유래된 명칭이다. 넓고, 높게 생각하면 수미산須彌山의 우주관에서 보면 일주문은 향수해 (香水海)를 건너 수미산에 접하는 최하단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화자는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을 가려고 하는 첫 발자국에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産道를 뚫고 태어난 것인지/한 알 씨앗이 된 것인지이런 찰나적 순간은 일반적으로는 경험하기 힘든 경우인데, 화자는순간적 진실의 포착, 어떤 본질이나 사물에 대한 직관이나 통찰인 ‘epiphany(에피퍼니)’를 느낀다. 한마디로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논리나 판단을 벗어난순간의 직관, 통찰속에서 어떤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분절되는 문 없는 문 일주문에서 화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단절되지만 결코 분절되지 않는 경계에서 어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산도를 통해 생명이 탄생하듯 俗埃의 번뇌로 흩어지고 부수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一心으로 豁然大悟하며 화자는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어느 사찰이든 들어서는 초입부터 길과 주변이 항상 정갈하고 티끌 하나 없는 듯하여 찾는 이의 마음이 상쾌하다. 스님의 비질은 수행의 과정이며 비질하는 행위를 보면 수행하는 마음과 불심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비질을 한 절 마당에서 맨발에 스며드는 흙의 숨결을 화자는 느끼고 들이마시며 상쾌한 몸살의 역설을 체험하고 있다. 온갖 탐욕과 욕망, 증오심과 노여움 등으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잃은 어리석음 등의 탐진치貪瞋痴를 비질한 절간에서 화자도 함께 비질하며 쓸어버리고 있다. 그러니 三毒으로 몸살을 앓은 마음이 상쾌할 수밖에 없다.

 

월정사 가는 전나무 숲길은 고즈넉하고 뭔가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든 숲길이다. 내가, 내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가 되는 길, 말없이 걷기만 해도 전나무의 푸른 잎은 화자를 전나무가 되게 한다. 또 다른 종교적 관점인 케노시스kenosis , , 자기 비움을 통해 내가 전나무가 되고 전나무가 내가 되고 있다. 묵언 수행의 길에서 곧게 뻗은 한 그루의 전나무가 된 것이다. 어찌 부처와 중생이 다르단 말인가. , 깨달음과 無明이 다르지 않고 나와 전나무가 다르지 않으니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인 不一不二의 세계관을 화자는 숲길을 걷으며 깨닫고 있다.

 

그리고 한강의 발원지라 알려진 우통수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전나무가 나를 품고 내가 전나무를 품는 넉넉한 현상들이 큰스님의 설법처럼 들려올 때 법열을 느끼며 차가운 계곡물에 화자는 발을 씻는다(洗足).

 

여기서 좀 아쉬운 점이 있다. 가톨릭의’‘洗足式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동양의 古典이나 詩文에선 洗眼濯足이라 하여 얼굴을 씻을 때는 자를 쓰고 발을 씻을 때는 자를 주로 사용한다. 굴원의 <어부사>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와 조선 중기 화가 이경윤의 高士濯足圖등이 그렇다. - 오직 필자의 협량한 견해임을 밝혀둔다. -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일주문에 들어선다. 또다시 일주문에 다다른 화자는 어쩜 월정사를 들고, 나옴에서 윤회의 의미까지 되새기는 것 같다. 중생의 돌고 도는 삶에서 잠시나마 순풍을 타고 천년의 향기로 던져지고 싶은 마음, 화자에게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의 체험은 삶의 해시계가 되었을지 모른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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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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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동

고즈넉히 절을 돌아보던 때 차분해지는 마음이 되세겨지네요:). 한자가 많아 읽기는 어려웠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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