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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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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2.0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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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생/명실

 

쌓여지는 날들의 두께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

     

*부천 디카시 회원

 

홍영수 사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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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다가오고 누군가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어떤 인생살이는 하루하루가 새털처럼 가볍고 날아갈 듯한 세월이라면 또 다른 인생은 세월의 무게가 천만 근의 짓누름으로 깊은 심연만큼이나 버거울 것이다. 삶이란 그렇듯 시대적, 개인적인 상황 논리에 따라 공통분모가 있고 교집합이 있고, 배타적,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한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시가 시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시인의 삶 또한, 시로 연결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없다. 어쩜 시인은 줄 아래의 땅과 줄 위의 허공 사이에서 어름을 타는, 시와 삶 사이를 아슬아슬 버티고 서는 어름사니가 아닌가 싶다.

 

시인의 눈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메마른 나무가 표의 문자로 다가오기도 하고 하얀 눈이 쌓인 초가지붕의 이미지에서 시라는 문자의 옷을 입기도 한다. 조선 시대 대학자 정인지는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을진대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을 것이다했다. 어쩜 조선 초기에 이미 디카시를 예언한 말 같이 들리기도 한다. 특히 디카시를 쓰는 시인은 눈에 잠기고, 담긴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짧은 시행으로 시의 혼을 불어넣을 때 무겁고 버겁게, 때론 가볍게 다가올 것이다.

 

화자의 바로 눈앞에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상징하는 일력日曆이 놓여 있다. 하루가 지나면 젊은이들은 그냥 의미 없이 확 찢어 버릴 얇디얇은 하루를 화자는 모아 모아 놓고 비록 지난 날일 망정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그런데 그 풍경이 풍경으로 보인 게 아니고 인생살이의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한 스투디움이 아닌, 푼크툼으로 확 박힌 것이다.

 

바로 지난 하루(16)와 지금의 오늘(17) 사이에서 꾹 집어놓고 바라본 저 두께, 그래서일까 17일의 하루는 반듯한데 지난날들은 지나갔다는 듯 옆으로 돌려놓았다. 저렇게 쌓인 날들의 웅변하는 침묵 속에서 디카시라는 침묵의 울림으로 화자는 단단히 깊어져 가는 삶을 건져 올리고 있다. 화자는 분명 무거운 나이이다.

 

8,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날이다. 더구나 17, 18일이면 중순이다. 얼핏 보아도 탁상용 일력日曆이 분명하다. 한 주의 쉼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인 17일 맞는다. 아니, 어쩜 하루가 기우는 오후쯤, 일요일의 휴식 한 장을 떼어내어 집게로 꼭 집어놓았다. 하루라는 종잇장도 감정을 잃고 붉게 물들어 일요일로 누워있다. 하루하루의 시간과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두께도 꽤 두터워 보인다. 화자는 그 지난날을 쌓여 지는 날들의 두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두꺼운 만큼 단단하고 깊어져 가는 삶이라 얘기하며 시제의 제목처럼 인생두께단단하고 깊은 삶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뜯어내어 차곡차곡 쌓아 놓은, 흘러가면서 존재하는 시간과 세월 속에서.

 

17일의 날짜에 당나라 시인 우세남의 <매미>의 시가 적혀있어 완본을 옮겨본다.

 

垂緌飮淸露(수유음청로) 드리운 빨대로 맑은 이슬 마시며

流響出疏桐(유향출소동) 오동나무에서 울음소리 울려 퍼진다

居高聲自遠(거고성자원) 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

非是籍秋風(비시적추풍) 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

 

혹여 화자는 우세남의 시를 보고 시상을 떠 올렸을지 모른다.“높이 있기에 저절로 멀리까지 들리지/가을바람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네했듯이 화자는 인생이란 그 무엇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두터워져 가는 삶이 바로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만물은 生成하고 死滅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 잡고 막을 수 없으며 시간 또한, 멈출 수도 없다. 이렇게 소멸하고 생성하는 커다란 자연 앞에서 일력이라는 자그마한 이미지를 보고 다소 거창하고 과한 듯한인생을 발견한다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다.

 

디카시에서 이미지는 시인의 의식 속에 내재 되어 문자 언어와 함께 태어난다. 그러므로 문자와()와 이미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디카시가 성립된다. 이렇다고 할 때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문자에 예시되지 않고 문자 또한 이미지를 설명하듯 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곧 이미지가 문자이고 싶어하고 문자가 이미지이고 싶어 할 때 좋은 디카시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론이나 시학에 앞서 태초부터 대자연의 수북한 풍경이 주는 주머니 속에서 시혼을 일깨워 끄집어내는 시인들의 생각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이다. 저 얇고 엷은 종잇장과 셰익스피어는 간결은 지혜의 상징이라 했듯이, 2행의 글 줄 앞에 여백마저 시이게 하는, 그래서 진한 페이소스가 전해오는 한 편의 디카시다.

 

디카시는 이미지의 언어로 빚는 장엄한 시혼이 아닐까.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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