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펄 벅의 『대지』, 그 광활한 파노라마가 주는 메시지/박희주 (소설가)

우리는 땅에서 나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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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2.1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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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펄 벅의 대지는 제1부 대지, 2부 아들들, 3부 분열된 일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고자 한 의도는 바로 1부에 있을 것입니다. 2부와 3부는 제가 보기엔 사설입니다. 1부 대지만으로도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왕룽이라는 농부입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본 -사진10.jpg

룽의 결혼식 날 아침이었다. 침대에 둘러친 휘장의 어둠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왜 이날 새벽이 다른 날과 별다르게 느껴지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집안은 늙은 아버지가 맥없이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뿐 아주 고요했다.

 

왕룽은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그 지역의 대지주인 황 대인의 종노릇을 하는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아버지의 며느리에 대한 주문은 너무 젊어서도 안 되고, 무엇보다 예뻐서도 안 되는여자입니다. 그녀가 바로 오란입니다. 작품 속에서 오란에 대한 인물묘사는 얼굴이 넓적하고 키가 훤칠한이란 말이 전부입니다. 거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과히 크지도 작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깔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듣기에 아주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돼있습니다. 왕룽은 그러한 오란에 만족합니다.

그들은 부부가 함께 열심히 일합니다. 연이은 풍년 덕에 해가 갈수록 왕룽의 자식은 늘어가고, 땅도 늘어가지요. 그 땅은 바로 황 대인의 것으로 아주 기름진 논이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 땅만 한 게 없고 모든 생명이 대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왕룽입니다. 이런 왕룽의 행복을 시기한 탓인지 하늘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남은 곡식을 다 먹고 밭을 가는 황소까지 잡아먹어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셋이 되었습니다. 그 중 딸아이는 정신지체인 백치이고. 그 와중에도 오란은 혼자서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왕룽은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는 뜻밖에도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대지의 가장 압권일 수도 있습니다.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은 아이를 다른 방으로 안고 가서 그것을 방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안을 뒤져 다 해진 포대기를 찾아 죽은 아이를 쌌다. 죽은 아이의 머리는 이리저리 달랑거렸고, 죽은 아이의 목 근처에서 두 개의 거무스름한 멍을 발견했다.

 

오란이 죽인 겁니다. 이제 막 낳은 아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모정, 먹을 게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 오란은 그 같은 일을 저질렀던 겁니다. 남은 아이들도 뼈만 남은 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바람에 먼지만 일렁이는 땅뿐. 그 땅을 팔라고 성안에서 사람이 옵니다. 왕룽의 비참한 상태를 알아챈 그들은 거저먹으려 합니다. 왕룽은 말합니다.

 

절대로 땅을 팔지 않겠소. 한 줌 한 줌 밭의 흙을 파다가 우리 자식들에게 먹이겠소. 그러다가 애들이 굶어죽으면 그 땅에 아이들을 묻겠소. 나도 내 아내도 우리 아버지도 우리에게 생명을 준 그 땅에 묻히겠소.

 

땅은 왕룽에게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왕룽의 가족은 굶주림을 피해 남쪽 지방으로 피난하게 됩니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남쪽 지방에서 왕룽의 가족은 빈민굴에서 그 도시의 최하층민으로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인력거꾼으로 돈을 버는 왕룽과 동냥으로 살림을 꾸리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간절합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대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땅이 그곳에 있는 한 기필코 돌아가리라는 게 왕룽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 기가 막힌 처지에서 왕룽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전쟁이 나면서 비밀스럽게 닫혀있던 부잣집의 빗장이 풀리고 성난 빈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부잣집에 쳐들어가서 돈 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다 가져오게 되는데 여기서 소 한 마리 제 손으로 죽이지 못했던 왕룽은 부잣집 뚱보 주인을 협박하여 금화를 얻게 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자금을 마련하고, 특별히 오란은 황대인의 하녀로 있으면서 부자들의 돈 숨기는 습성을 알았기에 값비싼 보석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왕룽은 금화와 오란의 보석으로 황 대인의 땅을 사고, 크게 농사를 지어 점점 더 대지주가 되어갑니다.

여기까지 보여준 것은  왕룽의 땅을 향한 집착입니다. 그 이후 대지주가 된 왕룽의 정신적 피폐와 고뇌를 펄 벅은 가감 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왕룽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백치인 딸도 편안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지만 자신과 힘든 나날을 함께한 조강지처 오란을 두고 부자 행세의 하나로 리엔잉이라는 둘째 아내를 들여오게 됩니다. 그런 데 반해 오란은 남편의 구박과 무관심 속에서 살림만 할 뿐입니다.

세월은 빠르게 흐릅니다. 오로지 일과 아이를 낳는 것과 왕룽이 대지주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오란은 병이 깊어가다가 큰아들의 결혼식을 지켜본 후 고단했던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죽기 전 난생 처음으로 속마음을 내비칩니다.

 

난 못났다. 하지만 아들을 낳았어. 난 종이었지만 내겐 어엿한 자식들이 여럿 있어. 저 계집(리앤잉)이 어떻게 나만큼 남편의 식사를 돌봐주고 시중을 들 수 있단 말이야? 어림없지. 예쁘기만 해가지고선 아들을 못 낳아!

 

오란이 죽은 후 늙은 아버지도 죽습니다. 왕룽은 묏자리로서 대추나무가 서있는 둔덕 아래 양지 바른 곳을 택합니다. 지대가 높아서 밀밭으로 썩 좋은 곳이었지만 왕룽은 그 땅을 아낌없이 묏자리로 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가문이 자기네 소유의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생에서 유일하게 골치를 썩이게 했던 삼촌도 죽어 그곳에 묻혔습니다. 아버지나 자신이 묻힐 곳과는 달랐고 좋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살았거나 죽었거나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또 흐릅니다. 신은 왕룽의 말년을 편하기 해 주기 위해 친절을 베푸는 것만 같습니다. 그 예날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 성안 황 대인의 집을 사 모든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된 겁니다. 농사꾼 왕 서방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이젠 왕 대인이나 왕 부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안에 살면서도 날만 새면 성문을 걸어 나와 농토로 돌아갑니다. 매캐한 흙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밭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왕룽은 아쉬울 것 없는 생활을 즐깁니다. 첩인 리앤잉의 수발을 들던 예쁜 리화마저 품게 되었지요. 리화는 백치 딸에게도 친절하기만 합니다. 왕룽은 그가 죽고 나면 백치 딸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 백치가 살거나 굶어죽거나 하는 것에 관심을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약방에서 하얀 독약 한 봉지를 사다가 보관해 두었을까요자신이 죽음을 맞게 되면  그 독약을 백치 딸에게 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그러한 걱정을 리화 때문에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왕룽에겐 해가 갈수록 새봄이 더욱더 몽롱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었습니다. 그는 농토를 떠나 성안의 큰 집을 쓰는 부자가 되었건만 그의 뿌리는 역시 대지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여러 달 동안 대지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도 봄이 오면 저절로 발길은 밭으로 옮겨 가곤 했습니다. 급기야 남은여생을 보내기 위해 리화와 백치 딸과 몇 명의 종을 거느리고 옛집인 토막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땅에 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에 대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추수가 얼마나 될 것이며 무슨 씨를 뿌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땅 자체만을 생각합니다. 그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흙을 긁어모아 쥐어 봅니다. 그렇게 한 줌의 흙을 쥐고 있으면 손가락 사이에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흙은 묵묵히 그가 흙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지의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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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기념관과 펄벅 여사의 동상

 그의 아들들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섬겼다. 그들은 매일 아니면 하루걸러 찾아왔고, 노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장만해 왔다. 그러나 왕룽은 그 옛날 아버지가 옥수수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 먹는 것을 좋아했듯 그 역시 그것을 좋아했다.

아들들이 매일 오지 않으면 그는 다소 불평을 하곤 했다. 그는 항상 곁에 있는 리화에게 물었다.

그 아이들은 뭐가 그리 바쁠까?”

다들 한창 일하실 나이잖아요. 큰 서방님은 성안의 부자 양반들한테 뽑혀 벼슬 한 자리 한다나 봐요. 그리고 첩을 들이셨대요. 작은 서방님은 혼자서 큰 곡물상회를 냈대요.”

왕룽은 리화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땅을 내다보는 순간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비록 잠시 동안이었으나 그는 의식을 되찾았다. 그날 두 아들이 찾아와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나가서 집 주위의 밭을 거닐었다. 왕룽은 아들들 모르게 뒤를 밟았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자 그는 천천히 다가섰다. 형제는 부드러운 땅을 밟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고, 지팡이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 왕룽은 둘째아들이 점잔을 빼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형님, 이 밭과 저 밭을 팝시다. 그리고 그 돈을 둘로 나눕시다. 그리고 형님의 몫은 제가 비싼 이자로 쓰겠습니다. 철도가 개통되었으니까요. 이제 해안지방으로 쌀을 보낼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제가…….”

왕룽의 귀를 울린 것은 땅을 팝시다란 말뿐이었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부르르 떨며 억양이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두서없이 소리를 질렀다.

뭐가 어째? 이 게으른 놈아, 밭을 판다고!”

왕룽은 목이 메어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려 했으므로 아들 형제가 양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왕룽이 통곡하기 시작하자 형제는 아버지를 위로했다. 서로 번갈아 가며 위로의 말을 늘어놓았다.

아닙니다. 우린 절대로 땅을 팔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고말고요.”

집안이 망하는 거야……. 땅을 팔기 시작하면 말이다…….”

왕룽의 말은 중간마다 끊어졌다.

우리는 땅에서 나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도 땅만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어. 아무도 땅을 떼어가지는 못하니까.”

왕룽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이 마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희뿌연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한 줌의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만약 땅을 팔게 된다면 그 길로 끝장이야.”

아들형제는 양쪽에서 팔을 하나씩 잡아 부축하고 있었고, 왕룽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흙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었다. 형제는 몇 번이고 번갈아가며 위로의 말을 되풀이했다  

마음 놓으세요, 아버지. 땅은 절대로 팔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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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부 대지는 막을 내리고 2부 '아들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왕룽은 죽음을 기다리며 그의 땅 한가운데에 있는 허름하고 낡은 토막집 방에 누워있었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는 젊은 시절부터 사용한 침대이자 결혼 첫날밤을 지냈던 침대이기도 했다. 그 방은 지금 아들과 손자들이 살고 있는 성안의 큰집에 얼마든지 있는 부엌 중의 하나만도 못할 만큼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땅 한가운데에서, 조상 때부터 물려 내려와 살아온 이 오래된 집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1부의 시작도 토막집 침대였고 2부의 시작도 그곳입니다.

왕룽은 마침내 리화의 위로를 받으며 죽습니다. 이 거대하고도 광활한 대지의 메시지는 한가지로 집약됩니다. 그것은 왕룽의 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대지는 영어로 큰 땅이 아닌 좋은 땅, the Good Earth인 것입니다.

       

박희주: 시인, 소설가.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 버린다」「네페르타리소설집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장편소설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천문인협회 회장 역임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문협70년사편찬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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