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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단 시절/박희주

소설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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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2.2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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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 교과서에 나온 시를 가르치고 나서 우리에게 한 편씩 지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을 때가. 시가 무엇이고 소설이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잘 모르던 시절, 고작 산토끼와 발이나 맞추고 냇가에서 멱 감으며 피라미 꼬랑지나 쫓아다니던 수악한 산골아이가 어떻게 시를 짓겠는가. 고민고민하다가 교과서에 나온 작품을 흉내 내어 다음날 가져갔는데 뜻밖에도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그걸 읽으며 칭찬을 하지 않는가. 그 일이 오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생생한 것은 소설을 업으로 삼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대한 싹수를 되짚어 본 소산이리라. 설령 모방이라 할지라도 내 세계를 지었다는 것. 어쨌든 문학과 최초의 조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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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주 작가

아직 시골을 벗어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서 50여 리 떨어진 중학교 시절에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아주 예쁜 국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곧잘 시를 낭송해주곤 했었다. 얇은 사 하이야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낭랑하면서도 사춘기의 가슴을 저리게 하던 목소리는 그때까지 문학이 막연하기만 했던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고 시와 시인이라는 존재가 경외의 대상이 되어 그 앞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위대한 존재를 고등학교에서는 직접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전라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님을 싫어했다. 칠판에 빼곡히 쓴 수업 내용이며, 걸핏하면 쉬는 시간까지 잡아먹는 게 일상이 돼버린 강의며, 시험지 뒷면에 시조 한 편씩을 꼭 적어내야 하는 강제를 싫어할 수밖에. 그러나 나는 좋았다. 시인의 수업을 듣는 게 경이로웠고 그 당시 나온 선생님의 시집 『문을 바르기 전에』를 읽는 게 좋았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시 「음삼월」과 「설야」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 시들을 외우고 있다. 아, 나도 시인이 되리라. 나는 어느새 문학도가 되어 있었다.

대학시절에 만나게 된 이는 「서울 하야식」을 발표하고 전주로 내려온 박봉우 시인. 도서관에서 <현대문학>을 들춰보다가 거기에 실린 3편의 시가 가슴을 울려 알게 된 이름. 그의 바뀐 주소가 잡지 뒤편에 있었으니 놀랍게도 내가 살고 있는 전주의 시립도서관이었다. 이런 위대한 시인이 전주에 있었다니! 강의가 남았음에도 곧장 찾아갔다. 그가 근무하던 부서는 정기간행문실. 꺼칠한 수염의 그는 내 손을 잡더니 퇴근시간이 아직 멀었으나 다짜고짜 막걸리집으로 데리고 갔다. 별로 말이 없던 그는 간혹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기울이곤 입을 쓱 닦으며 ‘기분 좋다’를 외쳤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신앙했다. 그의 모든 시를 섭렵하고 서울의 명동과 관철동 시대에 문단 동료들과 술을 무지막지하게 마셔대던 전설을 흠모했으며, 여전한 가난과 잦은 정신병동 출입과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아내마저 시인으로서 당연시 여기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내게 그 많은 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문학을 얘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술만 마시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 그런데도 나는 어렴풋이 문학을 알아가고 있었다. 몇 편의 시와 단편소설이 잉태되었으나 그게 문학이 될 수 있을까, 자신하진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나의 작품세계는 더 고민하라는 말씀이 전부. 처음으로 응모한 신춘문예에 떨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군대를 다녀오고. 백수가 되어 홀로서기를 꿈꾸던 때,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스포츠동아>에서 중편소설을 공모한다는 걸 알았다. 달라진 집안 환경으로 돈이 급했다. 취직을 하려 해도 기본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상금 250만 원이 절실했다. 마감은 얼마 남지 않았고. 원고지 270매 가량을 부리나케 써서 부쳤다. 「사랑과 미움의 42.195Km」. 기대했던 연락은 오지 않고 발표 지면을 보니 본선에 오른 세 명 가운데 내 이름이 있었다. 내가 소설가로서 소질이 아주 없지는 않단 말이지? 위안이라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 문학과는 별 관계도 없는 직장을 전전하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동안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으니 문학은 저 멀리 가 있었다. 그러던 1987년 여름, 파고다공원 앞을 지나치다가 전주에 계셔야 할 박봉우 선생님과 딱 부딪쳤다. 선생님을 뵙는 건 어쩌다 시골에나 다니러 갈 때였다. 서울에서 뵙게 될 줄이야. 파고다공원은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장소였다. 풍물패와 어울려 결혼식을 올린 장소였기에. 그날 선생님과 함께 한 이들은 <한국인>이라는 잡지의 기자들이었다. 그해 8월호에 이달의 한국인으로 선정되어 그곳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던 것.

선생님은 나와 기자들을 인사동 ‘귀천’으로 끌고 갔다. 귀천엔 미리 약속했던지 천상병 선생님이 나와 계셨다. 상병아, 봉우야 이게 몇 년 만이냐. 볼을 비비고, 껴안고, 낄낄거리고. 그들은 아이처럼 서로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부르며 스스럼이 없었다. 맥주가 나오고 선생님은 나를 하나밖에 없는 제자라 소개했다. 제자라니? 시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직 술 먹는 모습만 보여줬으면서 제자라니? 그것에 대해 따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 분이 따라주는 잔만 죽죽 들이켰다. 그게 선생님과 마지막 술자리가 될 줄을 알게 된 건 고작 3년이 지나서였다. 문제는 그가 날 제자라고 했다는 데 있었다.

내가 그의 제자가 될 자격이나 있는가? 문학과 담을 쌓고 지내는 처지에 있으면서 감히 제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설펐다. 치열하게 파헤치지도 열심히 쓰지도 못했다. 다시 책과 원고지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성에 누(累)가 되진 말아야지. 생활과 문학 사이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였다.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신춘문예와 명망 있는 문예지에 단편도 응모하고, 장편도 응모하고, 시도 응모했다. 반응이 없었다. 거듭된 실패에 나는 나를 의심했다. 안 되는 건가? 그러나 습관처럼 쓰고 오기로 계속해서 응모했다. 결국 90년대 중반 하나가 걸려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문예지에서 연락이 와 시인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문단을, 그 물질적 변화를 너무 몰랐다. 시인이 되면, 그 위대한 시인이 되고 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건만 한 달이 지나면 나와 같은 신인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문예지의 홍수시대였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부끄러운 짓들이 여기저기서 횡횡했다. 뭔가 잘못 됐구나.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여기가 그토록 선망하던 그 문학 동네가 맞아? 그렇게 회의하던 때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다.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피아노를 치던 아내에게 찾아온 불청객, 난소암 3기였다.

 

책 앞표지.-교보.jpg

난 하늘이 놀리는 줄만 알았다. 이제 좀 가정경제가 안정이 되고 문학을 제대로 해보려던 참에 하늘이 시기하는가? 입원과 수술과 항암과 퇴원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아내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내일이 무서웠다. 나는 못미더운 가장이었던 데 비해 아내는 우리 가정의 기둥이었다. 간병으로 직장도 다닐 수 없었다. 그 사이 나도 미쳐갔다. 당사자인 아내보다 더 절망하고 낙담했다. 숨죽여 부르는 나의 노래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생각해 냈던 게 시집 발간이었다. 아내를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다면…. 문학이 건달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건축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고향친구의 도움이 컸다.

첫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는 그렇게 아내의 투병 중에 나왔다. 부천시민회관에서 가졌던 출판기념회를 본 아내는 말했다. 이제까지 내가 해온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평소에 별 실속도 없는 문학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내가 나의 문학을 다소나마 인정해준 셈이었다. 그런 아내가 2004년 5월 8일 새벽, 마흔의 나이로 결국 떠나갔다.

무심한 하늘이었다. 처절한 고통 속 5년의 투병은 물거품이 됐다. 남은 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정경제와 어린아이들. 딸이 고2였고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의욕이 사라졌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법 중 가장 쉬운 게 술이었다. 두 달쯤 퍼마셨다. 주변에선 하루빨리 정신 차려서 아이들이나 잘 챙기라고 쉽게 말하지만 나의 변명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아내가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너무 쉽게 일어서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였다. 그러다가 어린 아들의 글썽거리는 눈을 봤다. 아들에게 나는 절대였다. 술에 취한 몽롱한 정신으로 현실을 직시했다. 바닥이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바닥. 이 시점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나머지 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론은 다시 문학이었고 방향전환이었다. 슬픈 노래는 그만 부르자. 지금까지 시에 비중을 뒀다면 앞으로는 소설을 운명으로 여기자. 소설이 밥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 될지언정 무슨 길이라도 있겠지. 아내에 대한 빚은 갚아야 했다. 투병 기간 동안 내 심중을 그린 작품을 위주로 아내의 초상을 표지로 한 두 번째 시집 『네페르타리』를 펴냈다. 아내의 죽음은 별다른 계획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았던 내 인생의 전환점이 돼야만 했다.

술을 딱 끊고 시작(詩作) 틈틈이 썼던 소설을 손보기 시작했다. 또한 고향을 소재로 한 새로운 작품에 매달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자세로. 일단 소설계 등단이 목표였다. 그해 연말쯤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공모에 중편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를 보냈다. 그동안 숱하게 떨어져 봤기에 담담했다. 이번에 되면 좋고 안 되면 다른 작품으로 다시 응모하리라는 심정으로.

해가 바뀌고 2005년 2월 어느 날 오후 집에서 무심코 받은 전화가 당선 통보였다. 당시 편집국장이셨던 이광복 선생님께서 직접 연락을 해오셨던 것이다. 심사위원은 유재용, 정을병, 이광복 3인. 그날, 아내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내 얼굴엔 겉과 속이 닮은 웃음꽃이 피었으리라. 다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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