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4(금)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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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3.2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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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물의 잠을 위한 아르페지오/임은주

-세월호 100일 후,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가 있었다

 

이것은 구명조끼의 아랫단을 묶고 나란히 피아노 속으로 걸어간 메아리들에 대한 이야기

 

1의 조명탄이 반복적인 아르페지오로 이름을 부른다 제2의 조명탄이 트릴로 따라간다 제3의 조명탄이 물 위에 손을 얹고 밤바다를 어루만진다 제4의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낸다 제…… 10

조명탄이 누구도 함부로 잊혀서는 안 된다고 물의 지문을 센다 아가야 내 아가 ……. 50의 조명탄이 물비늘 빛나는 보름사리의 먼 바다에까지 이름을 찾는다 ……. 100의 조명탄이 흰 갈기로 일렁인다……. 200의 조명탄이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인다……. 300번째 조명탄 아래 깊게 눌린 검은 건반이 마지막 이름을 부른다 어둠 속에서 뒤척이며 한껏 멀어진 양손을 건반 한가운데로 모은다……. 304번째의 조명탄이 오른손으로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풍랑을 쓰다듬는다

 

영혼들의 격랑이 창백해진 물보라로 일어선다 수평선 너머 선율이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물의 건반과 한 몸을 이룬다. 건반 위로 오른 울음들이 물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제주 제7항구로 내달리는 유속이 빨라진다 산맥처럼 몰려든 터지지 않는 울음, 물의 흰 건반이 일제히 물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앉는다 해저 수만 마일 아래 갇힌 발목들을 인양중이다 다 못 읽힌 악보가 다치지 않도록 겉봉투를 뜯는 세심한 파문, 파문들 심해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빛의 날갯짓, 회오리치던 조류와 수평을 맞춘 피아노 선율의 밀물이 긴 잠의 귓전에 가 닿는다

 

상현달이 양의 뿔처럼 밤하늘에 걸린다

 

*바그너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곡      

시집 <사라진 포도월>. 현대시. 2020

 

홍영수.png
NEWSIS에서 가져옴-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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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8월 중순 오후, 팽목항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깃발과 애도의 글들이 휘날리고 즐비했다. 평소 같으면 듣기 좋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 소리가 갑자기 곡비의 슬픈 곡조 같았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은 아픈 상처 부위에 염장을 했었다.

 

건축가 노베르 그 슐츠는장소의 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장소에 스며든 喜怒哀樂과 삶의 발자취, 역사가 켜켜이 쌓아져 만들어진 장소를 말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필자가 찾은 장소의 혼인 팽목항은 喜樂세월호와 함께 심연으로 수장되고 오직怒哀만이 찾는 이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을 뿐이었다.

 

화자는 기억하기도 싫은 커다란 참사인 “2014416일 세월호 사건를 소재로 시상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바닷속 깊이 잠들었을, 그들을 찾기 위해 불 밝히는 조명탄을 음악적 이미저리로 끌어와 감각적인 전개를 하면서 백건우의 추모 독주회를 함께 상기시킨다.

 

조명탄은 아르페지오로 음을 펼치고 이름을 부르면서, 트릴의 물결로 이어간다. 밤바다를 어루만지고, 조명탄은 닿을 수 없는 잠으로 곤두박질치고, 드디어 조명탄이 찾지 못한 이름에게 도 와 시 사이 솔과 파 사이의 검은 눈물을 닦아 낸다피아노 건반은 파와 솔’, 시와 도사이는 검은건반이다. - 여기서검은건반은 죽음을 의미한 또 하나의 장치다 -. 그러면서 지문을 세어보며아가야 내 아가…….’라고 오직 부모만이 성인의 자식에게 호칭할 수 있는 부르짖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부르며 찾고 찾는다. 이 얼마나 침통하고 애절한 시상의 전개인가.

 

그리고 마지막 304번 째의 조명탄은 사랑의 죽음을 연주하고 풍랑을 어루만짐에서 보듯이 화자는 청각적 상상력과 촉각적 이미지의 씨 날줄로 직조한 한 필의 진혼곡을 헌정하고 있다.

 

갑작스런 죽음은 혼을 동요시키고

적의나 원한을 품게 한다.

생명이 갑자기 끊어졌을 때 죽은 자의 혼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 근처에서

일상생활로 남겨진 일들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상상한다.”

 -엘리아데의 글 부분-

 

그렇다. ‘갑작스런 죽음’, 아이(자식)를 잃은 슬픔과 고통,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하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시켜 끌어안고 그냥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차라리 자학하며 살아가는 수준일 것이다. 슬픔, 아픔, 고통의 크기와 넓이를 낮추고 줄이며 오직 버틸 뿐, 누구의 哀悼(애도)도 동정도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며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봇물 터지듯 치솟으면 큰 사고 나고, 언어 또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고 거친 언어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터지고 넘치는 물과 언어의 함수 관계. 낮고 비좁은 천막에서물의 잠을 위해 아르페지오를 뜯는 유족들 곁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고 누군가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향해 징그럽게 (?)쳐 먹는다고 했잖은가.‘물과 언어물속은 생명수가 넘쳐야 하고 사람의 말속에는 숨겨진 신비와 비밀이 있어야 하는데 불순물과 광기 서린 언어가 웬 말인가. 세월호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을 규탄하고 비난하는 사회, 그렇게 만연되어 있는 선과 악의 顚倒(전도)를 우린 이미 目睹(목도) 했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생각보다 인간은 잔인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일 때 보다 집단적일 때 잔인성은 더한 것 같다. 중세시기 이단자로 내몰린마녀재판이 성행하면서 화형 시키는 무렵의 수사형(水死刑)이 떠올려진다. 물에 던져진 여자가 떠오르면 마녀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고, 가라앉아서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끝이다. 시인이 읊조리고 있는 시상을 펼쳐보며 수사형(水死刑)이 떠 올려지는 것은 비단 필자일 뿐일까.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영양괘각羚羊掛角을 떠올리는 게 하는 한 행으로 마무리를 한다. 송나라 엄우의 시론서인 <滄浪詩話>에 나온 얘기다. 영양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 발자국 흔적을 없앴듯이 탄생의 발자국인죽은 자의 이름을 상현달의 뿔에 걸어 버렸으니 흔적이 사라질 수밖에. 이렇듯 화자는 죽은 혼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상현달 바라보고 있다. 밤하늘에 걸린 그 상현달을.

 

 

https://www.youtube.com/watch?v=2jMdRxeZEkQ

(백건우가 당시 연주했던 곡 중 하나인 비창’)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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