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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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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3.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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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안 연가戀歌·4/박경순

 -신두리

 

신두리* 사막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

 

떠나고 싶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가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있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만나야 하는 당신은

아직도 낙타도 없이

떠날 채비만 한다

 

바람 불 적마다

용케도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읽은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린다

 

바람의 땅,

그 어디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다

그 바다, 그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해수욕장

 

시집 <그 바다에 가면>, 리토피아, 2019.

시 낭송가(부천 시소리 낭송회)

 

신두리 해안.png
‘신두리 해안 사구’ 다음 카페 ‘산사모2009’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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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반도의 신두리, 거기엔 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는 사구(砂丘)’가 있다. 조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밀물 등에 의해 올라온 모래펄을 강한 계절풍의 바닷바람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모래언덕(砂丘)은 빙하기 이후 15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대략 3Km 정도 해수욕장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당일치기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다. (키가 작은 솔밭에서 아침 라면을 끓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펜션, 위락시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펄럭이는 개발 반대’,‘개발 찬성의 두 극단의 깃발만이 나를 맞이했고 저 먼 곳에서 포크레인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엇보다 몸집이 큰 황소와 여러 마리의 소들이 매여져 있는데 박수근 화백의 황소와는 전혀 달리 한가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2번 답사하러 갔었다.

 

화자는 바로 신두리 해변, 해조음이 자갈자갈 속삭이고, 세월 씻는 파도 소리 들으며 砂丘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만 오천 년 알알의 층층인신두리 사막’, 그 너머에는 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실제로 생각보다 높은 야일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구가 형성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다. 어머니의 삶 또한 두꺼운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얼마나 잦은 파도의 울부짖음과 거센 바람의 휘날림이 있었겠는가, 또 거기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다양한 식물, 생물들의 진화과정, 이들은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지금은 한 편은 개발되고 한 편은 보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사막 너머에는/나만 아는 바다가 있다에 알 수 있듯이 境生象外, 즉 눈앞의 광경인 사막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화자만이 알 수 있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와 평생을 함께한 화자(해양경찰 64년 역사상 첫 여성 총경이다)는 사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이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모든 걸 다 안고, 받아주고, 품어주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바다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파도를 붙잡고 울고, 해안 바위를 껴안기도 하면서 모래에 스며들어 포근히 안기기도 한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바다가 지겹고,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바다 너머의 무엇을 그리고 상상하고 있다. 시는 자연을 보는 돋보기이다. 그렇다. 비록 현재 딛고 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지라도떠나고 싶어도/차마 떠날 수 없는 바다그래서戀歌를 부르고 있다.

 

사실 우린 사회적 제도와 주변의 환경적 요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그게 페르소나다. 그렇게 정해진 틀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극무대에서 탈출하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던가, 때론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되돌아올지라도. 그래서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다.

 

화자 또한 바다와 같은 꽉 찬 충만함의 텅 빈 공허의 여성(어머니)이기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기대고픈아버지의 바다를 기다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화자가 갈망하는 저 너머상상 세계의 상징이다. ‘나만 아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는 바다라고 읊조린 것에서 알 수 있다. 화자는나만 아는 바다, 아버지 같은 바다의 상징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은 곳, 바로 동양에서의 무릉도원, 서양에서의 이니스프리, 유토피아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 연의 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바다마저도 바다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바다, ‘바다 너머의 세계’,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상징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화자는 찾고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시인들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시인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로 살고 싶기에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창조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창조적인 영혼은 고독 속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독신이면 좋지 않을까 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살수 있는 공간을 호모토피아(homotopia)라고 했다. 즉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의한 공간, 화자는 이러한 공간을 넘어서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고 있다. 비록 상상적이고 저 너머 미완의 세계일지라도. 이러한 현실의 공간인 호모토피아와 이상세계의 유토피아, 이 둘이 섞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만의 공간인헤테로토피아(heterotpia)’이다.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온 무릉도원, 이니스피리, 유토피아적인 장소들, 오직 자기만이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 공간, 장소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실제처럼 현실화되는 장소, 푸코의 말처럼 깊숙한 정원’,‘다락방 한가운데같은 곳, 시인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바다일지라도그 바다, 그 바다 위에/또 다른 바다를 그린다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공간, ‘헤테로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년 4월에 서울 대림미술관에서‘?라는 회사가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제목이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No Space, Just a Place, Heterotopia>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거기 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지으려네.

아홉 이랑 콩밭을 가꾸고, 꿀벌 치게 벌통을 놓고

벌들이 붕붕거리는 숲속 작은 빈터에서 나 홀로 살려 하네.”

 - 下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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