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현의 명상노트-부모의 자식 사랑
말로만 다 했다고 한다면 책을 책장에 넣어 두는 것과 뭐가 다를까.
자기 자식을 잘 기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자식 교육을 말할 때면 ‘어느 부모가 내 새끼 잘못되라는 부모가 있느냐’며 반문한다. 이럴 때 더는 할 말을 잃는다. 좋은 말을 해주고 이해하여주며 크면 다 안다는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자식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이는 부모의 일방적인 무한 애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
천 리 길도 한 걸음이란 말이 있다. 천 리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야 한다. 말로만 다 했다고 한다면 책을 책장에 넣어 두는 것과 뭐가 다를까. 부모의 자식 사랑은 말대로 자식이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이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모의 자식 교육은 0점에 가깝다. 이렇게 자식을 키워놓고 다 큰 후에 무릎을 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모의 자식 사랑 방법을 간파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담론에 휘말려 시기를 잃기 쉽다. 사실 부모의 자식 교육은 가식을 심기보다 정직하게 해야 한다. 부모의 무모한 자식 사랑이 자식을 반항아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즈음은 부모도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부모의 자식 사랑 병폐를 말하면 귀에 거슬린다고 귀 막고, 내 새끼 내가 알아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며 쏘아붙인다. ‘맞는 사람은 다리 펴고 자도 때린 사람은 다리 못 뻗고 잔다’라는 옛 속담을 말하면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 때리고 들어오는 것이 낫다고 핏대를 올린다. 무조건 ‘오냐 오냐’ 식으로 무모한 사랑을 하면 아이들의 잘못된 부분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지뢰를 묻어둔 꼴이 된다. 그리고 그동안 묻어 두었던 지뢰가 하나둘 터지면 마음이 크게 상한다.
기고만장하게 가르쳤으면서 말 안 듣는다고 하며 어쩔 줄 모르고 상심을 한다. 모범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게임 중독, 몰래 PC방 드나들기를 한다. 그래서 뒤늦게 ‘자식 농사가 가장 큰 농사다’라는 말이 실감 나지만, 대책이 없다. 부모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고 자식이 염려돼 조심스럽게 한마디 하면 돌아오는 답은 “나보고 어쩌라고!”, “웃기네.”로 친구끼리나 하는 말을 예사롭게 내뱉으며 그동안 묻어 두었던 지뢰를 한 발 두 발 터트리기 시작한다.
오죽 시달렸으면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부가 하소연할까. “당신이 잘못하면 밉다는 생각이 들다 마는데, 아이들이 잘못하면 정말 죽고 싶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한다는데 아이들은 복장 터지는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식 문제가 아니라도 어루만져 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른이면서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교와 사회, 국가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정직과 책임, 공감과 배려를 외치지만, 아이들은 ‘됐거든요, 너나 잘하세요.’라며 코웃음을 칠 것이다.
이럴 때 잘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내용이 틀렸는지 곁에서 판단을 내려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할 때가 종종 생각난다. 분야별로 자격증이 있듯이 소통에 대한 자격증이 있어서 가려줄 심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갈등이 있으면 부모의 상담 방법이 서툴러서 아이들이 그런다고 책임을 묻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서로 다른 방법상의 차이를 떠나서 서로 수용의 자세나 태도가 중요하다. 부모는 자식을 사치품으로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익혀서 터득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나 행동을 일방적으로 하게 하여 나타나는 문제 상황의 우선순위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괴물, 사고뭉치로 만들어 놓고는 아무것도 논할 수 없다.
부모의 무모한 자식 사랑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 습관화될 수 있도록 시간을 묻어 두어야 한다. 바늘 따라 실 가듯 말 따라 행동이 이루어져야 자식 교육이 제 때에 될 수 있다. 부모는 누구나 언행일치의 중요성은 잘 안다고 하지만 말 뿐이라는 생각은 왜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