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9-30(금)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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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0.2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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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동지섣달 긴긴 밤에/권정선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온 하루하루

오르막길 내리막길

희로애락 그 세월들

열두 달도 끝자락인데

 

밤을 새며 뒤척이던

베갯잇에 묻은 사연

무어 그리 서러워서

고개고개 스무고개

아쉬움에 긴 한숨

 

동지섣달 기나긴 밤

정든 님은 어디 가고

칼바람 황소바람

문풍지에 부딪혀서

시퍼렇게 멍이 들고

 

돌아오는 길을 잃어

어디선가 그대도

긴긴밤 허리춤을

굽이굽이 홀로 새며

두고 온 님을 그리는지

 

낙엽 구르는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훠이훠이 눈물 바람

그 누가 이내 설움 행여나 아실까나

기다린 세월만큼 원망도 깊어가네.

 

시집 <내 그리움의 끝은 언제 너였다>, 미디어저널, 2021.

 

2021 10월사본 -덕유산 정상 홍영수  (3).jpg
덕유산 정상-사진/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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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는 간다. 그렇지만 다가가지는 못한다. 보고픈 맘 간절하기에 원망도 안타까움도 커지지만, 어찌하랴, 너에게 다가설 수 없는 이 현실을. 그래서 갈망할 수밖에.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듯이. 이 순간만은 진실이고 진심이다. 이때의 열정과 욕망, 그리고 그리움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갈망이기에 감추려 해도 낭중지추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안다. 널 가질 수 없다는 이 현실과 이 순간을. 아니 어쩜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계절은 겨울, 대설과 소한 사이다. 숨 가쁘고 바삐 살아온 한 해가 저문다. 1연의 오르막길 내리막길//희로애락 그 세월들의 대구법을 쓰면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아쉬움을 강조하고 있다.

 

춘향가 <쑥대머리> 사설 중에 전전반측(輾轉反側)에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를 반영하듯 밤을 새며 뒤척이던의 전전반측하는 화자의 심정 또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베갯잇에 묻은 사연/무어 그리 서러워서분명코 베갯잇에 속 울음으로 흐느끼며 눈물 자국을 흘렸을 것이다. ‘베개는 잠을 잘 때 사용하는 꿈을 실은 물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선 세계에 노니는 유선침遊仙枕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화자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까 하는여의침如意枕의 베개를 베고 돌아누워 있다.

 

길고 긴 한겨울 밤이다. 3연의칼바람 황소바람은 강력한 추위의 강력한 청각적 은유다. 그 추위가 문풍지에 부딪쳐서/시퍼렇게 멍이 들고라고 한다. 화자는 이러한 추위 속에서 혹여 돌아오는 길을 잃어”, “긴긴 밤 허리춤을/굽이굽이 홀로 새며라고 하면서 임을 걱정한다. 이 숭고한 여인네의 사랑 앞에 한 번쯤 다가가 보고 싶은 것이 모든 남정네의 욕망이라면 지나친 걸까? 더욱이낙엽 구르는 소리에/버선발로 뛰어나가라고 하니 더욱더 그러하지 않은가.

 

여인네의 사랑은 베갯잇에 적신 눈물과 한숨으로부터 새어 나온 것일까, 임을 기다리는 화자의 그리움은 전전반측하는 몸부림에서 새어 나온 것일까. 눈물과 한숨, 그리움의 늪에 빠져 긴 긴 밤을 지새우면서 원망하는 듯 원망하지 않고 흐느끼고 호소하면서 기다리는 화자의 절절한 사랑은 가난했던 백석을 평생토록 잊지 못하는 순수 사랑의 자야 김영한을 떠 올리게 한다.

 

문학에서는 을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토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긴장의 통로로 이용하기도 한다. 화자는 잠깐 잠든 사이에서도 벌떡 깨어나 폭풍 한설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그리고 차갑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 낙엽 구르는 소리에서 보듯, 동짓달 기나긴 밤과 교응하는 소리를 훠이훠이 눈물 바람으로 환치하며 설움과 원망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설움과 원망은 또 하나의 그리움에 대한 역설의 장치일 뿐이다

  

시상에 흐르는 운율은 서구적 운율이나 악기가 아닌 전형적인 동양적 리듬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섧디섧게 흐르는 거문고 가락이기도 하다. 그 가락 속엔 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속설움원망을 특히 겨울 특유의 청각적 운율을 통해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는 연정가(戀情歌)이다.

 

동지섣달 긴긴밤에의 시를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원망과 설움보다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한 올 한 올 직조한 한 필의 비단결 같은 서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단 폭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네의 정한과 정조가 무늬로 채색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쓰라림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이지만 누구나 사랑과 이별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모티브가 되었을 황진이를 만났다. 500년 지난 후 또 다른 황진이, 지금쯤 그녀의 곁에는 분명코 백호 임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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