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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다윗과 하늘, 그리고 갈마(褐磨)-11회

박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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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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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이 년 간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암논은 나의 형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도 아니다. 그는 한낱 율법을 어긴 죄인일 뿐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요행이었다. 요행은 영원하지 않다. 그는 오늘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율법이 살아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내 말을 따르라. 그는 여호와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왕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짐승과도 같은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너희는 내 명령을 따를 뿐이다. 오늘은 하늘이 준 기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최대한 그 죄인이 술을 많이 마시도록 내가 유도할 것이다. 죄인의 부하들이 죄인을 보호하지 못하도록 자리 배치에 유념하고 죄인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을 때를 기다려 신호를 보낼 것이니 너희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기 바란다. 실수가 있을 때는 너희들과 내 목숨은 없다는 걸 명심해라. 단 피는 그 죄인 하나로 족하다.”

넓은 들판에 장막이 지어지고 잔치 준비는 끝났다. 시간이 되자 압살롬의 형제, 왕자들이 속속 도착하여 축하를 보내고 자리를 잡았다. 다윗의 둘째 아들인 길르압과 넷째 아도니야, 다섯째 스바댜, 여섯째 이드르암이 그들이다. 암논은 맨 나중에 그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밧세바로부터 난 왕자들은 아직 어렸다.

압살롬은 암논의 말이 보이자 직접 나아가 그를 맞이했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더욱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암논은 말에서 내려 압살롬의 손을 잡아끌고 포옹했다.

그래, 압살롬. 축하한다. 좋은 날씨구나.”

이렇게 오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그동안 우리 사이가 많이 어색했지? 잊자. 잊어버리자. 내가 철이 없었다. 아바마마를 위해서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자. 내가 너를 도울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도우마.”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암논은 불안했다. 압살롬 앞에만 서면 자꾸 움츠러드는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그는 압살롬의 어깨 너머로 모든 동생들이 와 있는 걸 보고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양의 수가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조금 늘었을 뿐입니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아바마마의 배려 덕분입니다. 그렇지만 어디 형님에 비기겠습니까. 대적들이 사라지고 온 이스라엘이 평안하니 그놈들도 무럭무럭 자라나 봅니다.”

식탁에는 송아지와 양과 염소 고기로 만든 각종 요리와 과일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포도주가 넘쳐나고 있었다. 양떼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것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자연의 교향곡이었다. 잔치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압살롬의 동생 왕자들은 형의 번영을 축하해마지 않았고, 다윗의 차남이자 압살롬에게는 바로 위의 형이 되는 길르압은 몸이 약해 술을 마시진 못했으나 진정으로 기뻐하여 흐뭇해했으며, 암논 또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압살롬에게 무척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술이 여러 순배가 돌자 암논은 배짱이 두둑해져 여러 동생들이 따라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압살롬은 특히 암논이 잔을 내려놓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잔을 그에게 바쳤다.

암논은 기분이 좋았다. 압살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충직한 동생으로만 보였다. 압살롬에게 느꼈던 자기 혼자만의 불안과 걱정은 괜한 기우처럼 여겨졌다. 어렴풋이 갖고 있던 부도덕한 장형으로서의 자격지심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동생들은 변함이 없었고 압살롬 또한 깍듯했다.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앞으로는 정말 장형으로서 모범이 되리라 다짐하고 형제간의 우의를 앞장서서 다지리라 결심했다. 형으로서 어지간한 손해쯤은 충분히 감수하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잘못된 행동을 충분히 보상하리라, 그러면 부르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 아바마마께서도 나를 용서하시리라. 그래서 암논은 실추된 장자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싶었다.

압살롬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긴장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주변의 상황도 계획에 빈틈이 없었다. 암논은 저 죽을 줄 모르고 마냥 기분이 좋아 껄껄거리며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압살롬이 거느리는 부하들의 눈은 언제나 그에게 쏠려 있었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하더니 원을 그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암논의 부하들과 같이 음식을 먹던 압살롬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칼을 빼들어 암논의 부하들을 에워쌈과 동시에 무장해제를 시키고 그때까지 보이지 않고 언덕 아래 수풀 속에 은신해 있던 압살롬의 정예 용사들이 왕자들의 식탁으로 돌진해 온 것은. 술에 취한 왕자들의 몽롱해진 눈들이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놀라 휘둥그레지는 찰나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 그들은 경악했다. 거짓말처럼 암논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머리가 푹 꺾이어진 것이다.

잔치는 한마디로 난장판이 돼버렸다. 왕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소스라치며 허둥지둥 자신의 부하를 찾아 말을 타고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다.

압살롬은 목석처럼 서서 암논의 주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붉게 타올랐다. 그는 비명과 주변의 소란스런 상황에도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었노라. 너희들은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아무런 죄가 없다. 율법을 유린한 죄인은 처단되었다. 여호와께서도 기뻐하실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정당한 일을 집행했지만 어디까지나 폐하께서 망설이던 일이고 명에 없었던 일이다. 다른 왕자님들도 많이 놀라셨을 터. 차분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먼 훗날을 기약하자. 나는 잠시 이곳을 피해야겠다. 폐하께서는 죽은 자가 죄인일지언정 장자인 아들을 잃었으니 심히 진노하실 것이다. 나는 폐하께만은 죄인이 되었노라.”

압살롬은 그길로 심중에 두었던 그술 땅으로 향했다. 그술의 왕 달매가 압살롬의 어머니인 마아가의 아버지이자 압살롬의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다윗에게도 마침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모든 왕자들이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시종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시종은 너무 놀라서인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다윗은 믿기지가 않아서 숨을 죽이며 다시 물었다.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청하던 압살롬의 얼굴이 어른거리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잘 모르지만 분명히 오늘의 잔치에서 왕자님들과 관계되는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경악했다. 압살롬을 만났을 때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신경과민으로 돌렸는데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선지자 나단의 경고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단 말인가.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자신을 가리키던 나단의 손가락이 이제는 자신의 눈을 찔러오고 있는 듯했다. 언제나 가슴 졸이며 자신의 형제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아들을 감시하며 왕자들의 동태도 살피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암논은 자신을 팔아 다말을 능욕했고 그로 인해 압살롬마저 자신을 속였다. 암논의 경우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압살롬은 설마, 했었다. 그런데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단 말인가.

다윗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낭떠러지로 한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추락.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봐야 하나. 다윗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여호와여, 끝내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의 죄가 그렇게 크더이까. 저를 벌하시옵소서.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못 볼 거 다 보며 산들 무슨 의미가 있으리까.”

어전에서 다윗을 따라와 죽 늘어서있던 신하들도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다윗의 형 시무아의 아들 요나답이 코 막힌 소리로 왕자들의 죽임을 전한 시종을 나무랐다. 그는 암논에게 다말을 범할 수 있는 계책을 가르쳐 준 암논의 친구이자 사촌이었다.

무엄하도다. 어찌하여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뜬소문을 가지고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만약 왕자들께서 압살롬 왕자에게 변을 당하셨다면 아마도 암논 왕자만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다말 공주를 암논 왕자가 욕을 보였던 일로 압살롬 왕자는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시끄럽도다. 썩 물러가거라.”

다윗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으면 싶었다.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분명히 다른 왕자님들은 무사하실 겁니다.”

요나답은 다윗 가까이 기어와 고개를 숙이며 다윗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때 왕궁을 지키는 병사가 소릴 질렀다.

왕자님들이 오십니다. 왕자님들이 오십니다!”

다윗은 그 소리에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요나답이 더 바싹 다가와 울먹였다.

폐하, 소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왕자님들이 오신다 하옵니다. 어서 가보시지요.”

다윗은 일어섰다. 요나답의 말이 사실인가? 역시 암논은 보이지 않았다. 다윗은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왕자들은 다윗 앞에 다가와서는 땅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그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이냐?”

다윗은 왕자들을 부둥켜안으며 물었다.

아바마마, 암논 형님이 갑자기 밀어닥친 압살롬의 부하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압살롬이 양털 깎는다는 명목으로 우리들을 초청하여 암논 형님을 죽이려 했던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차남 길르압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다윗은 아들과 함께 통곡했다. 아들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낫다는 안도감과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에 울었고 다윗은 허탈감과 참척의 고통에 울었다.

내 탓이로다. 모두가 내 탓이로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른 내 탓이로다. 이 일을 어찌할 거나.”

자초지종을 들은 왕도 울고 왕자들도 울고 신하들도 울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그래서 징계도 남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비로우신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 저에 대한 징벌이 언제나 끝나는 것입니까. 자식들 보기 부끄럽사옵니다. 저를 치소서. 자식들에 대하여 내려지는 저에 대한 분노를 이만 거두소서. 어떻게 하여야 여호와께서 진노를 거두실지요. 가르쳐 주소서. 우매한 저를 일깨워 주옵소서.”

다윗은 무서웠다. 하늘이 무서웠고 여호와가 무서웠다.

- 계속 (매주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박희주 작가 운암.jpg
박희주 작가

 1996년 등단한 후 첫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와 두 번째 시집 네페르타리를 발간하고 2005년 <월간문학>에 중편소설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로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소설계 데뷔소설집으로 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 시대의 봉이』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와 장편소설집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 『나무가 바람에 미쳐버리듯이가 있다. 2021년 제46회 한국소설문학상우수출판콘텐츠로 박희주 중편3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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