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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기억 #여름방학

사진작가 권도연의 작가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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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4.2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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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년기를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서울의 변두리에서 보냈다. 집 근처에는 작은 헌책방이 있었다.
나는 주로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열두 살의 여름방학에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사 온 책들로
집의 지하실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 지하실은 작은 세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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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고 독립적이고 투명한 작은 세계. 그곳에서 나는 책 속의 모든 언어가 합쳐진 하나의 단어를 상상하곤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던 날에 폭우가 내렸다. 보름달의 달무리가 불안한 암호처럼 푸른빛 동그라미를 그리던
밤이었다. 비는 나흘간 쏟아졌고, 한강의 둑이 넘치며 홍수가 일어났다. 학교는 며칠간 휴교되었고,
나는 지하실에 빗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어깨를 웅크린 채,
얇고 거대한 한 꺼풀의 세계가 어둠 속에 삼켜지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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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의 물이 다 빠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책의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 나오는 먹색 어둠들,
겹겹이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종이들, 문장이 물고기처럼 토막 나서 비늘 같은 조사와 어미들이 떨어져 나와
나의 눈 속에 박혔다. 최대한 책을 건져 냈지만 문장의 세부를 읽지 못했다. 형상과 단어들은 덩어리로 뭉개져
있었고 읽기는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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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름방학은 어둠이 흥건한 나무 냄새와 곰팡이 냄새 물비린내로 범벅이 되어 있다.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젖은 어둠, 나무의 수액 냄새가 진하게 번져 있는 캄캄한 잡풀 속에서 밤새우는
풀벌레들.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흩어졌다가 가까스로 모아지며 흘러갔다.
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 후에는 경험하지 못했다.
 
[사진작가 권도연, 개인전]
2018 섬광기억, 갤러리 룩스, 서울
2015 고고학,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4 빗?鳧? 자세, 갤러리 NUDA, 대전
 
2011 애송이의 여행, 갤러리 류가헌,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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