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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아재가 산다/6회

박희주 중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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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4.2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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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주 시인. 소설가. 신인. 전북 임실 출신. <월간문학>신인상. 시집 나무는 바람에 미쳐버린다네페르타리소설집내 마음속의 느티나무』 『이시대의 봉이장편소설 사랑의 파르티잔』 『안낭아치현 부천문협 회장 galbeolheejoo@hanmail.net


* * *

어서 오십시오!”
두 남자가 모기장을 들추며 나왔다. 아하, 자영 씨가 말하던 황가, 혜순 씨가 부르던 황 사장은 바로 약삭바리였다. 돈을 잘 벌면 약초꾼도 사장 소리를 듣는구나. 하긴 상대가 들어 기분 좋을 수 있다면 미덕일 수 있겠지. 성조는 벌써 그라는 걸 알고 있었고 조금 전 자영 씨의 반응은 분명 달갑지 않은 인간을 대하는 것이었으니.
안녕하셨습니까?”
성조는 구면인 노래방 사장이라는 사내의 손을 잡아 흔들며 약삭바리를 보았다.
여기 오셨었군요.”
, . 피곤하시다면서 올라 오셨네요?”
친구니까 안 보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여기도 친구였구먼요. 나는 심심하기도 해서 대포 한 잔 하고 들어가려고 왔습니다.”
약삭바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성조도 객쩍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지만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서로간의 인사가 끝나자 노래방 사내는 잠깐 나온 거라며 놀러오라는 말을 남기고 지하에 있는 노래방으로 사라졌다. 약삭바리와 노래방 사내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 상에는 산나물과 버섯을 넣은 부침개가 동동주와 함께 놓여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으니 혜순 씨가 부침개를 더한다며 식당으로 나가자, 자영 씨도 따라 나가 술자리는 어색한 침묵이 흘러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이런 데서 노래방이 잘 되나?”
내가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리자 약삭바리가 재빠르게 말을 받는다.
요즘이 대목 아닙니까. 사람들이 겨울에만 뜸하지 워낙 많이 오니까요. 우선 이거라도 안주 삼아 한잔씩 하시죠?”
그럽시다.”
성조가 상으로 다가앉자 약삭바리는 비어있는 세 개의 잔에 술을 부었다. 배가 부르니 술 마실 생각도 없었다.
여기 오실 줄 알았으면 좋은 거 있는데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뭔데요?”
성조는 술잔을 들고 고개를 쳐들었다.
살쾡이 한 마리 얼려 놓은 게 있거든요. 고추장만 넣고 볶아도 맛이 죽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때 자영 씨가 잔과 주전자를 들고 들어와 성조 옆에 앉았다. 성조의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얼마 후엔 혜순 씨가 각종 나물을 담은 접시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데 불 밝힌 차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혜순 씬 마루에 쟁반을 놓고 돌아서서 후다닥 뛰쳐나가더니 개선장군처럼 떠들썩한 수다와 함께 서운 씨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서운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온 것이다.
성조가 일어나 서운 씨를 반기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내 옆자리에 앉힌다. 참으로 친절하기도 했다.
싱글끼리 잘 해봐.”
성조의 말에 모두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자동적으로 혜순 씬 약삭바리 옆에 앉게 되어 사각의 상엔 여자 남자, , , , 짝이 되었다. 술잔이 돌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남자가 마시니 여자들도 마셨다. 끊임없이 잔을 부딪치고. 곧 일어설 것 같던 약삭바리도 함께 어울렸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앙금도 사라졌다.
순간순간 성조는 끔찍이도 자영 씨를 챙겼다. 자영 씬 쑥스러워 하면서도 결코 싫지 않은 표정. 가끔씩 혜순 씨와 약삭바리도 속삭거리다가 서로 잔을 채워주며 다정했다. 나와 서운 씨만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지극히 의례적인 말 외에는. 그러다보니 성조가 낄낄거리면 같이 낄낄거렸고 혜순 씨가 깔깔거리면 따라서 깔깔거렸다.
서운 씨와 자영 씨는 자신들의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몹시 즐거워했다. 성조와 혜순 씨가 서로 뒤질세라 그 옛날과 현재를 오르내리며 갖은 얘기를 쏟아 붓는데……. 고달프기만 했던 옛날도 다 아름다웠다. 배고픔도, 헐벗음도, 지긋지긋하게 산을 오르고 내려 다리가 아팠던 기억도 그들에겐 아름다웠다. 머리가 커져 고향을 떠나자마자 맛보게 된 낯선 도시의 설움도 아름다웠다. 아픔도 아픔인 줄 몰랐단다. 가난도 가난인 줄 몰랐단다. 사는 게 다 그런 줄 알았단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그게 아니었다. 배우지 못한 자격지심이 일찌감치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닫게 했다. 그때그때 충실했다. 그러다보니…….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사는 게 거기서 거기고……. 세상은 공평하더라. 이제 나름의 한 세상을 이룬 지금 자신이 대견해 보이고……. 여유가 생겼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간직하고픈 모험, 싫지 않더라. 그 짜릿함을 나만 알고 즐기는데 까짓 거, 조금 흥청거린들 어떠랴. 하늘도 땅도 보상 차원에서 눈감아 줄 것이라 믿는단다.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잖은가. 그렇게 자신들을 위로하는 사이 서서히 눈이 풀리고 입이 풀렸다.
급기야 배꼽 밑을 간질이는 자극적인 얘기도 서슴없이 나오고. 우린 낄낄, 깔깔거렸다. 그 얘긴 질리지도 않고 언제 들어도 재미난 화제였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약삭바리는 대화에 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관객이 되었다. 성조는 신명이 났고 혜순 씬 처음부터 끝까지 우쭐해 있었다.
지리산이 나를 부르더라.”
신파조였다. 혜순 씬 열여덟까지 산골짜기를 맴돌다가 서울로 갔단다. 지리산을 닮아 튼실한 몸이었고. 사업을 한다는 딸만 셋인 부잣집의 식모살이. 허구 헌 날 비탈진 밭을 매고 산을 헤집으며 돈 될 것을 찾는 일보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서울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나. 차츰 수돗물에 얼굴이 하얘지고 손이 보들보들해져 옷만 잘 차려 입으면 여대생이 부럽지 않았단다. 비실비실하여 언제나 창백한 몰골의 안주인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집안은 깔끔하고, 아이들을 잘 챙겨 주었더니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랐다고. 그런데 사십대였던 바깥주인은 그 집의 제왕. 그의 사업에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고 그가 무슨 짓을 하던 시비하지 않았으며 그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안주인은 죽어지내고 아이들은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그의 속옷을 빨고 와이셔츠를 다리는 혜순이는 틀렸다. 당연한 것처럼 옷을 벗으라 했고 목 좀 깨끗이 씻으라 했단다. 오 년이 지났을 때 시름시름 앓던 안주인이 죽었다. 화장실에서 웃었을 바깥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한 것처럼 혜순에게 옷을 벗으라 했고 그녀도 서슴없이 그 품에 안겼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단다. 튼실한 그녀는 금방 아들을 낳았고 안주인의 자리는 자동으로 그녀의 것이 되었다. 바깥주인은 더 이상 제왕이 아니었다. 그녀의 포로일 뿐. 부러울 게 없는 생활,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행복이라는 말에 의심이 가고…….
그래서 이 산장을 사버린 거야.”
신파조의 신데렐라는 이런 건가? 고희를 넘겼을 그녀의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술을 마셔 섹시함이 넘쳐흐르는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쪼그라진 몸뚱어리로 아등바등 헉헉대는 모습이.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어째서 우쭐함을 넘어 요란한 빈 깡통으로 쓸쓸해 보이는 것일까. 그 순간 옆에 앉아있는 약삭바리의 눈이 번뜩이는 걸 보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런 눈이었다.
이미 1차를 했던 터라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랐다. 서먹함이 사라지고 우울도 사라졌다. 술잔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 옛날이여! 세세세. 주거니 받거니 세세세. 정자와 계곡과 어둠의 산도 세세세. 성조의 입이 다물 줄을 몰라 세세세. 서로서로 술이 취해 세세세. 그렇게, 세세세 잔치는 질펀해져 가는데.
성조의 낯 뜨거운 친구 자랑. 그리고 또 책과 서명.
오늘만 세 번째로 고민을 해야 했다. 장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분위기에 따라서. 하긴 처음부터 멋 부리느라 이름만 써서 주지 못한 내 불찰이었으니. 술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며 생각했다. 그리고 썼다.
<산장의 여인이 부르는 계곡의 노래, 지리산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책 두 권에 똑같이 썼다. 이들이 내 감상을 알까, 곳곳이 얼룩져가는 내 나름의 언짢음을. 빈 깡통의 슬픔을.
그런데도 영광이라며 약삭바리는 노래방에 스페셜로 모시겠다고 하고, 혜순 씨도 빠득빠득 우겼다. 자기 집에 온 손님은 자기가 모셔야 한다고.
우스웠다. 나 같은 무명작가를, 문단에 간신히 이름만 올려놓은 말석에게 무조건 작가라니까 황송해하는 이들이 우스웠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은 작가로부터 직접 책을 받고 사인까지 받았다는 게 무한한 영광이라는데. 그것이 거짓이든 참이든. 그때부터 약삭바리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내게 깍듯했다.
법대를 졸업했지요.”
이렇게 되는 것인가. 화개장터를 들어설 때부터 서운 씨의 안타까운 이별을 듣게 되더니 아재 부부의 희한한 인연을 들었다. 40년 전 지리산 꼬맹이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합창으로 들었고 조금은 억지스러운 혜순 씨의 지난날과 현실을 얼핏 보았다. 이제 약삭바리까지 지리산으로 흘러들어온 사연을 얘기하려 한다. 전력이 궁금하긴 했었다. 뭘 하다 굴러들어온 작잔가 하고. 법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내가 작가라는 걸 의식한 것인가? 이 상황이 말이다.
그는 애당초 도시에서 태어나 산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부친은 옛날에 사법서사, 지금은 법무사. 부친의 소망은 그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단다.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그 말에 자연스럽게 법대로 진학하게 되고. 한 번, 두 번, 사법고시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일곱 번을 계속해서 떨어졌다. 나이는 들어가고 자신이 없어지니 삶의 의욕마저 사라지더라나. 구청 공무원이었던 부인이 열 번까진 도전해보라 했지만 스스로 지겨워 때려치웠다고. 그러나 10년 공부가 너무 아까워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을 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로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단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이 세상, 죽을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한 변호사조차 돈이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더란다. 마침내 자신이 모시는 변호사보다도 입김이 강해지자 스스로 독립하여 풋내기 변호사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단다. 수임은 날로 늘어 돈을 갈퀴로 긁게 되고, 자신은 로비의 귀재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데, 욕심이었을까. 빌딩을 건립하여 수십 명의 변호사를 거느리고 싶어졌다. 은행 융자를 받아 건축을 시작하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런데 그렇게도 잘 돌아가던 머리가 욕심이 지나쳐 너무 돌아가 버린 걸까. 어느 사건에 휘말려갔다.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자신은 어느새 깃털이 되어 있었으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던가. 왜 그걸 미처 몰랐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몸통은 쏙 빠지고 깃털만 비리에 걸려들었다. 때마침 IMF사태가 터지고. 이자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건축은 중단되고. 아내와는 위장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런 머리라도 돌아간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러나 그는 감방에서 자신의 옷이 사그리 벗겨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형기를 채우고 나와 보니 자신은 이미 로비의 귀재가 아니었다. 형편없는 악질브로커로 전락해 있었다. 만나지 못해 안달이던 놈들이 그를 피했다. 아직은 이르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 때를 기다리자. 그러나 거들먹거리는 데에 익숙해진 몸이라 살길이 막막했다.
아무리 부정부패 척결 운운해도 뇌물 좋아하지 않는 놈 없습디다. 여기 송이 많이 나죠? 그때 송이도 한몫 했습니다. 억 단위로 송이를 샀으니까요. 그래서 송이를 알았습니다. 그때가 좋았지요. 내 생의 봄날이었습니다.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언젠가는 돌아갈 것입니다.”
그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은 정반대였다. 성조네는 배고프고 고달프지만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반면에 그는 배부르고 편안하지만 불순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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