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0-13(일)

딱, 하나/윤별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9.08.19 22:56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 하나/윤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10대엔

엿가락처럼 시간이 늘어져 짜증났었지

멋모르던 풋내기 사춘기엔

턱밑이 거뭇한 고딩 오빠도 참 늙어 보였어

19살 숫자는 넘나 징그러웠지

풋풋한 이십 청춘엔

서른이라는 말이 서늘했어

그 고개 넘으면 괜한 걱정 했다고 웃게 돼

금세 마흔 닥치면 다 산 인생 같아 맥이 빠지지

만 나이까지 들먹이며

삼십 대로 뻐팅겨도 별 수 없어

마흔이나 쉰은 그게 그거야

여기저기 시달리며 단내도 나고 쉰내도 풍겨

군인이나 경찰이 어려 보이면 늙은 거야

어어 하다가 환갑이 목전

환갑은 싸~아 하니 느낌이 좀 다르더라

서글퍼지다가 홀가분하다가 헷갈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전철도 공짜로 타면

어느새 칠십 문턱

가만있어도 데려갈 텐데 자살도 하더라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나 봐

아니, 죽고 사는 게 만만해지나

 

난 어떠냐구

나이 먹으면 다를 것 같지

다른 거 하나도 없어

누구나 내일은 똑같이 몰라

나도 처음 늙어보는 거야

그래도 한마디 듣고 싶다면,

 

그냥,

마음이 끄는 대로 살아봐

-------------------------

낙엽길.jpg

 

화자는 칠순을 넘기지 않았다. 랩을 좋아한걸까, 아님 랩을 잘하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시 자체가 랩송이다.

’, ‘’,‘’, ‘등의 rhyme이 그것이다. 각운의 리듬에 맞춰 읽어 가면 독자로 하여금 시의 비유를 떠나 흥얼거리게 한다. 재밌다. 시적 시어를 떠나,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리며 노래했다. 이 시를방탄소년단이 보면 작곡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그들은 의식 있고, 철학적, 시적인 노랫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의 3대 요소에 중에 음악적 요소가 있다. 시어에서 느끼는 운율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는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를 읽으면서 순수시를 지향했던 시문학파를 생각게 한다.

 

시는 운문이다. 이 시처럼 라임에 맞춰 흥얼거리면 하나의 노래가 되고 쉽게 읽히며 와 닿는다. 굳이 시론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낯익게 하기이다. 굳이 시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면 낯익게 하기낯익게 하게하는 것이 또 다른 낯설게 하기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독백조로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아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랩의 가락으로 읊조리고 있다. 읊조린 게 아니라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화두처럼 툭툭 던지듯 하고 있다. 화자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겪었을 층층의 시절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아 독자의 생각을 붙잡아 두고 있다. 필자도 두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다. 그의 곡 <피아노 협주곡 2>를 찾아 듣는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면서 종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종소리를 그려내는데 심혈을 기울인 합창 교향곡 <> 이 떠올라서이다.

 

그의 세속적 합창교향곡 op.35 ‘’, or 'The Bells', op. 35 드거 앨런 포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다고 한다. 이 시는 종소리를 세월의 흐름,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포우의 시는 태어난 유년 시절에서 늙음에 이르는 삶의 흐름을 종소리에 대비시키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도 여기에 착안해 인간이 태어나 결혼하고 살면서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과정(生老病死)을 위대한 작곡가답게 각각 은종, 금종, 동종, 철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논어의 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얘기다.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 살에 설 수 있었으며,(三十而立) 마흔 살이 되어 미혹함이 없었고,(四十而不惑) 쉰이 되어 천명을 알았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이 되어 귀가 순하게 되고,(六十而耳順) 일흔 살이 되어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였다.“

 

화자는 사십 대까지는 공자와는 좀 결이 다른 내용이다. 물론 공자와 화자와 같은 사고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대 이후부터는 비슷한 생각 겹치고 있다. “환갑 진갑 지나면 홀가분하고 죽음도 두렵지 않고. . . ”그럴 수밖에 없다. 천성과 천리를 깨우치고 귀가 순해지는 즉, 아무 거리낌이 없어지는 경지의 나이, 한마디로 득도와 무욕의 경지에 이름에서야 무엇에 얽매일 것인가. 그러면서 걸어왔던 내 발자취를 한 번쯤 뒤돌아봐야 할 이유는 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그 발자국 어지러이 하지 말지라

今日我行跡 오늘 남기는 내 발자욱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음에 양보해야 한다. 젊음은 직선이고 충동이지만 늙음은 곡선이고 여유다. 곡선과 여유를 가지고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자. 그리하여 헨델의 라르고, 드뷔쉬의 처럼 유려한 선율로 느리고 느리게 흘러가며 꿈같은 삶을 살아보자.

 

나이와 관계된 시를 읽다가 생각난 서산대사의 마지막 법어를 보자.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칠십 전인 화자가 칠십 고개를 넘어서는 어떤 가락으로 풀어낼지 기다려진다. 랩이 아닌 시김새가 있어서 멋진 감흥이 일어나는 그늘 있는 천구성의 판소리 풍이 아닐까 한다.

 

 

시인 홍영수 jisrak@hanmail.net

 

태그

전체댓글 0

  • 4604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딱, 하나/윤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