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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회(夜會)- 3회

김찬숙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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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6.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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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숙 소설가

 눈은 그렇게 계속 퍼붓고 있고, 황노인은 자신이 어느새 큰 바위 근처에 올라와 있음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어느새 큰 바위라니! 황노인은 갑자기 제 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무게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엾은 짐승! 불쌍한 것! 마치 그놈 황소가 눈앞 가까이 있기라도 하듯이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자신마냥 먹는 게 시원찮아진 놈을 위하여 평소보다 여물에 칡넝쿨과 콩깍지를 더 넣어 끓이고, 쇠죽에 겨까지 끼얹어 주었건만. 밥을 눈앞에 두고도 콧김만 몇 번 뿜어내고는 이내 주저앉아 되새김질도 시원치 않더니, 혀 한 번 날름거리지 않고 눈밭 가까이 버썩 얽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늙은 황소가 없어진 걸보면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선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놈도 살만큼 살았지! 그래 우심이 떠날 때도 이 늙은인 그저 눈만 뜨고 있었지! 외양간이나 주위의 모든 것들은 눈발에 묻힌 채 고요히 잠들어 있을 뿐, 코뚜레에 매어 기둥에 묶어놓은 고삐는 눈발 속에 거뭇하게 흔적만 남긴 채였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내가 꼭 찾아주마!

그런데 노인의 마음과는 달리 제 몸 하나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새어나가고,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집을 나서기 전(그것이 오늘 아침이었는지 며칠쯤 전의 어느 무렵이었는지 전혀 분별이 되지 않았지만) 그 긴 까무러침의 잠을 마지막으로 깨운 것-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방문 앞을 잠시 환하게 가로막고 서던 황소의 모습, 그것은 정녕 실물이었을까, 아니면 허깨비였을까.

황노인이 허둥지둥 집을 나선 그 길로 곧장 큰 바위 구릉을 향해 내달은 것은 그놈이 허깨비로나마 끊임없이 자신 앞에 서 있다가는 다시 다가가면 사라지기를 거듭한 까닭이었다. 이제 그놈이 선 곳은 큰 바위 구릉 안쪽, 우심의 무덤가였다. 구릉은 누군가 알려준 대로 황노인의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는 곳이며, 죽은 우심의 시체를 묻어 준 곳이며, 첫 굿판을 치르고 신 내림을 받은 우심이를 껴안고 첫정을 나눈 곳이 아닌가. 그래서 울적하거나 외로울 때 그 놈과 찾던 바로 그곳이었다. 어리석은 놈, 여름이면 몰라도 이 삼동에 가엾은 놈! 황노인은 어쩌면 그 짐승마저 자기 곁을 영영 떠나버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짐짓 위엄을 부려보았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과 절망감을 어쩌지 못했다.

노인은 이제 점점 온몸이 굳어져 마비가 옴을 느꼈다. 큰 바위 밑에 잠시 쉬어서 갈까. 그래, 잠시만 쉬어도 새 힘이 솟아날지도 모르지. 아니 녀석이 여길 찾아올지도 몰라. 그래 전에도 늘 그랬듯이 바위에 올라앉았노라면 언제나 새로운 힘이 솟구쳤지. 황노인은 한평생을 이 길 따라 뱀을 찾아 오르내리며, 비를 피해 수없이 큰 바위 구릉 밑으로 찾아들었다. 정말이지 이젠 더는 한 발짝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바위 밑에 이르러 거기 아무렇게나 길게 누워보았다. 그러자 한꺼번에 갈증과 졸음이 몰려들어 그는 입으로 눈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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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노인은 자신처럼 한평생을 땅꾼으로서 지냈다는 아버지 황백사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백사와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자꾸 꿈으로 꾸어오곤 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그때마다 대체로 당신의 친구이기도 했던, 어머니와 눈이 맞아 야간도주한 땅꾼 서씨의 얼굴로도, 더러는 박수 공씨의 얼굴로도 나타나곤 했는데, 지금 황노인은 자신의 얼굴을 한 아버지가 백사와 싸우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백사는 한겨울 눈을 함빡 뒤집어쓴 저 영물 같은 소래봉보다 더 우람하고 아름다운 몸뚱이를 뒤틀면서 황노인을 향해 덤벼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백사는 또한 우심이가 되기도 했다. 우심이가 뒤 안 우물가에서 알몸인 채 달빛을 흠뻑 받고 목욕을 하고 있고, 갑자기 노인을 향해 긴 혀를 날름대더니 불현듯 백사가 되어 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우심의 망령에서 가까스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잠시 조용해진 뒤란은 갑자기 안골 일대가 되고, 안골에는 이튿날부터 낮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아 온 천지가 개기일식 때처럼 캄캄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황노인이 꿈에서 깬 건 아마도 바위 밑에 스며든 한기 탓이었을까. 가까스로 천근만근한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그는 온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았다. 분명 살아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마지막 열기를 품은 채 어둠을 향해 벌겋게 불타고 있었다. 이제 밤이 오면 그들이 몰려오겠지. 그는 수도 없이 많은 도깨비불을 보았었다. 여름이면 소래산 도깨비들이 산을 뒤덮곤 했으니까. 그 안에 소를 찾아야 했다. 어둠이 오기 전……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땅꾼인 서씨를 따라 집을 나간 것은 황노인의 나이 겨우 열세 살 되던 해 봄이었는데, 지금도 가끔씩 그 당시를 꿈으로 꿀라치면 꿈은 언제나 안골 일대가 개기일식을 하던 깜깜한 어둠속이었다. 열세 살 되던 해 봄부터 황노인은 내리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를 찾아 헤맸지만, 자취를 감춘 어머니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어린 황노인이 불쌍하다 하여 집안으로 들였으나, 나이를 더해 갈수록 뱀 잡이에만 정신이 팔린 것을 알고는 그 아비 황백사를 대하듯 했다.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한테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라 하여 문전박대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낮 동안에는 마을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버지 황백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성 싶었다. 단지 황백사가 잡은 뱀을 헐값에 처분하고는 하는 별난 땅꾼이었다는 것, 그리고 입버릇처럼 자신이 한 겨울, 전설에만 있는 설상사(雪上蛇)를 잡겠다며 온 산을 헤매고 다녔고, 딱 한번 그것과 마주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것을 찾아 나선 위인임을 늘 자처했다는 것, 그리고 한해 겨울 마침내 소래산 큰 바위 구릉에서 그가 찾아다닌다는 설상사에 물려 비명횡사했다는 것, 그 정도가 그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아는 바 전부였다. 그런데 우심이 그녀가 집을 나가기 전날 밤, 그러니까 한씨네 딸 씻김굿에 황노인을 구경 오도록 허락하던 그 밤, 그녀는 제 어미한테 들은 것이라며, 제 아비가 백사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간 땅꾼이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전에 없이 우심이 몇 번이고 몸을 불같이 달구곤 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다음회에 계속 

 

 

김찬숙 

소설가. 부천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현재 다니엘종합병원 의무원장.

chankk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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