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램/김진석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바램/김진석
너무 노여워 마세요.
당신의 주름진 얼굴은
살아낸 삶의 수고스러움 보다
남아있는 시간의 기쁨의
깊이 일테니...
너무 그리워 마세요.
당신의 하얀 머릿결은
젊은 날의 검은 머릿결보다
더 아름다운 인고의 시간에 수고스러움을
고이 간직한 당신의 세월 일테니...
너무 슬퍼는 마세요.
당신께서 보낸 시간들은
슬픔의 흔적보단
기쁘게 살아온 나날의 시간을
더욱 값지게 하고 있으니...
당신께서 살아온 삶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기 힘든
인고의 세월일지라도
삶이 지치고 힘들었을
수고스러움 보다
억겁의 세월을 버텨내
드디어 더욱 값지게
빛을 비출 거니까요
-계간 시와늪(30집) 1차 추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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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자기만의 리듬감이 있다. 시간과 속도가 너무 느리거나 빨라도 안 된다. 지금은 너무 빠른 속도감에서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방향타를 잃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지쳐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젠 빠름에서 오는 불안과 초조 공포를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실천할 때이다. 때론 권태롭고 때론 역동적이게. 느림 속에서 삶과 시간의 향기를 가져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삶에서도 가끔은 동네 공원을 산책한다거나 가까운 산길을 걸으며 逍遙吟詠하는 것이다. 나를 옭아매는 성공, 출세, 부의 축적이라는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이젠 노여워 말지어다. 비록 솟구치는 욕망의 족쇄에 옭아 매여 생긴 피고름이나 곱디고운 얼굴에 주름이 생겼더라도. 옛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정신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 모습도 터럭과 주름 하나도 빠짐없이 함께 담았다. 傳神寫照이다. 내면의 가치를 그리되 외면의 주름 잡힌 형상도 그대로 그렸다.
나이 듦에서 오는‘주름’은 삶의 굴곡과 긴 여정의 발자국, 그리고 함께 한 그림자마저 새겨진 흔적이다. 수 없이 생의 키보드를 두드려 저장된 정보이고 발자취이다. 어찌 보면‘주름’은 한 사람의 일기장이며 상징이다. 이러한데 어찌 다리미로 펼 수 있으며 골을 메워 평탄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정녕 노여워하지 말자. “깊이의 기쁨”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잖은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자. 종이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고, 수분과, 햇볕과 천둥 번개를 치고 맞으며 자랐다. 종이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중체, 즉 주름이다. 나이 들어 생긴 주름엔 수많은 타자들과 만나고 접촉하며 때론 일탈하면서 생성되고 종이접기 하듯 또는 패치워크나 쪽매맞춤하며 인생의 장을 만든 다중체(multiplicity)이다. 인간과 사물들과의 마주침을 통한 아장스망(agencement)이 실현되며 주름이 생긴다. 그러므로 주름은 한 인간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한단 말인가.
흰 머리카락이 생기는 원인은 의학적인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유전적, 심한 스트레스, 염색, 또는 관계된 영양소의 부족 등등으로 생길 수 있다. 화자가 얘기하는 하얀 머릿결은 나이 듦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늙은 모습을 본다. 공자가 존경했던 거백옥(蘧伯玉)은 “나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할 뿐”이라고 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찾아오는 흰머리.
두목(杜牧)이〈송은자(送隱者)라는 시에서“백발공도(白髮公道)”라는 말을 했다.
“세상의 공평한 도리는 백발뿐이다. 귀인의 머리도 봐준 적이 없으니(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 그렇다. 그 어떤 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공평하게 찾아오니 白髮은 公道일 수밖에. 필자의 졸시에 ‘흰머리 꽃(白頭花)’라는 시가 있다. 흰 머리카락을 ‘흰 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화자는 검은 머릿결을 너무 그리워하지 마란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난 결과물인 세월이기에. 굳이 젊은 시절의 검은 머릿결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워한다고 파뿌리가 된 머리카락이 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목도 세월 따라 희어지 듯 사람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의 섭리일 수밖에.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한 세월의 흐름에 대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하며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최근에 본 어느 과학자의 연구 결과물이 생각난다. ‘인체 변화’를 연구한 결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시계시간(clock time)과 마음을 느끼는 ’마음시간(mind time)이다. 일정한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같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신호의 전달 경로가 활력이 떨어져서 젊은이에 비해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리 지나간 시간일망정 시계의 시간은 변함없이 일정하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 어느새 북망(北邙)의 산천(山川)이 눈앞에 다가왔다. 특별한 보상을 바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을 터전을 일궜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서글퍼지고 자꾸 남은 시간의 셈법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마냥 회한에 젖어 슬퍼할 수만 없는 노릇 아닌가. 석양의 노을빛이 아름다운 것은 온종일 스스로 자신을 불태우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가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슬프되 슬퍼할 수만 없고 기쁘되 기뻐할 수만 없는 노년의 오후. ‘슬픈기쁨’이란 단어는 없는 것일까.
노년은 수많은 어리고, 젊고, 중장년의 시절들을 모아서 보다 넓고 큰 광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 광장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광장이며 누구나 와서 신명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폭넓은 경험과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숨 쉬는 곳이기에 오히려 주름진 자화상을 노여워할, 검은 머릿결을 그리워할, 그리고 순간처럼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을 슬퍼할 시간도 이유도 없다. 이것이 화자의‘바램’이다. 외적인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의 뜻을 읽어보자. 言外之味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